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여자 하나를 30년 동안 마음에 품고 산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 남자를 늘 아프고 시린 마음으로 바라본 여자의 이야기를.

한 번 맺어진 인연의 자락을 끝까지 이어 온 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를.

당시 여자는 마악 서른살에 접어든 여자였다. 이상과 성격이 맞지 않은 남편과 어렵사리 이혼한 후 자식도 없이 혼자 살던 여자였다. 그리고 남자는 그녀보다  스무살이 많은 사람이었다. 고만고만한 자식이 셋이나 딸린, 그리고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부인을 둔 가장이었다.

그 남자는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너그럽고 자애로운 성품이어서 아무리 고약한 사람이라도 그 남자와는 친하게 잘 지낼 수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그남자는 무엇보다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 남자는 여자에게 눈을 돌리게 되었고 빠지게 되었고 30년이란 세월동안 여자를 가슴에서 떠나보내지 못했다.

그 남자가 30년이란 세월을 끊지 못하고 가슴에 담아두었던 여자는 어떤 사람일까.

척 보면 볼품이 별로 없는 여자였다. 길에서 마주치더라도 두 번 다시는 쳐다보지 않을 용모를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키만 비쭉 큰,  못생겼다고해야 옳을 그런 얼굴이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봐서 후한 점수를 준다해도 10점 만점에 2점이나 3점도 아까울 그런 용모의 여자였다. 그러나 남자는 늘 여자에게 말했다.

"당신에겐 그 누구도 갖지 못한 매력이 있습니다"

그 여자가 가진 매력은 무엇일까.

그리고 또 남자는 여자에게 말했다.

"당신에겐 다른 여자가 갖추지 못한 사람을 끄는 특별하고 독특한 힘이 있습니다"

그 여자가 가진 특별하고 독특한 힘은 무엇일까.

어쨌든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남녀가 어쩌다가 만나게 되었고 그렇게 30년이란 세월을 같이 보내게 되었다.

지금 여자는 육십을 바라보는 중년이 되었고 남자는 머리가 허옇게 세어버린 할아버지가 되었다. 육십을 바라보는 중년이 된 여자와 머리가 허옇게 센 할아버지는 며칠 전에도 전화 통화를 했다. 여자가 최근에 잠을 잘 못잔다는 걸 알게된 남자가 먼저 한 안부전화였다.

"잠은 잘 잤습니까?"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린 여자지만 남자는 항상 존대를 했다.

"예, 그럭저럭이요....."

"어쨌든 잘 자야 할텐데 걱정이네요....."

여자가 말했다.

"잘 자게 되겠지요.그나저나 올해로 우리가 서로 알게 된지 30년 째예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했을까요?"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바라보았지요....."

"당신과 나, 우리 둘의 관계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글쎄요....."

"애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양아버지와 양딸도 아니고 오누이도 아니고 도대체 우리 사이는 무엇일까요?무엇으로 표현해야 할까요?"

"글쎄요...."

"사람들은 우리 둘의 관계를 이해 못할 거예요. 이런 식으로 이렇게 30년이란 세월을 같이 보냈다는 것을요..."

"아마 그럴 겁니다...."

남자와 여자는 봉사단체인 R클럽에서 처음 만났다. 남자는 R클럽의 회장이었고 여자는 이혼한 후 허전한 마음을 달래고저 마악 그 클럽에 신입회원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남자가 후일 말했다.

"처음 당신을 보았을 때 가슴에 큰 울림이 왔어요. 그리고 이상한 예감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저 여자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을......"

남자의 말대로 둘은 인연을 맺게 되었지만 깊은 인연이란 표현은 옳은 표현이 아니다. 인연을 맺었으되 결코 깊은 사이까지 가지는 않았으니까. 그냥 긴 인연이었다. 강산이 세 번 변할 세월을 함께 한 긴 인연.

처음 남자가 여자에게 마음이 가기 시작한 건 여자의 아파트를 처음 방문하면서부터였다. R클럽에서 기금마련을 위해 헌물건을 수거해다 판매하는 작업 때문에 남자가 여자의 아파트를 방문한 것이다.

"제 집에 사다만 놓고 몇 번 쓰지 않은 운동기구가 있어요. 갖다가 팔면 적어도 몇백불은 쉽게 받을 수 있을 거니까 가지고 가세요."

남자는 다른 동료와 함께 여자의 아파트로 그 물건을 가지러 갔다.여자는 출근을 하면서 아파트 열쇠를 매트 밑에다 감추어 두었다. 아무도 없는 작은 아파트 방안. 남자는 그방에서 여자의 향기를 맡았다.그리고 이상하게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며칠 후 발렌타인 데이가 돌아 왔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쵸코렛을 샀다. 그리고 무작정 밤에 여자의 아파트를 찾아 갔다. 쵸코렛을 전해 주겠다는 마음보다는 무조건 여자가 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여자를 찾아간 것이다.

여자의 방엔 불이 켜져있었다. 남자는 포장지에 산 쵸코렛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안 쪽을 기웃거리다가 마침내 남자는 보았다. 종이 두어장이 겨우 들어갈 만한 블라인드 틈새로 보이는 여자의 모습을! 방금 목욕을 마친 듯 젖은 머리를 하고 가운 차림으로 책을 보고 있는 여자의 옆 모습을!

남자는 문을 두드릴 용기가, 여자의 얼굴을 보고 쵸코렛을 내밀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았다. 남자는 블라인드 사이로 보이는 여자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아파트 방문 앞에 초코렛을 두고 그 자리를 떠나왔다. 그날밤, 남자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남자는 느꼈다. 자신이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뿐이었다. 남자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또한 해서는 아니되는 일이었다. 남자가 대놓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끔 여자에게 전화해서 R클럽에 관한 일을 의논하는 일이었다. 누가 봐도 회장과 회원과의 통화쯤 여길만큼 자연스런, 그런.

그러나 날이 가면 갈수록 남자는 여자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불 타오르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런 마음을 혼자 지키고 있다간 말라죽을 것 같은 절박한 심경이 들던 어느 날, 남자는 무작정 여자를 찾아갔다. 그리고 고백했다.

"당신을 좋아합니다. 이런 마음이 애정인지, 사랑인지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고백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루종일 당신 생각만 합니다. 당신 때문에 일이 손에 안잡히고 잠을 잘수가 없고 밥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면 안된다고 자신에게 타일러도 보고 꾸짖어도 보지만 도저히 마음을 정리할 수가 없습니다.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여자는 담담하게 남자의 고백을 들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알고 있었다한들 여자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이었을까. 그냥 묵묵히 남자의 고백을 듣고만 있을 뿐.

남자는 이미 한인사회에 알려질대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리고 나이가 자신보다 한참이나 많은 남자였고 한 여자의 지아비였고 세 남매의 아빠였다.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매몰차게 거절하기에는 남자가 너무나 절실해보였다. 그의 고백에는 한 점 거짓도 없어보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점쟎고 덕망 있는 인품으로 존경받는 남자가 한낱 보잘 것 없는 자신 때문에 잠을 못잘 정도로 고민하고 애태운다니 미안하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그날 이후부터 둘의 미묘한 관계는 시작되었다. 둘은 가끔씩 전화 통화를 했다. 그리고 남자가 여자의 아파트로 찾아갔다. 아무도 없는 아파트 안. 그들이 하는 일은 찻잔을 앞에 놓고 밤 늦게까지 대화를 하는 일이었다.

남자는 한국에서 최고대학을 나온 사람답게 정치,문화,예술,사회,종교등 다방면으로 박식했고 여자또한 책을 많이 읽은 때문인지 남자 못지않게 화제가 풍부했다. 그들이 나눌 수 있는 대화거리는 무궁무진했다.

그들은 서로 털 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앉아서 얘기만, 얘기만 했다.

여자와 함께 있을 때 남자는 구름 위를 둥실둥실 떠가는 기분이었다. 여자의 얼굴만 바라볼 수 있다면 먹지 않아도 배 부를 것 같았고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을 모를 것 같았다.

대학때 동아리에서 만난 부인과 연애해 결혼한 후 앞만 보고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살아온 남자였다. 부인과는 워낙 어릴 때부터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을 가졌기에 부인과는 애틋한 감정, 두근두근거리는 마음이 없었다.

당시 남자의 소원은 단 한 가지였다. 여자를 한 번만 안아 보는 것. 섹스를 하지 않아도 좋으니 여자를 깊고 뜨겁게 한 번 안아 보는 것. 그러나 남자는 자신을 자제했다. 손만 뻗으면 닿는 자리에 여자가 있는데도 남자는 애써 자신의 욕구를 참아냈다. 왜냐면 여자가 자신의 손길을 원하는지 알 수가 전혀 없었기에. 남자는 여자가 원치 않는 것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가 하는 일은 편지로 자신의 마음을 적어 여자에게 보내는 일이었다. 그는 매일 자신의 절실하고 애틋한 마음을 편지로 실어 보냈다.

그러나 여자는 이상하리만치 반응이 없었다. 남자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만큼 표현했는데도 여자는 항상 무덤덤하기만 했다. 여자가 자신을 좋아하기는 하는지 아니면 예의상 자신을 내칠수 없어 그냥 받아주는지 알 수가 없어 남자는 미칠 것만 같았다.

더구나 혼자 사는 여자라 주위의 남자들도 몇몇 여자에게 대놓고 접촉을 하려 애쓰는 것 같아 남자는 더욱 애가 탔다. 그 여자에게 나란 존재는 무엇일까. 남자는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다그치기도 그렇고 물어볼 수도 없는 문제였다.

남자는 다시 여자에게 편지를 썼다. 자신의 미칠 듯한 심정을 고백한 후 편지 끝머리에 덧부쳤다.

-제발 한 걸음만, 한 걸음만 더 내 옆으로 가까이 와요-

남자는 여자를 위해서라면 여자와의 새삶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명예,재산,가족, 다 버릴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인생에서 여자의 존재를 제외시키고 나면 아무 것도 없는 빈 껍질일 것 같았다. 여자가 없는 자신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나중에 세월이 흐른 후 남자는 여자에게 이렇게 당시의 심경을 표현했다.

"내 인생에 있어 중요한 사건이 두어개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당신을 만나 사랑에 빠졌던 것입니다. 짧았지만 강렬했던. 당신은 내 인생에 한 획을 그은 여자입니다."

그러나 남자가 그렇게 타오르면 타오를수록 여자는 한 발씩 뒤로 물러났다. 여자에게는 남자의 사랑이, 그리고 자신이 남자를 사랑하는지 어쩌는지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당시 30대초반이었던 어린 여자는 그저 무섭고 부담스러웠다.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 감수해야 할 모든 조건들이. 남자의 사랑을 얻는 대신 치루어내야 할 모든 댓가들이

지금까지는 운 좋게 다른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았지만(아니 둘만 모르고 벌써 한인사회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는지 모르지만. R클럽 회장이 밤마다 여자회원 아파트로 찾아간다더라, 하는.)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꼬리가 길면 밟히게 되어 있었다. 비록 둘이 아무 짓도 안하고 같이 앉아 대화만 나눈 사이라 하더라도 야밤에 여자의 아파트에서 시간을 같이 했다는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그 파장을 어떻게 감당할까. 여자는 생각만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그때까지 다시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여자는 바깥의 남자에게 눈을 돌리기로 작정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부터 열까지, 단 하나의 조건도 맞지 않는 남자의 자신에게로 향한 불타는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선 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얼른 결혼하는 수.

그리고.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남자를 소개받고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시작한 두어달만에 운좋게 여자는 결혼상대자를 만날 수 있었다. 여자와 나이도 비슷하고 직업도 좋고 성품이나 집안도 비교적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여자는 더 망설일 것도 없이 약혼을 하기로 했다. 하루빨리 남자의 마음을 단념시키기 위해서였다. 간단하게 친구 서너명만 불러 약혼식을 날짜를 잡았다.

여자가 약혼한다는 소식을 들은 남자,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을 만큼, 상심하고 실망했다. 남자는 비통했고 슬펐고 아프고 쓰라렸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좋은 남자, 착한 남자였다.

여자의 약혼식 날. 남자는 스물 네 송이의 분홍장미 부케와 카드를 여자의 친구편으로 보냈다. 친구들 몇 명만 참석한 약혼식장에서 여자는 남자가 보낸 카드를 열어보았다.

-나는 괜찮습니다. 당신만 행복하다면.-

여자는 화장실로 쫒아갔다. 그리고 오열했다. 찢어질 듯 아픈 마음을 숨기고 자신의 행복을 빌어주는 남자의 마음이 너무 고마와서.

서너달 후  열린 여자의 결혼식.

여자는 한 구석에서 담담하려 애쓰며 이쪽을 보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여자는 남자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를 부여잡았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둘은 서로 외면한 채 눈물을 흘렸다. 남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모습을 보는 게 마음이 아파서. 여자는 또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미안하고 죄스러워서.

둘이 외면한 채 눈물을 찍어내는 모습을 사람들이 보았다. 다음 날 한인사회에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여자가 결혼하므로 여자에게로 향했던 남자의 마음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의 상실감은 너무나 컸다. 손안에 가득 쥐고 있던 보물을 놓쳐버린 기분. 남자에게 여자는 사는 이유였고 이 세상의 가장 큰 존재였었다. 그 무엇보다도 더 큰.

밤마다 그는 신음하고 아팠다.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절대 내색을 할 수없었기에 그의 아픔은 더욱 지독했다. 여자가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가던가 죽었던가 해서 눈 앞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면 차라리 잊기도 쉬웠으련만 여자는 결혼을 한 후에도 남자와 한 동네에서 살았다. 그리고 결혼을 한 후에도 R클럽에 나왔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를 잊기 위해 더욱 안간힘을 써야했다. 가까스로 잠자는 듯한 마음이 여자의 얼굴을 한번 보고나면 예전보다 더욱 심하게 소용돌이를 쳤다. 그렇게 남자는 2년을 혹독하게 가슴앓이를 했다.

그러나 바보스럽게도 여자는 남자가 자신 때문에 그렇게 심하고 힘들게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이 결혼함으로 남자가 조금 마음을 다치긴 했겠지만 곧 단념한 줄 알았다. 왜냐면 남자가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기에. R클럽 말고 남자와 여자가 같이 회원으로 있는 한 단체에서 늘 자주 만났지만 단 한번도 너 때문에 죽을 듯이 아프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기에 여자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하긴 남자가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기에 그 후 친구같은 좋은 관계를 이어왔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2년 씩이나 그렇게 힘든 시간을 견디어 냈다는 얘기를 남자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 여자는 울고 싶어졌다.

언젠가는 내가 벌 받을 거야. 한 남자를 그렇게 죽을 듯 아프게 했으니....

30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여느때 같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여자는 남자에게 말했다.

"다시 생각해 보건데 제가 태어나서 이날 이태껏 당신 만큼 저를 사랑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 남편도 당신 만큼 진실한 사랑을 제게 주지는 않았어요. 당신은 저 보다도 더 저를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월은 모든 것을 망각하게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여자에게로 향하던 남자의 불꽃같은 마음은 거의 다 사그라들었다. 여자의 얼굴을 보아도 예전처럼 별 다른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늘 기쁘다. 여자와 같이 차 한 잔을 하기 위해 운전해 나가는 시간은 언제나 설렌다. 마치 소풍을 앞둔 학생처럼.

남자와 여자는 만나도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아직도 한인사회에 많은 봉사를 하고 있는 남자는 한인사회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리고 간간히 이제는 성년이 된 아이들 이야기를 한다.여자는 직장 이야기, 최근에 읽은 책 이야기를 한다.

그 둘 사이에 단 한치의 색다른 감정은 없다. 남자와 여자 사이라면, 이성이라면 당연히 흘러야 할 야릇한 그런 느낌은 전혀 없다. 매우 자연스럽고 평범하다. 물 같다. 무색무취의 물.

앞으로도 그들은 그렇게 같이 세월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같이 늙어 갈 것이다.

남자가 세상을 먼저 떠나든, 여자가 먼저 떠나든 누구 하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저 그런 관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