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씨가 은미씨를 처음 봤을 때 느낀 것은 참으로 곱고 아름다운 여자로구나, 하는 것이었다. 요가 클래스 안의 스무 명 여자 중 은미씨는 단연코 군계일학이었다. 몸 동작을 따라 하기 쉽고 편하게 모두 츄리닝 바지나 짧은 반바지와 헐렁한 티셔츠에, 아니면 레깅스차림 일색인 여자들 속에서도 은미씨는 눈에 확 띄였다. 그만큼 은미씨의 미모가 돋보였다는 말일 게다.
스무살, 서른살의 젊은 여자들을 다 제치고 이제 사십줄에 들어서는, 그러니까 중년기에 접어드는 은미씨가, 쭉쭉 빠진 팔등신 미국여자들 틈에서도 동양여자인 은미씨가 유독 민주씨의 눈에 아름답게 비추어진 것은 착각이었을까. 아니었다. 은미씨의 미모는 그 동네서도 알아주고 있었다. 아름답고 우아한 미모를 그 동네에서 따라갈 여자가 없는 걸로. 그리고 은미씨는 또 팔자가 편하기로도 동네에서 손꼽히고 있는 여자였다.
은미씨는 바다가 환히 내려다 보이는 언덕의 방이 자그마치 여덟 개나 되는 큰 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집에는 실내 수영장이 있었고 웬만한 극장만한 스크린이 설치된 영화방도 따로 있는, 그 지역에서 스무 손가락 안에 꼽히는 화려한 주택이었다. 상주 가정부가 두 명이나 있었고 정원사가 있었으며 집안 일을 총괄하는 집사도 있었다.
그 저택의 안주인답게 은미씨는 십만불이 넘는다는 빨간색 스포츠카 를 몰고 있었다. 그리고 은미씨는 민주씨가 아무리 머리를 짜내며 궁리를 해도 값을 짐작할 수 없는 브랜드의 핸드백이나 신발을 수십 개나 가지고 있었다. 기껏해야 샤넬이니 루이 뷔탕이니 하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명품 이름밖에 모르는 민주씨는 은미씨의 옷장을 구경하고 나서 경외감까지 느꼈었다. 은미씨가 부럽다 못해 존경스럽기까지 했으니까.
"그러니까 한 개에 몇만불이 넘는 이 많은 핸드백과 신발들을 직접, 그러니까 장여사님께서 직접 돈을 지불하고 구입하신 거란 말이예요? 남편님한테서 선물받은 게 아니고요?"
민주씨가 놀라움과 부러움과 질투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묻자 은미씨는 그냥 짧게,그리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래, 다 내가 산 거야. 맘에 들면 그냥 가서 사면 되는 거지 누가 선물해 줄 때까지 기다릴 것 뭐 있어.
민주씨는 그 대답을 듣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오오, 세상에! 하늘 아래 이렇게 화려하고 멋지게 사는 여자도 있구나. 내가 콩나물 한 봉지를 사면서도 옆의 마켓보다 비싼가, 싼가 머리를 굴리며 갖은 궁상을 다 떨고 있을 때 내가 타고 다니는 차 값보다 비싼 핸드백을 망설임 한 번 없이 척척 사는 이런 여자도 같은 하늘 아래에 존재하고 있었구나.....
단 하루를 살더라도 은미씨처럼 살아봤으면, 아니, 은미씨처럼 흥청망청 돈을 쓰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내일 아파트 세 낼 걱정, 공과금 낼 걱정, 돈 걱정 없이 한 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에 민주씨는 잠깐 미묘한 심정이 되었었다.
얼굴 빛이 변하는 민주씨를 보면서 은미씨는 가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부러워? 부러워 할 것 없어. 물질이란 다 부질 없는 거니까. 난 민주씨가 오히려 부럽네...."
은미씨의 말에 민주씨는 비명을 질렀다.
"에엑? 제가 부럽다고요?"
"적어도 민주씬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쟎아......"
은미씨는 그렇게 말하고 쓸쓸하게 웃었다. 그때 민주씨는 은미씨의 말뜻을 몰랐다. 아니, 방금 구경한 휘황찬란한 은미씨의 핸드백과 구두와 의상에 혼이 나가 버려 은미씨의 말뜻을 헤아릴 생각을 못했다고 해야 옳겠다.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은미씨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게 되었을 때야 그 당시 은미씨가 한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인지하게 되었지만.
요가 클래스에서 은미씨를 알게 된 후 민주씨는 부쩍 짜증이 늘었다. 하루종일 가야 햇볕 한 번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방 하나 짜리의 어두침침한 자신의 아파트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은미씨의 넓은 집이 자꾸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사랑하는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고 가슴 벅차던 민주씨였다. 하루 세 끼 좁쌀죽을 먹는 고생도 감수할 만큼 현재 남편 현욱씨는 민주씨 인생에 커다란 존재였었다. 그랬는데 은미씨를 알게 됨으로 자신의 현생활이 너무나 초라하고 구차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최근에 알게 되었어. 미국 속담이 참으로 우리 살림에 적절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낼 것 다 내고 나면 새우깡 한 봉지도 마음놓고 사 먹지 못하는 빠듯하고 구차한 살림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규모있고 알뜰하게 살아보겠다고 매일매일 가계부를 써오던 민주씨가 어느 날 가계부를 집어던지며 남편 현욱씨에게 말했다.
변변한 책상이 없어 식탁에다 랩탑과 책을 펼쳐놓고 공부를 하고 있던 민주씨의 현욱씨는 의아한 눈으로 그런 민주씨를 쳐다보았다.
요가 클래스 티켓을 아내에게 선물하기 위해 석달을 고생했던 현욱씨였다. 학교에서 공부하다 출출할 때는 밴딩머신에서 파는 감자칩 한 봉지, 한 개의쵸코렛 바 생각이 간절했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렇게 몇 푼 되지 않은 용돈을 차곡차곡 모았다. 단지 아내에게 요가 클래스 티켓을 생일 선물로 주기 위해. 하루종일 친구도 없이 컴컴한 방에서 오매불망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아내를 조금이라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아내가 지나가는 말 처럼 '요가나 좀 배워 봤으면'고 했을 때 남편으로서 그 말을 실천하기 위해 1전 한 푼에 벌벌 떨어가며 돈을 모았던 현욱씨였다.
현욱씨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아내의 생일날 육 개월 짜리 요가 클래스 티켓을, 약간 허영기가 있는 아내를 위해 자신들이 사는 아파트에서 멀리 떨어진 부자동네에 위치한 요가 교습소의 티켓을 짠, 하고 내밀었을 때 아내의 입에서 터져나오던 기쁨과 놀라움의 환성을. 그러나 요가 클래스에 다니기 시작한지 몇 달이 지난 지금, 아내의 짜증과 신경질은 갈수록 늘고 있는 것이다.
"가난이 앞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이 뒷문으로 나간다는 미국 속담 말야...."
현욱씨는 아내 민주씨가 지금 하고저 하는 말이 무엇인지 몰라 안경을 치켜 올리며 멀뚱한 눈으로 민주씨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지금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비싼 핸드백이나 구두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그래도 사람이 먹고 싶은 것은 사 먹어 가며 살아야지.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먹고 싶은 것도 참아가며 이런 생고생을 해야 하냔 말이야..."
".............."
"갈수록 짜증이 나서 미치겠어. 이런 구차하고 가난한 생활.내 자신이 비참해서 미치겠어....."
아내의 말에 현욱씨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까닭 모를 비애감을 느꼈다. 여지껏 타일렀던 말을, 고장난 녹음기처럼 똑 같은 말을 다시 해야 하는가. 오오, 이 철없는 아내여! 그러나 현욱씨는 여지껏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해서 아내를 달래주기로 한다. 그 방법 외에는 아내의 심통과 신경질을 잠 재울 방법이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앞으로도 마냥 이렇게 살 게 아니라고 몇 번 말해야 알아 들어? 내 공부가 끝날 때까지라고 했쟎아. 앞으로 2년만 더 참으라니까. 공부마치고 한국에 들어가서 취직만 하면 절대 돈 걱정 안 하게 해줄테니까. 알았지? 남부럽지 않도록 호강시켜 준다고....."
그렇게 말하면 두어마디 더 말 대꾸를 하다가 제풀에 지쳐 잠잠해지던 민주씨였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현욱씨의 말에 더욱 부아가 치미는지 민주씨는 더욱 목소리를 높혔다.
"나중에, 나중에! 그놈의 나중에 소리 듣기도 싫어! 난 지금 현재가 중요한단 말야. 당신 부모님은 생활비 한 번 넉넉하게 보내주지도 않을 거면서 유학은 왜 보냈대? 부모님한테 솔직하게 얘기를 좀 하라니까. 빚을 내서라도 돈을 좀 넉넉하게 보내라고 말이야. 내가 이렇게 거지같이 먹을 것도 못먹으며 비루하게 사는 걸 알면 우리 부모님들은 기함을 할 거야. 기함을 하고 말고...."
그렇게 기함을 할 정도면 니네 부모님한테도 생활비를 좀 보내라고 그러지 그러니?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현욱씨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아내와 싸우는 걸 포기하고 책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불 같이 뜨겁게 사랑해서 결혼했다. 개천에서 용난 격의 현욱씨에게 줄을 서는 많은 여자들에게 곁눈질 한 번 안 주고 오로지 사랑때문에 결혼한 여자가 민주였다. 무엇보다 열렬히 사랑했었기에 아니, 지금도 열렬히 사랑하고 있기에 현욱씨는 아무 것도 아쉬울 게 없었다. 사랑하는 여자, 민주라는 여자가 자신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현욱씨는 너무 행복하고 충만했으니까. 그런데 단 몇 년 만에 이렇게 관계가 어긋나고 있는 게 너무나 가슴이 아픈 현욱씨였다. 현욱씨의 이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주씨는 끝내 한 마디 말로 현욱씨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국에 안 따라 오는 건데......"
그래서 지금 나랑 결혼한 걸 후회하고 있는 거냐고 고함을 치고 싶은 걸 억지로 꾹꾹 눌러참는 현욱씨였다. 대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오냐, 조금만 기다려라. 공부마치고 좋은 회사 취직을 하면 네가 매일 노래부르다시피 하는 명품 가방, 명품 구두를 양 손에 들지도 못하게 많이 사다 안겨 줄테니.....
남편과 한바탕 말씨름으로 저녁 나절을 망친 민주씨는 쓰레기를 버린다는 명목으로 밖으로 나왔다. 쓰레기 봉지를 들고 느릿느릿 걸으면서 민주씨는 내가 왜 이럴까, 하고 반성을 했다. 여러 가지로 짜증이 나서 남편에게 퍼붓긴 했지만 영 마음이 편치 않은 민주씨였다.
이렇게 어렵게 살 줄 모르고 따라 온것도 아닌데 미국생활이 갈수록 갑갑하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미래에 투자한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 남편이지만 현생활이 이러니 갈수록 느는 게 짜증이요, 신경질이었다. 특히 짜증과 신경질은 은미씨의 집을 다녀온 후로 더욱 심해졌다. 세상 참 안 고르단 생각이 갈수록 심화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민주씨가 짜증과 신경질을 낼 때마다 현욱씨는 둘이 얼마나 사랑해서 결혼했는지를 상기시키며 민주씨를 위로하러 드는 것도 민주씨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흥! 그까짓 사랑, 개나 주라지.....
민주는 단 백 불짜리 핸드백 하나도 제대로 사주지 못하면서 사랑타령만 해대는 현욱이 지겹고 한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은미씨가 민주씨를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은미씨가 '저녁을 먹으러 와'라는 말이 아닌 '저녁 식사에 초대 할께'란 말을 했기에 다른 사람도 오는 자린 줄 알았다. 그래서 의상에 각별히 신경쓰고 꽃다발까지 마련해 정시에 도착한 민주씨였다. 그러나 차려진 식탁을 보니 달랑 민주씨 혼자만을 위해 마련된 식탁이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은미씨의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수 차례 은미씨의 집을 드나들었지만 은미씨의 남편을 본 것은 딱 한 한 번 뿐이었다. 키가 훌쩍 크고 배가 적당히 나온, 그리고 염색을 하지 않은 은빛의 머리칼이 잘 어울리는 중년 신사였다. 그는 민주씨를 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고 은미씨와 민주씨, 두 사람이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얼른 자리를 피해주었다.
둘이 참 잘 어울리는 부부다,하고 민주씨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민주씨는 보았다. 은미씨가 남편을 향해 던진 경멸과 멸시의 눈길을, 그리고 은미씨의 얼굴에 나타나는 냉소를.
내가 잘못보았나, 하고 민주씨는 생각했다. 여왕같은 호사스런 생활을 할 수 있게 돈도 잘 벌고 사회적인 위치도 높은 남편에게 보내는 눈길이 너무나 이상했기 때문이다.
나 같으면 업고 다니겠구만......
한국식으로 차려진 저녁 식사는 민주씨의 입에 참 잘 맞았다.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이 분명 타인종 여자이던데 어떻게 한국음식을 그렇게 잘 만들었을까, 감탄이 나올 만큼.
식사 중에 틈틈히 마신 와인으로 식사가 끝날 쯤에는 은미씨는 적당히 취해 있었다.그러나 은미씨는 가정부를 불러 다시 와인 한 잔을 더 가져오게 했다.
"민주씨. 날 부러워 하지 마"
가정부가 날라온 와인 잔을 뱀 처럼 핥으며 은미씨는 민주씨를 향해 말했다.
"내가 가진 모든 것 말이야. 좋은 집, 좋은 차, 비싸고 화려한 물건들은 그저 허상일 뿐이야. 훅, 불면 날아 가버리고 말 바람 같은 허상말이야...."
은미씨는 민주씨가 미처 무어라 대답을 할 틈을 주지 않으며 말했다.
"우리는 모래로 지은 성에 살고 있어. 파도가 몰아치면 언제라도 금방 부서져 내리는 모래성...."
이어 은미씨의 입에서 나온 말. 민주씨는 그 말을 들으며 입맛을 잃어버렸다. 너무나도 놀랍고 경악스럽고 충격스런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은미씨는 대학 때 죽도록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 서로를 위해 목숨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을 만큼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남편과 결혼 한 것은 양쪽 집안의 집안의 강요에 떠밀려서였다. 양쪽 집안의 사업에 득이 되기 위해 은미씨와 남편을 억지로 맺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정략결혼인 셈이다.
은미씨의 남자는 은미씨가 결혼하는 걸 아는 순간 군에 입대해 버렸고 은미씨는 그야말로 펑펑 울면서 눈물의 면사포를 써야했다.
사람은 현실에 순응하는 동물인가. 사랑없이 한 결혼이었지만 사람 하나는 괜찮은 것을 알게 되자 그럭저럭 남편에게 정이 생기는 거였다. 그래서 별 탈 없이 물 흐르듯이 몇 년의 결혼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던 은미씨는 어느 날 청천의 벽력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키 크고 덩치좋고 호남형인 남편이 사실은 동성 연애자였다는 것, 더구나 여자 역할을 하는.
"서재에 들어간 남편이 나오지 않길래 찾으러 들어갔다가 상대방 남자와 전화통화 하는 걸 듣게 되었지. 어디서 간드러진 여자 목소리와 신음소리가 나는 거야.난 첨에 어디 여자라도 몰래 숨겨 들여 와 서재에서 그짓을 하고 있는 줄 알았지. 알고보았더니 그 사람이었어. 내 남편이란 사람. 우리가 아이가 없는 건 바로 그 이유때문이야......."
".................."
"당장 울며불며 친정에 이 사실을 알렸지. 근데 놀라웁게도 우리 친정에서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거야. 물론 시집식구들도...양쪽 집안에서는 부랴부랴 우리를 미국으로 보내더군. 흥. 하늘 아래 가장 추잡하고 더러운 짓을 하면서도 사업수단은 좋았나봐. 아니, 부모님이 대 주신 밑천이 든든해서였겠지?그의 사업은 하루가 다르게 승승장구했지...."
"그..그래서...이..이혼할 생각을 해보지 않았나요?"
"왜 안했겠어? 지금도 하루에 몇 번씩 그생각을 해. 그러나 인간이 불쌍해서 그럴 수가 없어. 우리가 그런 이유 때문에 이혼해 봐. 그의 체면은 어떻게 돼? 그래도 여기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사업가, 존경받는 사업가인데 말이야. 그의 체면은 둘째라치고 그의 집, 우리집은 어떻게 되냐고....."
"..............."
"부모님을 생각하면 이혼은 도저히 할 수가 없어......"
은미씨는 와인 잔에 코를 박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민주씨는 그런 은미씨를 잠자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위로할 말이 떠오르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한다 한들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에.
한참을 흐느끼던 은미씨가 고개를 들었다.
"이런 얘기 남 한테 하는 건 민주씨가 첨이야. 반드시 비밀을 지켜줬음 좋겠어....."
늦은 밤 은미씨의 집을 나서는 민주씨는 착잡한 마음에 한숨을 몇 번이고 내쉬었다. 세상은 돈이 다가 아니구나,아무리 행복해 보이고 별다른 걱정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도 저런 어두운 아픔과 고민은 있구나, 하는 생각에 늘상 책에 파묻혀 사는 남편이 새삼 못견디게 고마와졌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하늘에는 보름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달 때문에 도로는 헤드라이트를 밝히지 않고 운전을 해도 될 만큼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말 할 수 없는 비밀 한가지를 가슴에 지니게 된 민주씨의 가슴은 그저 그믐밤처럼 어둡고 캄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