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지 바를 돈이 없어 신문지를 대충 바른 새집에 아버지는 박옥이를 데리고 이사를 갔다.아기와 동생은 물론 데리고 갔지만 나는 할머니 집에 남았다. 나를 데려 가려고 했었는데 내가 따라 나서지 않았는지 나는 가고 싶었는데 아예 처음부터 그들이 날 데려갈 생각을 하지않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지금 짐작컨데 나에게 같이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어릴 때 부터 늘 짓눌리고 핍박받으며 기를 못펴고 살아서인지 예나 지금이나 내 성격은 매우 수동적이다. 한번도 내 주장을 강하게 펼쳐 본 적이 없다. 아버지가 같이 가자고 했는데 내가 싫다고 했을 리가 없다는 말이다.

 

아버지와 박옥이가 없어져서 섭섭하거나 아니면 홀가분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덤덤했다. 다만 몇 달동안 정이 들대로 들어버린 아기의 얼굴을 보지 못해서 서운했다.

여기서 내가 처음으로 경험했던 박옥이의 성격에 대해서 이야기해야겠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양부모밑에서 자라서 그런지 굉장히 순종적이고 순한 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앙칼지고 못된 구석도 있었다. 그녀의 그 못된 성격을 처음으로 경험한 것이 나였는데 할머니 집에 같이 살 때였다. 아버지와 할머니는 밭에 갔는지 어쨌는지 집에 없었다. 박옥이가 저녁을 짓는다며 내게 아기를 업어달라고 했다. 그때 나는 이웃집 명자와 함께 소꼽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기를 업으면 마음대로 소꼽놀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아기를 업지않겠다고 박옥이에게 찡찡거렸던 것 같다. 그러자 박옥이는 다짜고짜 마루에 주욱 늘어져 있던 내 장난감들을 모조리 집어다 마당으로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을 바라보았다. 명자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명자가 자기 엄마에게 박옥이의 행동을 일러바쳤다. 명자의 엄마가 같쟎다는 듯 비웃음을 얼굴 가득 띄우며 말했다.

"꼴같쟎은 년이 성질은 있네 그려......"

그래. 아무리 꼴같쟎은 인간이라해도 성질마저 없을라구. 그러나 아버지나 할머니 앞에서 고개도 제대로 못들고 숨소리조차 크게 못내던 박옥이의 그 행동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나중엔 그보다 열배 스무배 더한 행동으로 나를 구박하고 학대하긴 했지만.

아버지 식구들이 떠나고 나는 다시 할머니와 둘이 됐다. 할머니는 가끔 아버지 집에 딸린 밭으로 일을 하러 갔다. 아기가 보고 싶다면서. 당시 아버지 가게에는 소주와 막거리를 팔고 있었고 박옥이는 할머니가 갈 때마다 막걸리를 마음껏 대접했었던 것 같다. 할머니가 아버지 집에서 돌아오는 날은 늘 막걸리에 취해서 기분좋게 돌아왔으니까.

한번은 아버지 집에 다니러 간 할머니가 저녁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집집마다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고 나랑 같이 놀던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 나는 혼자 마루에 오도카니 앉아 할머니를 기다렸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나는 왜 때가 되면 밥 먹으라고 불러주는 엄마가 없을까. 왜 우리집엔 끼니때마다 음식을 장만하는 맛있는 냄새가 나지 않을까.왜 우리집은 낮이나 밤이나 늘 썰렁하기만 할까.

할머니는 연료를 아끼느라 사흘치 밥을 한꺼번에 해서 부엌천장에 매달은 바구니에 담아두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싸늘하게 식은 찬밥덩이를 먹어야 했던 것이다. 그날 혼자 마루에 오도카니 앉아 온 식구가 둘러앉은 따뜻한 밥상을 그리워 하던 생각이 바로 어제인양 생생하다. 그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처럼 나의 어릴 때 바램은 늘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비오는 하교길에 누가 우산을 들고 마중을 나와 주는 것, 비를 흠뻑 맞고 집에 돌아왔을 때 갈아 입을 마른 옷이 있는 것, 온몸이 얼어서 집에 돌아왔을 때 발을 녹일 따뜻한 아랫목이 있는 것, 그리고 배가 고플 때 먹을 밥이 있는 것. 그래, 나의 바램은 늘 그렇게 작고 소박했다. 그러나 나의 그 작고 소박한 바람은 아버지와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그래,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날 밤 할머니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걸음을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술에 취했기 때문이다. 마악 여덟살이 된 여자아이를 혼자 내버려두고 할머니와 아버지와 박옥이는 그날 밤 잠이 잘 왔을까. 그들이 부모로서 보호자로서 나를 걱정했다면 적어도 그날 밤 한번은 와서 들여다 보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저녁밥은 먹었는지, 혼자 무서워하지는 않는지.....그러나 그들은 와보지 않았다. 나는 밤새 무서움에 떨며 그 밤을 보냈다.

얼마 후 큰 아버지 식구들이 보따리를 싸들고 할머니 집으로 다 내려왔다. 큰 아버지에게는 당시 아이가 넷이나 되었다. 방 두개에 큰 아버지 식구들까지 합세하자 나는 자연히 아버지 집으로 쫒겨갔다. 그리고 몇 달 후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가 편치않다는 기별을 받고 급히 할머니 집으로 갔던 아버지는 그날 밤이 새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아버지는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집에 왔다. 돌아오자마자 "영순아, 할머니가 죽었다"고 엉엉 울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보다 아버지가 우는 모습이 무서워서 나도 조금 울었던 기억이난다.

단 한 순간도 몸을 가만두지 않을 정도로 부지런하고 건강했던 할머니, 왜 그렇게 허망하게 가셨을까. 나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우리 아버지는 폭력적이고 거칠긴 했지만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큰 아버지는 얼음처럼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이었다. 큰 어머니 역시 같은 성격의 사람이었고 남의 무시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었다. 나 역시 자라면서 큰 어머니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다.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계모 밑에서 크는 천덕꾸러기 조카, 나 같으면 불쌍해서라도 따뜻하게 대해주었을텐데 어쩌면 그녀는 그렇게 내게 못되게 했을까 하는 정도의 일을 많이 당했다.

큰 어머니는 내려오자마자 자신이 큰 며느리랍시고 살림을 도맡았다. 하루가 가도록 한두마디 말밖에 하지 않는 어려운 큰아들과 말을 함부로 하는 싸가지 없는 며느리, 그리고 네 명이나 되는 손녀딸들. 나랑 둘이 고즈넉하게 살던 할머니는 바뀐 환경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게다. 그게 할머니의 명을 재촉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그 해 봄,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집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그 고장에서 하나밖에 없는 초등학교였다. 아버지는 자전거의 뒤에 나를 태워 입학식에 데리고 갔다. 나는 그날 박옥이가 사준, 분홍색이 도는 스웨터에다 실바지를 입었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그 옷 색깔과 무늬를 기억한다. 왜냐면 그 이후로 나는 단 한번도 박옥이로부터 새옷을 얻어입은 적이 없기에. 그 옷 한벌이 내가 박옥이로부터 얻어입은 최초이자 마지막의 옷이었다. 추석이나 설 명절이 돌아오면 밑의 동생들은 하다못해 외상으로라도 옷을 사입혔다. 그러나 내게는 단 한번도 새옷을 사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큰 불만이 없었다. 새옷이라니, 가당키나 한가. 당시 나는 새옷을 입으면 절대 안되는 쓰레기같은 존재였지 않은가.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아버지는 인물이 좋은 사람이었다. 까만 양복을 입고 안경을 쓴 아버지는 많은 학부형중에서도 군계일학이었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근 70여명이나 되는 우리들을 돌보기 위해 이리뛰고 저리뛰느라 정신이 없는 담임 선생님의 의자에 아버지가 대신 앉아 다른 학부형과 담소를 나누던 모습을. 도대체 아버지의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을까.감히 담임 선생님 자리에 앉을 생각을 하다니 말이다. 어쨌든 다리를 척 꼬으고 앉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황홀할 만큼 멋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는 나를 극도로 미워하거나 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자랑스런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성격이 화통하고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누구든지 한번만 대화를 나누면 금방 친해질 수 있는 매력을 가진 사람이기에 친구가 무척 많았다. 어릴 때 같이 자랐던 친구도 많았지만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면서 사귄 사람도 많았다.

내일 때거리 걱정을 해야하는 찢어지게 없는 살림이었지만 아버지는 친구들과 관광계를 해서 일년에 한번씩 꼭 관광을 갔는데 50여명, 백여명이 찍은 단체사진에도 아버지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중 인물이 제일 뛰어나게 훤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이다.인물좋고 말빨 끝내주게 좋고 친화력도 좋고 게다가 유식하기까지 한 남자, 무엇하나 빠질 것 없는 남자라고. 나중에 여자 두엇이 아버지에게 빠져서 (유부남임에도 불구하고)죽네 사네 한 것도 다 아버지의 겉모습만 본 것이다.

걸핏하면 폭력을 휘두르고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을 자식과 마누라에게 예사로 퍼붓던 사람이란 것을 사람들은 상상이나 했을까.

아버지는 입학 첫날만 나를 학교에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부터는 혼자가라고 명령했다.

며칠 후 하교길에서 나랑 같은 반이며 나랑 같은 동네에 사는 성희를 만났다. 나중에 나의 영혼의 친구가 되어주던 아이였다. 나는 그래도 새옷이라도 한벌 얻어 입었지, 성희는 단추가 다 떨어져 나간 잠바에다 양말도 없이 낡은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잠바의 원래 색깔은 상아색인 듯 했는데 얼마나 오래 안빨았는지 거의 회색이 되어 있었다. 머리는 며칠 감지도 않았는지 떡이 져 있었는데 그녀는 여덟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벌써 인생을 다 산듯한 우울하고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우리 동네로 들어가는 동네 초입의 외딴 집에 사는 아이였고 그녀의 집 앞뒤로 무덤이 있어 무덤집 아이로 불리운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참 재밌는 것이 그녀의 가족관계라던지 처해 있는 환경이 나와 똑같았던 것이다. 성희 역시 새엄마 밑에서 크고 있었다. 성희가 다섯 살 때,동네 부잣집 머슴과 성희의 엄마가 바람이 나서 도망을 쳐 버렸다는 것이다. 성희 밑으로 당시 한 살이던 여동생이 있었는데 젖을 얻어먹지 못해 골골하다가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새엄마가 낳은 동생이 셋이다. 당시 내가 성희를 만날 당시엔 내 친동생을 비롯해 박옥이가 낳은 아들까지 밑으로 남동생을 둘 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박옥이가 아들 하나를 더 낳음으로 나는 성희와 똑같이 남동생이 셋이 되었다.

성희는 남의 집 품을 팔러 다니는 부모를 대신해 그 어린 나이에도 벌써 동생 셋을 돌보며 살림을 도맡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얼굴이 그렇게 지쳐보였던 것이다.

새엄마 밑에서 자란다는 동질감에서였을까.성희와 나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그녀는 글짓기를 아주 잘하는 아이여서 나중에 교내 백일장은 물론 전국 백일장의 장원을 도맡아하곤 했다. 내가 남편과 연애를 할 때 성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나도 글을 꽤 잘쓰는 편이었지만 성희의 글재주는 진짜로 뛰어났다. 당시 일선에 있는 국군아저씨들한테 의무적으로 위문편지를 쓰곤 했었는데 반 전체에서 답장을 받는 아이는 늘 성희혼자뿐이었을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성희는 나를 대신해 연애편지를 많이 대필해 주었던 것이다.

엄마가 바람나 도망가버린 것까지 똑같고 여러모로 비슷한 게 많은 성희와 나였지만 한가지 비슷하지 않은 게 있었다. 새엄마 밑에서 여러동생들과 치이며 힘들고 어렵게 산다는 건 둘 다 같았지만 성희는 적어도 새엄마나 아버지한테 폭력을 당하거나 학대를 당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성희의 아버지는 그래도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워낙 없는 살림이라 제때제때 아이들이 필요한 것을 조달해주지는 못할 망정 우리 아버지처럼 폭력을 휘두르거나 "당장 나가서 뒈져버려라. 죽은 개 끌듯이 끌어다가 묻어 줄테니까"하는 따위의 무시무시한 욕설을 퍼붓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성희와 단둘이 만나게 됐다. 성희를 보자 어릴때의 기억이 되살아 났다. 나는 가슴속에 켜켜히 품어진 한을 발작하듯 풀어놓으며 성희 앞에서 통곡했다. 성희는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몰랐어, 정말 몰랐어. 네가 그정도로 모진 학대를 받으면서 처참한 생활을 했는지 진짜 몰랐어......."

모를 수밖에. 그런 사실을 전혀 입밖에도 내지 않았으니까. 어린 마음에도 우리 아버지가 영화에나 나오는 미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라는 것이, 박옥이와 내가 일 주일에도 몇 번씩 아버지로부터 뺨을 철썩철썩 맞고 머리채를 휘둘리며 몽둥이 찜질을 당한다는 것을 얘기하기가 너무너무 창피했으니까.

내가 아버지로부터 처음 폭력을 당한 것은 어느날 해가 어스름한 저녁이었다.그때 나는 무엇을 잘못한 것 같다. 그래, 아버지가 나를 때릴 때는 늘 내가 무엇을 잘못해 아버지를 화나게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나를 때리려고 거친 맹수처럼 으르릉거렸고 나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요리조리 피하고 있었다. 그때 박옥이가 나섰다. 아, 이 장면을 회상하려니 눈물이 저절로 흐른다. 박옥이가 나중에 나를 그렇게 죽도록, 진짜 진저리치게 나를 미워했어도 나는 단 한 번도 박옥이를 진정으로 미워하지 않았다. 바로 지금 묘사하려고 하는 이 장면 때문에.

박옥이가 나를 보호하려고 나섰던 것이다. 박옥이는 나를 자신의 뒤에 숨게 했다. 아버지는 박옥이를 제치고 나를 끌어내려고 발광을 쳤는데 박옥이가 결사적으로 아버지를 저지했다.그리고 울면서 애원했다.

"때리고 싶으면 나를 때려요, 나를. 어린 애가 때릴 게 어디 있다고 그래요?"

그래, 그때의 박옥이 행동이 진심에서 우러 나온 것을 내가 안다. 그녀는 그때 나를 보호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중에는 아버지가 나를 때리거나 말거나 방관으로 일관했고 아니, 오히려 아버지에게 매질을 당하는 나를 신나고 고소해 했을 망정 당시 나를 아버지의 매질로부터 보호하려는 박옥이의 행동은 진심이었다.

그날 내가 박옥이로 인해 아버지의 폭력에서 구출되었는지 아니면 아버지가 박옥이를 밀치고 나를 팼는지까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그날 박옥이의 행동은 내 가슴 깊은 곳에 인상적으로 남았고 그것이 평생 내가 박옥이를 미워하지 못하게 된 이유가 된다.

나중에 박옥이가 내게 갖은 욕설을 퍼붓고 밥을 주지 않고 술주정뱅이가 침을 묻히면서 먹다 남은 더러운 김치를 나 모르게 도시락 반찬으로 싸주는 일을 공공연하게 했어도 나는 단 한번도 박옥이를 진심으로 미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와 박옥이가 치고 박고 싸울 때도 나는 항상 박옥이 편이었다. 언젠가 한번은 아버지가 한밤중에 박옥이를 집밖으로 쫒아내버린 적이 있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아버지는 때리는 것도 지겹고 욕하는 것도 지겹다면서 박옥이를 질질 끌어다가 문밖에 내팽겨쳐 버리고 문을 잠가버린 것이다.

한 겨울 깊은밤, 귀신의 울음소리같은 삭풍이 몰아치는데 양말도 신발도 없이, 변변한 겉옷도 없이 밖으로 쫒겨난 박옥이, 그때 그녀가 느낀 것은 절망이었을까. 그녀는 울면서 마구 문을 두드렸다. 악에 받쳤는지 욕을 섞어가며 소리를 질렀다.

"야이 개새끼야! 문 열어!문 열란 말이야!이 더러운 개새끼야!"

아버지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잠을 청하려는지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나는 그때 눈물로 얼굴을 칠갑을 하면서, 그리고 무서움에 벌벌 떨면서 집안에 있었다. 나는 알았다. 아버지가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저대로 두면 박옥이는 얼어죽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손으로 문을 열어주지 못했다. 대신 울면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밖에 오줌을 누러 가야 한다고. 아버지가 일어나서 문을 조금 열어 주었다. 그리고 내 몸이 밖으로 나가게 되자 마자 다시 문을 잠구었다. 나는 곧 박옥이와 합류해 같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문 열어! 빨리 문 열라고!"

그때 나도 아버지에게 뭐라고 욕을 한 것 같다. 딸년까지 합세해 악을 쓰며 욕을 해대니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는지 아버지는 곧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박옥이를 발길로 두어번 걷어찼다. 어쨌든 박옥이는 그날 밤 집안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얼어죽지 않아도 되었다.

박옥이는 궁금하지 않았을까. 왜 내가 그날 일부러 밖으로 나가서 자기랑 합세했는지.

친아버지를 제치고, 생모인 송은동을 제치고 내가 영원히 박옥이 편이었다는 사실을 박옥이는 모를 것이다. 내가 단 한 번도 입밖에 내어 말하지 않았었으니까. 나중에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을 때도 박옥이를 대신해 내가 나서서 해결한 적도 있었다.

한 인간으로, 아니 한 여자라는 매개체로 놓고 박옥이를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때 박옥이는 누구한테로부터 사랑받을 만한 여자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인물이 좋길 하나, 성격이 좋나, 살림을 잘 하나, 고집은 또 왜그리 셌을까. 급하게 말 할땐 말까지 더듬는 여자였다. 그리고 매우 지저분하고 더러운 여자였다. 생리가 묻은 기저귀를 여기 쿡,저기 쿡 처박아놓고 일년이 넘도록 빨지 않은 여자였으니까.어느날 아버지가 무엇을 찾다가 썩어서 벌레가 생기기 시작 한 그것을 찾아냈다. 나 같으면 창피해서라도 입을 꾹 다물고 있겠다. 그러나 박옥이는 오히려 언성을 높혔다.

"빨 시간이 있어야 빨지!"

박옥이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자인할 줄 모르는 여자였다.단 한번도 그 입에서 자신이 실수했거나 잘못했다고 시인하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그게 더 아버지의 화를 돋구어 매를 자초한 결과가 되긴 했지만.

나중에 차차 박옥이에 대해 상세히 얘기하겠지만 도대체 우리 아버지는 왜 박옥이란 여자한테 애정을 느껴 같이 살기시작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자신보다 스무살이나 어렸으니 어린 그녀의 몸에 혹했던 것일까.

"기집복도 지지리도 없는 사람이었지......"

나중에 고모들이 아버지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 끝에 하는 말이었다. 기집복이 없어서라고? 아니지. 내가 보기엔 아버지가 여자 보는 눈이 더럽게도 없었을 뿐이다.

송은동도 그렇고 박옥이도 그렇고 골라도골라도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지지리도 못나빠진 여펜네들 뿐이었는지.

"그래도 박옥이나 하니까 네 아버지같은 사람하고 살았지, 다른 여자같았으면 어림도 없었을 게다"

그래도 고모들은 박옥이 편이었다. 박옥이한텐 어쨌든 아버지가 첫순정이었으니 죽어도 같이 살았다고.다른 남자를 안 여자였다면 절대 못살았을 거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모들은 박옥이의 지고지순한 겉모습만 보고 내린 평가다. 말 안듣는 전실 자식을 둘이나 키우면서 바람피우고 폭력이나 휘두른 남편밑에서 고생하고 희생하며 살았던 박옥이의 겉모습은 누가 봐도 칭찬받을 만한,훌륭한 여자라는 평가를 내릴만 했다. 그러나 고모들은 모른다. 박옥이가 내게 했던 행위들을. 내가 그녀로부터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당했는지를 고모들은 모른다. 아니 이 세상 사람들 그 누구도 모른다. 그것이 지금 내가 40년이나 지난 지금 박옥이에 대해 털어놓으려는 이유이다. 혼자 가지고 있기엔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털어놓으려는 이유란 말이다.

박옥이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칭찬을 할 때마다 나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나는 단 한번도 박옥이의 실체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게 얼마나 심한 학대를 했다손치더라도 아버지의 매질로부터 보호하려고 나를 막아서던 그녀를 생각하면, 나는 절대로절대로 그녀에 대해 나쁘게 얘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늘 생각했다. 박옥이의 본질은 착하고 착하지. 환경이 그녀를 그렇게 악하게 만들었을 뿐.내게 그렇게 심하게 한 것도 내가 말을 안들어서 그랬던 거야.......

언젠가 한번 우연히 박옥이가 나한테 이런 욕을 하더라,하고 작은 고모한테 입을 연 적이 있다. 일러바치려고 작심해서 한게 아니고 우연히 얘기 끝에 그런 얘기가 나왔다.

작은 고모는 눈을 휘등그레 떴다.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박옥이가 절대로 그런 욕을 네게 할 여자가 아니다. 네가 잘못 들었겠지.만약 네가 잘못들은 게 아니고 박옥이가 진짜로 그런 욕을 네게 했다면 아마 그것은 박옥이가 그 욕의 뜻을 모르고 한 것일 게야.. 박옥이가 얼마나 순진하고 착한 여잔데 그런 엄청난 욕을 네게 했겠니?"

아버지가 없을 때 박옥이가 내게 늘 소나기처럼 퍼붓던 욕,아아, 표현하려니 내 입이 부끄럽다.

그것은'어느 씹구멍으로 내질렀길래 가시나가 저렇게 말을 안들을까'라는 욕이었다.

-이계숙의 더 많은 작품은 http://kyesook.com 로 오셔서 읽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