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이씨가 병기씨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은 것은 입국하던 날 공항에서였다. 그녀가 유럽에 사는 딸의 산후조리를 해주러 미국을 떠난 것은 1년 전이었다. 딸네집에 방문한 김에 유럽 인근의 각 나라를 돌아다니며 실컷 구경하다가 이제사 미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공항에는 미리 연락을 받은 옥이씨의 절친한 친구, 재원씨가 마중나와 있었다. 재원씨는 1년만에 보는 옥이씨의 안부를 묻는둥 마는둥 하더니 제일 먼저 병기씨의 죽음을 조급하게 알려왔다.

"뭐라고? 그 인간이 죽었어? 언제? 어떻게? 일 주일 전에 나랑 전화통화 했을 때도 그런 얘기 없었쟎아."

"죽은지 며칠 안됐어. 뇌출혈이었대나 봐. 목욕탕에서 혼자 쓰러져 있는 걸 아들이 발견하고 911에 신고를 했대. 구급차가 왔을 땐 이미 늦었더라지. 어저께가 장례식이었어...."

"진짜 믿을 수가 없네... 그 인간이 죽다니...천년만년 살 것 처럼 그렇게 욕심을 부려대더니..나쁜 짓은 혼자 다 하면서 말이야...."

옥이씨가 병기씨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자 재원씨가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처음에 믿을 수가 없었어. 죽기 며칠 전에도 식당에서 그 남자를 봤었거든. 얼마나 건강해보였는데. 아무리 앞 일은 아무도 예측못한다지만 어쩌면 그렇게 허망하게 하루 아침에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

재원씨가 운전하는 차는 고속도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재원씨는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고속도로의 차들과 합류하기 위해 백 미러와 사이드 미러를 보면서 잠시 말을 끊었다.

"장례식장이 그렇게 썰렁할 수가 없었대. 다 합쳐서 조문객이 서른명이 될까말까했다네. 그럴 줄 알았으면 나라도 참석해서 불쌍한 인간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 줄 걸....."

"그 놈 부인은?"

"당연히 참석 못했지. 그 몸을 해가지고 어딜 올 수 있었겠어. 불쌍한 건 그 집 아들이지. 이제 겨우 열여덟살 난 아이가 부모도 없이 이 험하고 거친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갈까"

그집 아들이라면 옥이씨도 언제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세상의 악한 짓이란 악한 짓은 다하고 다니는 부모를 둔 아이답지 않게 선한 눈빛과 정갈한 이마를 가진 아이라고 옥이씨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아이가 지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눈물 한 방울을 흘리지 않더래. 장례식 내내 이를 앙다물고 아주 독한 표정을 짓고 있었대나봐. 사람들이 그러더군. 지 아버지가 그동안 사람들에게 행한 짓들을 다 알고있는 듯했다고...."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아버지가 죽었는데 눈물 한 방울이 안날까....."

옥이씨는 차창 밖 풍경으로 눈을 주면서 7,8년 전으로 기억을 되돌렸다.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 여행이나 다니고 맛집 기행이나 다니면서 느긋하고 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옥이씨와 재원씨였지만 10년 전 둘은 작은 한국식당을 운영하던 주인들이었다. 미국에 와서 우연히 조우하게 된 두 사람은 대학동창이었다. 둘 다 넉넉한 재정을 가지고 있었고 자식들은 다 성장시켰으며 남편이 없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집에서 지내기엔 무료하고 답답하기만 했던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 어느 날 의기투합해 식당을 차렸던 것이다.

똑같은 양념을 넣어 나물 한가지를 무쳐도 언제나 남보다 뛰어난 맛을 내는 훌륭한 음식솜씨를 가진 재원씨가 주방과 종업원 관리를 총괄했고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옥이씨가 수입 및 손님관리를 책임지는 것으로 역할분담을 했다.

수지타산에 중점을 두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손님들에게 제공한다는 취지로 연 두 사람의 식당은 당연히 손님들로 늘 붐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식당문을 닫을 무렵이었는데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여인 하나가 쭈볏거리며 들어서는 것이었다.

"저......."

"손님. 오늘 영업시간은 끝났습니다"

하루 매상을 체크하면서 옥이씨는 건성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나 여자는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옥이씨는 직감적으로 그 여인이 자기에게 용건이 있다는 걸 알았다.

"무슨 일이세요?"

옥이씨가 재촉을 해도 여인은 한참동안을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옥이씨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얼굴이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옥이씨는 황급히 다가가 여자의 손을 잡았다.

"아,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여자가 울면서, 그리고 모기소리 같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 대단히......죄,죄송하지만 저, 여기서 일 좀 하면 안될까요?"

그렇게해서 주방의 허드렛일 하는 사람으로 쓰게 된 경숙씨였다. 처음에 경숙씨를 채용하겠다고 하자 재원씨의 반대는 대단했다. 대우를 후하게 해준다고 소문이 나서 자신들의 식당에서 일 하겠다고 줄을 선 사람이 쌔고 쌨는데 왜 영주권도 없는 불법체류자를 채용하느냐는 거였다.

몇 년 동안 식당을 운영하면서 단 한 번의 불법행위를 저지르지 않을 만큼 충실히 법을 지킨 두 사람이었다. 허술한 것 같지만 한 번 법을 어긴 것이 발각나기라도 하면 경을 치고 마는 게 미국이란 나라라는 걸 잘 아는 때문이었다. 그러나 옥이씨는 경숙씨의 눈에서 철철 흘러내리던 눈물때문에라도 그녀를 박절하고 매정하게 내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경숙씨가 털어놓은 사연은 참으로 기막힌 것이었다.

그녀는 한국에서 대기업에 다니던 남편과 딸 아이를 데리고 남부럽지 않게 살던 중산층이었다. 그러다가 한국에 사는 직장인들을 하루 아침에 거리로 내몰던 IMF가 터지면서 그들의 풍족하고 안락한 생활도 바뀌었다. 그녀의 남편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권고사직을 당하고 만 것이다.

그 후 1년 동안 이리저리 다시 일을 해보고저 알아보았지만 사십대 초반의 경숙씨 남편을 불러주는 데는 단 한군데도 없었다. 그러다가 경숙씨 남편은 대박 터지는 사업을 해보자는 고교동창의 꾐에 빠져 퇴직금의 반 이상을 날리고 만 처지가 되었다. 들어오는 돈은 없고 퇴직금은 거의 반 이상이 줄어들고 있는 상태였던 어느 날, 경숙씨는 우연히 인터넷에 접속했다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한 광고를 보게 되었다.

'희망과 비젼없는 한국 땅에서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미국으로 들어 오라, 수입? 한 달에 5천불 보장하겠다.영주권? 1년만에 책임지고 따게 해 주겠다'하는 광고였다.

경숙씨 부부는 그 광고에 혹했다. 아니 그 누구라도 경숙씨의 입장이면 혹할 수밖에 없었다.당장 광고에 나와있는 미국 현지로 연락을 했다.

그 광고를 낸 사람은 병기씨 부부였다. 그들 부부는 뉴스를 통해 한국의 중산층들이 모래성처럼 팍팍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고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했던 그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밑바닥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도 잘 알았다. 자신들을 그렇게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 한국정부에, 한국사회에 혐오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잘 알았다. 기회만 있으면, 어디 탈출할 동아줄이 있으면 앞 뒤 잴 것 없이 그 동아줄을 허겁지겁 잡을 거라는 것도 그들 부부는 잘 알았다.

1.5세로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 미국법과 사정에 밝은 그들 병기씨 부부. 그렇게 그들은 한국에다 맛있는 미끼를 던진 것이었다. 그들 예상대로 미끼를 덥석 물은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나 실제로 병기씨의 낚시바늘에 걸린 사람은 서너사람이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경숙씨 부부였다. 경숙씨 부부는 아파트를 팔고 적금을 깼다. 그리고 퇴직금까지 몽땅 전재산을 병기씨 부부에게 투자했다. 푸른 잔디가 양탄자처럼 가는 곳 마다 펼쳐져 있는 평화롭고 자유스러운 미국생활. 영주권과 한 달에 들어오게 될 5천 불의 수입.경숙씨 부부는 마냥 꿈에 부풀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해서 한달에 5천불의 수입을 얻게될 것인지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경숙씨네는 병기씨 부부를 철썩같이 믿었던 것이다. 하긴, 미리 속일 작정을 하고 접근해오는 사기꾼들의 말에 속아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미국에 도착해 한 달 간의 꿈 같은 생활을 마쳤을 때. 경숙씨네는 알았다.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몇 십만불에 달하는 자신들의 재산, 그 돈은 이미 병기씨에게로 넘어간 상태였고 그들에게 남은 건 빈 주먹이었다. 영주권도, 한 달에 5천불의 수입도 뜬구름같은 허상이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매일이다시피 전화해주고 방문하며 친형제보다 더 살갑게 굴던 병기씨 부부가 어느 날부터 전화도 일절 받지않고 발걸음을 끊었을 때, 어찌어찌 만나게 된 병기씨 부부의 독사같이 싸늘하게 변한 태도를 보고나서야, 그제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사기당했다는 것을!

이 놈의 거지같은 한국땅 쪽으로는 침도 안뱉을 거라고 호언장담하고 떠나온 경숙씨 부부, 한국으로 돌아 갈 수는 없었다. 아파트세도 내야하고 전기세도 내야하고 전화세도 내야했다.그리고 먹고 살아야 했다. 무엇보다 하나밖에 없는 외동 딸에게 사기당하고 울부짖는 부모의 못난 모습만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역시 여자는 강했다. 먹지도 못하는 술을 먹고 취해 널부러져 있는 남편을 두고 경숙씨는 분연히 일어섰다. 그리고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예전에 병기씨 부부랑 두어번 들려 식사를 한 적 있었던 옥이씨 식당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

경숙씨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듣게 되었을 때 옥이씨는 바깥에 나가 하늘을 한 번 쳐다보았다. 하늘은 늘 그랬듯이 그 자리에 있었다. 높고 청명하게.

그 병기씨 부부, 하늘이 무섭지 않을까.

경숙씨의 사연이 아니더라도 그들 부부에 대한 악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옥이씨였다. 영어에 능통하고 미국 현지사정에 밝다는 잇점을 이용해 초기 미국이민자들의 등을 쳐먹는다는 악명이 온 한인사회에 퍼져있는 것이다. 이제는 동포들을 이용해 재산을 빼앗아 먹는 것도 모자라 한국에까지 마수의 손길을 뻗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부부는 일심동체고 부창부수라지만 어떻게 둘다 똑같이 그럴 수 있을까. 하나가 그러면 다른 하나는 좀 나은 구석이 있어야지....

그 뒤로도 옥이씨는 그들 부부에게 당하고 땅을 치면서 눈물바람을 하는 사람들을 몇몇 더 만날 수 있었다. 전 재산을 다 털리고 길바닥에 나앉게 된 사람, 자기 돈이 없으면 그냥 말일이지, 여기저기서 빌려다가 병기씨에게 투자했다가 본전까지 다 날리고 자살미수에까지 간 사람....

여기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말 할 것이다. 법에 호소하면 될 것 아니냐고, 고소해버리면 될 것 아니냐고. 그러나 병기씨 부부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교묘하고 약삭빨랐다. 나중에 자기들에게 불리한 서류는 한 장도 남기지 않고 감쪽같이 일을 처리했으니까. 하긴 남의 돈을 등쳐먹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이 증거를 남길까. 바람처럼 쓱싹쓱싹 해치웠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기당한 걸 눈 앞에 뻔히 보면서도 증거가 없으니 어떻게 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보통 남에게 이용당하는 사람들이 순박하고 착하다. 내 죄요, 내 큰 죄로소이다, 하고 가슴을 치고 통탄할 망정 자신들을 그렇게 만든 사람을 정죄할 엄두를 못내는 것이다.

사람들의 눈물과 비탄과 한숨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병기씨 부부의 재산도 점점 불어났다. 한국타운에다 몇 밀리언짜리 빌딩을 샀느니 이곳 A시에서 제일 부촌인 어디에 집을 샀느니, 그리고 이번에 웬만한 집 값 한 채 값인 최고급 승용차를 새로 구입했느니 하는 소리가 한인사회에 파다하게 퍼졌다.

"신은 없나 봐...."

병기씨 부부가 승승장구한다는 소문을 들을 때마다 옥이씨는 궁금했다. 저렇게 악행을 밥 먹듯 일삼은 사람들이, 남의 눈에 피눈물을 빼는 사람들이 왜 잘 먹고 잘 살까. 진짜 이 세상을 관장하는 신은 없는 것일까.

"걱정 마. 그 죄 값, 자기 대에 못받으면 자식 대에라도 꼭 받고 말 거야...."

병기씨로부터 당한 사람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분개하는 옥이씨와는 달리 불교신자인 재원씨는 태연하고 담담했다. 걱정말라는 것이다. 언젠가는 지은대로 다 받게 되어 있으니. 죄는 지은대로 가고 공은 닦은대로 가니 결과는 그저 하늘의 뜻에 맡기라는 것이다.

"인과응보라는 말이 왜 있겠어? 스스로가 저지른 모든 행에 대하여 그 결과도 반드시 스스로가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법칙이 저들 병기씨 부부에게 꼭 내려질 테니까 두고 보라구."

재원씨의 말이 맞았던 것일까.

끝까지 승승장구할 줄만 알았던 병기씨 집안의 몰락의 첫 번째 징조가 생겼다. 병기씨의 와이프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이다. 별로 늙지도 않은 나이에 뇌졸중이라니! 옥이씨는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무척 놀랐다. 뇌졸중은 나이가 많이 든 노인네한테나 오는 질병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오십밖에 안된 사람이니 곧 회복하겠지, 하고 옥이씨는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은 심각하다고 했다. 뇌졸중은 쓰러졌을 때 첫 세 시간 안의 응급조치가 중요하다. 그러나 병기씨 부인은 혼자 집에서 쓰러져 그 중요한 세 시간을 방치된 채 넘겨버렸다. 때문에 그녀는 나중에 병원에 실려갔지만 손을 쓸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했다. 오른쪽이 완전 마비가 되었으며 말은 물론 할 수가 없고 사람도 잘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 봐라. 언제까지나 잘 먹고 잘 살 줄 알았더니, 내 그럴 줄 알았다......"

사람들은 속 시원해하고 좋아했지만 옥이씨는 병기씨 부인이 딱해서 자신의 일이나 된 것 처럼 안타까왔다. 악행을 저지른 건 저지른 거고 어쨌든 불쌍했기 때문이다. 아직 오십밖에 안된 여자가....

옥이씨는 병기씨 부인의 빠른 회복을 빌었다. 죽어버렸으면 차라리 나았을텐데 식물인간처럼 병원에만 누워 있으니 얼마나 자기의 신세가 비참하게 느껴질까. 늘 주먹만한 보석반지에다 몇 천불짜리 옷을 입고 거들먹거리고 다니던 여자였던 병기씨 부인의 평소 모습이 옥이씨 눈에 선했다.

그러나 몇 달후 병기씨 부인은 병원에서부터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도저히 회복 가능성이 없어 사회로 복귀할 수 없다는 의사의 소견에 따른 조치였다. 그렇다면 병기씨 부인은 두 번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도,예전같은 생활을 할 수 없단 말인가. 평생을 요양원에서 지내야 한단 말인가.

하늘을 뚫고서라도 더 치솟을 것 같던 부동산 가격이 점차 떨어지기 시작 한 것은 그즈음이었다. 집이고 건물이고 내놓기만 하면 웃돈을 더 주고라고 구입하려먼 바이어들이 벌떼처럼 달려들던 호시절이 언제였냐고 할만큼 부동산 경기가 갑자기 싸늘하게 냉각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부동산 경기가 안좋아지면서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은 것은 병기씨였다. 사람들에게 갈취한 돈을 보두 부동산에 투자했던 까닭이었다. 상가 건물만 몇 채를 구입해서 거기서 나오는 세를 받아 또 다른 부동산에 투자를 하면서 재산을 불려가던 병기씨였다. 그러나 경기가 나빠지면서 렌트비를 못내 가게를 비우는 업주들이 점점 늘어났다. 얼마 후에는 건물 한 동이 전부 텅텅 비어버리는 일이 생겨났다.

옥이씨는 늦은 밤, 식당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면서 불꺼진 건물, 유령이 사는 것 처럼 을씨년스런 병기씨의 건물을 볼 수 있었다.

날이 갈수록 부동산 경기는 악화일로 치닫고 있었다. 전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병기씨의 욕심이 너무 지나쳤어. 앞으로 병기씨는 어떻게 하려나...

그러다가 옥이씨와 재원씨도 식당 일을 접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재원씨가 부엌에서 미끄러지면서 허리를 크게 다쳐 당분간 요양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돈을 벌자고 한 게 아닌, 재미로 열었던 식당이었으니 크게 미련둘 것도 없었다.

식당을 팔고 옥이씨는 유럽의 딸네집으로 여행을 떠났었고 1년 만에 돌아오는 공항에서 재원씨로부터 병기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기씨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루어졌다고 했다. 형제라곤 한국에 사는 누나 한 사람이 전분데 누나가 미국에 도착하기를 기다려 장례를 치르느라 늦어졌다는 것이다.

장례식장은 한산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웠다고 했다. 서른명이 될까말까했는데 그 서른명도 병기씨 지인이나 측근은 거의 없었다고 했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병기씨는 죽기 한 달 전부터 한 개척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그 교회 교인들이 조문객으로 모두 참석한 거였다고 했다.

한 동네에서 20년을 넘게 산 사람의 장례식장에 서른 명의 조문객이라니.장례식장에 가보면 평소 그사람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 있다던가.

어쨌든 옥이씨는 가슴이 아팠다. 병기씨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죽은 인간이 불쌍해서. 살아 생전에 곁에 둘 변변한 친구하나 사귀지 못했다쳐도 어떻게 가는 길 마저도 그렇게 쓸쓸하고 초라할 수 있을까.

병기씨는 그렇게 죽어버리고 나면 그만이지만 한 달에 5천불이 들어간다는 부인의 요양원비용은 누가 감당을 할까 그리고 불면 날아갈까 놓으면 꺼질까 그렇게 애지중지했다는 외동 아들의 미래는?

옥이씨의 염려대로 병기씨가 죽고 난 얼마 후 부인은 사립요양원에서 강제로 퇴소되었다.요양원비가 몇 달치나 밀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라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으로 보내졌다. 병기씨가 여기저기 매입해 놓았던 부동산과 '저택'이라 불리우던 집도 모두 은행으로 넘어갔다.

"세상에. 지금 병기씨 재산이라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네. 다 은행소유래. 그야말로 땡전 한푼 남은 게 없다는 거야. 병기씨 그 사람, 그동안 내야했던 페이먼트가 매달 4만불이 넘었대. 빛좋은 개살구였어. 페이먼트 할 생각만 하면 머리가 복잡해서 밤마다 잠이 안왔겠지. 그러게 뭣하러 건물들은 뭉턱뭉턱 사가지고서는. 부동산이라는 게 대박이 터질 땐 몰라도 망하려 들면 앉은 자리에서 쪽박을 차는 게 아닌가...."

그후에 옥이씨는 병기씨 외동 아들에 대해 들은 소식은 아무 것도 없다. 아들의 행방은 아무도 몰랐으니까. 병기씨 누나를 따라 한국으로 나갔단 소문과 향락과 도박으로 유명한 라스베가스에서 누가 얼핏 봤다는 얘기를 들었을 뿐.

그 아들이 무슨 죄일까....

따뜻한 밥 한끼 해먹이지 못하고 그 아들을 떠나보낸 게 늘상 마음에 걸리는 옥이씨였다.

옥이씨는 염원했다.

어느 하늘 아래에 살던지 제발 잘 살으렴. 부디 몸 건강하게...

-이계숙의 더 많은 작품은 http://kyesook.com 로 오셔서 읽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