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두어달 전부터 회사내에서 돌던 흉흉한 소문, 대대적인 정리해고가 곧 단행될 거라는 흉흉한 소문이 사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 일은 몇 시간만 더 일하면 며칠을 쉴 수 있다는 기대감에 모두 부풀어 있던 년말 오후에 일어났다. 갑자기 사무실 안이 소란해지더니 빈 박스를 든 인사과 직원들 몇 명이 들이닥친 것이다. 실내는 삽시간에 경악과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다.

사전에 아무런 통고를 받지 못했던 우리들은 그저 입을 벌린 채 멍한 얼굴로 인사과 직원들의 행동을 바라만 보았다. 정리해고자 대상에 오른 사람들은 인사과 직원이 내미는 빈 박스를 받았고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묵묵히 자신들의 소지품을 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책상에 자랑스레 놓여있던 가족 사진들이, 꽃병들이, 인형들이 박스에 아무렇게나 쑤셔박혔다. 그리고 그들은 인사과 직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사무실을 떠나갔다.어깨를 추욱 늘어뜨리고.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조금전까지만 해도 같이 웃고 떠들면서 연휴계획을 짜던 동료들이었다. 그들 동료들이 떠나간 빈 책상을, 먼지와 폐지만 여기저기 널려진 책상을 나는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이번 정리해고에 내가 포함되지 않은 게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왜냐면 '다음 번'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정리해고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시행될 거니까. 우리 회사는 현재 수익을 전혀 내지 못하고 있다. 회사가 그냥 땅 파서 운영하는 데가 아니니 곧 이어 2차 해고를 단행할 전망인 것이다.

 

나는 회사에서 지원해 준 사무용품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내 책상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정리해고가 단행될 거라는 소문을 들은 그날부터 나는 준비를 철저히 해두었다. 책상위에 있던 소품들을 집으로 다 옮겨둔 것이다. 혹시 다음 번에 인사과 직원이 내게 박스를 내밀더라도 '난 박스같은 건 필요 없거든?'하고 일갈하고는 핸드백만 들고 우아하게 자리를 뜨게끔 말이다.  해고되어 나가는 주제에 소지품을 담은 박스까지 들고 나가는 구질구질한 모습을 보이긴 싫으니까.

매스컴에서는 말한다. 건국이래 가장 심각한 불황이라고.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다. 내가 미국 온 20년 동안 이런 지독한 불경기는 없었으니까.

미국온 지 몇 년 후 잠깐동안의 불경기를 겪은 적이 있었다. 걸프전쟁이 한창이던 1992년도였던가, 그랬을 게다.

그때 나는 건물 청소 일을 하고 있었는데 회사에서 불경기를 이유로 청소료를 슬금슬금 깎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천 칠백불짜리 빌딩이 천 오백불로 내려갔고 몇 달뒤 천 이백불로 내려갔다. 아무리 불경기라도 그렇지. 차라리 동결을 했으면 했지 청소료를 깎다니, 이게 무슨 소리냐며 항의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워낙 낮은 단가로 치고 들어오는 러시안들과의 경쟁에 밀리지 않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

그때의 막막하고 아득하던 심경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다.

들어오는 수입에 맞추어 바늘 꽂을 틈도 없이 빡빡하게 살던 나는 내일이라도 곧 굶어 죽을 것만 같은 걱정에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지 않았고 지갑 속에 숨어있던 페니까지 탈탈 털어 막 구입했던 집이 금방이라도 은행에 넘어갈 것만 같아 밤에 잠이 안왔다.

직장을 잃고 매달 나가는 페이먼트를 감당못해 은행에 집을 뺐긴 지인들이 당시 한두명이 아니었던 때였으니까. 그때 나는 '주부생활'이란 여성잡지에 매달 기고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실정을 '빨간 잉크로 가계부를 쓰는 한인들'이 제목에 담아 썼다.

그 글을 읽어보면 청소료가 깎이면서, 그러니까 매달 들어오는 수입이 줄게 되면서 내가 생활에 얼마나 절박해 했었는지 다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것은 그렇게 밤마다 나를 태산처럼 짓누르던 걱정 근심이 평생 갈 줄 알았는데 지나간 과거가 되더라는 것이다. 그때 곧 죽을 것만 같이 힘들고 어렵던 시절도 지금 생각하면 그저 꿈같이 아스라하다. 그러니까 모든 근심과 걱정은 물론 기쁨과 행복 또한 흐르는 세월과 함께 바람과 함께 다 지나가고 마는 것, 그것이 우리 인생인 것이다.

건국이래 가장 심각하다는 이 불황도, 꿋꿋이 잘 버티기만 하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