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때?"

"뭐가?"

"뭐긴 뭐야. 일 말이야. 좀 익숙해졌어?"

"뭐 그저 그래...."

"아직도 많이 바빠?"

"으응........"

"이렇게 늦게 들어왔는데 내일도 일찍 출근 하는 거야?"

"으응......."

"............."

수화기 속에서 잠깐동안 침묵이 이어진다. 선희는 그 침묵이 별로 애닯지도, 궁금하지도 않다. 오히려 얼른 좀 전화를 끊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전화기를 한 쪽 귀에 대고 옷을 벗는 게 불편해서다. 그러나 선희는 먼저 자기 입으로 전화를 끊자는 말을 안 한다. 아니, 못한다. 선희는 양손으로 번갈아 전화기를 잡아가며 쟈켓을 벗고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스커트의 지퍼를 내린다. 그리고 텔레비젼을 틀고 냉장고로 걸어 가서 물병을 꺼내 입을 대고 마신다.

"물 마시니?"

"으응......"

"저녁은 먹었어?"

"으응......"

"별로 할 말이 없는 모양인데 그만 전화 끊을까?"

오, 드디어 저쪽에서 전화를 끊을 기색을 보인다. 선희는 자신도 모르게 반갑다는 티를 살짝 목소리에 묻히고 만다. 그래, 그럼 끊자, 하는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던 것이다. 이래선 안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선희는 변명을 한다.

"요즈음 너무 많이 피곤해서.....미,미안해..."

"그래, 그럼 끊을께......."

"잘 자....미안해...."

"괜찮아. 너도 잘 자...."

엔드 버튼을 누른 후 선희는 지그시 입술을 깨문다. 미안하단 말을 해놓고나니 자신이 바보같단 생각이 들어서다. 뭐가 미안한데. 정말 뭐가 미안한데. 반갑고 살갑게 전화를 받아주지 못해서 미안한가, 전화를 끊자는 말에 기쁜 티를 내서 미안한가. 항상 이런 식이다. 뭘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미안하고 죄지은 것 같은, 뭔가 주눅드는 듯한 기분.

그렇다고 그쪽의 조건이나 상황이 선희보다 월등히 나으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선희는 떳떳하고 당당하지 못한 걸까. 왜 그럴까. 유진이 다만 남자이기 때문이다. 선희는 엄마로부터 세뇌당한 것이다.아무리 못나고 무능한 남자라도 남자는 여자 보다는 월등하다......

저나 나나 오십보 백보, 도토리 키 재기지 뭐.....

선희는 잠옷을 머리에 꿰면서 생각한다. 지금 둘이 결혼해 엮어진다해도 서로 밑질 것도 없고 이득될 것도 없는 그런 집안, 그런 가족들. 그리고 선희와 유진.

선희가 7년 째 사귀어오고 있는 남자, 유진은 팔순이 가까워 오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사남매의 장남이다. 밑의 여동생 하나는 시집가서 그냥저냥 살고 있다. 선희가 생각하기에 유진 집안의 큰 문제는 유진의 위로 있는 누나들이다. 오십이 넘은 누나 하나가 아직 마땅한 직업도 없이 유진이 생활비 전체를 대고 있는 어머니의 집, 엄밀히 따지면 유진의 집에 얹혀살고 있다. 또 바로 밑의 누나 역시 이혼한 후 틴 에이저 아이들 둘을 데리고 혼자 사는데 생활이 말이 아니다. 그래서 걸핏하면 유진의 주머니에서 가욋돈이 나가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대학 졸업후 바로 들어간 직장에서 지금까지 근속하며 적쟎은 급료를 받고 있으면서도 여지껏 마땅한 집 한 채 없이 렌트로 전전하며 궁핍하게 사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나가는 돈이 너무 많은 것이다.

지겨워. 지겨워 죽겠어.....

유진은 선희 앞에서 늘 푸념한다. 가족이란 끈으로 얽혀서 꼼짝달싹도 못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 지겹고 싫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진 역시 선희와 마찬가지로 제손으로는 절대로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그 끈을 풀어내지 못한다고 말한다. 마음같아선 단 일년만이라도 아무도 모르는데 가서 지금까지 누리지 못한 자유를 누리고 싶지만 가족에 대한 부양의 의무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유진이 선희의 집에서 자고 갈 때가 있다. 처음엔 서로 좋아서, 정말로 헤어지기 싫어서였다. 그러나 7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 시들해질대로 시들해진 지금, 서로에 대해 새로울 것도 없고 궁금할 것도 없는 지금, 서로의 벗은 몸을 보아도 별다른 감정이 없는 지금. 선희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라기보다 지긋지긋한 가족들을 대하기 싫을 때이다. 자신의 얼굴만 쳐다보고 앉아 있는 어머니와 누나의 얼굴을 보는 게 염증이 날 때, 그럴 때 유진은 선희집을 찾는다. 그리고 자고 가는 것이다.

"내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으면 아마 그 달로 우리 큰 누나와 어머닌 길거리로 나 앉게 될 걸. 그리고 굶어 죽을 거야. 우리 어머니도, 큰 누나도 정말 대책없는 사람들이거든. 아니, 최소한의 양심이나 염치조차도 없는 사람들이지. 나가서 내 손으로 단 돈 10불이라도 벌어 내 아들 유진이, 내 동생 유진이 어깨에 얹힌 짐을 적으나마 덜어줘야지,하는 생각조차도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

선희는 생각했었다. 유진과 비해서는 그래도 내가 조금은 낫군. 적어도 우리 부몬 굶어죽진 않을 테니까. 생활력 강한 엄마가 있으니까. 엄마는 구걸을 해서라도, 빈 깡통을 줏어모아 팔아서라도 목숨은 연명해 가겠지. 유진이 가족들처럼 하늘만 쳐다보고 있진 않을 거야....

유진이 가족들 때문에 너무 속상하다며 운 적도 있는 걸 선희는 기억하고 있다. 작년 겨울 초입이었나. 직장 동료들과 저녁을 먹고 오는 길이라며 유진은 술에 잔뜩 취한 채 찾아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울었다. 어릴 때부터 꿈 꾸어오던 차를 사려고 모아놓았던 돈을 몽땅 여동생 집 사는데 보태준 날이었다고 했다.

그날 유진은 울면서 절규했다. 아아, 내 어머니와 내 누나들은, 내 여동생은 지독한 거머리들이야. 내 몸에 기생하며 내 피를 빨아 먹는 거머리! 이러다간 내 몸의 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몽땅 다 빨리고 말거야.그리고 나는 빈껍데기만 남아 어딘가에 던져져 숨을 거두고 말거야.....

가엾은 유진....

선희는 버릇처럼 한숨을 내쉰다. 7년을 사귀어오면서도 서로 먼저 결혼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은 각자의 사정을 너무 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함으로, 유진과 선희의 살림이 합쳐짐으로, 얽히고 설키게 될 짐들이 너무 골치가 아프니까 아예 겁을 먹고 먼저 결혼에 대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흥. 둘이 결혼을 한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나. 각자 나누어 지던 짐을 합쳐서 같이 지고 간다는 것 뿐....

샤워를 하지 않고 바로 잠옷을 걸쳐 입은 몸이 어딘지 모르게 끈적끈적거리는 것 같다.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 선희는 목욕탕쪽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인다. 벌써 열한시가 넘었다. 샤워를 하고 머리 말리고 어쩌고하고 나면 너무 늦을 것 같다. 선희는 세수만 하는 걸로 마음을 다시 바꾼다. 샤원 내일 아침에 하지 뭐.

일단 클린싱 크림으로 얼굴부터 닦아내야겠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틀어올리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무슨 일이지. 유진이 다시? 침대에 아무렇게 던져둔 전화기로 손을 뻗치려던 선희는 잠시 그 자리에서 흠칫한다. 혹시 엄마가? 갑자기 가슴이 두 방망이질 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해올 사람은 유진과 엄마 말고는 없다. 그러나 엄마는 웬만해서는  한밤중에 전화를 하지 않는다.  집에 무슨 큰 일이 있지 않고는. 선희가 얼마나 일에 지쳐 피곤해 하는지 잘 아니까. 선희는 전화기의 액정화면을 본다.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집이 아니었다. 선희는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쉰다.

"네에_."

"강선희씨?"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다. 한국말. 깊은 동굴에서 울려나오는 듯 울림이 있는 목소리. 굵은 저음의 목소리.

"나, 박익준이요."

"네에?"

"나 박익준이라고. 나 몰라요? H&K에서 보았었쟎아...."

"아, 예에..."

박익준. 선희가 H&K 공인회계사 사무실에 처음 입사했을 때, 그러니까 지난 1월, 옆 책상에 앉아 일하던 남자다. 더 높은 연봉을 받고 다른 회사로 스카웃되어 간. 두달 동안 선희와 책상을 나란히 하고 일했었지만 사적인 대화를 나눈 것은 손에 꼽을 정도인. 아니, 대화가 아니라 박익준이 일방적으로 먼저 말을 했었다.

그때 박익준이 한 말을 어제 일인 듯 선희는 아직도 기억한다.

선희씨, 어디 살아요? 여기 H&K에 오기 전엔 어디서 일 했었어요? 오늘 입은 회색 투피스 멋진데요? 머리 잘랐네요? 오, 선희씨 립스틱 색깔이 바뀌었군요.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남자가 자신의 머리모양이 바뀐 것에 대해, 그리고 립스틱 색이 달라진 데 대해 아는 척 해오는 것에 선희는 영 불편했었다.

선희는 흘낏 벽에 걸린 벽시계를 본다. 열 한시 십칠분이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이 남자가 내겐 무슨 볼일일까.

"잤어요?"

"아,아니요..."

"그럼 뭐했어요?"

"예에, 그...그냥...."

"지금 들어왔어요?"

"예,...예...지, 지금 마악....."

"그래요? 그래도 나 보단 퇴근이 빠르군. 난 지금 막 사무실 문을 나서는 길이요....."

"예에, 그..그러셨군요......."

선희는 호흡이 가빠져서 오른 손으로 가슴쪽을 지그시 누르면서 고개를 전화기에서 살짝 돌려 상대방이 들지지 않도록 심호흡을 한다. 아, 갑자기 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지......

"궁금하지 않아요?"

"네? 뭐라고 그러셨나요?"

고개를 돌리느라 상대의 말을 놓쳤기에 선희는 수화기를 바짝 귀에 갖다대고 조심스레 묻는다. 죄,죄송해요. 잘못들었어요. 방금 뭐라고 그러셨나요?

"궁금하지 않냐고 그랬소"

"뭐, 뭐가요?"

"이런. 맹추같은 아가씨같으니... 내가 선희씨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내 이런 늦은 시간에 전화를 했는지 전혀 안 궁금해요?"

"아, 예에......."

그렇다. 궁금하다. 이 남자가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 밤늦게 왜 내게 전화를 왜 했을까.

"나 선희씨한테 관심이 있었거든..... H&K에서 일할 때 선희씨의 전화번호를 입수했어요....."

"............."

선희는 잠깐 정신이 아득하다. 입속 가득 침이 고여 온다.이 남자는, H&K 공인회계사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십여명의 남자 중, 기혼 미혼을 합쳐 가장 눈에 뜨이던 남자였다. 멋있고 잘 생긴데다 점쟎고 과묵하던. 그래서 어찌보면 도도하고 거만하게까지 느껴지던 남자. 그나저나 이 남자, 박익준이 지금 내게 뭐라고 하는 건가. 선희는 박익준이 밤늦게 전화를 걸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전신의 힘이 빠질 만큼 놀랍고 황홀한데 자신에게 관심있어 전화번호를 알아냈다는 말에 기절하기 일보직전이다.

선희는 얼굴에 바르려고 손끝으로 덜어냈던 클린싱 크림을 도로 통안으로 밀어넣는다. 그리고 끈적끈적한 손바닥을 잠옷에 마구 닦아내며 부엌으로 나간다. 아무래도 찬물을 한잔 마셔야 정신을 차릴 것 같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도 이건 놀랍다. 정말 놀랍다.

"듣고 있어요, 선희씨? 금방 전화하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전화할 시간이 없었어. 새로운 곳에 가서 분위기 익힐 새도 없이 정신없이 일 해야 했으니까. 알다시피 지금 텍스시즌이지 않소. 오늘은 그래도 퇴근이 빠른 편이예요. 매일 밤 열두시 넘어서 집에 들어 갔지......."

"예에......"

"오늘은 죽어도 전화를 해야 할 것 같았어........"

"예에....."

"그래서 지금 뭐 해요?..........."

"네... 그...그냥........"

"자려고 준비 해요?"

자려고 준비하느냐는 박익준의 말에 선희의 얼굴이 붉어진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씻지도 않고 잠옷을 걸친 자신의 깨끗하지 못한 몸을 박익준이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늦게 전화해서 미안해요..."

"예에......."

밤 늦게 전화해서 미안하다는 말인지 전화번호를 입수해놓고도 시간을 끌고 늦게 전화해서 미안하다는 말인지 혼돈스러웠지만 선희는 대답을 해놓고 본다. 머리속과 더불어 입술도 꽁꽁 얼어붙은 것만 같다. 예에, 라는 말 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가끔 전화해도 되죠?"

"그..그럼요......"

언제든지요. 아무 때라도 상관없어요. 저 항상 늦게 자니까요,하고 덧부치고 싶은 것을 선희는 황급하게 입을 틀어 막아 참는다. 선희는 왜 박익준이 자신에게 전화를 했는지 이유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당신한테 관심있어서,라고 하긴 했지만 그건 석연치 않은 이유다. 선희가 생각하기에도 박익준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만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선희는 눈에 뜨이지 않는 여자다. 평범한, 지극히 평범한 여자다. 키도, 얼굴도,스타일도 무엇하나 자신있게 내놓을만 한 게 없는, 무엇하나 특출하게 뛰어난 게 없는 여자다.

미국온 지 20년동안 자신의 손으로 돈을 벌어본 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무능하고 게으른 아버지, 세탁소로, 식당으로, 청소일로 세월을 보낸 힘 없고 나약한 엄마.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남미계통 남자의 아이를 임신해 결혼식도 변변히 올리지 못하고 지금 근근히 살아가는 여동생 선주, 그리고 엄마의 간절한 희망을 무시한채 비뚤어진 길로만 나가고 있는 선우. 선희의 등뒤는 어두컴컴하고 구질구질한 짐들이 가족이란 이름으로 버티고 서 있다. 기껏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선희 자신의 직업. 공인회계사란 선희의 직업. 그러나 선희는 집안을 돌보느라, 그리고 늦게까지 공부해 공인회계사가 되느라 결혼 적령기를 놓쳐버린 늙은 처녀다. 서른 다섯 살의 처녀.

그에 비해 선희가 생각하는 박익준은 까마득하기가 하늘 같다. 박익준이 가진 조건은 선희와는 비교도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선희는 전화기를 손에 든채 빠른 걸음으로 방안을 서성거린다.

한번 이혼을 했다지만 요즘 한번 이혼이 딱히 흠이 될 것은 없지. 암. 흠이 되지 않고 말고.더구나 박익준에겐 딸린 아이도 없는 것 같다. 헤어진 와이프에 대한 이야기는 두어번 비추었어도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한번도 하지 않을 걸로 미루어 봐서다. 아니, 딸린 아이가 한둘 있음 어때. 두세명의 여자로부터 네,다섯의 아이들만 아니라면 말이지. 그는 다른 공인회계사 사무실에서 스카웃을 해갈 정도로 실력이 있는 남자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영화배우처럼 잘 생기고 멋있다. 사십대 초반이라는 그의 몸은 온갖 종류의 운동으로 다져져 삽십대라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이 섹시하고 탄탄해 보였다. 오오, 그리고 그가 타고 다니는 스포츠 카. 십만불을 호가한다는 은색의 스포츠 카.

선희는 박익준이 운전하는 날아 갈 듯 날렵한 은색의 스포츠 카 조수석에 자신이 타고 있는 상상을 해본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부풀어 터질 것 같다.

가끔 전화해도 되죠, 한 말로 봐서는 그 은색의 스포츠 카를 타 볼 기회가 전혀 없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선희는 해본다.

'그나저나 그 남자는 목소리조차 어쩌면 그리 굵고 황홀하지?'

조금 전에 자신의 귓전을 울리던 박익준의 목소리가 아직도 남아 있는 듯 해 선희는 머리를 흔든다. 아무래도 샤워를 하지 않고는 들뜬 몸과 마음을 식힐 수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 전에 꿰었던 잠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목욕탕으로 직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