당신들의 유년시절은 어떠한 기억으로 지금 당신에게 남아 있는가.

두 살적,아니면 세살적,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하고 사물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생애 최초의 기억들은 어떠한 색채를 띄고 당신의 가슴에 스며들어 있는가. 검은 색인가, 보라색인가, 분홍색인가. 슬픈 것인가, 행복한 것인가, 우울한 것인가.

 

아마 모르긴 해도 대부분의 기억들이 저녁 무렵 식탁 위에 켜진 전등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것들일 것이다. 엄마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기억, 식구들 앞에서 재롱을 부리면서 귀여움을 받았던 기억, 그지없이 편안하고 밝았던 그런.....

내 생애 최초 기억은 박옥이란 한 여자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그 여자, 내 인생에, 그리고 아버지 인생에 악연이란 이름으로 들어와 얽힐 박옥이란 여자를 기억하는 것은 내 나이 네 살 무렵부터이다.

아버지의 빵 가게에 놀러온 그녀가 나를 안아 올렸을 때, 그녀의 가슴에서 나던 빨래 비누냄새와 비릿한 생선냄새가 지금도 코 끝에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작은 키에 약간 통통한 몸매를 가진 여자였다. 그리고 둥그스럼한 얼굴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부끄러움을 잘 타고 숫기가 별로 없는 여자였이기도 했지만 나를 자기 품에 안을 때만은 어디서 용기가 나는지 얼레레, 혀를 내두르며 나를 어르기도 하고 내 발바닥을 간지르는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듯한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였다.

"영순아,영순아. 넌 참 좋겠다. 저렇게 잘생긴 아버지랑 같이 사니까 넌 참 좋겠다. 네 아버지랑 같이 밥도 먹고 잠도 잘 수 있으니 넌 참 좋겠다......."

참 이상도 하지. 네살 때, 엄마 아버지의 얼굴도 겨우 분간 할 수 있는 어린 아기 때의 기억이 이렇게 맑을 수 있다니. 그리고 그 때의 기억이 사십 몇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게 또렷할 수 있다니.

그때 본 박옥이의 얼굴이, 몸짓이, 그리고 목소리가 바로 그제께 일인양 지금까지 선명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박옥이의 기억이 내가 평생을 지켜본 박옥이의 일생중 가장 아름답고 편안했던 것 같았던 생각이 드는 것이다. 왜냐면 그때 박옥이는 한 남자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박 옥이, 그녀는 열 아홉의 나이에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바로 우리 아버지란 사람과.

열아홉살의 어린 나이의 처녀를 꼬셔 그녀 인생을 빨랫줄처럼 비비 틀어 버린 남자가, 그리고 그녀를 전생애에 걸쳐 코 푼 휴지처럼 하당찮게 멸시하고 학대했던 남자가 바로 우리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때, 우리 아버지와 사랑에 빠졌을 때 그녀, 박옥이는 짐작이라도 했을까. 남자 하나를 잘못 선택한 죄로 그녀의 한평생이 욕설과 폭력으로 점철될 줄. 그 많은 날들을 하루같이 눈물과 한숨과 통곡으로 물들여질 줄 그녀는 꿈에라도 상상했을까.

박옥이가 그때 우리 우리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떤 삶을 살게 됐을까. 조금은 수월하고 편안하지 않았을까. 팔자 땜은 못하더라고, 우리 아버지와 살 때보다 더 힘들고 극한 삶을 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여지껏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박옥이처럼 힘든 인생을 살아온 여자를 보지를 못했다. 그러니까 박옥이는 우리 아버지와 얽히면서 인생이 망가진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증오하고 미워하고 헐뜯고 멸시하고 적대시하는 사이였다. 그러면서 둘은 평생을 같이 살았다. 그 두 사람의 관계를 가까히서 지켜 본 나는 또 이렇듯 아프고 힘든 기억으로 고통 받고 있고.

박옥이는 우리 아버지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을까. 안경을 쓴, 지적으로 생긴 얼굴에 반했을까. 아니면 당시로는 큰 키에 속하는 아버지의 풍채에 반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아버지는 쥐뿔도 가진 게 없는 주제면서 키가 컸고 인물만은 많은 여자들이 현혹될 정도로 훤했다. 박옥이뿐 만 아니라 아버지에겐 늘 꿀단지에 기어오르는 개미들처럼 달라 붙는 여자들이 많았으니까.

나는 지금,결혼을 앞둔 처녀들이 주위에 있으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타이르고 또 타이른다.

"얘야, 잘난 인물이란 기껏해야 1년이란다. 절대로절대로 인물을 보고 결혼할 생각일랑 하지 말아라. 남자가 너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그리고 최소한 너를 굶기지 않을 만큼 열심히 일하는 지 딱, 그 두가지만 보고 결정하여라. "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밝혀둘 게 있다.

내가 여자인 박옥이 편에서만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를 천하에 잡놈, 죽일놈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는데 아버지 역시 박옥이를 만남으로 평생을 편안하게 살지 못했다. 나중에 자세한 이야기를 하겠지만 아버지는 박옥이 때문에 단 하루도 마음편할 날이 없었다. 그녀의 성격때문이다! 아아, 박옥이의 그 지랄맞은 성격을 지금 머리에 떠올리는 것만으로 벌써 소름이 돋고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양철을 숟가락으로 긁는 듯한 소름끼치는 그녀의 끊임없는 잔소리와 신경질과 한탄소리!

궁핍하고 힘든 생활이 그녀를 그렇게 변하게 했는지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는지 박옥이는 옆에 있는 사람을 미치고 환장하게 만드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부처님 같이 너그럽고 인자한 사람이라도 한 대 쳐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아버지와 박옥이는 60년대 초반 어느 섬에서 만났다. 기술도 학력도 가진 것도 없는 아버지는 서른 몇 살이 되고 결혼해 내가 태어날 때까지 변변한 밥벌이도 못하면서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녔던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에 남쪽의 어느 작은 섬에까지 흘러 들어간다.

아버지는 왜 다른 곳 다 놔두고,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선택하는 서울이란 곳을 두고 인구 1천명도 안되는 작은 섬에 정착하려는 결정을 했을까. 박옥이이란 여자를 만나게 하려고 신이 꾸민 계략이었을까. 여기서 내가 계략이란 표현을 쓰는 것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둘은 결코 만나서는 안되는 인연, 그러니까 악연중의 악연이었기 때문에 하는 소리이다.

섬에 도착해 몇 달간 허송세월을 보낸 뒤 아버지는 궁여지책으로 빵가게를 열 결심을 한다. 섬은 매우 작고 볼품 없었다. 그러나 섬에 한 육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군인들에게 군수물자를 대주러 오는 여객선이 한 달에도 몇 번씩 있다는 것에 착안을 한 것 같다.아버지는 뱃사람들을 상대로 빵을 팔아볼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고 몇달후 아버지는 바다가 보이는 해변쪽으로 빵가게를 열었다. 종업원도 캐쉬어도 없이 달랑 혼자서 빵 만들고 손님도 받아야 하는 두 평 남짓한 초라한 빵가게였다.

아버지는 제법 빵기술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기로 당시 손님이 꽤 심심챦게 있었던 것이다. 군것질 거리라곤 말린 멸치나 오징어밖에 없던 섬 사람들에게 아버지가 구워내는 풀빵이나 찐빵은 밥은 한끼 굶더라도 반드시 먹어봐야 할 먹거리도 다가갔을 게다.

아버지의 빵가게 길 건너편에는 목조로 지어진 작은 여관이 있었다.

인구 천 명도 안되는 작은 섬에서, 섬 둘레 한바퀴 도는데 자전거로 삼십분이면 족한 작은 섬에 무슨 여관이 다 있었을까.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여관은 선원들을 대상으로 한 여관이었다. 군수물자를 부려주러 온 여객선이 풍랑을 만나 뭍으로 돌아가지 못할 때 선원들을 재우는 여관이었던 것이다.

그 여관 주인은 우리 아버지 나이 또래의 대머리였다. 머리는 한올도 없었지만 흰수염이 북실북실 난 아저씨였는데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박옥이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 빵가게로 놀러와서 나를 안아주곤 했다. 내 얼굴에 와닿던 그 수염의 감촉이 어제일인양 아직도 생생하다.

박옥이는 아들만 셋 있는 그 여관집의 딸이었다. 엄밀히 따지만 여관집 친딸은 아니고 전쟁통에 고아가 된 박옥이를 부부가 데려다가 키운 것이다. 그녀는 아들만 셋있는 여관집 부부로부터 많은 사랑받는 딸이었다. 공부도 잘했고 집안 일도 잘 도우는 착한 딸이었다.

착하다는 대목에서 나는 눈물이 나려한다. 그래, 내가 기억하는 그때의 박옥이는 착했다. 그녀가 착하다는 데는 나도 시인한다. 나중에 생활이 힘들고 피폐해지니까 내게 갖은 포악을 부리곤했지만 원래 심성은 아주 착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착했으니까 우리 아버지같은 사람을 만났지.

아버지와 사랑에 빠지게 될 당시 박옥이는 열 아홉살이었고 아버지는 서른 여섯이었다. 아버지를 좋아했기 때문에 나를 핑계로 그렇게 자주 드나들었는지 내가 귀여워서 나를 보려고 드나들다가 아버지랑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여튼 그렇게 된 것이다.

그 둘의 관계가 그렇게 된 걸 당시 네 살이던 내가 어떻게 알았을까.

엄마라는 여자의 입을 통해서였다. 엄마라고? 흥, 엄마같은 소리하네. 정말이지 나는 송은동, 그 여자를 절대로 절대로 엄마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증오하는 인간이 있다면 송은동, 바로 그 여자이다.

"그 미친 놈의 품에 박옥이가 안겨 둘이 나란히 자고 있더래....."

송은동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빵가게와 집이 별로 멀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가끔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박옥이 아버지의 여관에는 손님이 끊임없이 늘 있는 게 아니라서 평소에는 동네사람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 동네남자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화투들도 치면서 밤샘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피곤하면 그냥 아무 방에 들어가서 잠을 자고는 다음날 아침에 자기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아버지 역시 다른 동네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 여관에서 가끔 잠을 자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아버지와 같이 박옥이가 자는 것을(여기서 잤다는 건 둘이서 성행위를 하는 걸 누가 목격했다는 뜻은 아니다. 말 그대로 박옥이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자고 있더라고. 나는 분명 그렇게 들었고 지금도 그렇게 기억한다. )누가 본 것이다. 소문은 금방 일파만파 퍼져나갔다.그리고 나중에 1년 후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박옥이에게 돌을 던질 것이다. 아무리 어린 나이라고 해도 어떻게 사리분별도 없이 남의 유부남과 놀아날 수 있냐고. 본부인과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그러나 나는 박옥이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박옥이에게 남편을 빼앗긴 내 친엄마인 송은동을 불쌍하고 가엾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송은동의 친딸인 내가, 그녀의 배에서 열 달을 있다가 그녀의 배를 아프게 하고 나온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아버지가 그때 박옥이와 바람이 났다면 송은동은 당시 다른 유부남과 바람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확실하게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당시 그 남자 말고도 또 다른 남자가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가끔씩 송은동을 개 패듯이 팼다.

아버지가 송은동의 바람을 알아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선지 그건 나도 모르겠다. 하여튼 어린 기억에 가끔 아버지가 문짝을 부수고 상을 집어던지며 송은동을 때렸다는 기억이 안개처럼 희미하고 어렴풋하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그렇게 무지하게 맞으면서 송은동이 단 한마디도 말대꾸나 대항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기억에 남아있다.

아무튼 송은동에겐 남자가, 아니 남자들이 있었다.

하루는 송은동이 당시 한살이던 동생을 들쳐업고 아버지의 저녁밥을 갖다주러 갔다. 어린 나는 그때 송은동의 정부(情夫)와 함께 집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송은동은 간도 큰 여자였던 것이다. 남편이 한푼이라도 벌고자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빵가게에 매달려 있는 사이 정부를 집에 불러들인 송은동, 그녀는 어떤 정신세계를 가진 여자일까.

"나 금방 갔다 올게.영순이랑 같이 밥 먹고 있어, 응?"

"그래, 빨리 와. 나 저녁만 얻어먹으러 온 거 아닌 거 알지?"

둘의 사이엔 대충 아마 그런 대화가 오간 것 같다.

나는 송은동의 정부와 방에서 말 없이 밥을 먹었다. 콩나물과 고추장을 넣은 비빔밥으로 기억한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방문이 왈칵 열리더니 벌겋게 흥분한 얼굴의 어떤 여편네가 나타났다. 그녀는 고무신을 신은채로 방으로 왈칵 뛰어 들어오더니 우리가 먹고 있던 비빔밥 양푼을 확 걷어찼다. 비빔밥 양푼이 휙~하고 빠른 속도로 방구석으로 날라가 나동그라졌다. 콩나물과 고추장이 묻은 시뻘건 밥알들이 사방으로 파편처럼 흩어졌다.

"이 미친 놈이 여기서 지금 뭘 하고 자빠져 있는 거야?"

그 여편네는 그 남자의 부인이었다.

둘이서 악다구니를 하고 있는데 송은동이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편네는 송은동을 보자 그녀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맹수같이 달려들어 머리채를 확 움켜잡았다.

"이 나쁜 년아. 남의 서방 불러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어린 네 딸년한테 부끄럽지도 않냐?"

먼저 머리채를 잡힌 것은 송은동이었지만 송은동,그녀도 만만치 않았다. 두 손을 우왁스럽게 뻗어 여편네의 머리채를 같이 휘어잡은 것이다. 송은동의 등에 업힌 동생이 와아, 하고 울음을 터트렸고 나는 밥풀이 묻은 숟가락을 들고 그냥 멍하니 앉아서 독오른 두 여편네들의 싸움을 구경했다.

남자는 어쩔줄 몰라 우왕좌왕 하더니 곧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다. 송은동의 팔을 잡고 둘을 떼어놓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남자의 개입으로 마침내 두 여편네는 떨어졌다. 그 틈을 타 남자가 자기 여편네에게로 가더니 그녀의 뺨을 철썩, 소리가 나도록 냅다 갈겼다.

"여기가 어디라고 쳐들어 와서 행패야, 행패가?!"

그 당시 송은동에겐 마음을 털어놓고 지내는 과부 친구가 있었다. 아버지가 가끔 심하게 송은동을 때릴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나와 동생들을 데리고 피신해 며칠씩 숨어있기도 하는 친구였다. 며칠후 빨래터에서 만나 친구에게 송은동이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그러니까 그이가 그년의 싸대기를 올려부치지 않았겠어?"

둘은 빨래를 하다말고 머리를 맞대고 키득키득 웃었다.

빨래터엔 우리 셋 외엔 아무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곁눈질로 주위를 연신 살펴가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때 개울 반대편 돌팍 위에 앉아 있었다. 큰 웃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어깨를 들썩이며 킥킥거리는 두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송은동이 고개를 바짝 쳐들면서 말했다.

"지 남편이 나를 편들 줄은 꿈에도 몰랐었겠지?"

"그러게 말이야. 코가 납작해졌겠네?"

둘은 누가 들을새라 다시 소리를 죽여 웃었다.

어린 자녀를 가진 엄마들이여.당신의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그들을 무시하지 말기 바란다. 어린 아이들 앞이라고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지 말기 바란다.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행동과 말을 받아들이는 속도는 바짝 마른 스폰지에 스며드는 물같이 급속도로 빠르다. 그리고 어릴 때 머릿속에 투입된 아이들의 기억력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길고 명확하다. 어른들이 무심코 하는 행동 하나가, 내뱉은 말 한 마디가 그 아이 일생의 짐이 될 수도 있고 멍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 남편이 나를 편들 줄은 꿈에도 몰랐었겠지,라는 말을 할 때의 송은동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나는 지금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 몇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리고 송은동의 내게 보여준 행동과 말들은 평생 내 일생을 지배했다. 나는 은연중에도 늘 생각했다. 송은동의 그 피가, 화냥기가 섞인 그 더러운 피가 내게도 흐르고 있겠지.

후에 아버지가 내 머리가 깨지고 코피가 터지도록 매질을 할 때에도 나는 생각했다. 나는 아버지의 친자식이 아닐지도 모른다. 송은동이 아버지 몰래 바람펴 내질러 놓은 자식일 거야. 이 사람이 나의 친 아버지라면 나를 이렇듯 죽도록 팰 리가 없지. 아버지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게야. 그래서 나를 이렇게 죽도록 패는 거야......

아버지와 살 때에도 이런저런 남자와 바람을 피우던 송은동은 아버지와 헤어진 후에도 수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와 동생을 버렸다. 남자에 미쳐서, 정욕에 미쳐서.

내 유년의 기억들은 이렇듯 어둡고 음습하고 축축한 것만으로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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