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둥둥.....

그 남자, 재영씨를 처음 봤을 때 신애씨는 자신의 가슴에서 둥둥둥, 하고 울려나오는 북소리를 들었다. 신애씨의 가슴에서 울려나오던 북소리, 그것은 사랑의 시작이었다.

결혼한 여자와 결혼한 남자와의 사랑. 그것을, 가정이란 울타리를 가지고 있는 두 남녀가 서로 좋아한 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러나 신애씨는 말한다. 힘들고 아팠었지만 그것은 사랑이었다고, 그것도 진정한 사랑이었다고.

"왜냐면 우린 끝까지 이성을 잃지 않았거든요. 우린 결단코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 만한 짓을,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남녀들이라면 다 하는, 육체적인 관계, 이를테면 손을 잡는다던가, 키스를 한다던가, 섹스를 하는, 그런 일을 둘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밤잠을 설치며 보고 싶어하면서도, 하루종일 그리움으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유행가 가사처럼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만 했으면서도 둘은 끝까지 아무 일도 만들지 않았다는 거다. 서로의 몸에 난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순수하게 정신적인 사랑만 했다는 신애씨. 육욕(肉慾)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기에 그들의 사랑은 정신적인 사랑,(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그야말로 순수한 사랑이었다고 신애씨는 주장한다.

신애씨는 올해로 서른 아홉살에 접어드는 여성이다. 신애씨가 세상에 태어난 이후 남편 다음으로 진실하게 사랑했다는 남자, 재영씨는 그보다 열여섯 살이나 많은 남자다. 중년도 지나 노년기에 접어드는 '늙은 남자'를 사랑했다는 얘기다. 남녀의 사랑에 나이가 무슨 장애가 되리요만은 육십에 가까운 남자를 사랑했다니 참 예외다. 더구나 신애씨같이 자존감이 강한 여자가.

"마치 바짝 마른 땅에 물이 스며 드는 것 같았어요. 절대로 저 남자를 내가 좋아해 봐야지, 사랑해 봐야지, 작정한 것이 아니었어요. 나도 모르게 늪에 빠져들 듯이 서서히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그 남자에게 빠져들게 되었어요. 그 정도로 그 남자,내가 사랑했던 재영씨는 멋진 남자였어요."

정신을 차리고보니 벌써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마음 전부가 재영씨에게로 가 있었다는 신애씨. 자신도 어떻게 콘트롤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게 자신의 마음을 콘트롤 하는 게 아닐까.

신애씨의 그 남자, 박재영씨는 옷을 잘 입는 남자였다고 한다.

비 오는 날엔 베이지색 레인 코트에 머플러를 늘어뜨려 입는, 웬만한 연예인도 소화시키기 힘든 빨간 벽돌색 울 쟈켓을 멋지게 입어내는, 그리고 넥타이를 매지 않은 날엔 와이셔츠 색깔에 맞추어 붉은 색이나 하늘색 스카프를 목에 두르는, 멋쟁이 남자였다고 한다.

"저도 패션엔 일가견이 있는 여자였더랬어요. 백명이나 되는 에이전트 중에 늘 옷 잘입는 여자로 꼽힐 만큼, 아, 죄송해요. 제 자랑을 해서. 그래서 남들의 옷차림을, 특히 남자들의 옷차림을 유심히 보는 편이었지요. 재영씨를 처음 보는 날 숨이 헉, 막히는 것 같았어요. 낙타색 쟈켓에다 검은 바지, 그리고 베이지색 와이셔츠를 매치해 입었는데요. 그는 마치 잡지에서 마악 빠져나온 모델 같았어요. 중년남자를 겨냥한 화장품이나 향수 광고 모델. 그때 나는 생각했었지요. 오오, 옷은 저렇게 입는 거구나. 나이든 남자도 저렇게 멋지게 옷을 입어낼 수 있구나......"

신애씨는 부동산 에이전트다. 똑, 소리나게 야무지고 빈틈없는 일 솜씨로 이 업계에서 늘상 '탑 셀러' 자리를 놓치지 않는 유명한 에이전트. 그리고 그녀의 남편은 주립대 교수다.두 사람 사이에 아이는 없다. 서로의 합의 아래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해서다. 아무리 행복한 결혼생활이라해도 거기에 백 프로 만족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신애씨는 그녀의 결혼생활에 백프로, 만족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부족할 게 없었지요. 바로 만족 그 자체였어요. 적어도 재영씨가 내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재영씨 역시 부동산 브로커로 몇 십년을 종사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직접 부동산 회사를 차려 스물 몇 명의 부동산 에이전트를 두며 큰 돈을 벌기도 했던 사람이다. 그가 신애씨가 사는 곳으로 이사온 것은 40줄, 늘그막에 낳은 외동 아들 때문이었다고 했다.아들이 신애씨가 사는 주의 대학에 다니게 된 것이다.

"그가 내가 사는 주로, 그리고 내가 일하는 회사로 오게 된 것을 숙명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어요. 그는 아들을 불면 날아갈까 놓으면 꺼질까 애지중지 하는 타입이 아니었답니다. 외동아들이지만 자유주의로 약간은 방임주의로 키웠대요. 그런데 부인이 아들을 단 한 순간도 옆에 두고 지켜보지 않으면 숨이 넘어가 버릴 거라고 난리를 쳐서 모든 것을 처분하고 이사를 오게 된 거라고 해요. 그가 말했어요. 이 고장에, 제가 사는 이 고장에 첫 발을 디뎠을 때 전혀 낮설지가 않았다고 합니다. 꼭 좋을 일이 있을 것만 같은, 누군가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대요........"

부인하고의 사이가 좋은지 나쁜지 신애씨는 모른다. 왜냐면 과묵하고 말이 없는 재영씨가 신애씨 앞에서 단 한 번도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 한 번, 재영씨의 부인을 먼 발치로 본 적 있는데 재영씨가 신애씨의 회사에 일 하기 시작하던 첫 해 크리스마스 파티, 부부동반으로 참석해야 했던 파티에서였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질색하는 신애씨의 남편이었기에 신애씨는 여느 때와 같이 혼자 참석하게 되었다. 등이 깊게 파진 빨간색 롱 드레스와 수만달러치의 보석으로 멋을 냈던 신애씨는 파티장에 참석하자마자 물론 먼저 눈으로 재영씨를 찾았다. 그리고 검은 턱시도와 라벤드 색 보타이로 성장한 재영씨를 발견하고 반갑게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신애씨는 보았다. 키가 큰 재영씨 옆에 나팔꽃처럼 붙어 서 있는 한 여자를.

얼핏 본 그 여자는 검은 색의 드레스에 밍크 숄을 걸치고 있었다. 크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한 키에 약간 마른 듯한 몸집의 여자였다. 그녀는 굉장히 명랑하고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인듯 했다. 그녀는 옆사람의 팔을 쳐대며 연신 깔깔대고 웃고 있었다. 사춘기 소녀의 웃음소리 같은 투명하고 맑은 웃음소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신애씨의 귀에까지 들리는 것이다.

부부동반 파티이니 당연히 재영씨의 아내가 참석하리라는 걸 짐작은 했었었지만 직접 눈으로 그 광경을 보자 신애씨는 슬펐다. 아프고 안타깝고, 그리고 이유없이 분했다.

늘 혼자 참석하는 파티였었다. 그리고 혼자서도 늘 당당하던 신애씨였었지만, 아니 오히려 뭇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은근히 그것을 즐기던 신애씨였지만 그날 만은 달랐다. 그날따라 혼자인 자신이 왜 그리 초라하게 생각되던지 말이다. 신애씨는 파티가 시작도 되기 전,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행사장을 빠져 나갔다.

집으로 바로 가면 남편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근처의 공원으로 간 신애씨, 신애씨는 공원의 파킹 랏에 몇 시간을 앉아있었다. 차창 밖의 어둠만 응시하며 하염없이 앉아있었다. 신애씨의 셀폰에는 재영씨가 해대는 전화로 연신 불이 반짝반짝 들어왔지만 신애씨는 응답을 하지 않았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남의 남편을 사랑하다니!

가정있는 사람들의 애정관계라면 설사 그게 허구라해도 망칙스럽고 더럽다고 몸서리치던 신애씨였다. 남편을 사랑하기에, 그리고 결혼생활에 지극히 만족하기에 단 한 번도, 정말이지 꿈에도 상상 해 본 적이 없었던 신애씨였다. 그런 그녀가 지금 그렇게 경멸해 마지않던 일의 주인공이 되어 있는 것이다.

"시내야. 너 괜찮냐? 얼핏 모습이 보이는 것 같더니 금방 없어져 버려서 얼마나 찾았는데..."

다음 날 회사에서 만난 재영씨는 신애씨를 나무랐다.

신애씨는 그의 굳은 얼굴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렇지만 무어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말을 할 것인가.당신 부인을 보는 순간 기분이 극도로 나빠졌었다고, 그래서 그 자리에 도저히 있을 수가 없었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인간에겐 누구나 금지된 것에 대한 갈구와 욕망이 있다. 가질 수 없기에, 아니 가져서는 안되기에 더욱 갖고 싶은.

신애씨는 재영씨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멈추어 보고자 별별 안간힘을 썼었다고 한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려니, 한 달 동안 외국 여행을 떠나보기도 했고 건강 핑계를 대고 당분간 회사를 떠나있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랴! 신애씨는 벌써 재영씨의 포로가 되고 만 것을! 별별 수단과 방법을 써보았지만 재영씨에게로 향하는 신애씨의 마음은 안정되지 않았다. 흐르는 마음을 억지로 멈추게 하려니 오히려 점점 더 혼란스럽기만 했던 것이다.

나중에 신애씨는 포기했다. 물 흐르는대로, 바람 부는대로 내 마음 가는대로 내버려 두자. 불어나는 강물을 막고저 강둑을 막아놓으면 언젠가는 그 강둑이 터지고 말 듯이 억지로 마음을 정리하려하니 내가 더 힘들고 아프다.그래, 그냥 두자. 언젠가는,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정리되겠지.....

신애씨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활활 타는 화산이라면 재영씨는 깊은 바다같은 사람이었다. 절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해 주는 걸 보면, 깊고 그윽한 눈으로 신애를 쳐다보는 걸 보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어 신애씨를 만나러 나오는 걸 보면 신애씨를 좋아하는 것 같긴한데 그 좋아하는 깊이가 어느 만큼인지 짐작이 가지 않아서 신애씨는 늘 목이 마르고 애가 탔다.

내가 좋아하는 만큼 저 남자도 나를 좋아하는 걸까. 옆에 있어도 그리워 가슴이 시린 내 감정만큼 그도 나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당신은 거대한 바위같아요. 언제나 검은 표정으로 묵묵히 서 있는 차가운 바위......"

"시내야. 이런 감정은 한 순간이야. 인간의 감정은 영원하지 않아.. 언젠가는 변하고 마는 거라고. 현재의 감정에 휩쓸려서 서로 실수하지 맙시다. 나중에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자고..."

정신적인 사랑만 한 남녀가 만나서 한 일은 뭐였을까.

대화를 나누고,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고, 그리고 눈을 마주 보고 그저 서로를 바라만 보는 일이 그들 둘의 일이었다. 둘은 매일 아침 전화통화를 했다. 출근하면서 30분 남짓한 시간을.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 셀폰으로 통화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회사에서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미팅에서, 복도에서, 그리고 휴게실에서. 그들은 눈으로 대화를 교환했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시내가 보고 싶었어......

당신 얼굴이 부석부석해요. 피곤해 보여요....

음.어제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었거든. 시내는 어때?

저 역시 마찬가지죠 뭐. 요즘 깊게 잠드는 일이 거의 없어요. 당신을 만난 이후 불면은 나의 친구가 되어버렸어요.....

그리고 가끔 그들은 점심을 같이 먹었다. 한 시간의 짧은 점심 시간. 회사 사람의 눈을 피해 먼 곳으로 나가야 했기에 오는 시간과 가는 시간을 빼면 정작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삼십 분 남짓.

그들이 시켜놓은 음식은 늘 싸늘하게 식기 일쑤였다. 음식 먹을 생각을 잊은 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저 서로의 얼굴을 바라 보고만 보다가 시간을 보내었기에.

지옥이다....

그의 넓고 푸근한 가슴에 안기고 싶은 마음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지옥이다, 하고 신애씨는 늘 생각했다. 견우와 직녀의 마음이 이랬을까. 간절하게 눈 앞에 원하는 것을 두고도 만져보지 못하고 가져보지 못하는 안타까움, 그것이 신애씨를 바짝바짝 마르게 했다. 신애씨는 재영씨에게 마음이 주기 시작하던 날부터 그후 1년 동안 무려 십 몇 파운드의 살이 빠졌다고 한다. 그리고 수면제를 늘 달고 살았다. 원래 쿨쿨 잘 자는 편이 아닌 신애씨였지만 사랑의 열병이 그녀를 잠들게 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 사는 데에는 가끔씩 불가항력의 일이 일어난다. 국어사전에선 불가항력을 사람의 힘으로 저항을 하거나 막아낼 수 없는 어떤 힘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인간이 혼자 갖은 애를 써도 안되던 일이 불가항력에 의해서 정리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신애씨가 마음을 정리해야 하는 사건이 생기고 만 것이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그리고 신애씨와 재영씨가 두어시간 걸리는 바다로 드라이브를 가기로 약속을 한 날이었다. 일 년 정도를 사귀면서도 단 한 번도 둘이 긴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신애씨는 어린아이처럼 마냥 들떠 있던 아침이었다.

바다로 떠나기 전 둘은 커피집에서 만나 잠깐 모닝 커피를 마셨다. 방금 면도를 마친 듯 파릇파릇한 수염 자국이 있는 재영씨의 얼굴을 보면서, 그리고 바다 향기 같기도 한 재영씨의 체취를 느끼면서 신애씨는 마냥 행복했다.

그러나 신애씨의 행복은 거기까지였다. 둘이 차에 마악 오르려는 찰나 재영씨에게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와이프가.....와이프가 교회에 가다가 교통 사고를 당했대......"

새파랗게 질린, 흙빛이 된 절망스런 얼굴로 허둥지둥, 신애씨가 옆에 있는 것은 안중에도 없는 듯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황급히 떠나가던 재영씨를 보면서 신애씨는 그날로 자신의 사랑이 끝났음을 알았다.

그 남자는, 꿈 속 같이 찾아와 함께 하던 그 남자는, 그 남자는 그저 다른 한 여자의 남편일 뿐이었다는 것을 신애씨는 깨달았던 것이다.

신애씨는 그날 하루종일 생각했다. 만약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해도 그렇게 새파랗게 질릴까.....

아니다, 하고 신애씨는 단언했다. 매우 놀랄 망정 이 세상이 끝난 듯 그렇게 절망스러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날 오후 신애씨는 재영씨의 전화를 받았다. 와이프의 교통사고는 가벼운 것이었다고. 차는 좀 못쓰게 되었지만 목숨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 사고였다고.

"그래요? 참 다행이네요......"

자신도 놀라울 만큼 침착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신애씨는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이제 그만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세요........."

수화기 저 쪽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재영씨는 말했다.

"그래야겠지?........"

그리고 일 년.

신애씨는 다른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일절 다른 생각없이 매일 매일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재영씨를 만나기 전 처럼. 열심히, 맹렬하게.

그러나 신애씨는 자신도 모르게 일 하다가 가끔 창 밖의 먼 산을 쳐다 본다. 그리고 운전을 하다가도 하늘을 올려다 본다. 아직도 가슴에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한 남자의 얼굴, 재영씨의 얼굴이 거기에 있다.

신애씨는 중얼거린다.

어쨌든 그것은 사랑이었어. 지금도, 나중에도 말 할 수 있어. 진정한 사랑이었다고....

-이계숙의 더 많은 작품은 http://kyesook.com 로 오셔서 읽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