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하고만 어울린다고 남편이 아무 말 안해요?"

 

내가 쓰는 글에 가끔 나오는 이니셜의 인물들이 대부분 남자들이란 사실을 밝히고 난 뒤 주위의 몇몇 사람들이 물었다.

아내가 외간남자들하고 친한 데도 가만 있는 남편이 있다니 아마 그집 남편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 틀림없는 것 같다면서.

그러면서 그들은 덧부친다. 참으로 부럽기 그지 없네요 하고.

그러나 나는 안다. 말은 그렇게 좋게 해도 속으로는 '부처님 가운데 토막은 무슨! 분명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남자가 틀림없는 게지' 하고 비웃고 있다는 것을.

나의 열혈팬을 자처하는 한국의 한 젊은 남성은 '흑기사들을 좌악 거느리고 다니는 이계숙씨' 어쩌고 하는 인사말을 내 사이트에 남겼다.

그 글을 읽고 나는 엄청 웃었다. 흑기사들이라고? 아이고, 내 주제에 무슨 흑기사들 씩이나. 흑기사들이 나 같은 여자에게 곁눈질이나 해줄까. 사실대로 밝히자면 내 글 속의 남자들은 모두 다 비실비실한 노인네들이다. 육십세를 한참 넘어 내일모레 칠순을 바라보는 '할배'들인 것이다.

아직 '할매' 소리 들을려면 십여년은 더 있어야 하는 여자가 왜 그런 할배들하고만 어울리냐고?

그 할배들, 고혈압이니 당뇨니 하는 노인병들을 하나씩 가지고 때 맞추어 약을 챙겨먹어야 하는 할배들, 같이 어울려 식당가면 시니어 디스카운트를 꼬박꼬박 챙겨받는 할배들, 그러나 내겐 더할 나위없이 편하고 정다운 친구들이니까.

미국와서 20년동안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이들 할배들을 친구로 사귄 일이다. 내가 그 어떠한 말을 해도 비난하지 않고 내 편이 되어주며 아무리 어려운 부탁을 해도 기꺼히 들어주는 할배들, 이들은 나이를 초월한 나의 친구들인 것이다.

그 할배들과 나와의 관계를 내 남편이 다 알고 있듯이 할배들의 부인들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저런 말이 없다. '밤길을 갈 때 별다른 호신품이 필요치 않는, 얼굴이 무기'인 이계숙이니까 절대로 자기 남편들이랑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하고 있기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안심해 하는 것 같다. 그걸 어떻게 아냐면 어쩌다 할배들 집에 전화라도 하면 부인들이 얼마나 반가와 하는지 오히려 내가 미안할 정도이니까.

최근에 Q씨가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세상 헛살았은 걸 알았다며 당분간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에서 근신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럴 만도 했다. 미국와서 27년동안 사귀었던, 친형제처럼 가깝다고 여기고 있던 친구한테 좀 어려운 부탁을 했다가 거절당했다는 것이다.

허물없이 온갖 속사정 얘기까지 다 나누던 사이였을 뿐 만 아니라 상대방이 몇 년 전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도 Q씨가 옆에서 가장 큰 힘과 위로가 돼주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 부탁을 당연히 들어주리라 믿었다고 했다. 그런데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말아서 Q씨가 깊은 상처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 일이 알려지고 난 후 가진 모임에서의 주제는 자연스레 '진정한 친구'란 무엇인가가 되었다.

자라온 환경과 학력이 다르고 나이대가 다르고 또한 현재 종사하고 있는 직업들이 다르며 생활수준이 각각인 미국 이민생활에서 과연 진정한 친구를 사귈 수 있는가. 우리가 내린 결론은 드물지만 있을 수 있다,였다. 그렇다면 진정한 친구를 어떻게 가려낼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졌는데 H씨가 말했다.

"새벽 두시 쯤에 전화를 하는 거야. 그리고 차가 고장이 나서 오도가도 못한다며 서너시간 걸리는 거리로 픽업을 오라고 해보는 거야. 그 시간에 단숨에 달려오는 친구는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있지"

"그거 말 되네....."

H씨의 말이 일리가 있다며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새삼 내 주위사람들을 하나하나 꼽아보았다. 새벽 두시에 전화해 장거리 픽업을 부탁했을 때 성가시고 귀찮다고 생각안하고 허겁지겁 달려와 줄 진정한 친구, 고맙게도 나는 열 손가락이 모자랄 만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친구, 그런 진정한 친구, 당신 옆에는 지금 몇 사람이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