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섯 살이 되자 아버지는 나를 섬에서 하나 뿐인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취학연령에서 두 어살이나 모자랐지만 아버지가 그 섬의 교육관계자를 구워삶은 덕분이었다. 각 학급이 한 반밖에 없는, 전교생이라곤 통털어 1백명이 겨우 되는 작은 학교였다.

아버지가 무슨 생각으로 걸음마를 겨우 뗀 나를 학교에 집어넣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일약 그 학교의 귀염둥이로 떠올랐다. 전교에서 제일 어린 나이도 나이였지만 송은동이 내게 무척이나 신경을 써주어 옷차림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아이들의 부러움 속에 내가 메고 다녔던 그 빨간 비닐 가방을. 전교생 1백명 중 가방을 멘 아이는 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빵재료를 구입하러 한 달에 한번씩 육지로 나갔다. 그 때마다 송은동은 늘 나에 관한 물건을 사올 것을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학용품일 때도 있었고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일 때도 있었고 색동 운동화였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빨간 타이즈일 때도 있었다. 당시 그 학교에서 치마를 입고 타이즈를 신은 아이 역시 나밖에 없었다.

수입이라고는 잡아온 생선을 팔거나 손바닥만한 밭떼기에서 나오는 농작물 판매대금이 전부인 작은 섬. 그 가난하고 척박한 섬에서 아버지는 그런대로 부유한 축에 속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적으나마 매일 현금을 만질 수 있었으므로.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첫딸이었다. 밑으로 동생이 하나 있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아버지의 첫 소생이었다. 더구나 아버지는 거의 서른에 가까운 나이에 결혼해서 나를 보았기 때문에 나에 대한 애정이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사랑과 송은동의 보살핌을 등에 업고 나는 아이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내가 공부를 잘했는지 못했는지 그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내 전생애를 돌이켜보면 그때 학교를 다니던 일년 남짓이 내 일생에 있어 가장 정상적이고 행복하던 때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둘 다 바람을 피웠거나 어쨌거나, 둘이 치고 박고 싸웠거나 어쨌거나 아버지,엄마가 내 옆에 있었던 때이기 때문이다. 아, 이런 제기랄. 남에겐 아주 지극히 평범한 사항이 내겐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니. 이 무슨 거지같은 인생이란 말인가.

나는 또한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인기였다. 송은동이 선생님들에게도 대접이 후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치면 '촌지'를 많이 갖다바쳤던 것 같다.

어느날 무용 시간이었다. 모두들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앉아서 율동을 배우는 중이었다. 나는 오줌이 마려웠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변소에를 가지 않았다. 그리고 자리에 앉은채로 오줌을 싸버렸다. 쭉 뻗은 내 두 다리 사이로 오줌이 천천히 번져나가는 걸 멀거니 구경하면서 그냥 앉아 있었다. 아이들의 손가락질로 선생님은 내가 오줌을 싼 걸 알아차렸지만 그녀는 아무말 하지 않았다. 가까운 데 앉은 아이에게 걸레를 가져오게 해 오줌을 닦았다. 며칠전 가난한 집 아이가 오줌을 싼 걸로 손바닥을 때리는 벌을 주던 그녀였다.

그녀는 우리집에 가정방문을 왔을 때 송은동으로부터 식사를 대접받았던 것이다.

송은동은 싫다는 선생님을 억지로 인근 식당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식사를 대접했다. 야단치지 않은 걸로 밥 값을 해야한다고 선생님은 생각했을까. 그 때가 또 내 생애를 통털어 남으로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았던 유일한 때이기도 했다. 그 일년 남짓 한 때가. 그 이후로부터는 나는 나가 뒈져도 누구하나 슬퍼할 사람 없는, 아니 얼른 나가 뒈져버리기를 원하는, 벌레같은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나의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박옥이로부터.

당시의 내 모습을 찍은 사진을 지금도 두어장 가지고 있다.

카메라를 메고 돌아 다니는 사진사로부터 찍은 것이다. 어디서 났는지 노끈을 낀  벽돌을 가지고 장난을 치며 학교에서 돌아왔더니 송은동과 사진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동생과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당시 두 살이던 동생이 내가 가지고 있던 벽돌을 달라고 울었기 때문에 나는 벽돌을 동생에게 양보해야 했다. 동생은 벽돌을 얻게되어서 행복하고 기쁜 얼굴로, 나는 벽돌을 빼앗겨서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우리는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그 사진을 가끔 들여다 보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왜 그렇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니. 앞으로 닥쳐올 어두컴컴한 네 운명을 미리 알고 그랬던 거니. 그래서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었던 거니.

그 사진을 찍을 무렵이 아마 아버지가 우리를 떠나가기 얼마 전이었다. 아버지는 끝내 섬을 떠나고 만다. 박옥이와의 관계가 소문이 나면서 더 이상 섬에서 생활을 할 수가 없게되었기 때문이었고 박옥이가 없어져버린 때문이기도 했다.

박옥이 아버지는 박옥이를 B시에 있는 친척집으로 피신을 시켰다. 박옥이가 없는 섬에서 더 이상 살 의미가 없어져 버린 것일까. 아버지는 어느날 빵가게를 정리하고 떠나버렸다. 그게 일시적인 떠남이었는지 송은동 및 우리들과의 영원한 이별을 고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송은동이 그때 다른 마음을 먹지 않고 섬의 다른 아낙네라면 다 하는 굴 따기라도 하면서 우리들이랑 얌전히 살았다면 아버지는 나와 동생이 보고 싶어서라도 도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랬다면 나와 내 동생의 팔자가 좀 틀려지지 않았을까. 계모 밑에서 눈물과 한이 섞인 밥을 먹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떠난 후 송은동은 나와 동생을 데리고 얼마동안 그 섬에서 더 살았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집은 당시 섬에서도 귀한 유리문이 달린 함석집이었다. 송은동은 그집을 팔아 방 한 칸짜리 초가집으로 옮겼고 반 년 정도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살면서 그 돈을 야금야금 다 까먹었다. 돈이 궁해지자 그녀는 그 초가집마저 팔아버리고 그 섬을 나왔다. 그리고 여기저기 친척집을 전전하게 된다. E군에 있는 송은동의 남동생 집, 그리고 I시에 있는 아버지의 사촌집.

지금 생각해보면 송은동은 참 뻔뻔했던 것 같다. 60년대 초, 너도나도 할것없이 궁핍한 시절이었다. 입 하나 더는 것이 큰 다행이던 시절에 아이를 둘씩이나 데리고 하릴없이 몇 달씩 친척집에서 개기며 살았으니까.

그 눈을 기억한다. 아버지 사촌의 부인, 그러니까 당숙모가 나를 향해 사납게 홀기던 눈을. 그 미움을 잔뜩 담은 눈을. 식사시간이었다. 동생이 똥을 싸서 송은동은 그 뒷처리를 하러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당숙모가 하얗게 눈을 홀기며 내게 말했다.

"밉쌀스런 계집애. 네 에미만 아니면 너를 가만 두지 않을텐데.아주 꼬집어 뜯어 놨을 텐데........"

그래, 밉기도 하겠지. 자기 자식도 둘 씩이나 있는 판에 별로 가깝지도 않은 군식구가 셋씩이나 들러붙어 몇 달씩이나 빌붙어 살았으니. 나중에 커서 그 당숙모를 몇 번 만날 일이 있었는데 어릴 때 나를 홀겨보던 그 무서운 눈에 대한 기억이 먼저 떠올랐다.

동가식서가숙하던 송은동은 그 무렵 풍문결에 아버지와 박옥이가 Y시에서 살림을 차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그들이 사는 곳을 어떻게 알아냈을까. 어느 날 송은동은 나와 동생을 끌고 그집으로 쳐들어 간 것이다. 저녁무렵이었고 박옥이는 마당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치는 우리를 보고 박옥이의 손에 든 두레박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그날 밤 우리는 박옥이가 차려주는 푸짐한 저녁밥을 먹었다.

참 뻔뻔들도 하지. 거기서 송은동은 또 두어달을 더 개겼다. 남편과 첩,그리고 본처, 그리고 본처의 자식들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작은 빵공장을 차려 운영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일반인들에게 빵을 파는 것이 아닌, 인근 군부대에다 납품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낮에는 아버지, 송은동,그리고 박옥이가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빵을 만들었다. 그리고 밤이면 송은동과 아버지,그리고 나와 동생이 빵공장에 딸린 살림집에서 잠을 잤다. 당시 그 살림집에는 방이 하나 뿐이었는데 저녁밥을 차려주고 박옥이는 슬그머니 사라졌다가 다음날 아침이면 돌아오곤 했다.

"도대체 어디서 자는 거지?잘 데라곤 없는데 말이야"

박옥이가 어디서 자고 오는지 아버지와 송은동은 궁금해 했지만 더 이상 캐묻지는 않은 것 같다.

몇 달 후 송은동은 우리를 데리고 그 집을 나왔다.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나를 놓고 가라고 송은동에게 말했다. 아마 농담이었던 것 같다. 송은동과 떨어지는 것이 무서웠던 내가 내 머리를 쥐어뜯으며 우니까 순순히 보내준 것을 보면. 그때 아버지는 낌새를 알아챘던 것일까. 송은동이 나를 버리려 한다는 것을.그래서 나를 자기한테 놓고가라고 농담을 했을까.

버스에 오르기 전 아버지는 나를 번쩍 안아 입을 맞추었다. 그것이 Y시에서 마지막 기억이다. 그리고 내 기억은 그 몇 달 후 친할머니가 살던 M시로 옮겨진다.송은동은 나를 할머니한테 데려다 놓으러, 정확하게 말하면 나를 버리러 M시로 갔던 것이다. 내 나이 일곱 살 되던 해 봄이었다.

그때 송은동은 기차에서 만난 한 젊은 군인과 한창 정분이 나 있었다. 군대를 마악 제대하고 돌아오는 군인과 기차안에서 수작을 주고받다가 정이 든 것이다. 짐작컨데 송은동은 그 군인과 살림을 차리려고 한 것 같다. 그런데 군인이 내 동생까지는 어떻게 책임져보겠으나 나까지 거두기에는 곤란하다고 난색을 표한 것 같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를 할머니 집에 떼어놓기로 결심 한 것이. 철이 들고 눈치가 빤해져서 갈수록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는 나를 떼어놓고 홀가분하게 젊은 군인과 살림을 차리려고 말이다.

송은동은 떠나가기 하루전 내게 몇가지 조심 할 것을 얘기해 주었다 .

나를 버리기로 결심은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인간이었던지라, 에미였던지라, 그래, 제 젖을 먹여 키웠던 자식을 떼놓으려는 에미였던지라 아무래도 불안하기도 하고 또한 가슴이 아팠던 것 같다. 그랬을까. 송은동은 나를 떼어놓으며 가슴이 아팠을까. 나만 떼어놓으면 곧 젊은 남자와 새살림을 차릴수 있다는 기대에 오히려 가슴이 부풀지는 않았을까.

"차 조심해야 한다. 특히 기차 조심. 그리고 할머니 말 잘 들어야 해......"

자식을 버리는 에미라면 반드시 하는 상투적인 말, 맛있는 것 많이 사가지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냥 조목조목 몇가지 조심해야 할 말만 일러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떠났다. 그녀가 동생을 업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가던 기차 건널목 옆에 살구꽃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연분홍 살구 꽂잎이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부르르 진저리를 내면서 마구 떨어져내렸다. 지금도 살구꽃이 피는 계절이 되면 아른하게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종종걸음으로 사라져가던 송은동의 뒷모습이. 그때 송은동이 떠나버려서 슬프다던가 하는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철이 들 무렵부터, 내게는 엄마라고 부를 존재가 없어져 버린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부터 '엄마'라는 말은 내게 아픔이 되어버렸다. 엄마라는 말만 들어도 저절로 눈물이 났다. 그리움과 미움과 애증이 복합된 묘한 감정 때문에. 

푸근하고 정다워야 할 '엄마' 라는 단어는 떠올리는 것만으로 평생 내게 恨으로 사무치던 이름이었다.

나는, 그리움보다 나를 버렸다는 미움의 감정이 더 많은 나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절대 단 한번도 송은동을 지칭해 '엄마'라고 부른 적이 없다.

고모들과, 아니면 나랑 처지가 비슷한 친구들과 송은동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어도 내가 그 여자를 지칭하는 말은 '그 여펜네' 아니면 '송은동'이었다. 자식을 둘이나 버린 여자에겐 엄마라는 호칭도 아까우니까. 엄마라는 호칭은 진짜 엄마노릇을 잘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귀한 이름이니까.

나중에 내 새엄마가 된 박옥이를 나는 엄마라고 불렀다. 나와 겨우 열 여섯 나이 차이밖에 나지 않은 박옥이였지만 나는 꼬박꼬박 그녀를 엄마라고 불렀던 것이다. 어쨌든 그 혹독하고 처참한 환경속에서 나를 키워준 여자였으니까. 자기가 낳은 자식과 표나게 나를 차별하고, 나를 학대하고 미워했지만 남자에 미쳐 나를 버리고 떠난 송은동보다는 열 번, 백 번 고마운 사람이니까.

어쨌든 내 동생에 비하면 나는 행복한 축에 속한다. 엄마라는 여자에 대한 기억이 조금이나마 남아있으니까. 그 여자의 얼굴 생김새를 떠올릴 수 있고 그 여자와 함께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나 내 동생, 나랑 세 살 차이나는 내 동생, 그 아이는 송은동에 대한 기억이 전무하다. 그 아이는 기억하기에는 너무 어린 세 살 나이에 송은동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나를 할머니한테 떼어놓고 동생만 업고 떠나간 송은동은 나중에 동생마저 버렸다. 이제 마악 장가가 새살림을 차린 삼촌네 집에 동생을 버려두고 떠나가버린 것이다.

"그 추운 겨울에 내복도 없이 남의 집 처마 밑에 웅크리고 있는 걸 업어 왔지......"

나중에 송은동이 동생마저 버린 걸 어떻게 알게된 아버지는 동생을 찾아 왔다. 동생을 찾으러 갔을 때의 정경을 주위에 얘기하는 걸 내가 듣게되었다. 아버지가 그랬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동생을 업고 피눈물을 흘리며 돌아왔다고. 그말을 들으며 나는 조소했다. 흥, 무슨 피눈물씩이나. 젊은 여자에 바람나 제자식을 팽개친 당신이나 젊은 놈한테 바람나 제자식을 버린 송은동이나 다 똑같은 인간들이지...

내가 보기엔 피차 똑같은 인간들이었지만 할머니나 고모들한테는 송은동만 죽일년이었다. 할머니가 말했다.

"내가 7천원이란 돈을 주면서 그년한테 얼마나 타일렀는지 모른다. 어느 남자든 바람이야 나는 거고 제발 아이들 의지하면서 살라고 말이다. 언젠가는 남편이 정신차리고 돌아올테니 그때까지 딴 생각 말고 얌전하게 살라고 타일렀지.그런데 그년의 피가 너무 뜨거웠어...."

고모들도 말했다.

"그 미친년이 네 아버지랑 결혼 안해주면 죽는다고 생난리를 쳤거든. 네 외할아버지가 네 아버지한테 통 사정을 했더란다. 사람 하나 살리는셈치고 자기 딸과 결혼해 달라고. 그렇게 억지로 한 결혼이었는데 지년이 먼저 깽판을 치고 가버렸네......"

당시 미혼이던 큰 고모는 어머니 집을 떠나 I군에 있는 이모네서 살고 있었다. 송은동은 당시 큰 고모의 절친한 친구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큰 고모를 만나러 I군에 몇 번 갔었는데 그때 송은동이 아버지를 보고 상사병이 나버린 것이다.

"동네에서 바람둥이로 소문난 년이었어. 보리밭에서든 물레방앗간에서든 사내만 보면 가리지 않고 가랭이를 벌려주는 년이었지. 네 아버지가 네 에미년의 행실을 모를리 있나.그런데 네 외할아버지의 읍소에 맘이 약해진 거야. 외동딸 살려달라고 머리가 허연 영감이 눈물로 하소연하는데 어찌 모른척할까. 아이고, 네 아버지 팔자가 저렇게 꼬이게 된 건 행실 더런 네 에미년을 잘못만난 때문이야........"

고모가 송은동에 대해 말한 것 중에는 단 한 가지도 좋은 게 없었다. 고모의 입에서 나오는 송은동은 천하의 잡년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부인 있는 남자와 바람을 피우다 걸린 후 '지 남편이 나를 편들 줄은 꿈에도 몰랐었겠지' 라고 말하던 뻔뻔한 송은동의 얼굴이 떠올랐다.그랬구나. 그 여자는 생겨먹기를 그렇게 생겨먹은 여자였구나.....

고모는 항상 똑같은 말로 시작해 똑같은 말로 송은동에 대한 험담을 마쳤다. 으이그, 미친년. 도망을 갈려면 애새끼나 싸지르기전에 가던지 아이를 둘씩이나 퍼놓고 무책임하게 가버리다니......"

그러게 말이다.

저 못지않게 아버지도 바람꾼이라는 것을 알아서,인물만 뻔드러할 뿐 폭력적이라는 것을 알아서 도저히 같이 해로를 못할 것을 알았으면 나와 동생을 낳기 전에 마음을 접었으면 좋았을 것을. 멀쩡한 아이 둘의 가슴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한을 새겨주고 떠나가버린 송은동, 그녀의 무책임함에 치가 떨린다.

나중에 몇 십년의 세월이 흐른 후 송은동,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됐다. 그때 나는 얼굴 빛 하나 붉히지 않고 말했다.

"이 여펀네야. 그래, 우리 버리고 떠나가서 두발 뻗고 잘 살줄 알았니? 천벌을 받아서라도 당신은 잘 살면 안돼지, 이 미친 여펀네야!"

나는 한국 연속극을 거의 보지 않는데 몇 년전, 지금은 세상을 떠난 최진실이 주연으로 나왔던 '장미빛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다. 우연히 그 연속극에 대한 내용을 알게되었는데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생모를 만난 최진실이 발악하며 우는 장면'이 있다는 것에 눈이 번쩍 뜨였기 때문이다. 나는 부랴부랴 비디오점으로 달려가 장미빛 인생 전편을 빌려왔다.

생각했던대로 그 연속극은 지루했고 재미도 없었다. 그러다가 중반에 가서 드디어 기다리던 그 장면이 나왔다.

최진실이 생모를 만나러 간 장면. 현남편에게 얻어터진 시퍼런 멍자욱이 선명한 생모에게 달려드는 장면, 같이 부여잡고 "기껏 이렇게 살려고 우리를 버리고 떠났냐"고 울부짖으며 통곡하는 장면.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그래, 극중 최진실의 대사가 바로 내가 송은동에게 했던 말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거지들이나 살 듯 싶은 비닐 움막, 컴컴하고 냄새나는 그 움막안에서 송은동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울면서 부르짖었다.

"기껏 이렇게 거지같이 살려고 우리를 버리고 떠났더란 말이야. 좀 잘 살지. 악착같이 노력해서 좀 번듯하게 살아보지, 이 바보같은 여편네야! 이 못난 여편네야! "

 

-이계숙의 더 많은 작품은 http://kyesook.com 로 오셔서 읽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