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한 아버지 밑에서 한국식 교육으로 자라면서 다른데 눈 돌리지 않고 지금까지 자라온 자식들이 곧 이성을 사귀게 될 것이고 그 아이들이 백프로 한국인 이성 친구들만을 사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아줌마는 잘 알고 있었다.

자기 집안의 평화와 고요가 적어도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큰 집 딸들로부터 감지하고 아줌마는 눈에 띄게 불안해 하고 있었다.

생일잔치에 다녀온 아줌마 남편은 더욱 기고만장했다.

"흥, 항상 뻣뻣하기만 하던 고개가 테이블에 닿을 듯 푹 수그려 든 꼴이라니. 내 형님이지만 고소하더군. 자기는 표를 안내려고 애를 쓰는데 기가 팍 죽은 게 눈에 보이더라니까. 내 그럴 줄 알았어.고년들이 공부 잘 하고 인물 잘 났다고 작은 아버지인 내게까지 콧대가 높더니 기껏 사귄다는 게 맥작이야! 망할 년들.그 인물 가지고 어디가서 한국남자를 못 만날 거라고 맥작들을 사겨,사귀길!"

나는 아무말 하지 않았다.

몇년여를 두고 말씨름 해 보았지만 아줌마 남편의 머릿속에 박힌 타 민족에 대한 거부감은 조금도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여기서 한마디 더 거들어 봤자 내 머리만 아프고 아줌마 남편과의 사이만 안 좋아질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아무말 않자 아줌마 남편은 내가 자신의 생각에 수긍하는 줄 알았는지 더욱 입에 거품을 물었다.

 

"고년들이 딸들이기에 망정이지 아들들이었으면 어쩔뻔 했노,가문에 난데 없는 맥작 피가 섞일 뻔 하지 않았나! 형님도, 형수도 이제 내 앞에서 더 이상 딸년들 자랑 못하겠네. 그동안 있는대로 큰 소리 쳤는데 입이 부끄럽게 되지 않았나!"

날이 가면서 아줌마 남편의 형님집 딸들에 대한 흉은 내가 그 집을 들릴 때마다 강도를 더해갔다.

 

딸들에게 남자친구와 헤어지지 않으려면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다며 사생결단을 내자고 덤벼들었다가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는데 왜 아빠가 간섭이냐'고 대드는 바람에 아줌마 남편의 형님과 형수가 기절일보 직전까지 갔다는 이야기, 애인과 흥청망청 돈 쓰며 어울려 다니는 게 싫어서 용돈을 두어달 끊었더니 집안에 감추어 두었던 현금이 점점 없어져서 다시 할 수 없이 용돈을 주었다는 이야기, 작은 딸의 애인은 길게 기른 머리하며, 팔뚝의 문신으로 봐서 분명 범죄자 아니면 마약하는 놈 같다는 이야기....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쇼핑몰에 갔다가 가까운 지인을 만나 차라도 한잔 할 요랑으로 몰 안의 오픈 커피숍으로 갔다가 아줌마 딸을 만나고야 말았다.

여기서 내가 만나고야 말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내가 그동안 알게 모르게 우려했던 일들이 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을 마침내 목격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늦은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춥지도 않은 지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탱크탑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그 아이 옆에 나이가 좀 위인 듯한 남자하나가 그 아이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연신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머리를 레게 스타일로 가닥가닥 꼬은 흑인이었다!

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채 멍하니 그들을 바라 보았다.

 

흑인을, 세상에! 지 아버지가 제일 못마땅 해 마지않는 흑인을 ....!

누가 지들을 바라보는 지 마는 지 관심조차 없이 복잡한 오픈 커피숍 한 귀퉁이에서 몸을 밀착한 채 연신 입을 맞추고 있는 아줌마 딸과 흑인 남자, 쇼핑몰 안이면 어디서나 부딪치게 되는 평범한 커플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불행의 그림자를 보았다면 과장일까?

경악하리마치 놀란 내가 입을 벌린 채 서 있자 지인이 왜 그러냐며 내 팔을 잡았고 나는 부랴부랴 서둘러 지인의 옷자락을 끌고 그 커피숍을 뛰쳐 나오고 말았다.

행여라도 아줌마 딸이 나를 보면 큰 일이었다.

서둘러 커피숍을 나오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하면 안된다고 다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다짐을 지켰다.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었지만 나는 내 입으로 그런 엄청난 이야기를(아줌마와 아줌마 남편한테는 그야말로 엄청난 이야기였다)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속으로 제발이지 아줌마 딸이 그 흑인 남자 친구와 헤어지게 되길 빌었다.

아줌마와 그 남편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경우 받게 될 충격이 어느만치인지 알고 있었던 내가 할 일은 그 방법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어쩔수 없이 아줌마 집을 방문할 때마다 아줌마와 남편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제비를 끊였으니 먹으러 오라는 전갈을 받고 차에 시동을 켜면서 '적어도 오늘은 아무일이 없구나' 안도하는 나날이 계속됐다.

그러기를 서너달 동안했는데 염려했던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자 나는 안도하면서 차츰 아줌마 딸의 이야기를 잊어갔다. 아니 내가 그 무렵 너무 바빠서 아줌마 집에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고 해야 옳겠다. 당시 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 매일 데이트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적어도 한달에 두어번 정도는 들리던 아줌마 집에도 서너달 가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 전화로 안부만 물었을 뿐이다.

전화기로 들려오는 아줌마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집안에 별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는 낌새는 전혀 없어 보였다.

나는 안심하고 내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큰 나의 착각이었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