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씨는 집순이이다. 남편도 아이들도 주위 사람들도 다 그렇게 부른다. 본인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 집안에 놓여있는 가구와 함께
늘상 집에만 처박혀 있는 집순이라고. 남편 없이는 문 밖을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바보 집순이라고. 하다못해 슈퍼마켓도, 은행
볼 일같은 잠깐 동안의 외출도 혼자서 할려면 등에 식은 땀부터 먼저 나는 바보같은 천치같은 집순이라고 지영씨 자신도 생각한다.
지영씨가 혼자서 자신있게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을까.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이 있다. 아, 또 있다.
24시간 나오는 케이블 방송으로 한국 연속극이나 코메디 프로그램 보는 것. 그리고 거실에 사시사철 깔려 있는 전기장판 위에서
뒹굴뒹굴 하는 것. 하루종일 주지분주지분 먹어대는 것. 그리고 퇴근해 들어오는 남편을 따라다니면서 잔소리하는 것.
지영씨는 올해 오십 두살의 여성이다. 미국에 온 지는 이십 팔년이 되었다.그러나 그녀는 영어를 잘 못한다. 집에
하루종일 있으면서도 전화를 절대로 받지않는다. 혹시라도 미국사람일까 봐 겁이나서 전화를 받지못하는 것이다. 오는 전화는 모두
자동응답기로 넘어가게 한다.저녁에 남편이 퇴근해 들어와서 자동응답기를 체크하는데 어떤 땐 반드시 전화를 받아야만 하는
경우(지영씨의 남편은 한국인을 상대로 융자업을 한다. 손님들이 가끔 급하게 남편을 만날 일이면 생겨 사무실이나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다가 부재중이면 집으로도 연락을 하는 것이다)도 있는 터라 그럴 때마다 남편은 짜증을 부린다.
"도대체가 말이야. 집에서 하는 일이 뭐가 있어. 다른 건 몰라도 전화 정도는 받아야, 그래서 얼른 내게 메시지를
전해 줘야 일을 해먹을 것 아니냐. 이런 지극히 사소한 일까지도 해주지 않으니 내가 성가셔서 어찌 사냐고......."
미국온 지 삼십년이 가까이 되도록 전화 한 통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여자 지영씨, 그녀는 놀랍게도 영문과 출신이다.
그것도 우리나라 최고라는 SKY 대학 중 한 곳을 나온 여성이다.그리고 그녀가 미국에 오게 된 이유도 놀랍다. 한국굴지 대기업의
미국 지사 책임자로 발령받아 왔단다. 그런데 어쩌다가, 어쩌다가 미국사람과 전화 통화마저 겁이 나서 못하는 바보가 되어버렸을까.
왜 그렇게 퇴행해 버렸을까.
그녀처럼 주목받는 인생이 또 있었을까. 머리좋고 예쁘고 날씬하고 일곱 남매의 막내 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주위의 온갖
귀여움을 받으면서 자라 성격까지 밝고 명랑한 지영씨. 그녀는 성장해서도 어딜 가나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는 여성이었다고
한다. 사랑만, 사랑만 넘치도록 듬뿍 받던 여성이었다고 한다. 세상 살면서 단 한 번의 작은 어려움도, 고난도 겪어보지 못한
온실 속의 화초같은 여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물정을 전혀 몰랐기에 아주 엉뚱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던 여자였다고 한다. 이를테면 퇴근 길에서 만난
거지에게 월급봉투를 몽땅 쥐어주고 온다던가, 숫기나 끼라고는 전혀 없으면서 방송국에서 모집하는 탤런트 시험에 응시해 덜컥
붙는다던가 하는 그런 엉뚱함.
그런 그녀가 미국에 가겠다는 의견을 가족들에게 표출했을 때 극심한 반대에 부딪힌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명석하고
영리하긴 했지만 엉뚱한 면이 있는 지영씨가 어느날 갑자기 노랑 머리, 파란 눈의 미국사람과 결혼을 하겠다고 나설지도 모른다는
우려때문이었다. 그러나 지영씨의 고집을 누가 꺾으랴! 연약하고 다소곳하면서도 한편으로 당차고 드센 구석이 있는 지영씨는 끝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미국행 비행기를 탄 것이었다.
부모님을 비롯해 오빠들 그리고 언니들이 모두 의사이고 변호사이고 교수인 집안의 막내 딸인 지영씨. 초등학교
때부터 반장을 도맡아하고 피아노면 피아노, 미술이면 미술, 발레면 발레, 예술 방면에서도 어느 것 하나 뒤처지 않던, 늘
주인공으로 스포트라이트만 받던, 항상 승승장구만 하던 지영씨가 홀홀단신으로 미국에 오면서 그녀의 인생은 달라졌다.
한 남자를 만나면서 부터였다.
첫 몇 년간 지영씨의 미국생활은 자유와 여유로움, 바로 그 자체였다. 지영씨는 그때 당시로도 적지 않은 돈을 가지고
미국에 왔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일정액 이상의 달러를 해외로 반출 못하게 되어있었지만 친척들이 고위관리직에 수도 없이 포진하고
있었던 지라 지영씨에겐 그게 가능했다.
가져온 돈은 은행에다 예금하고 적지않은 월급만으로 생활하면서도 화려한 생활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사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사고 여행을 다니고 맛있는 식당을 찾아다니며 지영씨는 혼자만의 해외생활을 마음껏 만끽했던 것이다.
모범생답게, 가문 좋은 집안의 막내딸답게 어른들이 원하는대로, 학교에서 가르쳐주는대로 늘 틀에 박힌 반듯한 생활만
하던 지영씨는 우리를 벗어난 동물처럼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실천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영씨는 당분간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기에 영주권도 획득했다.
그러기를 몇 년, 혼자만의 자유분방한 생활에 슬슬 진력이 날 무렵, 지영씨는 지금의 남편인 현우씨를 만나게 되었다.
현우씨는 지영씨가 책임자로 있던 업체와 협력관계에 있던 회사의 말단 직원이었다.아니다. 직원이랄 것도 없다. 그는 임시로
채용되어 있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수출된 짐들을 하역하던 일개 짐꾼이었다.
어느 날 현장 시찰을 나갔던 지영씨가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짐을 나르고 있던 현우씨에게 시쳇말로 그만 '필이 꽂히고' 만 것이다.
"저기 저 소매없는 푸른 티 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는 누구예요?처음 보는 사람인 것 같은데?..."
지영씨는 옆에서 현장상황을 설명하는 직원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그냥 흘낏 한 번 얼굴을 쳐다보았을 뿐인데 그 강렬한 인상이 너무도 가슴에 남아 그냥 지나쳐 갈 수가 없는 지영씨였다.
"아, 저 사람? 미스터 한이요?"
직원에 의하면 거기서 일한지 한달 째가 되었는데 별로 말이 없는 남자이기에 본인의 자세한 신상은 모른다고 했다. 그저
우울하고 고독한 눈매로 보건데 복잡하고 깊은 사연을 가진 사람으로만 짐작 할 뿐. 전혀 꾀를 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일을 하기에
좀 더 두고 보았다가 정식 직원으로 채용을 할까 고려중이라는 직원의 말이었다.
"인물이며 몸이 참 반듯하게 생겼지요?이런 데서 저런 험한 일을 할 사람같지는 않은데......"
"............"
그와 인연이 되려고 그랬던가. 지영씨는 그날 저녁 생전 가지 않던 바닷가의 한 술집에를 갔다가 현우씨를 다시 보게
되었다. 맥주 한 병을 앞에 놓고 마냥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현우씨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지영씨의 가슴은 마냥 뛰었다.
"앞에 앉아도 돼요?"
그날 지영씨는 현우씨에 대한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우씨는 지영씨보다 한 살이 많은 남자로 한국의 최고 대학을
나와 서울의 한 사립 고등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했던 사람이었다. 실력도 있었고 성실했던 관계로 그 고등학교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선생님으로 꼽히며 은연중에 장래 교장자리까지 내정되어 있던.
그런데 현우씨는 8형제의 장남이었다. 고향은 강원도의 아주 아주 깊은 두메 산골, 버스를 두 번 갈아타는 것도 모자라 이십리를 걸어 들어가야만 하는 화전민 터가 현우씨의 고향이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두뇌가 명석했던 현우씨는 중학교 때부터 대학까지 장학금으로 공부를 마쳤다. 그리고 고등학교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늙은 부모와 일곱명이나 되는 동생들이었다. 현우씨가 사는 동네의 인근 동네 열 몇개를
합쳐봐도 대학을 나온 사람이라곤 현우씨가 유일한 찢어지게 가난한 고장에서 고등학교 선생님이, 그것도 서울의 유명한 사립학교
선생님이 된 현우씨는 고향 사람들 사이에서 신화같은 존재였다. 부모님을 비롯한 동생들, 그리고 친척들의 기대가 남 다를 수밖에.
개천에서 난 용인 현우씨의 월급은 통째로 고향으로 보내졌다. 늙어서 경제적 능력이 전혀 없는 부모를 대신해 일곱이나
되는 동생들의 용돈과 학비는 모두 현우씨의 몫이었고 친척들의 크고 작은 사건 사고의 해결을 해야 하는 것도 모두 현우씨의
책임이었다. 그리고 늙은 부모는 걸핏하면 병석에 누웠기에 그 약값을 대는 것도 현우씨의 허리를 휘게 했다. 현우씨의 어깨에는
크나큰 짐이 매달려 있었다. 적지 않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현우씨는 변변한 옷한벌, 신발 한 켤레, 하다 못해 기름지고 영양가있는
밥 한 끼를 맘놓고 사먹지 못했다. 학생들과 교사들은 그 남자, 현우씨를 '흰 고무신'이란 별명으로 불렀다. 돈이 없어 구두를
사 신지 못했던 현우씨, 늘 스님들이나 신는 흰 고무신을 신고 다녔기에.
어느 날 현우씨는 생각했단다. 이러다가 평생동안 부모와 동생들과 친척들 뒷바라지만 하다가 내 인생이 끝나겠다. 내가
이러다가 장가도 못가 보고 총각귀신으로 늙어 죽게 될지도 모르겠다. 항상 고향의 부모 먼저, 형제 우선인, 개천에서 난 용인 나
한테 시집 올 여자가 있으려나.......
어느 날, 월급을 봉투째로 고향집으로 보내고 우체국 계단을 내려오다 문득 든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날로 현우씨는
미국에 갈 방도를 알아보기 시작했다.부모님과 형제들이 같은 하늘을 이고 있는 한국에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으니 멀리
외국으로 떠나자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내가 없으면 없는대로 다들 대충 살아들 가겠지. 지금처럼 내 얼굴만 쳐다 보면서 마냥 손을 놓고 있지는 않겠지.
미국에 친지나 아는 사람이 없기에 정식으로 들어올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던 현우씨. 그는 아는 사람을 통해 돈을
쓰고 어찌어찌하여 밀항선을 타고 미국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영주권이 없기에, 영어를 못하기에 정식 직장을 구할 수 없는
현우씨는 한국회사에서 짐 하역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그지 없이 편하다고 했다. 잠자리도 음식도 단 하나
맞는 게 없었지만 자유가 있었기에. 한 푼이라도 더 벌어 고향에 보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에서 해방되었기에.
가엾기도 해라. 이 잘 생기고 귀티나 보이는 남자에게 그런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단 말이지?
현우씨의 이야기를 듣고 지영씨는 자신이 현우씨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둘은 결혼을 했다. 물론 지영씨가
먼저 서둘러서 한 결혼이었다.그리고 결혼을 한 몇 달 후 지영씨는 직장을 그만 두었다. 지영씨가 임신을 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영씨가 일하는 걸 현우씨가 원치 않았다.
그리고 현우씨는 지영씨가 한국에서 미리 가져다 놓은 돈과 적지않은 액수의 돈을 지영씨 부모로부터 더 송금받아 그것을 밑천으로 가발가게를 냈다.
그리고, 그 가발가게는 돈을 쓸어 담는다는 말이 적합할 정도도 성공했다. 70년대 당시 마악 가발산업이 붐이 일
때였다. 영어는 잘 못했지만 미국 경제돌아가는 것을 누구보다 민감하고 명석하게 잘 파악했었던 현우씨의 첫 번째 대박작품이었다.
그리고 그후에도 현우씨는 그야말로 '승승장구'란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성공에 성공을 거듭했다. 하는 사업마다 대박이 터졌던
것이다.
"한 달에 집에 가져오는 돈만 3만 불이 넘을 때도 있었어요......."
빈털털이 남자였던 현우씨는 지영씨와 결혼하는 순간부터 돈을 망태기로 담아다 지영씨에게 갖다 주기 시작하는 것이다.별 볼일 없는 불법체류자와 결혼한단 소식에 머리를 싸매고 누웠던 친정부모도 현우씨를 사위로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영씨는 집에 가정부를 두고 손에 물 한방울 안묻히고 살았다. 태어날 때부터 입에 금 숟가락을 물고 태어났던 지영씨, 태어나서 단 한 순간도 돈 걱정을 해본 적 없었던 지영씨, 돈 복은 타고나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런 편한 생활이 지영씨의 앞 날에 큰 독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지영씨는 회상한다. 그때 그렇게 넘쳐나던 돈을, 시간을 좀 더 건설적으로 활용할 걸. 어릴 때부터 소질있단 소릴 늘
들었던 미술이나 디자인 쪽으로 공부를 좀 더 할 걸. 뛰어난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소셜워커 자격증이라도 따서 사회에 봉사라도 할
걸. 하다못해 당시 마악 소개되기 시작하던 컴퓨터 수강이라도 해 놓을 걸.
그러나 지영씨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지영씨가 집에서 한 일은 낮잠을 자고 한국드라마를 보는 일이었다. 한국에서는
심드렁하던 한국연속극이 미국에서 보니 전혀 새롭고 흥미진진했다. 탤런트들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머리에 쏙속 들어왔고 눈물이
나도록 절절하게 공감이 되었다.
그때가 80년대 초반, 해외 동포들에게 한국 방송물이 비디오 테잎으로 제공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녀의 하루 일과는 한국비디오로 시작해서 한국 비디오로 끝났다. 집안 곳곳에다 수십개씩 쌓아놓고 하루종일 비디오만
보고 살았다. 세 개 방송국에서 나오는 연속극은 모조리 싸악쓸이를 했고 쇼프로그램도 한 개도 빼지 않고 보았다. 나중에 정 볼게
없으면 뉴스나 다큐멘터리까지 모조리 섭렵했다. 한국의 탤런트나 가수들 이름은 줄줄 꿰고 살았고 집에 상주하던 한국인 가정부와
연속극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게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이 되었다.
집 밖을 전혀 나가지 않으며 바깥으로부터 철저하게 차단된 생활을 하면서 지영씨 혼자가 되었다. 그녀는 무인도에 유배된 귀양자처럼 점점 고립되어갔다.
비디오를 볼 때는 누가 찾아오는 것도 싫고 전화조차 받기를 귀찮아 했기에 미국 오면서 사귀었던 수십명의 친구들도 차차 멀어졌다.
한국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와도 얼른 이 전화를 끊고 연속극을 마저 봐야지, 하는 생각에 대충 건성으로 대응을 했기에 형제들과 전화통화를 하는 횟수도 점점 줄게 되었다.
그녀의 젊은 날, 날카롭게 빛나던 지성도 학식도 지식도 점점 빛이 바래어져갔다. 그녀는 책은 고사하고 신문 한 장을 제대로 들추어보지 않았기에.
당시 그녀는 우울증에 걸린 게 아니었을까. 하루하루 먹기 살기 바빠서 허덕이는 사람은 우울증이란 말 자체를 모른다.
왜냐면 사는 게 절박하니까 말이다. 치열하고 바쁘게 사는 삶에는 우울증이란 사치한 이름이 끼어들 틈이 없다. 보통 우울증은
공허함 때문에 오는 것이다. 갖출 것 다 갖춘 사람들,더 이상 원하는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는
사람들에게.
당시 지영씨가 그랬다. 넘쳐나는 돈에, 넘쳐나는 시간에,그리고 남편은 날 바빴고 아이들은 유모 손에 맡겨져 지영씨의
관심과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그 어디에도 지영씨를 필요로 하는 데는 없었다.
하여튼 지영씨는 그렇게 몇십 년의 미국 생활을 한국비디오와 함께 허비했다. 뼈 없는 연체동물처럼 집안에서 흐느적거리며, 생각 없는 바보처럼 멍하니 그렇게. 해다 주는 밥 먹고 비디오 보다가, 졸리면 자고, 또 비디오 보고.
지금도 지영씨의 생활은 똑같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어릴 때 유모의 손에 키워지던 아이들은 하나둘 독립해서 다 떠났고 집에는 남편과 둘만 있다.
지영씨 남편, 현우씨는 그동안 벌렸던 사업을 접고 현재 융자일을 하고 있다. 한때 돈을 망태기로 가져오던 현우씨, 그
넘쳐나던 망태기가 영원할 줄 알았는데 세월이 가면서 빈자루로 쪼그라들고 만 것이다. 그때 넘치게 번 돈을 거의 다 투자했던
부동산 경기가 싸늘하게 식으면서 현우씨의 한때도 끝나가기 시작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호경기 때 여기저기 마구 사두었던 부동산이
하루가 다르게 곤두박칠 치기 시작했기에.
손 털고 버려버리자니 아깝고 그냥 두자니 한 달 페이먼트 내기에 허리가 휘는 애물단지 부동산 때문에 현우씨는 요즘
하루에도 열 몇시간씩 일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몇 십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현우씨의 어깨엔 아직도 무거운 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걸핏하면 전화로 돈 타령을 해오는 한국의 일곱 형제들, 아니 이제는 장성한 조카들까지 합쳐 수십명이 되고 말았다.
마음 약한 현우씨는 그들의 간곡하고 애절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구두창이 닳도록 이리저리 뛰어다녀서 몇만불 몇천불을 해 보내고 나면 다시 따르릉,걸려오는 전화.
"오빠, 이번에 제 딸 대학을 가야 하는데 등록금이 모자라요. 한 5천불만 부쳐주면 좋겠는데....."
"형님, 집주인이 전세금을 올려달라지 뭐요. 이천만원이나요. 천만원은 여기서 어떻게 해보겠는데 형님, 미안하지만 천만원 정도, 그러니까 만불만 좀 어떻게 해줄 수 없겠습니까?....."
"삼촌. 죄송해요. 아빠 몰래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를 냈거든요 합의금이 필요한데....."
현우씨는 단 한 푼의 돈이라도 더 벌기 위해 오늘도 정신없이 뛰고 있고 우리의 지영씨는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집에서 한국 연속극에 푹 빠져 있다.
-이계숙의 더 많은 작품은 http://kyesook.com 로 오셔서 읽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