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도 나는 첫 자식이었지만 아버지 형제 오남매중에서도 처음으로 태어난 자식이기도 했다. 물론 할머니에게도 첫 손주였다. 우리 할머니 이 분필. 그녀는 8.15 해방무렵 남편을 잃고 혼자 몸으로 온갖 험한 풍상을 겪으며 오남매를 키웠다. 그리고 그들 오남매를 다 출가시키고 난 후 혼자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혼자 사는 할머니의 집에 닭의 몸에서 떨어진 달걀처럼 어느 날 툭, 떨어트려졌던 것이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할머니는 송은동의 마음을 돌려놓으려고 무진 애를 쓴 것 같다. 어렵사리 모은 돈, 피 같은 돈 7천원을 주면서 (그때가 60년대 중반이었으니 지금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한 천 만원 쯤 되지 않았을까)아버지의 마음이 돌아올 때까지 같이 살자고 회유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게서 마음이 떠난 송은동은, 기찻간에서 만난 젊은 군인한테 몸과 마음이 다 가버린 송은동은 7천원이란 거금까지 손에 쥐자 발걸음도 가볍게 나를 검불같이 털어내버리고 훌훌 떠나갔다.

할머니는 나를 무척 좋아했다. 내가 당신의 첫손주이기도 했지만 내가 무척 할머니를 잘 따랐기때문이기도 했다. 할머니가 밭에 일하러 갔다 올 때쯤이면 나는 동네어귀까지 마중을 나갔다. 저만치서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면 한달음에 뛰어가 할머니의 다리에 매달렸다. 매달리는 나 때문에 걸음을 제대로 못걸으면서도 할머니는 내가 귀엽고 좋아서 어쩔줄 몰라하던 게 생각난다.

할머니는 얼마 안가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눈을 감으면서도 당신의 오형제를 다 제쳐두고 내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나를 그렇게 귀여워했던 할머니였지만 날이갈수록 나를 미워했던 할머니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말을 안듣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할머니 집에 내던져지던 날부터 나중에 아버지와 박옥이의 학대를 보다못한 고모가 나를 구해낼 때까지 나에게 꼬리표처럼 늘 따라붙었던 말, 그것은 '말 안듣는 아이'였다. 부모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나를 지칭해 '말 안듣는 아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내 이마에 새겨진 주홍글씨였다. 박옥이가 나를 죽도록 미워 한것도 내가 '말을 안들었기때문'이었고 아버지가 나를 각목이 부러지도록 때린 것도 '말을 안들었기때문'이라고 했다.

할머니와 내가 살던 집은 방 두개짜리 기와집이었다. 마당과 뒤안도 넓었고 그 동네에서 꽤 큰 축에 드는 집이었다. 할머니는 생계수단으로 두부를 만들어 팔았다. 그리고 읍내에서 소주를 받아다가 동네할머니 및 할아버지들에게 작은 소줏잔으로 팔기도 했다. 이를테면 주막아닌 주막이었던 셈이다. 두부를 사러온 사람들이 마루에서 놀고 있는 나를 보고 할머니에게 말했다.

"이 대궐같이 큰 집에 혼자사시다가 손녀딸이 와서 같이 사니 좋으시겠네요?"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좋긴요. 가시나가 당최 말을 안들어서요......"

나로부터 어른들이 원 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가 참 궁금하다. 그들이 그때 내게 듣도록 기대했던 그 놈의 '말'이란 진짜 무엇이었을까. 심부름이었을까, 집안청소였을까, 부엌일이었을까.

할머니는 매우 부지런했다. 시계도 없으면서 새벽 네시면 여차없이 일어났다. 새벽 네시에 우리가 누운 집 천장을 우르르 흔들면서 어김없이 통근열차가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맷돌을 돌려서 불린 콩을 갈았다. 두 시간에 걸쳐서 콩 한말을 다 갈은 할머니는 갈은 콩을 가마솥에 붓고 불을 때서 끊였다. 그리고 끓인 콩물을 헝겊 자루에 담아 짰다. 짜낸 콩물에 간수를 부어 네모진 틀에 부어 굳히면 두부가 되는 것이다. 콩물을 짜낸 찌거기는 비지가 되는데 그것을 방아랫목에 넣고 띄웠다. 안띄운 비지는 깔깔해서 목으로 잘 넘어가지 않기 때문에 띄운 비지가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양은 양재기를 들고 두부나 비지를 사러오는 동네사람들의 행렬이 우리집에 늘 끊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집세나 다른데 돈이 나가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오히려 방 두 개중 하나는 월세를 놓고 있었다) 할머니는 오롯히 목돈을 모았지 않았나 생각이 된다. 할머니의 아들들, 그러니까 아버지와 큰 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돈이 있는 걸 알았다. 돈을 얻으러 할머니에게 한두번 내려 온 걸 내가 기억한다. 아들이라고 키워서 출가를 시켜놓으니 제집 살림 하나도 건사못하고 할머니에게 손을 벌렸던 것이다.

할머니 집에 내가 살기 시작한 몇 달 후 아버지가 내려왔다. 어느 초가을이었다.

그때 할머니는 밭에 나가 있었고 나는 보자기를 치마처럼 두르고 마루에서 놀고 있었다. 갑자기 아버지란 남자가 성큼성큼 마당을 가로질러 집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이다.

"아부지........"

그리고 그만이었다. 나는 물끄러미 아버지를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랫만에 보는 아버지이니 달려가서 안길만도 했으련만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지금도 내 자신이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다.

나중에 옆방에 세든 여자가 할머니한테 말하는 걸 들었다.

"어떻게 된 아이가 지 아버지를 오랜만에 보는데도 전혀 반가운 기색이 없는 것 있죠. 그냥 아부지,이렇게 부르고는 그만이예요. 제 아버진 딸을 봐서 좋아죽을라하더만...."

그때 아버지는 할머니한테 돈을 얻으러 왔던 것 같다.

"여지껏 잘되던 빵장사가 기집년을 새로 얻은 날부터 제대로 되지를 않는댜. 빵을 납품해도 수금을 제대로 못하거나 빵이 금방 썩어버린다네. 그게 다 새로 얻은 년이 재수가 없어서야..."

할머니가 고모에게 하는 소리였다. 새로 얻은 년이란 바로 박옥이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박옥이가 재수가 없어서 빵공장은 갈수록 고전을 면치 못한다는 거였다.

그리고 어느날 아침 아버지가 들이닥쳤다. 여기서 내가 들이닥쳤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무런 기별도 없이 갑자기 짐을 싸들고 온식구가 내려왔기 때문이다. 하긴 전화도 없던 시절이었고 할머니는 글도 쓸 줄도, 읽을 줄도 몰랐기 때문에 편지나 전보를 보내 자신들이 내려온다는 걸 알릴 수도 없었겠지만.

그때 할머니와 나는 아침을 먹고 있었다.

들어오는 아버지를 보고 할머니가 숟가락을 내던지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아버지를 향해 황급히 물었다.

"영순이 에미도 오냐?"

아버지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안 와요"

아버지의 등뒤로 박옥이가 갓난 아기를 안고 들어왔다. 그리고 동생이 박옥이의 뒤를 아장아장따라 들어왔다.나는 동생을 쳐다보았다. 남의 집 처마밑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던 동생을.동생도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와 박옥이,그 둘 사이에서 낳은 아기, 그리고 동생은 할머니 집으로 들어온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아들 복도 지지리도 없었던 것 같다. 나중엔 아이 넷을 데리고 큰 아들 부부,그러니까 나의 큰아버지 부부까지 주르르 할머니 집으로 내려오니까 말이다. 어떻게든 객지에서 죽을 힘을 다 해 버텨보지 직장도, 농사도 해먹을 거라고는 없는 시골 촌구석에 어쩌자고 모두 대책없이 줄줄이 내려왔을까. 아이들만 한 광주리씩 낳아가지고.

어쨌든 할머니와 나 둘만, 단촐하던 살림에 갑자기 식구가 느니 돈 쓸 일도 많아졌다. 할머니는 전에보다 더욱 자주 두부를 만들었다. 박옥이는 굉장히 열심히 할머니를 도왔던 것 같다. 할머니는 두부 만드는 일 외에도 보리, 토란, 감자 등 밭농사도 지었다. 박옥이는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생전 할 줄 모르는 밭농사도 열심히 했다. 언젠가 한 번은 아버지를 비롯해 모두가 마당에서 타작한 보리를 도리깨질 한 일이 있다.생전 도리깨질이라고 해본 적 없는 박옥이의 손등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나 박옥이는 피를 흘리면서도 끝까지 도리깨질을 놓지 않았다.

할머니는 박옥이를 본처 내쫓고 들어온 년이라고 곱게 보지를 않았다. 후덕하게 생긴 것과는 달리 박옥이는 젖이 귀했다. 그래서 아기는 젖이 모자라 늘 울었는데 할머니는 그걸 가지고 늘 지청구를 했다.

"재수 없는 년이라 젖까지 귀하네. 남들은 펑펑 흘러넘치는 젖이 왜 지년한테는 없누....."

초등학교 다닐 때 공부를 꽤 잘했고 특히 작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던 박옥이는 아버지와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일기를 매일 썼다. 아버지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경위며 나중에 같이 살게 되기까지의 기록이 소상히 적혀 있었는데 나는 박옥이의 일기장을 늘 읽었다. 몇 달후 학교에 다시 입학하고 한글을 완전히 읽을 줄 알게되면서 몰래몰래 그리고 틈틈히 박옥이의 일기를 훔쳐 보았던 것이다.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는 내가 직접 보고 느낀 것과 내가 훔쳐 읽었던 박옥이의 일기장을 토대로 한 것이다.

박옥이는 할머니가 그때 자신에게 행하는 구박에 말 한 마디 대꾸도 못하고 일기장에다만 털어놓았다. 하긴 일기장 외에는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을 데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어느 날을 박옥이는 이렇게 적고 있었다.

'동네사람들이 다 모이는 샘가에 빨래를 하러 갔다. 빨래비누가 떨어진지 옛날이라 어머니께 비누를 사 달라고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들은척도 하지 않으셨다. 아기 기저귀는 빨아야 하는데 비누는 없고 할 수없이 빨래감만 이고 샘가로 갔다. 부엌에 계시던 어머니가 나를 힐끗 내다보셨다. 비누도 없이 빨래를 하러나간 걸 아시니까 혹시라고 영순이를 시켜 비누를 보내오나 싶어 목을 빼고 기다렸다. 끝내 비누 없이 빨래를 마쳤다.비누없이 빨래를 하고 있는 나를 보고 동네사람들이 기웃거리며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박옥이는 미워했지만 박옥이의 아들은 매우 귀여워했다. 할머니 집에 내려올 때까지 이름도 없는 아기에게 직접 이름도 지어주며 매일 업어주었다. 그러나 남의 집 처마밑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던 내 동생을 할머니는 엄청 미워하였다. 동생이 할아버지를 꼭 닮았다는 이유였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사이가 매우 안좋았다고 하는데 동생이 생김새는 물론 성격까지 할아버지를 그대로 빼다박았단다. 동생을 보면 생전의 할아버지를 그대로 보는 기분이라서 밉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박옥이를 '아기 엄마'라고 불렀다. 나와 동생을 버린 친엄마 대신 이 여자랑 앞으로 평생 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어린 나이에도 들었지만 내 친엄마가 아닌 걸 뻔히 알면서 엄마라고 부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어떻게 그냥 엄마라고 자연스럽게 부르게 됐지만 한동안은 아기 엄마라고 불렀다.

친구 한 명 없는 낯선 곳에서 무서운 시어머니, 그리고 말 안듣고 똥오줌도 못가리는(어릴 때 생모와 떨어진 충격때문인지 동생은 네 살이 넘는 그때까지도 똥오줌을 못가렸다) 전실 자식을 둘이나 돌보면서, 그리고 별로 호의적이지 않은 동네사람들의 눈초리를 매일 받으면서 그녀는 행복했을까.

"누가 찾아왔다길래 나가보니 생전 처음보는 여자가 내 눈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면서 쭈볏거리고 서 있는 거라. 머리는 양갈래로 땋아서 묶었는데 깡통치마에 흰고무신을 신고 있었어. 한눈에 봐서 아, 이 여자가 네 아버지랑 바람났다는 박옥이구나,하고 알 것 같더라구."

작은 고모의 회상이다.

양아버지에 의해 B시로 보내진 박옥이는  아버지가 섬을 떠났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그렇게 숫기없고 착한 여자가 무슨 용기였을까. 사랑의 힘은 그렇게 위대한 것일까.그녀는 아버지의 행방을 수소문해 쫒다가 당시 미혼이던 작은 고모의 직장까지 찾아갔더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거처를 알기 위해서.

"내가 그랬지. 단념해라. 우리 오빠는 아이가 둘이나 딸린 유부남이다. 변변한 직장도 없고 성질도 아주 더러운 남자다. 아가씨같이 순진하고 어린 사람에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더구나 나이가 자그마치 스무살 가까이 차이가 나지 않느냐......"

자신의 열아홉 순정을 바쳐버린 남자랑 죽어도 같이 살아야 한다는 순박한 섬마을 처녀라서 그랬을까. 작은 고모가 알아듣게 차근차근 타일렀는데도 박옥이는 말을 듣지 않더라고 했다.죽어도 오빠를 만나야겠다면서. 그때 작은 고모의 말을 들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니, 아버지한테 털썩,따귀를 맞던 그날 아기를 데리고, 아기를 혼자 키울 용기가 없으면 그냥 아기를 놔두고 종적을 감추어버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 부질없는 일이긴 하지만 나는 늘 생각했다. 박옥이가 세상을 떠나고 없는 지금도.

그때 , 그 당시에 박옥이가 맘을 단념하고 아버지를 떠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어느 날 아침이었다. 우리는 둘러앉아 아침을 먹고 있었다. 젖이 모자라 늘 찡찡대는 아기가 그날따라 투정이 심했다. 늘 고개를 숙이고 말 한마디도 크게 하지 못하던 박옥이도 그날은 짜증이 나는지 아기의 벗은 궁뎅이를 찰싹찰싹 치는 것이었다. 왜 이리 울어대는 거야,하면서. 그 모습을 보더니 아버지가 벌떡 일어났다(아버지는 우리와 따로 상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박옥이가 앉은 곳으로 성큼 걸어오더니 박옥이의 따귀를 철썩,소리가 나도록 치는 것이었다.

"기집년이 엊다대고 어른들 앞에서 신경질을 부리는거야,아침부터 재수없게...."

우리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둘을 바라보았다. 할머니도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더러운 성격을 익히 알고 있는 할머니는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버지의 손버릇은 악명높은 것이었다.

어릴 때 작은 고모는 걸핏하면 아버지한테 맞아서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부어있었다고 했다. 하도 때려서 친구집에 사흘동안 피신해있기도 했단다. 할아버지가 안계시고 큰 아버지가 군대에 가 있는 집안에서 아버지는 왕이었던 것이다. 제 맘에 안내키면 일단은 주먹부터 휘두르고 보는.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마음대로 주먹을 휘두르게 된 데에는 할머니의 책임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어린 여동생을 피가 나도록 패도 할머니는 단 한번도 적극적으로 저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은 고모의 회상이다.

"어느날 네 아버지가 스테인레스로 된 밥그릇을 내게 던졌어. 내 눈두덩이에 정통으로 맞았지. 금방 얼굴이 터지고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데 어머니, 그러니까 네 할머니는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리더라.야야, 말로 해라, 어린 아이를 때릴 게 어디 있다고 그리 패노?..."

큰 고모는 일찌감치 이모네로 더부살이를 갔고 둘째 고모는 죽기살기로 덤볐기 때문에 만만한 작은 고모가 표적이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작은 고모를 사흘들이로 때렸다고 한다.

그날 아침이 내가 최초로 본 박옥이에 대한 아버지의 폭력이었다. 나중엔 피가 터지고 머리가 깨지고 온갖 살림살이가 날라가는 폭력이 이틀이 멀다하고 난무했지만 말이다.

아버지로보터 기습적으로 따귀를 맞은 박옥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말 없이 밥을 먹었다. 얼굴에는 줄줄 흘러내린 눈물로 칠갑이 되었다. 그날 박옥이의 눈에서 소리없이 흐르는 눈물을 기억한다. 그리고 30년동안 아버지랑 살면서 흘렸던 수많은 피눈물을 나는 기억한다.

할머니집에서 몇 달을 개기던 아버지는 살림을 날 결심을 한다. 인구라곤 백명도 안되는 시골 촌동네에서 도저히 희망이 없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당시 할머니에겐 밭이 서너뙈기 있었는데 제법 큰 밭 하나가 다른 동네앞을 흐르는 강 위의 가파른 절벽 위에 있었다. 제법 깊고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 강이었고 강뒤로는 얕으막한 산이 솟아있는 아주 경치가 좋은 곳이었다. 할머니는 그곳에 보리니 콩이니 하는 것을 심었는데 여자 혼자 힘으로 가꾸는 밭이다 보니 소작률은 늘 형편없었다. 아버지는 그 밭에다 집을 지을 결심을 한 것이다.

예나지금이나 아버지는 일단 한번 결심을 했다하면 실행은 빠른 편이다. 아버지 친구 서너명을 모아 할머니 밭에다 집을 짓는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좀 기다렸다가 날씨라도 따뜻해지거든 하지, 그때가 추운 겨울이었는데 할머니와 박옥이는 일꾼들의 점심과 새참을 해대느라 죽을 고생을 하던 것이 생각난다. 그 먼길을 하루에도 몇 번 씩 오가면서 음식을 해날랐던 것이다. 나도 몇 번 심부름을 하느라 가보았는데 나의 작은 걸음걸이로 꼬박 하루가 걸리는 먼 곳이었다.

그리고 몇 개월의 고생 끝에 방 두개에 부엌하나, 그리고 점포를 차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마련한 스레트지붕 집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지붕만 올린, 말만 집이지 사실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집이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지은 집은 무허가여서 전기를 끌어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수도도 없었다. 집 옆에 작은 도랑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실처럼 가늘게 졸졸 흐르고 있었다. 먹는 물은 그걸로 해결하고 그밖에 나머지는 강물을 사용하려고 아버지는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강은 바닥을 훤히 볼 수 있을 정도로 깨끗했었으니까.또한 강주위에 사는 많은 동네사람들이 강물을 식수로도 사용했다.

아까 말한대로 그곳은 경치가 아주 좋은 곳이었다. 그리고 강에는 은어니 송어니 하는 온갖 민물고기들이 많았다. 그래서 사시사철 낚시꾼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낚시군들을 상대로 장사를 해볼 생각을 했다. 일단 집이 지어지자 아버지는 곧 나무로 된 탁자와 의자를 서너개 들여놓았고 손님들을 위해 연탄 난로도 설치했다. 그리고 소주니 막걸리니 하는 주류들과 과자 및 안주부스러기를 들여놓았다.

내가 극도로 미워하는 아버지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걸 어쩔 수 없다.

불쌍한 아버지. 바람이라도 불면 금방 지붕이 벗겨져 달아날 것만같은 얼기설기 지은 전기도 수도도 없는 브로크 집, 거기서 스무살짜리 철없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아버지는 살아갈 생각을 한 것이다. 그것도 엄동설한에, 외풍이 얼마나 세던지 아침에 일어나면 자리끼가 꽁꽁 얼어터지는 겨울의 한복판에서 말이다. 얼마나 막막했을까.

절벽 위의 집, 앞에는 강이 흐르고 뒤엔 작은 야산이 있는 그림같은 경치의 집, 그러나 그곳은 지옥이었다. 아니 지옥보다 더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황폐하게 망가졌다. 정말이지 할 수만 있다면 그곳에서 지낸 기억만 따로 도려내 던져내 버리고 싶도록 슬프고 비참한 세월이었다.

-이계숙의 더 많은 작품은 http://kyesook.com 로 오셔서 읽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