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씨를 만났는데 얼굴 표정이 밝다. 한달 전쯤 극심한 통증과 함께 손등이 퉁퉁 부어올라 병원을 찾았다가 통풍이라는 진단을 받았는데 최근 재검사 결과 통풍이 아니라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 손목을 너무 무리하게 써서 오는 단순 관절이상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통풍은 거의 비대한 사람이 잘 걸리며 손이 아니라 대부분 발에 온다는 사실을 인터넷에서 확인했었던 나는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올렸다.

"거 봐요. 제가 통풍이 아닐 거라고 했지요? 이제 예전처럼 마음대로 잡수셔도 되겠네?"

통풍이라는 진단을 내리면서 의사는 J씨에게 이것저것 가려야 할 음식 리스트를 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가려먹어야 할 음식이란 게 모두 한국인이라면 늘상 먹는 음식들 뿐이었다. 새우와 조개를 먹으면 안되고 쇠고기를 비롯해 닭고기, 돼지고기도 먹으면 안되고 생선도 먹으면 안되는데 특히 등푸른 생선, 즉 꽁치와 고등어를 먹으면 안되고 푸른 채소중 시금치와 블로컬리를 먹으면 안되고.....

"아이고, 차 빼고 포 빼고 그럼 대체 뭘 먹으란 말이요?"

그렇쟎아도 비쩍 마른 몸에 온통 먹지 말란 것 뿐이니 앞으로의 J씨 건강이 심히 걱정이 되었던 내가 비명을 올리자 J씨도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할 수 없지 뭐. 밥하고 김치나 꾸역꾸역 먹을 수밖에......"

잘 먹는다, 잘 먹는다, J씨처럼 아무 음식 가리지 않고 잘 먹을까. 해방둥이로 태어나 하도 못 얻어 먹으며 자라서 그런지 먹을 수 있는 건 절대로 사양하지 않고 다 먹는다는 J씨, 그는 약하게 생긴 몸집과는 달리 양도 엄청나게 컸다. 보통땐 세 그릇이 기본이며 배 고플 땐 네,다섯 그릇도 뚝딱 해치우는 양반이었으니. 그런 그가 이것저것 음식을 가려먹어야 할 입장이었으니 그동안 얼마나 고충이 컸더랬을까.

나도 한동안 음식을 가려먹어야 했던 때가 있었다. 2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였다. 혈압도 정상,콜레스트롤도 정상인 내게 왜 뇌졸중이 왔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의사는 피 묽어지는 약을 한동안 복용할을 것을 권유했다. 혹시라도 재발할 것을 염려한 의사의 배려였다. 나중에 밝혀졌는데 나의 뇌졸중 원인은 극심한 스트레스였다. 혈압이 정상이라도, 평소 건강해도 단시일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장에 무리가 가서 피 순환이 제대로 안된다고 한다. 그래서 혈전이 생겨 뇌졸중이 생긴다고 했다.

약을 복용하는 동안은 섭취를 전면 금지해야 할 식품이 있었는데 바로 비타민 K가 들어간 음식이었다. 깻잎,배추,시금치,녹차등 푸른색이 들어간 채소.

그때 나의 상심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컸다. 심심하고 밍밍한 병원밥만 일주일을 넘게 먹다가 퇴원하면서 가장 간절히 바랐던 게 칼칼한 배추김치로 입맛을 확 돋구는 것이었는데 그걸 먹을 수 없다니!

마침 위문차 들렀던 지인이 멸치 젓갈을 듬뿍 넣고 버무린 배추김치를 한 병 가지고 왔는데 냉장고를 열 때마다 나는 눈을 감아야 했다. 지인이 갖다준 배추김치병과 함께  깻잎 장아찌가 있었던 것이다.

저 시뻘건 배추김치를, 잘 삭은 저 깻잎을 갓 지은 쌀밥에 척척 걸쳐 볼이 터지게 좀 먹어봤으면 나중에 산수갑산을 가더라도 원이 없겠다 싶었다.

약 한 달간 약을 복용했었는데 그 한 달이 내겐 지옥이었다. 평소엔 별로 신통챦게 여기던 채소들도 먹지 말라고 하니 얼마나 더 입맛에 당기던지 말이다.

커피 매니아였던 L씨도 혈압이 높다는 진단을 받고 최근에 커피를 끊었다. 하루에도 대여잔씩, 커피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할 수 없다던 그녀였지만 고혈압에 커피가 안좋다는 얘기를 듣고 큰 결심을 한 것이다. 한동안은 두통 등 금단현상에 고생하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디카페인 커피도 마시지 않을 정도로 잘 견뎌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가끔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설탕과 크림을 잔뜩 넣은 한국식 냉커피를 상기시키면서 약을 올린다.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던데 웬만하면 커피, 그냥 마셔보지 그래? 그렇게 좋아하는 커피까지 끊고 얼마나 천년만년 오래 살려고?"

아무 음식이나 마음껏 잘 먹으며 산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이런저런 일을 통해 다시 깨닫고 있는 요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