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도 제대로 못싸가던 살림살이가, 삼시 세끼 깡보리 밥에 김치쪽만 먹어야 했던 구차하고 궁색한 살림살이가 내가 집을 떠난후 부터는 점차 나아졌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내가 재수없는 아이였거나 그집과 내가 궁합이 잘 맞지 않았던 거다.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하던 살림살이가 내가 없어지므로 불 일 듯 일어났으니.

아니다. 아버지의 강인한 생활력 덕분이다. 아버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그리고 박옥이도 열심히 아버지를 도왔다. 박옥이의 한 가지 칭찬 할 점이 있다면 그렇게 싸워대면서도 일 하나는 열심히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에 맞아 깨진 머리에 빨간 약(머큐롬)을 바르고도 팅팅 터진 입술로도 그물질을 하러 아버지를 따라나섰다는 것이다.

 

당시 아버지는 '줄낚시'란 것을 놓아서 민물장어나 자라를 잡았는데 이 민물장어와 자라가 몸보신용으로 아주 비싼 값에 팔렸다. 어떤 때 운 좋으면 아이 팔뚝만한 장어와 솥두껑만한 자라를 수십마리 잡아 올렸다.

낮에 박옥이는 이것들을 다라이에 이고 읍내로 들어가 팔았다. 돈깨나 있는 동네유지라는 사람들이 박옥이가 가져오는 장어와 자라를 사려고 돈다발을 들고 기다렸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이 줄낚시라는 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고 (돈이 된다는 소문이 돌자 나중엔 너도나도 나서서 별 재미를 볼 수 없었지만)아버지는 강에 지천으로 깔린 장어와 자라들을 독점할 수 있었다.그래서 아버지는 무한정으로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집에 다니러 갈 때마다 재산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내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할머니가 물려준 삼단 서랍장이 가구의 전부이던 방안에 문 두짝자리 장롱이(당시엔 단스라 했다)들어섰고 집안에 전기가 설치되었다. 하루는 집에 갔더니 집채만한 냉장고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 마리이던 염소가 두 마리로 불어있었고 이듬해엔 소도 있었다. 그리고 그 동네에서 두 번짼가 세 번째로 전화도 설치되었다. 바느질 하는 걸 좋아하는 박옥이는 빨간 자개가 박힌 재봉틀도 들여놓았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아버지와 박옥이, 둘 사이의 불신과 불화는 점점 깊어졌다. 아버지의 바람때문이었다. 살림이 점차 나아지자 아버지가 슬슬 바깥으로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박옥이는 내가 보아도 여자로서 그리고 아내로서 매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사근사근 한 맛도 없고 고분고분한 맛도 없고 애교도 부릴 줄 모르고. 그녀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거라곤 하루종일 잔소리하고 고함지르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화가 나서 한 마디하면 열 마디 스무마디 맞받아쳐 아버지를 더욱 열받고 화나게 하는 일엔 선수였을 뿐 남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아내로서 남편에게 하는 일이 뭔지 전혀 모르는 여자였다..

그런데 만약, 박옥이가 예쁘고 사근사근하고 애교도 많은, 여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다 갖춘 여자였다면, 그랬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아버지는 일평생 박옥이만 바라보고 살았을까. 아니다. 아버지는 원래 바람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바람기가 많았으니까 스무살이나 어린 박옥이를 꼬드겨내었지. 아무리 박옥이가 자기에게 죽기살기로 빠져있었다 해도 올바른 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박옥이와 관계를 맺으면 안되는 거 아닌가. 더구나 박옥이랑 바람이 날 당시엔 송은동이랑 어엿한 사실혼 관계에 있었으면서.

남자의 바람에는 두가지 유형이 있다고 생각한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바람기를 가진 사람, 이를테면 완벽한 미모와 나무랄 데 없는 살림솜씨를 가진 부인을 두고도 끊임없이 밖으로 눈을 돌려대는 남자, 한 여자 가지고는 도저히 만족을 못하고 발정난 개처럼 여자만 보면 침을 흘려대는 족속의 남자. 그리고 별로 끼는 없으나 어쩔수 없는 환경에 노출되다보니 자의 반 타의반에 의해서 딴 생각을 하게 되는 남자, 이렇게 두 가지 유형.

지금은 이 세상에 없지만 내가 아는 이웃 남자 중 첫 번째 유형의 남자가 있었다. 미스 코리아 뺨치는 외모의, 그리고 남편을 왕 모시듯 극진히 모시는 부인을 내버려두고 온동네의 싱글 여성이란 여성과는 다 관계를 가진 남자.

나는 그 남자를 볼 때마다 저렇게 헌신적이고 고운 부인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는 여성편력을 만들어내는 바람의 근원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골똘하게 생각하곤 했다.

그 남자는 사십을 몇 살 앞둔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몇 년후 그 부인을 우연히 길에서 만났는데 빛나는 부인의 미모는 여전했다. 남편을 잃은 처연함까지 더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녀를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며 여전히 고우시네요, 했더니 그녀가 쓸쓸하게 말했다.

고우면 뭘해요. 가장 나를 사랑해 주어야 할 사람한테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살았는데.....

내가 알건데 그녀는 남편의 끊임없는 바람 때문에 고통을 받긴 했지만 한 번도 자기가 나서서 바람녀를 응징한다던가 남편을 괴롭힌다던가 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저 묵묵히 아이들을 키우면서 남편이 돌아오길 바랐을 뿐.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끝내 그녀에게 돌아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남자는 세상을 떠나며 부인의 손을 잡아주었을까.혼자 외롭게 내버려두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을까.

두 번째 바람의 경우도 본 적이 있다.

안맞는다 안맞는다 어쩌면 저리 안맞을까 싶은 부부가 있었다. 여자는 키가 1미터 70센티가 넘는 한 덩치 하는 외모인데 비해 남자는 여자보다 키가 한 뼘이나 작은 부부였다. 여자는 마치 남자처럼 우락부락한 외모를 가졌고 남자는 곱상하고 여성스러운 얼굴과 몸집을 가진, 외모부터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부였다.

남자와 아내는 기름과 물 같이 맞지 않은 성격이었다. 그래서 끊임없는 불화로 결혼이후부터 둘은 불행했다고 한다.

남자는 그래도 아이들을 봐서 이 불행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려고 많이 노력한 것 같다. 골프에 미쳐보고 종교에 빠져보고 별 짓을 다하는 것 같았다. 그랬는데 어느 날 남자가 바람이 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한국에서 갓 온 기러기 엄마와.

이처럼 타고난 바람기가 별로 없지만 환경으로 인해 다른 여자에게서 평안과 안식을 찾다보니 바람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이혼을 하자니 이것저것 걸리적 거리는 것도 많고 그렇다고 나 죽었소하고 같이 맞추어 살아보려니 계속 불행하고 어긋나기만 하는 관계에 지쳐갈 무렵, 우연히 만난 이성에게 자기도 모르게 확 마음이 쏠리는 그런 케이스, 그런 바람.

내가 보건데 우리 아버지는 불행하게도 둘 다였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바람기가 다분했으며 박옥이의 그 악바리같고 거센 성격을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다보니 자연스레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게 된 것 같다. 어찌보면 아버지의 바람은, 그것은 장마철에 비가 온다는 것처럼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 어떤 남자라도 아니, 나 같아도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고 말았을 테니까.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는 참 불쌍하고 가엾은 사람이었다 싶다. 마누라라고, 자식이라고 있는 곳이었으니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죽지못해 돌아가는 곳이 집이었지 결코 들어가고 싶어서 가는 곳이 아니었던 가정을 둔 불행한 가장이 아버지였으니.

아버지에게 집이란 평안과 휴식을 위한 안식처가 아니었다. 고장난 축음기처럼 단 한시도 쉬지 않는 박옥이의 고함소리 잔소리 넋두리가 가득 차 있는 곳, 지옥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박옥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박옥이처럼 사납고 거세 빠진여자에게서가 아닌 편안하고 밝은 웃음을 주는 다른 여자에게서 집에서 얻지 못하는 편안함을 얻으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몇 번 얘기했지만 나는 집에 들어가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박옥이가 늘 나를 잡아먹을 듯이 닥달해댄 이유 중의 하나도 빨리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학교 파하고 빨리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토,일요일에 큰 집에 놀러가서 해가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 집이 참 싫었다.

큰어머니를 비롯한 큰집 식구들이 늘 나를 박대해도 사흘들이로 그 집에 간 것은 그집은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좋아서였다.

뭐랄까. 큰집은 아, 여기가 가정이란 것이구나, 여기가 가족이 모여 사는 곳이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집은 썰렁하고 우울하고 음습하고 어두운 기운이 항상 가득차 있었다. 젖은 옷을 입고 있는 듯한 축축하고 기분 나쁜 그 기운은 아버지와 박옥이가 싸우고 있을 때나 간만에 사이좋게 웃고 있을 때나 늘 집안에 머물고 있었다. 앞편에 쓴대로 귀신들의 나쁜 기운이 우리 집안을 누르고 있어선지 모르겠다.

하여튼 그 때문인지 몰라도 아버지 역시 나 처럼 틈만 나면 바깥으로 돌았다. 당시 박옥이의 일기장을 보면 '오늘도 아빠는 지금까지 안들어 온다' '지금 한 시가 지났는데 아빠는 들어오는 기척이 없다' '아마 아빠는 그 여자의 집에 있을 것이다. 가서 한바탕 하고 싶어도 뒷일을 감당 못해서 할 수가 없다. 너무너무 속상하다'는 등의 내용 뿐이다.

처음부터 아버지는 박옥이를 안중에 없는 사람으로 치부했다. 박옥이의 표현처럼 '집에 부리는 종' 처럼 아예 무시하고 아내 대접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였으니 바람피우는데 거칠 게 없었다. 주머니에 두둑한 돈도 있겠다. 뭐가 아쉬웠으리.

더구나 아버지는 인물이 좋은 사람아닌가. 우리식구들에게는 발휘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코메디언 저리가게 유머감각도 대단한 사람아닌가. 그리고 말빨도 굉장히 센 사람이었다. 어쩌다 아버지 친구들이랑 얘기하는 걸 가끔 들을 때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우리가 그 현장에 직접 있는 것 처럼 상황묘사를 기가 막히게 재현하는 사람이었다. 그 누구도 아버지의 이야기에 빨려들지 않고는 못배길 만큼.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매력적인 요소는 다 갖추고 있는 사람이 우리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굳이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여자들이줄줄 따라 오게 돼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박옥이였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데 가만 있을 여펜네가 어디 있을까마는 박옥이의 강짜와 질투는 도가 넘은 적이 많았다.

박옥이는 아버지를 별로 사랑한 것 같지 않다. 첨에 눈이 맞았을 때 얼마동안은 사랑했는지는 몰라도 같이 살면서 눈꼽만치의 사랑이나 애정을 가진 것 같지 않아보였다. 사랑했다면,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사랑했다면 아버지가 그렇게 치를 떨게 싫어하는 잔소리를 단 한 순간도 쉴 틈 없이 해서 아버지를 화나게 하지 않았으리. 사랑이란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은 안하는 것, 상대방을 기쁘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것이니까.

참 이해할 수가 없는 게 별로 사랑하지도 않은 남편이 바람이 났는데 왜 박옥이는 그렇게 강짜를 부려댔을까. 나 먹기는 싫고 남 주기는 아까운 게, 그게 여자의 심리라서 그랬을까.

큰 어머니가 말했다.

"하이고, 참말로 인간이 지 잘못한 것은 모른다더니 제 년도 조강지처 자리 빼앗아차고 들어온 주제에 지금 누가 누구를 질투하고 미워 해? "

아니지. 그건 아니지. 얌전하게 가만히 엎드려 있는 송은동을 밀어내고 박옥이가 그 자리를, 그 잘난 조강지처라는 자리를 차지한건 절대 아니지.

그러나 송은동이 어떤 인간인가를 잘 모르는 큰 어머니는 아버지의 바람에 대한 박옥이의 강짜와 질투가 가증스러운가 보았다.

"나 같으면 그냥 입 딱 닥치고 구구로 가만 있겠다. 지가 질투할 만한 주제가 되냐고?"

비쭉거리는 큰 어머니를 향해 지금만 같아도 한 마디 쏘아 주겠다.

"큰 어머니는 같은 여자 입장에서 박옥이가 불쌍하단 생각도 안드요?그래서 지금 박옥이가 당해도 싸다는 말인가요?"

어른한테 감히 눈도 한번 제대로 못맞추는 소심했던 나, 나는 그저 묵묵히 큰 어머니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나는 죽어도 박옥이 편이었다. 나랑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여자였지만, 나를 바퀴벌레를 대하는 것 보다 더 끔찍히 싫어하던 여자였지만 나는 항상 박옥이 편이었다. 나는 박옥이가 힘들어 하는 걸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으랴. 마음은 뻔했지만 박옥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더구나 나는 공짜로 공부를 하는 처지였다. 신흥종교 단체에서 짜준 시간표대로 움직여야 했다. 개인적인 시간이란 학교 파하고 잠깐 동안 뿐.

나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박옥이를 위해서 기도를 했다. 신흥종교에서 모시고 있는 그 '알 수 없는 상징물'을 향해. 나는 당시 신흥종교가 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믿고 있었다. 고모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신흥종교 단체에 몸담고 있는 처지, 공짜로 공부를 하고 있는 처지가 아니더라도 나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나의 절박하고 애타는 염원을 들어 줄 절대적인 그 무엇.

나는 아침 저녁으로 기도했다. 틈만 나면 기도했다.그 신흥종교의 상징물을 향해.

제발 아버지의 바람기를 잠재워 주세요. 제발 둘이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게 해주세요........

아버지와 박옥이는 모른다. 당시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그들의 행복을, 가정의 평화를 바랐는지를. 내가 얼마나 눈물로 그들의 평안을 빌었는지를.

 

내 나이 스물 네 살 때.

나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Y시에 직장을 얻었다. 한 작은 출판사였다. 성희와 함께였다.

방 하나 부엌 하나의 작은 공간에 성희와 내가 살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내 인생이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많지는 않지만 매달 일정액 씩 나오는 월급, 그리고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작고 깨끗한 공간. 그 곳에서 나는 성희와 함께 4년을 살았다.

나의 생활환경은 나아졌지만 아버지와 박옥이의 관계는 조금도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더욱 파국으로 치닫고 있을 뿐.

내가 자라온 환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성희, 계모 밑에서 눈치를 보며 커야 했던 나의 어린 시절을, 그리고 우리 집에서 매일이다시피 일어나던 끔찍한 가정폭력을 오며가며 직접 본 성희는 나의 상처와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성희는 왜 내가 집에만 다녀오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우는지, 왜 내가 늘 어두운 표정인지, 왜 내가 밤에 깊은 잠을 못자고 뒤척거리는지, 왜 내가 자기랑 신나게 얘기를 하다가도 먼 창밖을 보며 한숨을 내 쉬는지 잘 알았다.

어느 날.

집에 다니러 가서 박옥이부터 아버지의 새 바람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아버지의 바람이었지만 이번은 조금 이야기가 달랐다.

읍내에 사는 한 과부와 바람이 났는데 이번 바람은 꽤 길다는 것이다. 지금 몇 달째인데도 서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시 동생 하나가 몸이 좋지 않아서 인근 큰 도시로 병원을 다녔는데 아버지가 동생의 병원길에도 바람녀를 동행한다는 것이다.

박옥이는 죽을 만큼 속이 상해 몸져 누워있었다. 때문에 동생들 밥도 도시락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서일까?아니면 아버지가 무서워서일까. 박옥이는 아버지만 죽도록 달닥할 뿐 단 한번도 상대여자를 찾아가 볼 생각을 못한 것 같았다. 연속극에 나오는대로 '깽판'을 치지는 못한 것 같았다.

박옥이의 푸념과 눈물을 보고 돌아온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를 어쩐다? 진짜 이를 어쩐다?

나는 밥맛을 잃어가며 고민했다.산발한 머리에 퀭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면 아버지의 바람녀 이야기를 할 때의 박옥이의 얼굴을 생각하면 절대 내가 가만있어서는 안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어쩐단 말인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내 고민을 눈치챈 성희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네 아버지와 바람을 피운다는 여자의 이름을 알고 있니?"

"?"

"내가 그 여자를 혼내줄 방도가 있어. 이렇게 하면 어떨까?"

어릴 때부터 억눌리고 기를 못펴고 자란 나는 굉장히 수동적인 성격이다. 예나 지금이나 스스로 나서서 일을 해결할 생각은 절대 하지 못한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저 참고 참을 뿐 나서서 항변하고 따지지 못하는 성격이다. 아버지의 바람이 안타깝고 분해서 박옥이를 붙잡고 같이 눈물흘리고 아버지를 욕했을 지언정, 그리고 혼자서 밥맛을 잃어가며 고민 할지언정 단 한번도 내가 직접 나서서 일을 해결해 보려고 나선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희는 달랐다. 그녀는 추진력이 있었다. 한 번 결심을 하면 되던 안되던 바로 실행에 옮기고 보는 것이다.

성희의 말인즉슨 자기가 그 여자에게 전화를 하겠다는 것이다.협박을 하겠다는 것이다.

성희의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나는 당장 박옥이에게 연락해 아버지의 정분이 난 여자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여자의 신상명세를 알고 있으니 전화번호를 찾는 것은 쉬었다고 했다. 워낙 인구가 작은 시라 전화번호부를 보고 찾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야심한 밤 성희가 그 여자집에 전화를 했다. 나는 안절부절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지금 하고저 하는 짓이 결코 잘하는 짓인지 확신이 없어서 불안한 눈으로 성희를 지켜보았다. 저쪽에서 전화를 받는 것 같았다. 성희가 수회가를 쥔 손을 고쳐잡으며 내게 한 쪽 눈을 찡긋했다.

"당신이 윤정재(가명)씨랑 바람났다는 강말자(가명)씨입니까?"

저쪽에서 뭐라고 하는 것 같았다.

"당신, 윤정재씨가 이미 가정을 가진 남자라는 걸 알고 있으시지요? 토끼같은 아이가 다섯이나 되는?당신이 남편을 잃고 긴긴밤 독수공방 하기가 외로운 걸 짐작은 하나 가정 가진 남자와, 하필이면 가정을 가진 남자와 바람이 났단 말입니까?...."

저쪽에서 이 야밤에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냐고 따지는 것 같았다.

"나요?정직일보라는 신문을 알고 계시는지? 나 그 신문사 기자요"

성희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조금치도 흔들림이나 망설임이 없었다.

"아이가 다섯이나 딸린 남자와 바람이 난 여자에 대한 제보를 받고 전화하는 거요. 벌써 당신에 대한 뒷조사는 다 마쳤어요. 마음같으면 당장 내일이라도 기사를 싣고 싶은데 같은 여자 입장에서 그래도 마지막 기회라도 주는 게 도리일 것 같아서 전화하는 겁니다. 어떻게 할래요? 내일이라도 펑 터트릴까요? 아님 오늘 이후로 다시는 윤정재씨랑 인연을 끊으시겠어요?"

박옥이의 말에 의하면 대학 1학년에 다니는 딸이 있다고 했다. 남편을 잃고 강말자 혼자서 양품점을 꾸려가며 십 몇년을 고이고이 키운 딸이라 했다. 그런 딸에게 엄마의 추접한 사생활을 보려주기는 싫을 터, 더구나 그런 내용이 신문에 실린다면?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박옥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려 애썼지만 별 효과가 없었는데 여자가 스스로 물러나니 아버지도 어쩔 수가 없는 가보았다. 일 주일 후 집에 전화를 하니 간만에 박옥이의 목소리가 밝았다.

"얘, 그 여편네가 떨어져 나갔다. 아버진 어떻게 더 좀 해보려고 안달인 모양인데 그 여자가 안만나준다나 봐......"

그 이후로도 몇 번 그런 일이 더 있었다. 성희의 신문기자 협박은 유효했다. 지금만 같아도 어림 없을 터였다. 오히려 신분사칭으로 고소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터. 그러나 그때만 해도 80년대 초, 누구나가 순진하고 어리숙할 때였다. 신문기자라는 소리만 들으면 벌벌떨며 모두 물러났다. 

간혹 세상물정을 빤히 꽤고 있는 뺀질이 여자가 걸릴 때도 있었다.그런 여자에겐 신문기자 협박이 먹히지 않았다. 그럴 땐 성희는 욕을 퍼부었다.

"야 이 썅년아. 어디 붙어 먹을 남자가 없어서 아이가 다섯이나 딸린 유부남하고 붙냐? 그게 그렇게 하고 싶으면 차라리 마당 수돗가에 팽개쳐 져 있는 빨래방망이를 이용하던지. 동네방네 발정난 개년이 유뷰남하고 붙었다고 소문 내기 전에 얌전히 떨어져 나가. 이년아"

나중에 아버지도 나와 성희가 저지른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더 이상 자기 주먹과 발길질에 반항 한번 못하고 무조건 당하기만 하는 어린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나도 스무살을 넘긴 성인이었고 어엿한 직업을 가진 사회인이었으니까.

그렇게 아버지의 바람은 조금씩 정리되었다.

지금 생각하건데 아버지가 바람을 접은 것은 결코 박옥이를 위해서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자식인 내가 나서서 설쳐대니 어쩔수 없었을 뿐이다. 아버진 내게 부끄러웠을 게다. 다른 것도 아닌 자신의 바람을 자식이, 자식이 해결하겠다고 나서니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부끄러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