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 샌드라가 이혼했단 소식을 들었을 때 명화씨는 들고 있던 컵을 떨어뜨릴 정도로 무척 놀랐다. 그러나 한편으론 잘 됐다는 생각이 얼른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아이와 그 남편은 어울리는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 이혼 사유라는 게 샌드라의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라는, 그러니까 그 아이, 샌드라보다 나이가 더 어린 다른 동양 여자를 봐서라는 이야기에 명화씨는 자신도 모르게 화를 벌컥 내고 말았다.

"아아니, 그 미친 영감태기는 정말 정력도 좋네. 그 나이에, 또 다른 여자를, 어린 여자를 또 보았단 말이지?"

그 미친 영감태기라고 명화씨가 표현한 그 영감은, 그녀가 알기로 올해 팔십 네살이다. 아무리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요즘 수명이 길어 백살을 거뜬히 넘기는 노인네가 숱하게 많다지만 팔십 네 살이란 나이는 새로운 여자를 만나 새 인생을 시작하기에는 좀 늦은 나이 아닌가. 지나간 인생을 반추하면서 조용히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해야 옳은 나이 아닌가 말이다.

그나저나 그 영감태기야 온갖 좋은 약과 음식을 다 섭취하고 매일 운동하면서 몸을 가꾼 덕분에 정력이 철철 넘쳐서 그런다치고 내일 모레 관에 들어가면 딱 좋을 그런 늙은 영감한테 넘어가는 여자도 참 한심하지 않은가,하고 명화씨는 생각했다.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그 젊음이 아깝지 않은가. 하긴 그 아이, 샌드라도 돈이 좋아서 그 영감에게 시집을 간 거니까. 돈 때문에 멀쩡하게 살아 있는 본부인 자리를 제치고 그 자리를 꿰차고 들어 앉았던 게 아닌가. 자그마치 자기랑 사십 여섯 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 영감과.

샌드라가 결국 벌을 받는 것인가.....

명화씨는 샌드라와 그 영감태기가 같이 산 햇수를 따져보았다. 데이트하며 왔다갔다 한 기간 말고 결혼 기간만 햇수로 14년이다. 고작 14년 동안 살고 이혼당하려고 주변 사람들의 온갖 눈총과 멸시를 무릅쓰고 그 영감과 결혼했단 말인가.

그나저나 그 영감태기와의 사이에서 낳은 세 딸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증조 할아버지 뻘 쯤 되는 '늙은 아빠'와 같이 살았던 세 딸들은. 더구나 그 아이들은 지금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틴 에이저들 아닌가. 열네 살, 열세 살, 그리고 열두 살 짜리 아이들.

'망할년. 아이들은 뭣 하러 셋 씩이나 퍼낳아가지고. 아이고, 이왕 이렇게 된 것, 위자료와 양육비나 듬뿍 받아냈으면....'

명화씨는 앞으로 전개될 샌드라의 신세가 암담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자신의 친딸이 이혼당하고 돌아온 듯 가슴에 돌을 얹어놓은 것처럼 답답하고 막막해져 온 것이다.

샌드라는 명화씨의 둘도 없는 친구, 영희씨의 사녀 중 막내딸이다.

샌드라가 그 영감을 만나게 된 것은 어느 고급 식당에서 웨이츄레스를 하던 중이었다. 영희씨가 20년이나 넘게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고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울 무렵, 샌드라는 엄마를 돕겠다며 커피집에서 서빙을 하는 것으로 본격적 돈벌이에 나섰다.

얼굴도 예쁘면서 싹싹하고 상냥한 성격의 그녀가 고급식당으로 일자리를 옮겨 가게 된 것은 그 식당 사장의 눈에 뜨여서였다. 그 커피집 단골 손님이던 사장이 샌드라를 아주 잘 본 것이다. 그리고 샌드라는 곧바로 식당으로 옮겨서 웨이츄레스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그 식당은 한 달 전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초특급 식당으로 그 지역의 유명 인사나 거물급 정치인, 그리고 갑부들이 주손님이었다. 상류층 인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곳이니만큼 팁도 후해서 샌드라는 커피집에서 일하는 것과는 비교도 못할 만큼 돈을 벌었다. 그리고 몇 달 후 아파트를 따로 얻어 독립했다.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서 시집간 큰 언니를 제외한 두 언니들과 엄마, 그리고 샌드라 자신까지 네 명이나 드글드글 모여 살던 곳에서 탈출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명화씨는 샌드라의 엄마, 영희씨로부터 샌드라가 좀 이상하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아무리 식당에서 팁을 많이 받는다쳐도 일 주일이 멀다하고 명품백을 갈아 치울 만큼은 아닐 텐데 말이야......"

영희씨의 말인즉슨 샌드라가 그 식당에서 돈 많은 남자 하나를 물은 것 같다는 거였다. 집에 다니러 올 때마다 차림새가 점점 화려해진다는 거였다. 자신은 평생 듣도보도 못한 이름도 요상한 핸드백이며 옷들을 척척 입고 온다는 거였다. 그리고 두 언니들이 그것들을 탐내면 대수롭지 않게, 마치 양말 한 켤레 벗어 주듯이 언니들에게 건네 주고는 다음에는 그보다 더 비싸고 좋은 것들을 걸치고 온다는 거였다.

"난들 아나. 그것들이 얼마나 좋고 비싼 것들인지. 우리 딸년들이 웬만한 봉급쟁이 한달 월급을 털어야 살 수 있는 것들이라고 줏어 섬겨싸니까 그런가보다 하지....."

몇 천불씩 하는 비싼 백이며 옷들을 한 달에도 몇 개씩 척척 사 줄 정도면 매우 돈을 잘 버는 사람인 것 같긴한데 그 남자가 뭐하는 사람인지, 나이는 몇 살인지, 샌드라가 입을 조개처럼 다물고 있어 여간 궁금하지 않다는 게 영희씨의 말이었다.

"글쎄 돈이 다가 아니니까 아무튼 잘 알아보라고 해. "

명화씨는 진심으로 샌드라를 걱정하며 영희씨에게 말했다. 제발 반듯한 사고를 가진 정상적인 남자라야 할텐데.

"난 나이가 나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좋아. 푸근하고 넉넉해서 말이지. 그래서 난 나중에 결혼을 하더라도 나 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과 할 거야. 서너살 말고 열살 이상 나이 많은 사람이 나랑 잘 어울릴 겉 같애....."

명화씨는 언젠가 샌드라가 장난처럼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을 때는 그냥 철 없이 한 번 해보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몇 달 후 샌드라의 결혼소식을 들었을 때 명화씨는 그때 샌드라가 한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냈다.

아버지도 아니고 할아버지 뻘인, 칠십이나 먹은 늙은 영감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알려왔을 때.

그랬구나....아버지의 정이 그리웠구나....

샌드라가 두 살때 영희씨가 이혼을 하는 바람에 샌드라는 아버지의 정과 사랑을 전혀 모른다. 샌드라의 아버지는 영희씨와 이혼한 후 곧 바로 한국으로 나가 살면서 미국엔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샌드라는 아버지의 얼굴 생김새 조차 모르고 자란 것이다.

그때까지만해도 명화씨는 샌드라를 동정했다. 어린 것이 오죽 아버지의 정에 목말라 했으면. 오직 아버지의 넓은 품이 그리웠으면. 그리고 얼마나 쪼들리는 생활에 한이 맺혔으면.

불쌍한 것 같으니.......

아무리 명화씨가 생각해 봐도 사랑해서 하는 결혼은 아닐 것 같았다. 샌드라가 그 영감과 결혼하는 이유는 단지 아버지의 정이 그리웠다는 것, 그리고 그 영감이 건물을 몇 채나 가진 부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명화씨는 가슴이 아팠다.

그래, 그래. 어쨌든 부잣집 마나님이 되는 것이니 돈이라도 실컷 써보려무나.그걸로 만족하며 살려무나.....

그러나 샌드라가 결혼한다는 그 영감에게는 아직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아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명화씨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 번 뿐인 인생을 그런 늙은 영감에게 맡기는 것도 피를 토할 듯 억울한 일일텐데 멀쩡한 본처자리를 밀어제치고 들어가는 자리라니!

"말려야 해! 그 결혼 말려야 한다구!....."

자기 딸이었다면 머리를 빡빡 밀어서라도, 다리몽댕이를 분질러서라도 결혼을 시키지 않을 거겠지만 엄연히 엄마가 살아 있는 샌드라를 자신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는 안타까움에 명화씨는 가슴을 쳤다. 그리고 명화씨는 샌드라가 홀몸이 아닌 임신 사개월의 몸이라는 데 또 한번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이제 와서 어떻게 해. 할 수 없지 뭐... 그냥 잘 잘사라고 기원이나 해주는 수밖에...... 영감이 그러더라는데 마누라와는 이혼 수속만 끝내지 않았을 뿐 남남이나 마찬가지래. 벌써 별거한지 1년이 넘었다는데....."

임신만 안했어도 어떻게 뜯어 말려보겠는데 떡 하니 아이까지 가진 몸이라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며 영희씨는 명화씨 앞에서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러나 명화씨가 보기에 영희씨는 어미로써 그다지 애통해하고 속상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가난이, 빈곤이 사람을 그렇게 비굴하고 뻔뻔하게 만드는 것일까.돈 앞에서는 사람이 염치고 체면이고 다 없어지고 마는 것일까.

그녀의 손가락에는 전에는 보지 못한 콩알만한 사파이어 반지가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필경 샌드라가 해 준 반지일 거라는데 생각이 미친 명화씨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꽥 지르고 말았다.

"그러게 진작 딸년 단속을 잘 했어야지. 이제 동네 부끄러워 어떻게 밖에 나다닐래?......."

자신과 결혼을 한다해도 나이가 많을 늙은 영감에게 이제 막 피는 꽂봉오리같은 딸년을 시집보내면서 태연작약한 영희씨가 마냥 딱하고 밉쌀스러기만 한 명화씨였다.

어쨌든 샌드라는 마악 불러오는 배를 코르셋으로 감싸매고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이랄 것도 없다. 그냥 양가 친척과 친구들이 모여 저녁식사를 같이하는 자리를 가졌을 뿐이었다.

영감에게는 장성한 딸과 아들 네 명이 있다는데 아비의 작태가 부끄러웠는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고 백발이 성성한 영감의 친구 부부 서너명만 참석했다. 신부 쪽으로는 샌드라의 언니 넷, 형부 두명, 영희씨의 언니 부부, 그리고 명화씨를 비롯한 영희씨의 친구 대여섯명이 참석했다. 영희씨의 친구 두어명은 샌드라의 결혼을 축하하기보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영감태기길래 손녀뻘 되는 여자랑 결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일까,호기심에 참석한 것이 역력했다. 옆에서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고개를 빼고 눈을 크게 뜨며 신랑(!?)을 살펴보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었다.

그날 결혼식에서 스물 네 살의 샌드라는 참 아름다웠다. 그리고 결혼식의 주인공답게 마냥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진정으로 행복한지 어쩐지 그건 본인만 알 수 있는 거겠지만 명화씨가 보기엔 샴페인 두어잔으로 볼에 발그랗게 홍조가 띈 샌드라는 마냥 행복해보였다. 발레복 처럼 허리 아래를 부풀린 소매 없는 핑크색 미니 드레스가 매우 잘 어울렸다.

그러나 샌드라의 버들가지같이 낭창하게 가는 허리 아래로 볼록 솟아나온 아랫배가 보기 싫어서 명화씨는 고개를 숙였다. 임신 5개월로 접어드는 아랫배는 코르셋으로도 감추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간단한 식이 끝나고 곧 식사가 서빙되었다. 식사는 일 인당 2백 불이 넘는 초일류 음식이었는데 명화씨는 그 음식이 도무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영감의 친구들이 샌드라를 쳐다보며 수근거리는 소리를 명화씨가 얼핏 들었기 때문이다.

"카사노바같은 늙은 영감의 여성편력에 놀아난 희생자가 또 하나 생겼구만....."

"엄밀히 따져 희생자는 아니지.일단 결혼을 했쟎아......"

"그러게. 뭐시기(영감 이름)가 여지껏 데리고 논 여자가 수십명이었지만 결혼까지 하기는 이번이 첨이지? 저 여자의 어리고 야들야들한 몸에 뭐시기가 이성을 잃어버렸나. 결혼을 하다니 참 놀라운 일이야....."

"그나저나 저 어린 아이가 참 대단해. 동양여자가 기가 세다더니 늙은이와 어떻게 결혼할 생각을 다 했을까.여자가 임신을 했다던데 뭐시기와 결혼할 생각으로 일부러 애써 임신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 한 밑천 잡으려고 말이야....."

샌드라는 결혼을 하고서도 풀방구리 쥐 드나들 듯 친정에 자주 왔다. 샌드라의 입덧은 아주 심했다. 거의 아무 것도 먹지를 못하지만 제 어머니가 해주는 김치찌개와 몇몇 음식은 신통하게도 입에 받기 때문이란다.

"신랑이 잘해 주니?"

명화씨는 샌드라를 볼 때마다 물었다. 샌드라는 그때마다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얼마나 잘 해주는데요. 이건 공주가 따로 없다니까요. 손에 물 한 방울을 못 묻히게 해요. 제가 결혼해서 제일 좋은 건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거구요..."

"그래. 참 다행이구나....."

그러나 명화씨는 영희씨의 입에서 나온 소리를 들어서 샌드라의 생활을 조금은 알고 있었다. 마음대로 쇼핑을 할 수는 있는데 그게 영감 이름으로 된 신용카드로만 통해서 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영감은 신용카드 내역을 통해 샌드라가 무슨 물건을 샀는지 어디가서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휜히 꿰고 앉아 있다고. 그래서 갈수록 돈 쓰는 게 조심스러워진다고 영희씨에게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이제 명품백 같은 것 말고 돈을 좀 갖다주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이번 달 아파트 렌트비를 맞추어야 하는데 지금 간당간당하거든. 아이고, 여우같은 영감. 이왕 쓰게 할 돈, 그냥 캐쉬로 좀 팍팍 주면 얼마나 좋아. 이건 어디다 썼는지 일전부터 십전까지 유리알 들여다 보듯 훤히 알고 있으니 어떻게 삥땅을 쳐보라고 할 수가 없다니까....."

"샌드라가 그동안 사다 준 명품백들 다 어쨌어?옷들은?그걸 팔아쓰지 그래?꽤 값나가는 것들일텐데"

"그렇쟎아도 명품백 서너개를 이웃에 팔아다 쓰기는 했는데 그것 마저도 이제는 할 수가 없게 되었어. 그 여우같은 영감이 어느 날 갑자기 샌드라에게 일전에 산 백들을 모두 좀 보자고 그랬다는 거야.언니들이 쓰자고 해서 빌려주었다고 둘러대기는 했는데 영감의 표정이 아주 이상했다지 뭐야......".

"하긴 한 달에도 몇 개씩 사대었으니 이상하기도 했겠지....."

샌드라는 결혼 몇 달 뒤 딸을 낳았다. 딸을 낳으면서 샌드라의 친정 출입은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나가 돌아다니지말고 육아에 전념하라고 했다는 영감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그래, 가서 산후회복 하는 것은 좀 도와주었어?미역국도 좀 끓여 주고?"

명화씨의 말에 영희씨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미역국은 무슨.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희한한 것을 먹인다고 야단만 맞고 왔는데. 덕분에 우린 사흘 밤낮을 미역국만으로 밥 먹었네. 큰 들통으로 하나를 끓였는데 버릴 수도 없고 그걸 우리가 다 먹어치우느라 고생을 했네...."

샌드라가 친정에 발을 끊으면서 명화씨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한 소식을 자주 들을 수 없었다. 그냥 아무 탈없이 잘 살고 있겠거니 짐작만 할 뿐. 그리고 그 다음 해 샌드라는 또 임신을 해 딸을 낳았다. 그리고 1년 후 또 딸을 낳았다. 샌드라는 스물 일곱의 어린 나이에 명실공히 세 딸의 엄마가 된 것이다.

'참 징그러운 영감이다. 칠십에서도 한참이나 넘긴 그 늙은 몸에서 어떻게 아이를 셋 씩이나 만드는 정력이 나올 수 있을까.'

명화씨는 피둥피둥 살찐, 백돼지같이 허연 몸으로 열심히 아이를 만드는 영감의 몸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욕지기가 처받혔다.

'없으면 허전하니까 그냥 하나만 낳지. 뭐 하러 셋씩이나. 샌드라도 그렇고 영감도 그렇고 아이고, 참말로 어지간한 사람들이다.'

그때 명화씨의 머리에 퍼뜩 떠 오른 생각 하나. 샌드라가 작심하고 일부러 아이를 자꾸 낳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 영감과 백년해로는 못할 것 같으니 나중에 영감이 죽더라도 유산이나 두둑하게 물려받자는 생각, 혹시 이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밑천으로 위자료나 양육비라도 두둑하게 뜯어내자는 흑심이 아닐까.

그러나 명화씨는 얼른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옳지 못한 생각으로 아이들을 낳는다면 천벌을 받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쨌든 표면적으로 샌드라는 십년이 넘도록 잘 살았다. 매일을 아이들 학교로 유치원으로 학원으로 쫒아다니며 바쁘게 살았다. 평범한 학부모가 되고 만 것이다.

평범한 학부모가 되면서 샌드라의 몸도 평범한 아줌마가 되어가는 걸 샌드라를 볼 때마다 명화씨는 느꼈다. 처녀때의 날렵하고 늘씬한 몸매를 다 잃어버린 샌드라. 아이 셋을 낳는 여자의 몸이 어떻게 예전같기하리요만 샌드라는 좀 심했다. 명화씨가 볼 때마다 눈에 띄게 살이 쪄가는 것이다.마치 바람을 잔뜩 넣은 풍선같이 두둥실해지는 것이다.

"이젠 아이를 더 낳을 것도 아니니 몸매 관리를 좀 하는 게 어떻겠니?"

명화씨는 진심으로 샌드라를 걱정했다.명화씨가 보기엔 그 영감, 샌드라의 남편은 언제든지 맘이 변할 위인이었다. 그 영감이 진심으로 샌드라를 사랑해서 결혼했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가 원한 건 샌드라의 젊고 싱싱하고 날씬한 몸매 뿐이었을 수도 있다. 본인이 원하는게 충족되지 않을 때 얼마든지 딴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게 명화씨의 짐작과 기우였다.

그리고.

명화씨의 짐작은 옳았다. 샌드라가 셋째 아이를 가지면서 극도로 불었던 살을 빼지 못하고 밍그적거리는 사이 영감이 바람이 나고 만 것이다. 샌드라의 나이보다 서너살이나 어린 날씬하고 예쁜 여자와.

"전. 괜찮아요. 진정으로 사랑해서 한 결혼도 아니었는데요, 뭘...."

이혼 한 후 친정에 다니러 온 샌드라는 별로 상심해 하는 것 같지 않고 명랑했다.

"그래..난 네가 매우 상심하고 있을 줄 알았다. 어쨌든 좋은 경험이었다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네 세 딸들을 봐서라도 말이지......"

명화씨는 샌드라의 손을 꼭 잡았다. 샌드라는 이혼하며 위자료도, 양육비도 별로 타내지를 못했다고 한다. 이혼 할 것을 대비해 영감이 몇 달전부터 미리 약삭빠르게 재산을 다른 데로 빼돌려 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짜로, 진짜로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이들을 다 내가 맡게 된 것만으로 기쁘고 행복해요.그까짓 돈, 벌면 되지요. 살아 보니 세상은 돈이 전부가 아니더라니까요......."

"참 다행이구나. 이제라도 그걸 깨달았다니........"

샌드라는 지금 한 네일가게에서 일 하고 있다. 제 어머니 영희씨가 이혼한 후 그랬던 것 처럼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서 세 딸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다. 속은 어떤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참  씩씩하게 산다. 그런 샌드라를 볼 때마다 명화씨의 마음은 짠하게 아프다. 말은 못하고 명화씨는 그냥 가슴속으로만 샌드라에게 타이른다.

어쨌든 열심히 살아라. 그리고 아직 젊으니 좋은 남자를 만나야지...부디 다음 번 결혼은 꼭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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