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콩쥐팥쥐라는 전래동화를 읽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계모와 이복동생에게 구박받는 콩쥐가 불쌍해서 가슴 아파해보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콩주가 불쌍해서 가슴 아파한 당신이여,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 당신의 유년은 유복했다는 증거니까. 유복까지는 아니더라도 먹을 것 입을 것이 그런대로 충족되었기에 남에게 괴롬힘을 당하는 사람을 동정하는 따뜻한 마음, 즉 순수한 동심이 남아있었다는 증거니까.
나는 책 속의 콩쥐를 부러워하던 아이였다. 왜냐면 책 속의 콩쥐는 계모에게 학대와 괴롭힘을 당할 망정 아버지에게 매는 맞지 않았으니까. 콩쥐팥쥐 그 어디에도 아버지가 콩쥐를 때렸다는 내용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콩쥐가 부러웠던 건 콩쥐에게는 그리워 할 대상이 있었다는 거였다. 짐작컨데 계모와 의붓동생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콩쥐가 한 일은 엄마를 그리워 하는 일이었을 게다. 콩쥐의 엄마는 적어도 자식을 버리고 간 사람이 아니라 '그냥 돌아가신 사람' 이었으니까. 그래서 콩쥐의 가슴에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애틋한 기억이 남아있었을 테니까.
사흘들이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박옥이의 입에서 퍼부어지는 구정물같은 욕을 먹고 내가 한 일은 그들의 눈에 뜨지 않는 곳에 앉아 하염없이 하늘을 쳐다보는 일이었다. 내겐 그리워 할 엄마라는 존재조차 없었으니까. 엄마는 내게 원망과 미움의 대상이었지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리움이라니! 오히려 아버지와 박옥이에게 당할 때마다 가슴 속의 한이 뭉게구름처럼 뭉게뭉게 일었다.
네가 나를 버리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 비참하지 않았을 거라는 한!
마음의 고향 대신 한의 대상으로 '엄마'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나, 나는 얼마나 억울한 사람인가. 나는 얼마나 불행한 사람인가.
할머니랑 같이 살 무렵, 송은동에게서 편지가 한 통 온 일이 있었다. 할머니는 글을 몰랐고 나 역시 글을 읽을 줄 모를 때였다. 할 수 없이 할머니는 아버지가 들리기를 기다렸다가 송은동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아버지는 할머니 손에서 편지를 확 나꾸어 채더니 읽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그 자리에서 박박 찢어버렸다. 그리고 마악 불씨가 사그러들지 않은 아궁이에다 편지를 던져넣어버리는 것이었다. 뭐라고 썼더냐고 할머니가 다그쳐 물었지만 아버지는 '씰데 없는 내용'이라며 편지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때 할머니와 부엌에 앉아 불을 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찢은 편지를 아궁이에 던져놓고 내게 다가와서 내 얼굴을 한참 물끄러미 들여다 보았다. 나도 아버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편지엔 뭐라고 쓰여 있었을까. 내가 보고 싶다고 쓰여 있었을까.
기찻간에서 만난 젊은 놈한테 혹해 단 한 조각의 미련도 없이 치마자락 휘날리며 사뿐히 떠났었지만 막상 떠나서 살아 보니 눈에 밟히는 건 영순이뿐이더라고 구구절절 나에게로 향한 애정을 호소했을까. 그랬었다면, 만약 송은동이 편지에 그렇게 썼더라면 그 이후부터는 송은동을 미워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는 편지내용을 끝내 말해주지 않았고 내게 남은 송은동에 대한 기억은 영원히 좋지 않은 것 뿐이었다.
그 힘든 어린 시절, 나를 구원해 준 것은 책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책을 많이 읽는 아이였다. 책을 읽는 동안은 내가 처해 있는 비참하고 남루한 현실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동화책이던 만화책이던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읽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였는가. 나는 조숙하게도 연애소설을 접했다. 반 아이였던 희연이가 큰 언니가 보던 책을 가져다가 내게 빌려준 것이다. 당시 미혼여성들에게 인기가 있던 박계형씨의 연애소설이었다. 사랑과 미움, 배신, 복수 등으로 점철되는 어른들의 세계를 나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알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박옥이는 내가 무엇을 읽는지 별로 눈여겨 보지 않았다. 아마 빨간 딱지가 붙은 포르노 소설을 내가 읽고 있었다해도 그들은 아무말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내게 아예 관심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으니까.
그들은 내가 집안 일을 도우지 않고 책만 붙들고 있다고 오히려 늘 야단쳤다.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해야 할 산더미같은 집안 일은 나 몰라라하고 늘 책만 보고 있는 '때려죽이고 패 죽여야 할 아이'였다.
집안 일, 그것은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는 일이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할머니 밭에 지은 새집에는 전기도 수도도 없었다. 걸레 한 장을 빨려면, 물 한 바케스를 길으려면 가파른 언덕길을 구르듯 강으로 내려가야 했다.
지금도 나는 길에서 아홉 살, 열 살 정도의 소녀를 보면 내 어릴 적 생각이 나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홉 살, 열살 정도의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집안 일, 그 집안 일이란 기껏해야 청소를 하거나 심부름을 하는 정도의 일 일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박옥이는 내게 집안의 모든 일을 통째로 맡기려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이 하기 싫었다.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가 강물을 길어 올리는 일,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하는 일 등등....
그곳에서 살기 시작한 1년 후 아버지는 다른 방법으로 살아갈 궁리를 차렸다. 낚시군을 상대로 과자나 소주 부스러기를 팔아서는 도저히 돈을 벌 수가 없다고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아버지는 강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물고기를 잡아다 팔아야겠다고 생각했나 보았다. 아버지는 어느 날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그물을 잔뜩 사서 자전거 뒤에 싣고 왔다. 그리고 두서너명 만 탈 수 있는 작은 배를 만들었다.
그날부터 아버지는 어부가 되었다. 물고기를 잡는. 그리고 잡은 물고기를 회나 매운탕을 해서 팔았다. 그때만 해도 강물은 전혀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에 강에서 바로 잡은 물고기를 회로 쳐서 먹을 수 있었다. 장사는 제법 된 것 같다. 주말이면 손님들이 꽤 있었으니까.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가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을까. 아니면 유독 나만 그랬던 것일까.아버지 주머니에 돈이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나는 늘 헐벗고 굶주리는 아이였다.
아버지는 내게 교과서도 공책도 연필도 제대로 사주지 않았다. 그리고 육성회비, 아! 그 지긋지긋한 육성회비!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서 초등학교가 국민들의 의무교육이 되어서 교과서도 무상으로 배급되었고 육성회비라는 것도 없어졌지만 그전까지는 모두 다 학생들의 부담이었다. 나는 육성회비를 안내는 학생으로 악명높았다.
수업시간 전, 조례시간에 선생님은 제일 먼저 육성회비를 안낸 학생들을 앞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70여명의 학생들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왜 육성회비를 안냈는지 언제까지 낼 것인지를 다그쳤다. 그리고 수업시간에 육성회비를 가져오라며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평소에 안 주던 육성회비를 집으로 돌려보낸다고 줄 것인가. 돈 때문에 학생들을 차별하고 달달 볶는 선생들 중엔 ㅇ행선 선생, ㅇ홍구 선생, 그리고 ㅇ정식 선생이 유명했다.그 세 선생은 나를 하루도 빼지 않고 때리고 야단치면서 족쳤다. 단지 육성회비를 안냈다는 이유로. 그러니까 돈이 없는 아이라는 이유때문에 아이들 앞에서 선생들로부터 따귀를 마구 맞으면서 내 자존심은 매일 형편없이 뭉개져내렸다.
나는 공부를 꽤 잘하는 학생이었다. 숙제는 커녕, 생전 예습 복습 한 번 해가지 않은 불량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그러나 일년에 두 번 방학때 선생님들이 내주는 내 '통신표'는 늘 형편없었다. 나는 육성회비도 절대 내지 않고 학급에 필요한 물품을 사는데도 전혀 협조를 하지 않으며 스승의 날에도 볼펜 한 자루를 선물하지 않는 아이였으니까.
당시 우리반에 박정이란 아이가 있었다.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얀 아이였는데 공부를 지독히도 못하던 아이였다. 정육점을 하던 엄마가 치맛바람을 꽤나 일으키며 쫒아다녔지만 5학년이 되도록 한글도 제대로 쓸 줄 몰랐고 덧셈도 뺄셈도 버벅거리던 아이였다. 그 엄마의 극성이 얼마나 심했냐하면 집에 제사를 지내면 제삿밥을 학교로 날라다 학교선생들 전부를 먹일 정도였다. 그런 때문인지 그 아이에 대한 선생들의 편애가 유독 눈에 띄게 심했다.
어느 학기 종업식 때 우연히 그 아이의 통신표를 보게 되었다. 공부를 꽤 잘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와 '양' 투성이던 내 통신표와는 달리 '수'와 '우'가 자랑스럽게 표기되어 있던 그녀의 통신표. 그것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세상은 고르지 않다는 것을. 돈이 최고라는 것을
나는 생전 가야 머리도 감지 않고 목욕도 하지 않는 지저분한 아이였다. 그런 나를 반 아이들은 늘 따돌렸다.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매일 선생님께 야단맞고 까치집을 한 머리로 더러운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다니는 나를 친구로 해줄 만한 아이가 없었다. 그런 반 아이들을 나는 원망하지 않는다. 나래도 그랬을 테니까.
나의 모습은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가 따로 없었다. 당시 아이들 머리에는 왜 그렇게 이가 많았을까. 우리반 몇몇 아이들 머리에서는 늘 이가 떠나지 않았는데 내 머리에도 늘 이와 서캐가 들끓었다. 그리고 몇 달에 한 번도 감지 않은 머리에선 부스럼이 떠나지 않아 늘 진물이 줄줄 흘렀다. 그리고 진물 냄새를 맡은 파리떼가 내 머리통을 빙빙 맴돌았다.
바로 집 앞에 맑은 강물이 철철 흐르겠다. 왜 나는 그렇게 머리를 감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런 진물이 질질 흐르는 머리를 하고 어느 날 할머니 집, 그러니까 큰집에 놀러갔는데 큰 어머니가 나의 머리통을 보더니 경악했다.
"아이고, 네가 이런 꼴로 어디를 다닌단 말이고?"
서너시간만 놀면 집으로 가라고 쫓아내던 큰 어머니가 그날은 늦게까지 아무말을 안했다. 그러더니 저녁 무렵 그날 일과를 다 마친 큰 어머니는 외출 채비를 차렸다.
"안되겠다. 오늘은 아무래도 내가 네 에미라는 사람을 좀 만나봐야겠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주인이 예뻐해야 남도 예뻐하는 법이라고 했다. 우리 아버지가, 박옥이가 신발 안에 들어 온 돌멩이처럼 나를 못견디게 미워하는데 큰 어머니인들 나를 예뻐할 리가 없었다. 큰 어머니도 표나게 나를 싫어하고 적대시했다. 그러나 헐어 빠져서 진물이 흘러내리고 냄새가 진동하는 내 머리통을 보자 그냥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나 보았다.
큰 어머니 집에서 우리집을 가려면 불빛 한 점 없는 시골길을 한참 걸어야 했다. 그런 길을 혼자 돌아가기 뭐했는지 큰 어머니는 친 구 한명을 불렀다. 나는 두 사람을 뒤에 두고 앞장서 걸었다. 둘은 어둠속에서 두런두런 얘기를 했는데 거의 박옥이의 이야기인 것 같았다. 한참을 걸어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우리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박옥이와 동생들만이 마당에 놓인 평상에 모기장을 쳐놓고 모두 태평스레 자고 있었다. 때는 여름이었다.
우리들의 발자욱 소리에 박옥이가 부스스 일어났다. 큰 어머니는 박옥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막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저 아이 머리를 좀 봐라. 저 머리가 사람 머리냐?! 아무리 자네가 집안 일, 그물질로 바쁘다 해도 어떻게 아이의 머리를 저 지경이 되도록 두나, 그래? "
내가 들은 큰 어머니의 말은 거기까지다. 하루종일 뛰어노느라 피곤했던 나는 곧 잠이 들고 말았으니까.
큰 어머니는 매정하게 찬 바람이 쌩쌩 도는 사람이었다. 남의 가슴에 못이 박히는 소리도 팡팡 잘하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큰 어머니는 박옥이보다 나이가 열 다섯 살이나 위인 사람이었고 '정식 결혼'을 해 들어 온 맏며느리였다. 어디서 굴러온 돌인지 모르게 굴러들어와 결혼식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채 빌붙어 사는 박옥이와는 신분 자체가 틀린 사람이었다. 그날 밤 박옥이가 눈물이 쏙 빠지게 큰 어머니한테 혼난 건 당연지사였다.
자다가 누가 세차게 걷어차는 바람에 나는 놀라서 잠이 깼다. 박옥이였다.
"야이 망할 가시나야. 너 때문에 야단 맞았쟎아!"
박옥이는 내게 그렇게 말한 것 같다. 미움과 원망이 뚝뚝 묻은 목소리로. 큰 어머니한테 야단 맞은 게 나 때문이었으니 박옥이는 내가 죽이도록 미웠을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박옥이는 자신의 잘못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은 성격이다. 왠만한 사람같았으면 내 머리통이 그 지경이 되게 둔 걸 미안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계모였던 어쨌든 당시 지가 내 에미를 대신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박옥이는 곤히 자는 나를 걷어차는 걸로 야단맞은 분풀이를 대신했다.
그래. 이해한다. 이해한다고. 박옥이도 바빴다. 생전 해보지 않던 그물 손질에, 고기잡이 일에, 집안 일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내 머리에까지 신경 쓸 새가 어디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운 것이 내가 어느 정도 철만 들었어도 내 머리통,내가 알아서 했을 텐데 당시 나는 너무 어렸다, 겨우 아홉 살, 열살이었다. 아홉 살, 열 살짜리가 무엇을 알았을까.
그러나.
아무리 바빴더라도 늘 아버지랑 싸울 때마다 박옥이가 악을 써면서 하는 말마따나 아무리 짬이 없었더라도 파리가 윙윙 달려들고 진물이 흘러 눈을 뜨지 못하는 어린 가시나의 머리통을 어찌 그냥 그렇게 무심하게 내버려 둘 생각을 했을까.
일 주일에 단 한 번이라도 손목을 끌고 강으로 내려가서 머리를 좀 감겨주지. 내가 자기의 친딸이라면 절대 그런 식으로 나를 방치해두지 않을 것이다.
당시의 박옥이가 처한 환경에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애써 이해를 하긴 하지만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박옥이가 세상을 떠나고 없는 지금도 그렇다. 박옥이를 이해하려 애를 쓰다가도 내가 자신의 친딸이라면 그랬을까, 하는 섭섭한 마음이 들때, 그 서늘하게 추운 마음이 들때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움추린다.
앞에서 내가 박옥이를 한번도 미워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그래, 그말은 진심이다. 또한 나는 하늘에 맹세코 박옥이를 단 한 번도 '계모'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밉고 싫은 전실자식이었지만 어쩌면 어린 내게 그런 심한 구박을 했을까,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나고 순간적으로 치를 떤 적은 있어도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박옥이에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근본적으로 늘 있었다. 그녀를 항상 불쌍하게 여겼고 측은하게 여겼고 안타깝게 여겼다. 우리 아버지같은 사람 잘못만나 평생 고생만 하는 그녀가 가엾고 안되어서 늘 잘 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좋은 거나 값진 게 있으면 늘 박옥이 생각이 먼저 났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의붓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박옥이가 혼자 살 때 나는 몇 번이나 박옥이에게 말했다.
"엄마, 내 사는 모습 안 궁금해? 놀러와. 뱅기표 부쳐 줄테니까 놀러오라고......."
그러나 박옥이는 빈 말로라도 미국에 나를 보러오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역만리 가서 사는 딸의 모습, '엄마로서' 어찌 궁금하지 않았을까. 내가 자신의 친딸이었더라도 그랬을까.
박옥이는 끝내 내가 사는 미국에 한 번 와보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내 어릴 때의 겨울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그 겨울만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등이 시리다.
우리 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매일 아침 칼바람을 맞으며 학교에 가야 했는데 그중 내 차림새가 제일 볼품없었다. 헐벗었다는 말이 딱 맞을 정도였으니까. 내겐 변변한 외투조차도, 언감생심, 외투라니! 하다못해 내복 한 벌도, 스웨터 한 장도 없었는데 외투는 꿈도 못꿀 일이었다. 물론 장갑도 양말도 없었다. 운동화도 없었다. 내가 일년 내내 주구장창 신고 다닌 건 검정 고무신이었다. 추운 겨울 내 꽁꽁 언발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던 검정 고무신.
농사라곤 포도와 딸기와 보리가 전부인 농촌, 그리고 모두가 빈곤하고 가난하던 60년대 초반이었다. 그러나 그중 나는 유독히도 초라하고 비루했다.
도대체 우리 아버지와 박옥이는 나의 보호자가 맞긴 맞았던 것일까. 기본적인 衣와 食도 챙겨주지 않았던 그들. 그들에게 최소한 양심이라는 게 있었던 것일까. 그들에게도 눈이 있었을텐데 못 먹어서, 추위에 떨어서, 병든 개 같았던 내 모습을, 내 초라하고 불쌍한 어린 육신이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내 손은 늘 터서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동상에 걸려 퉁퉁 부어 있었다. 가뭄의 논바닥같이 쩍쩍 벌어져서 속살이 보이는 손등, 농촌의 어지간한 집엔 다 굴러다니는 파란색의 안티푸라민 한 통마저 우리집엔 없었다. 아버지와 새엄마와 동생들과 같이 살고 있으되 나는 철저히 버려진 아이였다. 그 아무도 내 터진 손등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성희를 제외하고는 내겐 친구가 없었지만 성희마저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관계로 걸핏하면 학교를 빠졌기 때문에 나는 늘 혼자였다. 외돌톨이였다.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꽤 멀었다. 작은 도랑을 건너고 들판을 가로질러 난 길을 한참 걸어야 했다. 집에서 학교로 갈 때, 학교에서 집으로 갈 때 그 먼길을 혼자 걸으면서 내가 하는 일은 상상의 나래를 펴는 일이었다.당시 엄희자니 민제니니 하는 만화가들이 그린 순정만화가 아이들에게 매우 인기였는데 나는 상상속에서 그들 만화가가 그린 만화속의 주인공이 되었다. 공주도 되었다가 왕후도 되었다가 부잣집의 외동딸이 되었다가. 그런 상상들을 할 때 내 얼굴에서는 행복한 미소가 흐를 수 있었다.
나는 만화를 잘 그렸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당시 그린 만화는 꽤 그럴 듯 했던 것 같다.
점심시간, 도시락을 싸가지 못했던 내가 하는 일은 만화를 그리는 일이었다. 그러면 슬슬 나를 피하던 아이들이 내 주위에 모여들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만화를 그려주고 돈을 받았다. 아이들에게 만화를 그려주고 받는 몇푼의 돈 아니면 아버지 주머니에서 훔쳐낸 돈이 당시의 내 유일한 용돈이었다. 도둑질을 하다 걸리는 날은 아버지에게 매타작을 당하는 날이었지만 어린 나는 먹고 싶은 것도 많았고 가지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게 단 한 푼의 용돈도 주지 않았다.
가끔 달러 스토어에 갈 때마다 내 눈시울은 뜨뜻해진다.
지천으로 깔린 색깔 곱고 종류와 기능도 다양한 1불짜리 학용품들 앞에서 나는 할말을 잊는다. 왜 그때 내겐 이런 학용품이 없었을까. 10불, 20불만 있으면 한 보따리를 살 수 있는 학용품들. 한보따리 사 가지고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크레용을 마음껏 써서 그림도 그리고 싶고 희고 질 좋은 공책에 일기도 쓰고 싶고 넣으면 스스릇 깎여지는 연필깍이도 신나게 사용해 보고 싶다.
아무리 극빈자라 해도 자식들에게 조금치의 애정만 있었더라면 얼마든지 사 줄 수 있을 학용품들. 술 자리 두어번만 가지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모든 학용품을 다 사 줄 수 있었을텐데 술 먹을 돈은 있어도 내 학용품 한 가지 사줄 돈은 없었던 우리 아버지란 사람,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된다.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찌할 수가 없다.
부모로서 그들이 내게 해 준 일이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아무리 생각해봐도 없는 것 같다. 끼니 때마다 꽁보리 밥에 김치 한 보시기를 먹여준 것 밖에.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길 건너편에는 그 고장에서 유일한 고아원이 있었다. 언젠가 학교에서 단체로 고아원에 견학을 간 일이 있었다. 반 아이들과 줄을 지어 고아원 식당과 방들을 둘러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부럽다' 였다. 단 한 달만이라도 좋으니 여기와서 살아봤으면!
삼시 세끼 갓 지은 밥과 더운 국이 제공된다는 식당과 작으나마 정갈하고 깨끗한 십여개의 방은 내게 먼 환상의 세계처럼 아름답게 다가왔다.
구석에 반듯반듯하게 접혀 놓여져 있는 이불과 베개, 책과 공책이 주르르 꽂혀 있는 앉은뱅이 책상, 작은 스탠드 전등불, 벽에 걸려 있는 알록달록한 일과표, 그리고 온갖 장르의 책들이 가득꽂힌 도서관.......
고아원 아이들의 생활은 안정되고 편안해 보였다. 부모라는 인간들이 있으되 눈꼽만큼의 관심과 보살핌도 받지 못한채 방치되다시피 자라는 나와는 달리 고아원 아이들은 적어도 생활에 필요한 의식주는 충분히 제공받고 있는 것 같았던 것이다.
나는 속으로 절규했다.
차라리 나를 고아원에나 보내주지!
-이계숙의 더 많은 작품은 http://kyesook.com 로 오셔서 읽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