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태씨는 돈을 잘 쓰는 사람이었다. 본인 자신에게나 가족에게나 주위사람에게나.

펑펑 쓴다는 말이, 물 쓰듯 쓴다는 말이 적합할 정도로 그는 돈을 잘 썼다. 자신과 부인을 위해서는 한 벌에 몇 천불이나 하는 비싼 옷을, 구두를, 장신구를 별 망설임 없이 척척 구입했다. 바로 어제 운전면허증을 딴 틴 에이저 딸과 아들을 위해서는 스포츠 카를 사 주었다.
그리고 영태씨는 가난하게 사는 친척들과 어려운 사람을 금전적으로 잘 도와 주는 마음 좋은 사람이었다. 영태씨는 주위사람에게 밥도 잘 샀다. 과장 좀 보태어 Q지역에서 사는 한국인치고 그에게서 밥 한 번 얻어먹지 못한 사람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또 한인사회에 기부도 많이 했다. 한인사회의 자질구레한 행사에 그는 항상 남들의 몇배난 되는 거금을 쾌척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언제나 한인사회 행사의 기부자 명단에 제일 첫 번째에 올랐다.

그는 Q지역에서 새로 조성된 주택 단지의 제일 크고 좋은 집에 살았다.

"집이 너무 커서 청소를 할 엄두도 못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청소하는 사람을 따로 두었지요. 호호호..."

그 집을 구입한 후 연 집들이에서 영태씨의 부인이 사람들에게 한 말이다.

새집에 투입된 인테리어와 가구 값에만 30만불을 썼다고 자랑하는 영태씨는 한 벌에 천불이 넘는다는 이태리제 셔츠를 입고 있었다. 영태씨 부인의 손가락에는 두어달 전 결혼 20주년을 기념해 구입했다는 5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가 영롱한 빛을 내고 있었다.

영태씨의 집들이는 굉장했다. 음식 값에만 5천불을 들였다고 했다. 이날 나온 음식은 보통 한인들의 집들이나 결혼식, 환갑잔치 등에서 흔히 먹을 수 있는 갈비와 잡채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특별 초빙했다는 궁중 음식전문가가 재현해 낸 임금님 수랏상이었다. 사진에서만 볼 수 있었던 휘황찬란한 음식을 놓고 사람들은 누구하나 선뜻 젓가락을 대지 못했다. 예술 작품처럼 아름답고 정교한 음식을 함부러 흐트르는 게 황송하고 죄스러워서.

집들이에 참석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언제 쯤에야 이렇게 좋은 집에 살아볼 수 있을까. 아니, 언감생심 이렇게 좋은 집은 평생 꿈도 못꿀 터이니 이런 집 규모의 반의 반이라도 되는 집에 한 번 살아봤으면. 누구는 이렇게 돈이 넘쳐나 주체를 못하는 것 같은데 왜 우리는 밤 낮 없이 뼈 빠지게 일 하는데도 늘상 빈주먹일까. 특히 상실감에 상심이 깊었던 사람은 종철씨 부부였다. 왜냐면 종철씨 부부와 영태씨 부부는 이민동기였던 까닭이다.

"눈치가 빨라야 절에 가서도 새우젓을 얻어먹는다더니 세상의 흐름을 읽어내는 눈치가 있어야 돈을 벌지.영태씨는 눈치가 빨랐던 게야"

종철씨는 깊게 탄식했다. 마음은 뻔했지만 겁이 나서 현실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던 자신의 미련함에 대한 후회와 영태씨에 대한 부러움이 섞인 탄식이었다.

15년 전, 미국 생활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나란히 이 땅에 발을 디뎠던 사람들이었다. 공항에 누가 마중을 나왔냐에 따라서 이민자의 직업이 정해진다더니 그들의 첫 직업은 청소일이었다. 미군과 결혼해 미리 미국에 와 정착해 있긴 했었지만 영어에 능통하지 못한 영태씨와 종철씨의 누나 및 여동생이 청소일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황송하고 고맙게, 그리고 기쁘게 청소일을 했다. 왜냐면 그 둘은 한국에서 일용직으로 '노가다' 판을 전전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한 여름 뜨거운 땡볕에서, 아니면 살을 에는 듯한 추운 겨울에 벽돌을 나르고 시멘트를 바르는 막일을 하던 그들에게는 한 겨울엔 따뜻한 히터가, 그리고 여름엔 시원한 에어컨이 팡팡 돌아가는 건물에서 청소일을 하기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노릇이었다. 그러나 단순직이 다 그렇듯 청소일이 하기는 쉽되 돈은 되지 않았다. 남들 퇴근할 때 출근해서 새벽 서너시까지 팔이 아프도록 배큠을 밀고 화장실을 치우고 쓰레기통을 비워도 매달 들어오는 돈은 뻔하기만 했다. 그 뻔한 돈으로 아파트세 내고 차 페이먼트 내고 식료품 사고 나면 주말에 가까운데 여행 한 번 갈 돈도 남지 않는 것이다.

"뭐 좀 돈 되는 게 없을까?"

주말이면 영태씨부부와 종철씨 부부, 그리고 다른 몇몇 부부들이 모여 식사를 하고 어울려 놀았다. 살림들이 넉넉치 않으니 기껏해야 삼겹살과 소주 파티정도였지만 그들에겐 그게 큰 삶의 낙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모여서 하는 대화란 게 늘 뻔했다. 청소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청소하면서 줏어 모았던 깡통을 팔아 고기를 사먹었단 이야기, 아무리 깨끗하게 하느라 해도 성질 고약한 슈퍼바이저 눈에는 성이 차지 않아 늘 번번히 지적을 당한다는 이야기, 일등 시민인줄 알았던 미국 사람들도 가끔은 볼일을 보고 물을 내리지 않아 죽겠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의 끝은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져 불안하고 힘들기만 한 이 놈의 지겨운 청소일을 언제 그만두나 하는 걸로 맺어졌다. 하루라도 얼른 이 발전없는 청소일을 그만 두고 번듯한 직장이나 돈 되는 일을 해 보긴 해 보아야 할 텐데....

자신들이 경험한 청소 일에는 모두 한 마디씩 빠지지 않던 사람들이었지만 그 대목에가서는 딱히 좋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그들이었다. 왜냐면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그들이기에. 영어도 못하고 딱히 기술도 없고 밑천도 없는 그들이 할 게 뭐가 있을까. 매일 같이 똑같은 동선을 따라 하는 청소 일에만 전문인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뭐가 있나 말이다. 그래서 그들의 푸념과 한숨은 말 그대로 푸념과 한숨으로만 그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청소일 말고는 다른 일을 할 만한 능력도 주제도 못되었기에. 청소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라곤 복권당첨밖에 없었기에.

그러나 그중에서 영태씨는 좀 달랐다. 어느 날 그가 한국식 룸살롱을 개업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한국에서 꽤 잘 나가고 있는 먼 친척 조카 하나가 영태씨가 사는 지역에 출장차 왔다가 룸살롱을 열면 돈을 끌어 모을수 있을 거라는 아이디어를 줬다는 것이다. 한국남자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케이블로 한국연속극 보는 것과 기껏해야 골프나 치는 게 다인 이곳 미국에서 한국식 룸살롱이 먹힐 거라고 장담했다는 것이다. 섹시하고 참한 아가씨를 확보하는 것이 문제이긴 한데 높은 수입만 확실하게 보장해 주면 한국에서도 아가씨야 얼마든지 데려올 수 있다고 했다.

영태씨는 친척에게 그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은행에 가서 대출을 받았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처럼 미국 생활 십 년에 어느 정도 영어를 잘하게 된 장남을 앞세우고 은행에 가서 대출을 얻어낸 것이다.그리고 대대로 내려오던 한국의 선산을 팔아치웠다. 선산까지 판 돈을 술집차리는데 다 투자를 하는 것이다.

"글쎄. 한국식 룸살롱이 여기서 잘 될까......."

종철씨를 비롯한 지인들이 염려스런 눈으로 영태씨를 바라보았지만 영태씨는 개의치 않았다. 오래된 건물을 리스해 공사를 빠르게 진행시켜 나갔다. 영태씨가 사는 지역에서 한두 시간 정도 운전해 나가면 대도시가 있다. 거기에는 한국식 룸살롱 흉내를 낸 술집이 서너군데 있었다. 1970년대에 볼 수 있었을 촌스럽고 조악한 시설이었고 아가씨한테서는 연변 분위기가 물씬 풍겼지만 하릴없는 놈팽이들로 인해 늘 성업 중에 있었다. 영태씨는 그 술집들을 둘러보고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저것도 술집이라고......"

영태씨는 그 술집들을 능가할 술집을 차리겠다는 야심찬 계획에 가슴이 부풀었다. 수시로 한국에다 전화해 조언을 구하고 실제로 한국에 몇 번이나 나가서 강남에서 최고시설로 꾸몄다는 룸살롱을 구경하고 오기도 했다.

그렇게 하기를 거의 1년. 드디어 영태씨의 술집이 개업되었다. 영태씨가 지은 자신의 업소명은 '불나방'이었다.

영태씨의 계산이 맞아떨어졌던 것일까. 불나방은 문을 열자마자 밀려드는 손님들로 주체를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한국의 최고 잘 나가는 유흥업소를 그대로 본 떠 꾸몄다는, 그리고 1년 전부터 신문광고를 통해 끌어모은 아가씨들은 모델이나 탤런트 뺨치게 섹시하고 예쁘다는 소문이 한국사회를 넘어 아시안 사회에까지 퍼졌으니까. 그리고 영태씨가 준비한 대리운전 서비스가 손님을 끌어모으는데 큰 역할을 했다. 지금이야 웬만한 술집들도 술취한 손님을 위해 대리운전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영태씨가 불나방을 오픈할 때만 해도 대리운전이란 것은 생소하고 특별한 것이었다. 운전 걱정하지 않고 맘껏 마시고 즐길 수 있는 곳은 그 지역을 통털어 영태씨의 업소뿐이었다. 그러니 자연 남자들의 발길이 그쪽으로 몰릴 수밖에.

그리고 불나방을 찾는 남자들의 가장 큰 주요 목적은 '숙식제공, 한달에 5천 불 수입 보장'이라는 광고를 보고 전 미국 내에서, 아니 한국에서부터 날라 온 아가씨들이었다. 그들은 스무살 안쪽으로 어렸고 술집에서 일 하는 여자들답지않게 청순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으며 남자들의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아가씨들이었다. 긴 생머리를 느려뜨린 그들이 옆에서 오빠아, 어쩌고 하며 애교를 떨어대는데 넘어가지 않을 남자들이 없었다. 남자들은 기꺼이 그녀들을 위해 한 달 봉급을 털었고 심지어는 크레딧 카드까지 긁었다.

불나방에 손님들이 들끓어 영태씨의 주머니가 두둑해지면 두둑해질수록 그 지역에 사는 주부들의 한숨은 높아졌다. 위에서 얘기한대로 하루가 멀다하게 영태씨의 술집을 찾는 남편들때문이었다.

영태씨가 사는 지역에는 여성회라는 것이 조직되어 있었다. 한국여성들로 구성된, 커뮤니티를 위해 봉사도 하고 친목도 다지는 그런 모임이었다. 그 모임의 회장은 스테파니라는 이름을 가진 육십대 여성이었다.미국인 남편을 따라 미국에 온 지 40년이나 되었지만, 그러나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김치를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뼛속까지 한국인인 여성이었다.그녀는 영태씨의 룸살롱 때문에 한인들의 가정에 불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왜냐면 50여명 남짓한 회원들 중 벌써 세 가정이 이혼을 거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일 당장 아파트 세 낼 돈이 없는데 월급의 반을 룸살롱에다 쳐들이고 왔지 뭐예요. 더 이상 난 못참아요. 당장 저 원수같은 룸살롱의 문을 닫게 하던지 이혼을 하고 말던지 결판을 내고 말겁니다."

큰 언니 뻘 되는 스태파니씨에게 회원들은 걸핏하면 하소연을 했다. 그들의 심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스테파니씨였지만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없는 입장인 게 그녀의 딜레마였다. 왜냐면 그 룸살롱 주인인 영태씨는 여성회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한국전쟁 발발일을 기념해 여성회에서는 큰 행사를 열었다. 바로 이 지역에 사는 참전용사를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선물을 증정한 행사였다. 참전용사 및 가족들이 3백명이나 참석한 행사는 성황리에 끝났고 지역 미국신문에서는 이 행사를 자세하게 보도했다. 스테파니씨는 행사의 성공에 아주 크게 고무되었다. 그래서 매년 년중행사로 열 계획까지 세워두고 있는 거였다. 문제는 자금이었는데 그 자금줄을 영태씨가 쥐고 있었다. 왜냐면 이 번 행사에도 만불이라는 거금을 지원해 준 사람이 바로 영태씨였기 때문이다.

회원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영태씨를 조만간 만나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 것 같았다. 사실은 영태씨를 만날 것도 없었다. 스태파니씨가 알기로 술집에 여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녀들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고 나아가서 이차를 나가 매춘을 하게 하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해당당국에 전화 한 통이면 영태씨의 술집에 단속반이 들이닥치게, 그리고 오늘이라도 영업정지를 당하게 할 수 있게 할 수 있었다.

"참 간도 크지....어떻게 미국에서 그런 식으로 버젓하게 범법 행위를 할 수 있는지......."

스테파니씨는 영태씨가 딱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그 술집에 앙심을 품은 그 누군가가 얼마든지 신고를 할 수 있는 일인데 어떻게 태연하게 영업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가는 스테파니씨였다. 그러나 스테파니씨의 우려는 사실화되지 않았다. 영태씨의 술집은 갈수록 승승장구했고 수용인원이 넘쳐나서 옆 건물까지 리스해 확장을 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하여튼 숫컷들이란. 멀쩡한 지 마누라들을 두고 이 놈도 집쩍, 저 놈도 집쩍했던 술집 아이들에게 순정과 돈을 갖다바치고 싶을까......."

스테파니씨가 혀를 찼지만 소문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옆 건물까지 리스해 확장공사를 한 영태씨의 술집, 불나방은 명실공히 그 지역의 큰 명물이 되었다. 아시안 사회를 넘어 미국 주류사회에까지 알려진 명소가 된 것이다.

그리고 1년 후 영태씨가 투자한 돈의 배 이상을 받고 그 술집을 팔게 되었다는 소문이 한인사회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 술집을 산 사람은 중국인이었다고 했다.라스베가스에 두 개의 술집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으로 영태씨의 술집운영 방식을 크게 사서 적정가 이상의 돈을 지불하고 매입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소문이 들리던 어느 날 새벽. 스테파니씨는 요란스레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깨야했다.

"불이 났어요.불나방에 불이 났다고!"

그녀는 신발을 꿰는 둥 마는 둥 바람처럼 차를 몰아 불나방으로 쫒아갔다.

"오! 하느님 맙소사!"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니 엊저녁까지만 해도 휘황찬란한 불을 밝히고 불야성을 이루며 우뚝 서 있던 불나방이 화염과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고 매캐한 연기가 안개처럼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어 바로 옆에 서 있는 사람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소방차에서는 연신 기둥같은 물줄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만 화산같이 분출해내는 화염을 잡기에는 역부족인 듯 했다. 마침내 건물은 굉음을 내며 젖은 자루처럼 폭싹 주저앉고 말았다. 그 광경을 보는 구경꾼들 입에서는 탄식과 신음이 흘러나왔다.

경찰차와 경찰들, 그리고 구경꾼들로 인해 불나방 주위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스테파니씨는 애타는 심정으로 사람들을 헤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영태씨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리고 스테파니씨는 발견할 수 있었다. 소방관들이 뿌린 물로 한강을 이루고 있는 바닥에 철부덕 주저앉아 있는 영태씨 부부의 모습을. 그들 뒤로는 타다 남은 잔해 사이로 연기와 불꽃이 계속 피어오르고 있었다.

스테파니씨는 그들에게로 달려 갔다. 그리고 젖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들 부부를 부등켜 안았다.

"이..이럴 수는 없어...이럴...이럴 수는......"

영태씨는 넋이 나간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공교롭게도 불야성에 불이 난 날이 술집을 사기로 한 중국인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그동안은 구두로만 건물 판매와 매입에 관한 건을 주고받았고 그날, 불이 나던 날 오후에 서로 만나 서류절차를 밟고 사인을 하기로 했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영태씨는 술집을 중국인에게 팔기로 결심하면서 술집에 관한 보험을 모두 해약해버렸다는 것이다. 아무런 혜택도 받지않을 거면서 한 달에 천불 이상을 내야 하는 보험료가 아까운 생각이 든 영태씨가 내린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이제 곧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갈 건물인데 보험이 있음 뭐해. 그동안도 쭉 아무 일 없었는데 행여나 건물 사고 파는 잠깐 동안에 무슨 일이야 생기려구, 하는 얕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2백만불 이상 가치가 있었다는 영태씨의 술집 '불나방'은  단순한 전기 누전에 의한 불로 그렇게 허무하게 순식간에 잿더미로 스러져 버렸고 그 술집을 팔아 만든 자금으로 한국식 '러브 호텔'을 차려볼 거라는 영태씨의 두 번째 계획 또한 물거품이 되어 스러졌다.

그 일이 있고 난 몇 달후 스테파니씨는 영태씨가 집을 은행에 뺏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페이먼트를 감당못해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몇 달후에는 또 영태씨가 이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스테파니씨는 연속으로 계속되는 영태씨의 불운에 가슴이 아팠다. 어쨌든 자신의 여성회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영태씨 아닌가.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랬다고, 여성들의 눈에서 눈물을 뺐던 어쨌던 영태씨는 그동안 한인커뮤니티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었다.

스테파니씨는 영태씨를 초대해 따뜻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었다. 그러나 영태씨가 어디에 가 있는지 행방을 알 수 없는 스테파니씨였다. 마음만 안타까울 뿐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스테파니씨는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갔다가 종철씨 부부를 만나게 되었다.

스테파니씨는 종철씨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일단 급하게 영태씨의 안부부터 물었다.

"영태씨, 그 양반 어떻게 잘 계세요? 한꺼번에 많은 일이 닥쳐서 어떻게 감당을 잘 하고 계시는지 너무 걱정되고 궁금해서.....지금 그 분 어디에 계세요?아직도 이 지역에 계신가요? 건강은 어떠신지요?"

큰 술집을 운영하느라 신경을 많이 써서인지 아니면 체질 때문인지 혈압이 무척 높아 늘 약을 달고 산다는 영태씨의 말을 기억하고 있는 스테파니씨였다. 그때 스테파니씨는 대수롭쟎은 반응을 보였었다.

요즘 혈압이 높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혈압 높은 건 병도 아니라니까요. 그렇게 걱정되시면 운동와 음식조절을 좀 하시던지요.

스테파니씨의 말에 운동할 시간이 어디 있나요, 하고 씩 웃던 영태씨였다.

종철씨의 입에서 나온 영태씨의 소식은 스테파니씨의 가슴을 쿵 내려앉게 했다.

"영태, 그 친구 상황이 영 좋지 못해요. 중풍이 와서요...."

"예에?중, 중풍요?"

"혈압이 말도 못하게 높은 데다가 술집까지 불이 나서 한 푼도 못건지는 바람에 충격이 너무 컸나봅니다. 더구나 집까지 은행으로 넘어가고 마누라마저 잃는 불상사를 겪었으니...건강에 이상이 안생기는 게 이상한 거지요..."

"그래서, 그래서 영태씬 괜찮은 거예요?"

"안괜찮아요. 반신불구가 되어버렸답니다. 휠체어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지금"

"오, 맙소사!"

스테파니씨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종철씨 옆 의자에 털석 주저앉았다. 불행은 불행을 몰고 온다더니 한때 Q지역에서 가장 잘 풀렸다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지독하고 처참하게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을까.

"그, 그래서 영태씬 지금 어디에 계세요? 아직 이 지역에 살고 계시긴 한가요?"

"예. 현재 정부 아파트에 입주해 있어요. 저소득층을 위해 나라에서 주선해 준 아파트 말입니다.....몸을 움직이지 못하니까 간병인이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와서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긴 합니다만. 하여튼 그 친구 신세가 지금 말이 아닙니다..."

식사를 끝낸 종철씨가 일어서려는 모습을 보였으므로 스테파니씨는 다급하게 말했다.

"영태씨가 사시는 아파트가 어디에 있는 건지 혹시 알 수 없을까요? 제가 한 번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우리 여성회가 그분께 신세진 것도 있고요.저랑 회원들이 찾아 뵙고 음식이라도 좀 해드리면 어떨까 해서요......"

스테파니씨의 말에 종철씨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을 겁니다. 제가 찾아가는 것도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해요. 지난 주말엔 우리 집사람이 곰국을 끓여다 갖다주었는데..."

종철씨의 말을 자르며 부인이 나섰다.

"집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어요. 아무도 보고싶지 않다며 냄비를 그냥 문 밖에 두고 가라고 소리를 지르더군요. 그래서 그냥 문 앞에다 냄비를 두고 왔지요.에이구, 그렇게 몹쓸 지경이 됐는데 누군들 만나고 싶겠어요. 나 같아도 아무도 안 만나고 싶겠다...."

"................."

그 몇 달 후.

우연히 스테파니씨는 영태씨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운전을 하고 가다가 빨간불에 걸려 교차로에 잠깐 멈추어 있을 때였다. 파란불이 켜지길 기다리며 무료하게 차창 밖을 내다보다가 힙겹게 휠체어를 밀면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영태씨를 보게 된 것이다.

"!"

스테파니씨는 하마터면 큰 소리로 영태씨의 이름을 부를 뻔 했다. 그러나 스테파니씨는 손으로 입을 막아 가까스로 참았다. 그 누구랑 아는 체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종철씨의 말이 얼른 머리에 떠올라서였다.

휠체어에 앉은 영태씨의 모습은 그동안 스테파니씨가 보아오던 영태씨의 모습이 아니었다. 수세미처럼 봉두난발로 헝크러진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어있었고 몇 달동안 깎지 않은 듯 제 멋대로 마구 자란 수염은 영태씨의 얼굴을 반 넘어 뒤덮고 있었다. 신경써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영태씨인 줄 몰라볼 정도로 그의 모습은 황폐해 있었다.

영태씨는 왼쪽 몸이 완전히 마비된 듯 했다. 어설프고 힘겨운 동작으로 휠체어의 스위치를 조작하고 있는 손은 오른쪽이었다. 그 오른손마저 갈퀴같이 앙상하게 말라 사람의 손이 아닌 것 같이 보였다.

신호가 바뀌어 뒤에 차가 빵빵거렸기에 스테파니씨는 황급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스테파니씨는 고개를 빼서 백 미러로 점점 멀어져 가는 영태씨의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마침내 영태씨의 모습이 백미러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스테파니씨는 조수석에 아무렇게나 찌그러져 있는화장지 박스를 끌어당겼다. 눈물이 마구 흘러내려 시야를 가렸기에, 눈물을 닦아내지 않고는 운전을 할 수가 없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