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비오는 날을 좋아 하는 것 같다.

 

산천 초목이 씻기는 걸 보면 마음도 깨끗이 씻겨내리는 것 같아서, 아니면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안정되니까 등등의 이유로.

어릴 때 나는 비오는 날을 제일 싫어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비오는 날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집에서 학교까지 십리 남짓한 그 길, 비 오는 날 나는 단 한 번도 우산을 받쳐들고 그 길을 걸어 본 적이 없다. 학교가기 전부터 비가 내렸다해도 집에는 변변한 우산이 없었고, 수업 중에 비가 내렸다해도 나를 위해 우산을 들고 마중을 나와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좀 낫다. 빗줄기를 맞으며 흙탕물을 첨벙대는 재미라도 있었으니. 그러나 겨울에 오는 차가운 비는 나의 뼛속까지 시리게 했다. 얼음줄기같은 비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으로 맞으며 집으로 가면서 나는 속으로 간절하게 기원했다. 집에 갈아 입을 옷 한 벌이 있기를. 비에 젖어 축축 몸에 늘러붙는 옷을 벗어던지고 보송보송하게 마른 옷으로 갈아 입을 수 있기를. 그리고 따뜻한 국에 밥을 먹을 수 있기를. 그러나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먼 길을 걸어 집에 도착했을 때 나를 기다리는 건 산더미같은 설거지, 그리고 밥 한톨 남지 않은 텅 빈 솥이었다. 아버지와 박옥이는그때의 내 이 간절한 바램을 알고 있었을까.

나는 지금도 비오는 날이면 어릴 때 기억이 생각나서 등허리가 시리다. 어릴때의 기억이 다 아프고 춥고 힘든 것 뿐이지만 특히 비오는 날의 기억은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따뜻한 벽난로 앞에 앉아 있어도 마음은 그저 춥기만 하다. 그리고 비 내리는 창 저 너머로 헐벗고 굶주린 어린 계집아이의 모습을 본다. 자라면서 사랑과 보살핌이라곤 전혀 받아 본 기억이 없는 불쌍하고 불쌍한 어린 계집아이.

내가 할머니 집에서 아버지 집으로 건너간 이래 박옥이는 내 옷을 단 한 번도 빨아준 적이 없었다. 여덟살의 어린 나이 때부터 나는 내 옷을 내가 직접 빨아 입어야 했다. 박옥이는 걸핏하면 내게 말하곤 했다.

"내가 니 종이냐?"

그녀에게 내가 무엇을 해달라고 했길래 그런 말을 내게 했을까? 발을 씻겨달라고 했을까. 머리를 빗겨달라고 했을까. 설사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해도 들어줄 박옥이가 절대로 아니었다. 그녀에게 그런 작은 부탁이라도 해 본 기억이 전무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주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질시와 미움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큰 집 마루에서 우리 동생들 및 사촌들이랑 아침을 먹을 때였다. 아마 추석날 아침이었을 게다. 김친지 나물인지 반찬이 모자라 박옥이에게 말했다. 그것을 좀 더 갖다달라고.박옥이는 일언지하에 내 말을 거절했다.

"네가 갖다 먹어라. 내가 니 종이냐?"

동생들과 사촌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나는 무참해졌다.우리들은 마루에 앉아 있었고 박옥이는 왔다갔다하며 우리들의 식사시중을 들고 있었으면서도 내 말에 그런 식으로 대꾸했던 것이다. 집에서 같았다면 진짜 제 말마따나 내가 갖다 먹지 그녀에게 그런 부탁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엌쪽으로 그녀가 서 있었기에 부탁을 해본 것이다.

이상하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런 사소한 것들이 자꾸 생각난다. 그리고 강한 의문이 고개를 쳐든다. 그녀는 왜 내게 그랬을까. 부엌으로 두어 발자욱만 움직이면 되는데 왜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을까. 반찬 좀 더 갖다달라는 게 네 종이냐는 말을 들을 만큼 큰 부탁이었을까.왜 그렇게 그녀는 나를 죽도록 미워하고 못견뎌 했을까.

참 안타까운 게 박옥이가 지금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나가는 말처럼이라도 한 번 물어볼텐데.

큰 어머니는 아직 살아 있다. 칠순이 훨씬 넘었는데도 아직 정정하기만 하다.

냉정하고 차가운 성격의 큰 어머니.

할머니 집으로 온식구가 내려 올 무렵 그녀에게는 벌써 올망졸망한 아이가 넷이나 되었다. 그것도 다 딸로만. 나중에 딸 하나를 더 낳은 후 마침내 소원이던 아들을 낳게 된다.

큰 아버지도 우리 아버지처럼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른 지방에 살 때도 거의 무위도식하다시피 하는 것을 아버지가 빵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서 빵장사로 겨우 밥이나 먹었다고 한다. 할머니 집으로 내려와서부터는 그나마 빵 만드는 기술마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우리 아버지가 돈을 벌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반면 큰 아버지는 매우 게으르고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매일 책이나 들여다 보았고 내일 당장 먹을 끼니가 없어도 하루에 낮잠 30분은 죽어도 자야 하는 그런 대책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큰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사랑만은 끔찍한 사람이었다. 아름다울 미자가 들어간 아이들 본명을 두고 모두 하니야, 꿀레야, 두레야,하는 애칭으로 아이들을 불렀다. 그리고 자식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머리에 꿀밤 한 대로 끝내는 사람이었다. 일단 따귀부터 철썩, 때려놓고 보는 우리 아버지와는 틀려도 한참 틀린 사람이었다. 저 두 사람이 한 엄마의 뱃속에서 나온 사람이 많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어쨌든 나는 큰집의 분위기가 좋았다. 사촌들이 나를 반기던 말든 큰 어머니가 저 가시나가 또 왔네, 하는 눈으로 나를 홀겨보던 말든 일요일이면 그 집으로 놀러갔다. 우리집은 매일이다시피 싸움질에, 욕질에, 고함소리에, 악쓰는 소리가 떠나지 않았고 썰렁하고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늘상 감돌고 있는 반면에 큰집은 가난하나마 따뜻한 그 무엇이 있었다. 나는 그 분위기가 부러웠던 것이다.

내가 여기서 왜 큰집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느냐하면 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이왕 다 털어놓기로 작정한 이상 큰 어머니 이야기를 뺄 수 없으니까.

큰 어머니는 처음부터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까지는 나도 이해한다. 삼시 세끼 해먹이고 입혀야 할 자기 자식이 한 광주리나 드글드글 있는데 조카에게까지 신경 쓸 여유가 있었을까. 그러나 조카고 뭐를 떠나서 한 인간으로 나를 볼 때 가엾고 불쌍한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을까. 나는 그게 궁금하다.

늘 거지꼴을 하고 비루먹은 짐승처럼 풀 죽어 눈치를 슬슬 보는, 어딜 갔다놔도 계모밑에서 부모의 보살핌이란 걸 전혀 받지 못하고 자란다는 표가 확연히 드러나는 어린 계집애를 볼 때마다 마음이 짠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냉정한 심성를 가진 사람이라 해도 자식을 키우는 엄마로서 말이다. 그러나 당시 나의 큰 어머니는 그러지 않았다. 자주 놀러온다고 표나게 눈치를 주었고 미워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선명한 장면 하나.

어느 날 저녁, 어찌하여 그집에서 저녁을 얻어먹게 되었다. 나는 부엌으로 난 문쪽으로 엇비슷하게 앉아있었다. 내가 일부러 작심하고 보려고 본 게 아니고 문을 통해 큰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큰 어머니는 부엌 바닥에 상을 차려놓고 밥을 푸기 시작했다. 몇 그릇의 밥이 담긴 상이 방으로 들어왔다. 큰 아버지를 비롯한 사촌들이 그릇 하나씩을 맡아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다 둘러봐도 내 밥은 없었다. 나는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다시 부엌쪽을 기웃거려보았다. 큰 어머니가 다시 밥을 푸고 있었다. 가마솥 밑바닥을 닥닥 긁어 겨우 한그릇이 될까말까하게 푼 밥. 큰 어머니는 거지 동냥 주듯 그 밥 그릇을 내게 던지듯 내밀었다. 그러니까 큰 어머니는 자기들 식구들 밥을 다 푸고 제일 마지막으로 내 밥을 푼 것이다. 그것이 어린 마음에도 너무 서운해서 가슴에 못이 박혔나보았다. 한국 나갔을 때 언젠가 큰 고모한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고모가 말했다.

"너 지난 번 한국에 나왔을 때에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니?"

어느 날 오후 큰집에 놀러갔다. 사촌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데 억지로 참는 듯한 어색한 표정. 그러려니 하고 있는데 제일 막내가 말했다.

"우리 엄마가 아침에 빵 쪄주었다?"

막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옆의 아이가 다그쳤다.

"엄마가 영순이 한테 빵 얘기 하지 말랬쟎아?너 이제 엄마한테 죽었다!"

우리들의 대화를 큰 어머니가 엿들었나보았다. 얼른 부엌으로 들어가서 빵 한 조각을 가져다가 내게 주었다. 막내가 입을 열지 않았으면 끝내 얻어먹지 못했을 빵 한 조각.난 그 빵을 허겁지겁 먹었다. 마침 배가 엄청 고팠으므로.

어릴 때 그렇게 나한테 섭섭하게 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큰 어머니를 좋아하는 이유, 그녀는 살림을 깨끗하게 할 줄 아는 여자였다. 그렇게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물건이 제 자리에 정리정돈이 되어 있었고 부엌 선반은 늘 먼지하나 없이 깨끗했다. 내가 큰 집에 가면 마음이 편안했던 이유가 가족간의 화목한 분위기도 분위기였지만 반듯하고 정갈한 집안 때문이기도 했을 거라는 짐작을 해 본다.

앞에서도 잠깐 비추었지만 나는 살다살다 박옥이같이 정리정돈을 할 줄 모르고 더러운 여자는 여지껏 보지를 못했다. 더럽다,더럽다, 어찌 그리 더러울 수 있을까.

집을 떠나 있다가 집에 다니러 갔을 때, 결혼 후 친정에 갔을때, 나는 집안을 활라당 뒤집어서 청소하고 밀린 빨래를 하다 오는 게 일이었다. 빨래와 청소를 하면서도 어떤 땐 부화가 치밀었다. 부모복 없는 내가 언감생심 친정에서의 안식을 바랬다니, 아아! 더러운 이놈의 팔자!

입고 있던 바지단이 튿어졌다. 바지단 꼬매게 받짓고리를 좀 달라고 방에 있는 박옥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한참 지나도 소식이 없다. 작년에 바늘과 실, 골무와 가위까지 세트로 내가 마련해주고 갔었던 반짓고리, 그게 온 데 간 데 없는 것이다. 온집안을 뒤집어 엎은 끝에 장롱 안 깊숙이에서 입던 옷이랑 한데 엉켜있는 걸 찾을 수 있었다. 바늘은 다 녹 슬어있고 실패들은 서로 엉켜 끝을 찾을 수가 없다.

나중에 살림이 좀 피자 그래도 보는 눈은 있고 욕심은 있어서 박옥이는 이것저것 사들였는데 그 좋은 살림살이들이 1년을 못갔다. 제대로 간수를 못하기 때문이었다. 옷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큰 맘 먹고 사다준 옷들, 한 2년 가면 잘 갈까. 입고는 빨지를 않고 아무데나 처박아두니 옷에서 곰팡이가 피고 좀이 슬어 못입게 되기 일쑤였으니.

첨에는 나도 이해하려 했다. 그래, 바쁘니까 그렇겠지. 시간이 남으면 그렇지 않을거야...

그러나 나중에 그물질과 장사일 그만두고 집에서 살림만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옷장 안은 늘 뒤죽박죽 입던 옷, 안 입던 옷 섞여서 쓰레기더미처럼 되어 있었고 벽에 걸린 수건에서는 늘 축축한 쉰내가 났다. 언제 마지막으로 빨았는지 걸레는 늘 동태처럼 뻣뻣하게 말라 있다.

부엌은 더 가관이다. 냄비와 솥이 열 개면 열 개, 다 나와 있다. 그 열 개의 솥과 냄비에는 먹다남은 찌개며 국이 늘 남아있고 눌어붙어 있다. 그리고 어떤 건 쉬어서 썩은 냄새를 풍기는 것도 있다. 개수대에는 물때와 더덕때가 앉아 미끌미끌하고 걸레인지 행주인지 적어도 수천마리, 아니 수억마리의 세균들이 우글우글할 것 같은 이상한 헝겊조각은 본래는 흰색이었을 것 같은데 회색 및 주황색(고춧가루 양념이 묻어)으로 변해 있다.

냉동실은 열기가 무서울 정도다. 이름도 정체도 알 수 없는 온갖 것들이 검은 비닐종이에 쌓여 터질 듯이 들어가 있는데 돌처럼 꽝꽝 얼어있던 그것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날이면 누구의 발등이 깨지기 일쑤다.

박옥이와 떨어져 지내면서 나는 편지를 자주 보냈다. 나중에 집에 가 보면 내가 보낸 그 편지는 부엌 찬장에서, 화장대 서랍에서, 문갑 서랍에서, 반짓고리에서, 그리고 어떤 땐 화장실 캐비넷에서 각각 혀를 빼문 상태로 발견된다. 왜 그런 것들을 한 곳에 차곡차곡 모아두지 못하는 것일까. 박옥이는 정리정돈이란 말 자체를 모르는 여자였다.

우리집에 한 번이라도 들러본 사람들은 어렴풋이 눈치를 챘겠지만 고모들을 비롯한 그 누구도 박옥이가 그 정도로 더럽고 칠칠맞은 여자인줄은 모른다. 알았더라도 그들은 일체 여기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 왜냐면 전실자식을 둘이나 키우면서 갖은 고생을 다하며 사는 천사인데 그 정도 쯤은 아무런 흉이되지 않았으니까. 그랬다. 그들에게 박옥이는 마음이 비단결 같은 천사였다.

박옥이가 천사임을 느꼈다는 고종사촌들의 이야기 하나를 들어 보자.

밤중에, 그것도 밤 12시가 넘은 한밤중에 고모랑 고모부가 싸움이 났더란다. 겁에 질린 사촌들이 양쪽 집, 즉 큰집과 우리집에 전화를 했다(나중에 전화가 가설되고 나서의 일이다.)

"여기 큰 쌈 났어요. 빨리들 와서 우리 아부지 옴마 싸움 좀 말려주세요! 빨리요!"

그러나 전화를 받은 큰 어머니는 "너희 아부지 옴마 싸우는데 내가 가서 어쩌라고.." 하고는 냉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단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박옥이는 거의 30분이나 걸리는 밤길을 걸어 고모네에 왔더란다. 박옥이가 나타남으로 고모 부부의 싸움이 중단되었는지 사촌들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종사촌들이 감격한 건 그 한밤중에, 아무 건물이나 집도 없는 들판길을 걸어서 박옥이가 나타났다는 거에 있다.

그랬다. 박옥이는 누구에게나 천사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바보스러울 만큼 착하게 했으니까. 그러나 내게는 악마였다. 왜 그랬을까. 왜 나한테만 그렇게 못되고 악하게 굴었을까. 어느 책에서 읽은대로 우리 둘의 궁합이 맞지않아서 그랬을까. 부부는 물론 자식과 부모도 동성간의 친구도 궁합이 맞아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박옥이는 그리고 나와 박옥이는 지독히도 안맞는 상극의 궁합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를 미워해도 미워해도 어쩌면 그렇게 미워할 수 있었는지. 나를 미워한 이유가 단지 말을, 내가 자신의 말을 안들어서라는 이유인데 설거지를 제때 안했고 심부름을 제때 안했고 학교에서 늦게 왔다는 이유, 단지 그런 사소한 이유로 한 여자아이를 그렇게 지독하게 미워할 수 있었을까. 4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을 만큼.

다른 사람에겐 더할 수 없이 너그럽고 순했던 박옥이, 그러나 내겐 악마같았던 어느 날의 박옥이의 얼굴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아침시간이었다. 그날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아버지는 아침부터 없었다. 모두 밥상에 둘러앉았는데 내 밥그릇 옆에 따로 작은 김치 보시기가 있는 거였다. 나는 무심코 그 김치랑 해서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그리고 그날 가뭄에 콩나듯 싸가는 점심 도시락을 풀었는데 반찬으로 김치가 또 담겨있었다. 나는 또 그 김치를 다 먹었다.

그날 저녁 박옥이가 내게 말했다. 득의만면한 웃음을 얼굴 가득 띄우면서.

"야! 오늘 네가 먹은 그 김치가 무슨 김친줄 아니?너 일호 아버지 알지? 그 사람이 어제저녁 막걸리 마시면서 침을 있는대로 흘리면서 먹다 남은 김치야...."

술주정뱅이 손님의 안주로 내놓았던 김치를 일부러 내게 먹게 하면서 박옥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술주정뱅이가 침을 잔뜩 흘리며 먹다남은 김치를 내게 먹일 생각에 즐거워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을까.

또 다른 기억 하나. 이 기억을 떠올리면 나는 지금도 눈물이 펑펑난다. 며칠 전에도 이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마구 울었었다.그날은 저녁이었고 아버지가 없었다. 아버지가 있건 말건 박옥이는 나를 구박했지만 아버지가 없는 날은 더욱 심했던 것 같다. 저녁으로 라면을 끊였다. 지금은 누구나가 흔하게 먹는 라면이지만 그때는 라면이 어쩌다 먹는 별식이었다. 동생들의 그릇에는 넉넉하게 담긴 라면이 내 그릇엔 흥건한 국물 밖에 없는 것이다.박옥이가 그 어떠한 구박을 해도 말 한마디 못하고 다 당했던 나였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도 그날 저녁은 박옥이가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을까.나는 저녁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건넛방으로 건너왔다. 그러나 나는 곧 나를 따라 온 박옥이에게의해 밖으로 쫒겨나고 말았다. 나를 강제로 질질 끌어다가 밖에다 내팽개친 것이다. 그 어느 날 밤 아버지가 저에게 했던 것 처럼.

얌전히 앉아 있다 설거지를 마치고 건너가던지 말던지 할 일이지 그냥 훌쩍 가버리면 설거지는 누가 하느냐는 이유였다.

그날밤 나는 울면서 집을 나왔다. 울면서 읍으로 나오는 캄캄한 길을 걸었다.그리고 기차건널목(송은동이 치맛자락을 흔날리며 떠나가던)이 있는 언덕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그때 내가 한 생각, 그냥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아아, 그냥 이대로 잠들 듯이 죽어버렸으면. 그러나 내가 죽어도 내 죽음을 슬퍼해 줄 사람조차 없었다. 박옥이와 아버지는 입만 열면 '제발 나가서 뒈져버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그들은 내가 죽으면 좋아서 춤을 출 사람이었지 눈물 한 방울 흘려줄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신데렐라나 콩쥐팥쥐,장화홍련등 동화에는 계모 한 사람한테만 구박을 당하는데 나는 아버지와 계모 두 사람으로부터 구박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린 마음에도 슬프고 서럽고 분해서 나는 마구 울었다. 캄캄한 한밤중, 저녁을 굶은 어린 계집아이가 계모한테 구박을 받고 오갈 데 없이 그렇게 앉아 처절하게 울고 있을 때, 그때 신은 무얼하고 있었을까.

박옥이와 아버지, 둘은 걸핏하면 피터지게 싸웠다. 대부분의 이유가 두 사람의 의견차이였고 또 나 때문이었다. 나 때문에 싸울 때 박옥이는 아버지한테 악을 썼다.

"왜 저 가시나 편만 드는데에?!"

하늘에 맹세코 우리 아버지는 내 편을 들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가 나를 조금이라도 사랑했다면, 나를 단 한순간이라도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나를 무지막지하게(나를 어떻게 때렸는지는 곧 자세하게 쓰려고 한다) 때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어떻게 내편을 들겠는가. 언젠가 한번은 아버지도 박옥이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 미친년아! 네 년 말대로 내가 영순이 편을 든다면 어떻게 영순이를 팰 수 있겠냐?!"

그러나 박옥이는 아버지가 늘 내 편을 든다고 그렇게 악을악을 썼다. 박옥이가 그렇게 생각한 것에는 이유가 있긴 하다. 박옥이는 단 한 순간도 입을 가만두지 못하는 여자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흐르는 물줄기처럼 늘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왜 방을 안치웠니?왜 설거지를 제때 하지 않았니?왜 여섯뿌리 뽑아 오라는 파를 다섯뿌리밖에 뽑아오지 않았니?아버지 운동화를 왜 빨지 않았니?장독 뚜겅을 열어놓으라는데 왜 하지 않았니? 물을 길어다 물독을 가득 채워놓으랬는데 왜 반밖에 차지 않았니?왜 학교에서 늦게 왔니?......

아아, 단 하루도, 단 한 시간도 그치지 않던 그 지긋지긋한 잔소리와 고함소리.

잔소리도 어쩌다 해야 효과가 있는 법이다. 단 하루도 안빼고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잔소리. 하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 어느 집 개가 짓나 여겨지던 박옥이의 잔소리에 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다. 그러면 박옥이는 곧 악을 썼다.

저 개같은 놈의 가시나가 사람 말을 말 같지도 않게 여기네. 아버지(박옥이는 아버지를 꼭 그렇게 불렀다. 아버지, 아니면 영순이 아버지라고. 스무살 이상 나이가 차이나는 남편을 부를 마땅한 호칭이 없었겠지)나를 무시하니 저 개같은 놈의 가시나도 나를 무시하네, 어쩌네.......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악쓰는 소리, 마침내 아버지는 고함을 버럭 지르고 만다.

"야이 시팔년아! 아가리 좀 닥쳐라!"

그러면 그게 박옥이에겐 아버지가 내 편을 들어서 자신에게 '아가리를 닥치라'고 한 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한테 욕을 먹은 박옥이는 미친년처럼 길길이 뛴다. 그러다가 끝내는 아버지한테 주먹질과 발길질을 당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원인은 다 나한테 있다. 내가 자신의 말을 안들었고 그리고 말을 왜 안듣냐고 잔소리한데서 기인되었으니까. 그러니 내가 어찌 밉지 않으리오. 아마 할 수만 있다면 나를 갈갈이 찢어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그물질을 나간 아버지와 박옥이 대신에 내가 저녁을 했다. 감자를 썰어넣은 된장국이 반찬이었다. 껍질 벗기가 귀찮았던 나는 그냥 감자를 씻기만 해서 썰어넣었다.

아니나 다를까, 박옥이가 밥상에 앉자마자 잔소리를 시작했다.

"감자껍질을 왜 벗기지 않고 된장국에 넣었니?"

감자껍질을 벗기지 않고 끊인 된장국이 그렇게 큰일이었을까.그렇다치더라도 그냥 한 마디나 하고 말지, 식구들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그놈의 감자껍질 벗기지 않은 걸로 박옥이는 잔소리를 해대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숟가락을 소리나게 놓으면서 소리를 꽥 질렀다.

"제발 좀 시끄럽다!감자껍질 먹는다고 죽나?!"

그날 저녁도 난리가 났다. 아버지가 내 편을 들었다는 이유였다.

박옥이의 잔소리가 얼마나 지긋지긋했냐면은 언젠가 박옥이가 아버지한테 머리통이 깨지게 맞고는 보따리 싸서 한동안 집을 나가버린 일이 있었다.

바로 밑에 동생이 말했다.

"엄마가 없으니 집이 이렇게 조용하네........"

박옥이가 낳은 동생도 말했다.

"제발 엄마 안돌아 왔으면 좋겠다......."

겨우 예닐곱살된 남자아이들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걔네들도 박옥이의 잔소리와 고함소리가 얼마나 싫었으면 그랬을까.

나중에 나들 성인이 되고나서 박옥이가 낳은 동생이 간곡하게 제 엄마에게 말하는 걸 본 일이 있다.

"엄마! 아버지가 화나서 있을 때는 제발 좀 가만 있어요!뭐라고 대들고 악다구니 하지 말고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구요...."

아버지는 별로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불평도 없는 사람이었다. 생전 반찬 투정 하는 일 없이 주면 주는 대로 먹는 사람이었다. 생전 가야 부엌 살림에 관여 한 번 안하는 사람이었다.그리고 박옥이가 무슨 짓을 하던, 이를테면 머리를 지지고 볶던 자르던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박옥이에게 철저하게 무관심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박옥이는 화장품을 사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테그를 떼버리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상표에 찍힌 가격표를 볼까봐 그러는 것이었다. 아아, 박옥이는 그렇게 어리석었다. 아버지와 그렇게 살고도 아버지란 사람을 몰랐을까. 아버지가 어딜 봐서 마누라 화장품 가격이나 확인하는 사람이었을까. 그렇게 아버지를 몰랐으니 그 결혼생활이 불행했을 수밖에.

행복한 결혼 생활의 첫째는 상대방을 일단 잘 파악하는 것 아닐까. 상대방이 뭘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모든 남자가 다 그랬겠지만 아버지는 여자의 잔소리를 못견뎌하는 사람이었다. 우리집에는 라디오가 늘 켜져 있었다. 라디오 연속극에서 여자가 악을 쓰거나 잔소리하는 게 나오면 아버지는 호령을 내렸다. 듣기 싫으니 얼른 꺼버리라고.

아버지는 성질이 불같은 사람인 반면 성질을 낼 때 그때 뿐인 사람이었다.

화가나서 펄펄 뛰는 사람에게 단 한 마디도 지지않고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던 박옥이. 아무리 박옥이 편을 들어주려고 애를 써봐도 안되겠다. 박옥이는 정말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박옥이가 세상을 떠나고 박옥이의 의붓동생들한테 생전에 네 누나가 나한테 이렇게 했답니다, 하고 단편적인 이야기를 비출 기회가(몇번 밝히지만 박옥이의 실체에 대해 나는 입을 다물었던 사람이다. 이 글을 쓰는 것도 박옥이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있었다.

그들은 경악하면서도 절대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들이었다.

"에이, 설마, 그 사람은 천사로 공인된 사람아니야? 그 천사가 아무렴 너한테 그렇게 심하게 했을려구........"

내 말을 믿지못하는 그들이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그들은 박옥이의 실체를 전혀 모르니까 말이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내게 쌍심지를 켠 눈으로 달려들던 박옥이, 온갖 악다구니란 악다구를 다 퍼부어대다 아버지의 주먹이 날라가야만 다물어지던 박옥이의 입, 그러나 고모들과 사람들 앞에서는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순한 표정을 짓던 박옥이, 그녀는 천사와 악마가 공존해 있던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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