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모두들 늦잠을 자는 호사를 부리며 휴일의 아침을 만끽하는 일요일이었다. 그러나 은봉의 하루는 오전 여섯시부터 시작되었다. 때그르르르, 고막을 찢을 듯 울어대는 알람 시계를 손바닥으로 눌러 끄면서 은봉은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비벼 떴다. 몸이 돌덩이를 매단 듯, 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무겁다. 죽을 듯 피곤하다는 말이 바로 이런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일 거야, 하는 생각을 하며 다시 이불속으로 몸을 뻗으려던 은봉은 불에 덴 듯 얼른 일어난다. 오늘은 마켓에 한 시간 더 일찍 출근해야 하는 것이다. 어느 교회에서 야외야배를 간다며 김밥을 8백줄이나 주문했다는 것이다.
"오늘 하루종일 김치담으시느라 피곤한 줄은 압니다. 그러나 내일은 우리 모두 정신을 바짝차려야 하는 날입니다. 이 지역에서 제일 큰 교회에서 들어온 주문입니다. 다른 여러곳의 마켓들을 제치고 우리 마켓에 김밥을 맡겼다는 게 무슨 뜻인지 여러분들 잘 아시지요? 약간의 실수라도 있어서는 절대 안됩니다. 손톱만큼의 실수없이 완벽하게 약속한 물건을 만들어야 할 겁니다........"
어저께 퇴근 무렵 매니저 양씨가 직원들을 불러놓고 한 말이 은봉의 머리에 아직도 어른어른 남아 있다. 손톱만큼의 실수도 없이 8백줄의 김밥을 훌륭하게 말아달라는 말. 손톱만큼의 실수라는 표현. 그 표현은 김밥에 손톱만큼의 불순물도 들어가지 못하게 각별히 유의해 달라는 말이었다.
진짜 귀신이 곡할 노릇도 있지...
은봉은 주전자에 물을 받아 스토브에 올리고 가스 불을 당겼다. 그리고 두 봉지의 인스턴트 커피를 컵에 털어넣으면서 중얼거렸다. 한올의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게 머리를 꽁꽁 싸매고 음식을 만들어도 그 어디에서 날라들어갔는지 한두개의 머리카락이 음식에 들어가서 손님들로부터 경을 치는 일이 가끔 생기는 것이다.
일주일에 200병 이상의 김치를 담그는데 그중 한 두병에서 반드시, 라고 말할 정도로 머리카락이며 돌이며 비닐조각이 나오는 것이다. 며칠 전엔 그릇 닦는 파란수세미 조각이 김치에서 나왔다며 생난리를 치는 여성 때문에 식품부가 발칵 뒤집어진 적이 있었다. 김치 다섯병과 100불짜리 상품권을 공짜로 주는 걸로 겨우 무마하긴 했지만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생난리를 치지않고 부엌으로 와서 다른 사람 듣지 않게 살짝 귓뜸을 해주는 여성들이 있기도 하다.
"저, 며칠 전에 사간 김치에서 머리카락이 나왔어요. 좀 더 신경써주시고 조심하셔야겠어요...."
그런 여성일수록 공짜로 김치나 상품권을 주겠다는 제의를 정중하게 거절한다. 반면에 온 마켓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환불이나 반품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 마켓측에서 제공하는 공짜 선물을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가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무사하게 지나가게 하소서. 맛이 있고 없고는 다음 문제이고 음식에 불순물이 들어갔다고 항의하는 손님이 제발 한 명도 없게 하소서.....
은봉은 속으로 빌었다.
어쨌든 내가 만든 김치는 최고니까....
며칠전 선희도 와서 말했지만 요즘 김치맛이 무척 좋아졌다는 말을 손님들로부터 많이 듣는다. 매니저 양씨도 칭찬을 했었다. 은봉이 김치를 책임지고 나서 매상이 거의 배로 올랐다며 자기 돈으로 아이스 바와 음료수까지 사서 전 식품부 직원에게 돌렸던 것이다.
참 고마운 분이지....
은봉은 매니저 양씨만 생각하면 그저 기분이 좋다. 난로 앞에 앉은 것처럼 마음이 훈훈하고 푸근해진다는 생각을 한다.
은봉의 남편 호성과는 다른 품성의 사람이다. 호성이 인정머리 없고 게으르고 저 자신밖에 모르고 가끔은 난폭하기까지 하다면 매니저 양씨는 따뜻한 사람, 점잖은 사람인 것이다. 하긴 평생을 은봉의 어깨에 혹처럼 매달려 무위도식하며 지낸 남편에 비할 건가. 매니저 양씨는 한국에서 중학교 교장을 지낸 인테리가 아닌가 말이다.
암, 비교가 안 되지, 비교가 안 되고 말고.
커피를 마시고 난 후 세수를 하기 위해 화장실 불을 켜던 은봉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아무리 호성이 남편, 가장 구실을 못해도 남편은 남편이고 가장은 가장이다. 아이들 아버지고 호적상 지아비이다. 그 누구랑 비교해서는 안되는 거다. 그런데 지금 은봉은 자신의 남편과 매니저 양씨를 비교하고 있었지 않은가 말이다.
'얼른 좋은 마나님을 만나야 할텐데......'
치매에 걸린 아내를 8년이나 수발했다는 매니저 양씨다. 자식들이나 주위에서 제발 생고생 하지말고 요양원에다 갖다 맡기라고 수십차례 권유를 해도 끝까지 보살피다가 임종까지 지켰다는 매니저 양씨다.
만약 내가 그런 처지라면?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마친 얼굴에 크림을 바르면서 은봉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친다. 호성이라면 8년은 고사하고 단 두달도, 아니 단 한 달도 보살펴주지 않을 거다. 귀찮은 짐짝 부리듯 얼른 요양원에다 팽개치고 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릴 거다. 그리고는 죽을 때까지 얼굴 한번 비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이고, 그러니까 내가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한다니까. 그런 더러운 꼴을 안보려면....
은봉은 머리를 빗고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꼼꼼하게 펴바른다. 평소엔 잘 바르지 않던 화운데이션이다. 눈 주위에 든 멍 때문에 어쩔수 없이 바르는 것이다. 딸 선희가 왔다가던 날 저녁, 호성으로부터 주먹으로 얻어맞았다. 거무죽죽하게 든 멍이 창피해서 마켓일을 하루 빠질까도 생각했지만 입사한지 겨우 서너달밖에 안된 주제에 일을 빠질 수가 없었다. 부랴부랴 다음 날 새벽 딸을 시켜 파운데이션을 가져오게 한 것이다.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은 파운데이션을 바르지 않으면 눈에 뜨일 만큼이다.
"아버진 그 더러운 버릇 아직도 못고쳤대? 저러다가 언젠가는 손목에 수갑차고 감옥으로 끌려가고 말지...."
잠을 제대로 못자 푸석푸석한 얼굴로 선희는 은봉의 전화를 받자마자 달려왔다. 자신이 쓰던 건데 엄마의 얼굴에 색이 맞을지 모르겠다는 걱정을 하며 한참 동안이나 은봉의 얼굴을 쳐다보고 가던 선희.
선희를 생각하면 은봉은 마음이 너무 아프다. 부모 잘못만나 철이든 이래 지금까지 부모 뒷바라지에 동생들 뒷바라지에 편할 날이 없는 딸인 것이다. 결혼도 못한 채 나이를 먹어가는 선희를 보면 낳아놓기만 했다고 부모 노릇 하는게 아니구나, 싶어 그저 죄책감만 든다.
선희를 맘 편하게 하려면 호성과 싸우지를 말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 그날도 기껏 해놓은 음식을 타박하길래 몇마디 말대꾸를 했다가 날아온 주먹에 눈 눈두덩이를 맞고 만 것이다. 얼른 피했기에 멍만 들고 말았지 까닥 잘못했다간 눈알이 빠질 뻔 했다.
화장을 다 마친 은봉은 부엌으로 나간다. 밥통을 열어보고 냉장고를 열어서 남편이 오늘 하루 먹을 음식을 확인한다. 그리고 흘낏 작은 방을 바라본다. 작은 방은 어젯밤 은봉이 자러 들어가면서 봤을 때처럼 똑같이 굳게 닫겨져 있다. 선우가 들어왔는지 방문을 열어 확인하려다 은봉은 식탁 의자에 걸쳐놓았던 스웨터를 집어든다. 들어와 자고 있어도 속상하고 빈 침대를 확인해도 속상한 건 마찬가지인 것을 굳이 확인해 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열쇠를 찾아들면서 은봉은 버릇처럼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여섯시 이십오분. 서너 블락 거리에 있는 버스정거장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십여분이면 도착한다. 은봉을 태운 버스가 빙빙 돌면서 버스정류장마다 섰다가 떠난다해도 매니저 양씨가 말했던 8시까지는 충분하게 도착 할 것 같다.
문을 열자 싸한 새벽공기가 탄산음료처럼 은봉의 얼굴에 내려 앉았다. 오, 이 상쾌하고 차가운 공기. 은봉은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면서 호흡을 크게 한다. 그리고 가방을 땅에 내려놓고 가볍게 맨손체조를 한다. 들이마신 신선한 공기로 가슴이 마냥 푸풀어 오르는 것 같다. 만족감으로 가슴이 충만해지는 것 같다.
그동안 은봉은 아침이 오는 게 두려웠었다. 부족한 잠에 깨어나 천근같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야 했던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의 아침시간은 하루 중 은봉이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 되었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고요하고 청량한 이른 시간. 드라이브 웨이로 나가 몰래온 손님처럼 배달되어 온 신문을 주워 큰 제목을 훑어보는 시간. 간밤에 움추렸던 팔다리를 활짝 펴고 마음놓고 기지개를 펴보는 시간. 앞 뜰에 핀 꽃과 인사말을 주고 받으며 서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
은봉은 가방을 주워들고 큰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은봉이 아침을 좋아하게 된 게 언제적 부턴가. 마켓에 출근하는 것을 그다지 힘들다고 생각치 않게 된 게 언제부터였는가...
거기까지 생각하다 은봉은 갑자기 얼굴을 붉힌다. 그리고 혹시라도 누가 자기의 붉어진 얼굴을 볼새라 앞뒤를 돌아보며 두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이른 아침. 햇살이 아직 고개를 내밀기전인 어슴프레한 아침. 간간히 차들만 헤드라이트를 켠 채 빠르게 은봉의 곁을 지나갈 뿐 은봉이 걷고 있는 길엔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도 않는다.
은봉은 손지갑과 집 열쇠, 그리고 복용하는 약병이 담긴 작은 가방을 누가 뺏을새라 움켜쥔다. 그리고 저 멀리 버스 정거장이 있는 큰길이 보이기 시작하자 뛰듯이 걸음을 빨리 한다.
매니저 양씨가 식품부 일을 관장하고서부터다. 10여년을 식품부를 맡았던 매니저 윤씨가 최근들어 바짝 더해진 관절염을 이유로 퇴직하고 나서 생선부와 육류부에서 일하던 양씨가 식품부로 오게 된 것이다. 석달전 입사해서 누가 누군지 분간을 못하고 얼떨떨한 은봉이었지만 매니저 양씨가 누구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부엌에서 일하는 아줌마들 사이에서 양씨는 언제나 화제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예의 중풍든 마누라를 내치지 않고 8년이나 수발을 들다 임종을 지켰다는 순애보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그 순애보가 아니더라도 매니저 양씨는 부엌 아줌마들 사이에서 인기가 매우 높았다. 선하고 인자한 얼굴에 걸맞는 점잖은 품성때문이었다.
"아무리 언쨚은 일이나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양씨는 생전 목소리를 높히는 법이 없고 얼굴 붉히는 법이 없대. 완전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 따로 없다는군. 어린애로 돌아가버린 마누라를 8년이나 수발하다가 화내는 법을 잊어버렸다고 수군대던데....."
마켓에 처음 입사하던 날부터 은봉과 친하게 된 춘자가 전해준 말이다. 식품부, 주류부, 채소부,생선& 육류부를 털어 총 네명의 한국인 매니저가 있는데 모두 다 성질들이 개떡같고 지랄맞다는 것이다. 직원들을 자기 집 하인부리듯이 윽박지르고 구박한다는 것이다. 목구멍이 포도청만 아니라면 당장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로 멸시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온화하고 유순한 양씨의 인품이 그 네명의 매니저들 사이에서 유독 돋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이 생전가야 큰소리 한 번 내는 법 없는 매니저 양씨 팀만이 말썽도 제일 없고 직원들의 이직률도 낮다는 것이다. 전 직원이 친 아버지처럼, 친 삼촌처럼 매니저 양씨를 좋아하고 따른다는 것이다.
외투를 벗기는 것은 햇볕(유화)이지 바람(강경)이 아니니까, 하고 은봉은 그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했었다. 그러면서 은봉은 도대체 매니저 양씨가 어떻게 생긴 사람일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에 대한 좋은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어갔다. 그러나 같은 마켓안에서 일하지만 부엌에 처박혀 김치나 담그고 김밥이나 말고 야채나 다듬는 일이 다인 은봉은 양씨를 만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어쩌다 부엌을 벗어나 마켓안으로 갈 일이 있을 때 은봉은 괜스리 이리저리 기웃거려 보곤 했다. 혹시라도 매니저 양씨를, 그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라는 남자를 먼 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어서. 그러던 어느날 운좋게 은봉은 직원 휴게실 앞에서 양씨와 마주칠 수 있었다. 첫눈에도 적당한 키와 적당한 풍채의 중년 남자가 양씨라는 걸 은봉은 알아챌 수 있었다. 겨우 육십대 중반이라는데 눈같이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가 양씨의 트레이드 마크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은봉은 양씨의 하얀 머리카락이 아니더라도 그가 양씨임을 금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돗수높은 안경 뒤로 보이는 선하고 인자한 눈빛 때문이었다. 세상에, 사람의 눈이, 60평생을 세상 풍파를 겪고 살아온 남자의 눈이 저렇듯 어린 아이처럼 천진하고 맑을 수도 있구나. 저런 착하고 선한 양반의 보살핌을 8년씩이나 받고 돌아간 마나님은 참으로 복많은 사람이었구나......
그날. 처음 보았던 양씨, 그의 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던 따뜻하고 편안한 기운을 지금도 은봉은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후부터도 일부러 마켓으로 나갈 기회를 만들어 여기저기를 기웃거려보았지만 두 번 다시 그를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매니저 윤씨가 갑작스레 퇴직을 하고 예의 양씨가 식품부를 맡게 된 것이다.
은봉이 양씨에게 품은 감정은 존경이었다. 그리고 선망이었다. 자신은 한평생 가져보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과 선망. 그러나 은봉은 남 몰래 생각하기도 했다. 남자라는 권위 하나만으로 평생을 자기 위에서 제왕처럼 군림해온 남편, 호성대신에 매니저 양씨같은 남자와 단 하루만이라도 살아봤으면. 보살핌 받고 사랑받으며, 애정어린 눈길을 주고 받으며 단 하루동안만이라도 부부의 인연을 맺어봤으면.
굳이 매니저 양씨가 아니라도 좋았다. 그저 따뜻하고 편안하고 자상한 남자면 족했다. 아플 때 이마를 짚어주며 걱정스런 눈길을 보내는 남자, 외출했다 돌아오며 감자 칩 한봉지를 사다 주는 남자, 물 없이 밥을 먹고 있을 때 물 한 컵을 따라 말 없이 식탁에 놓아주는 남자......
그것은 스물 몇살에 결혼한 이래 사십년 가까이 호성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과 보살핌을 받아보지 못하며 살아온 은봉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었다. 호성과 헤어지고 매니저 양씨같은 사람을 만나 재혼을 한다면 모를까.
거기까지 생각하다 은봉은 몸서리를 쳤다. 아무리 개차반 같은 남편이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번도 이혼이라는 생각을, 호성과 헤어져 남남이 된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은봉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은연 중에 호성과 헤어지고 난 후를 상상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호성의 반찬 걱정, 다음 달 집 페이먼트 걱정등 부양의 의무에서 벗어나 아무런 제약이나 구속도 없이 홀가분한 자유의 몸이 된 자신을.
은봉은 아무도 없는 버스 정류장에서 서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이고. 망칙도 해라.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담.....
얇은 스웨터 한 장을 걸친 은봉의 몸에 와닿는 공기가 찼다. 4월이라도 해도 아직은 완연한 봄이라 하기엔 이른 날씨였다. 그녀는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빼고 버스가 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몇분 내외면 버스가 도착 할 것이다. 맘 좋게 생긴 흑인 할아버지가 운전하는. 오, 아니다. 오늘은 1시간 일찍 타는 버스이므로 흑인 할아버지 운전사가 아닐지도 모른다. 운전을 할 줄 모르는 은봉은 마켓까지 늘 버스를 이용했다. 버스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30분 간격으로, 그리고 토요일, 일요일엔 1시간 간격으로 운행되고 있었다.
지금 향 좋은 커피 한잔을 마셨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은봉은 한다. 그동안 가끔 휴대용 커피 머그에 커피를 담아다니면서 마셨다.얼마 전 그 휴대용 커피 머그를 잃어버리고는 아직 새것을 사지 못하고 있다. 선희가 사다준대놓고는 워낙 바빠서 그런지 아직까지 못사오고 있는 것이다.
운전을 할 수 있었다면 한달음에 가서 사올 수 있을 텐데....
60평생 살아오면서 은봉이 한 가장 큰 후회가 있다면 미국오자마자 운전을 배워놓지 않았던 거다. 예전에는 호성이 태워다주었고 선희가 운전을 할 줄 알게되자 선희의 신세를 많이 졌다. 그리고 웬만한 데는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런데 선희가 독립해나가면서 운전을 할 줄 모른다는 게 미국생활에 얼마나 큰 제약을 받는 일인지 은봉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은봉은 운전을 배워보려고 시도를 했었다. 이제와서 다 늦게 운전은 배워 뭐하느냐고 일언지하에 무시하는 호성에게 거의 빌다시피 매달려 며칠 운전교습을 나갔다가 포기하고 돌아온 게 지난 달이었다. 고양이 쥐 잡듯 윽박지르고 핀잔주고 멸시하는 호성의 기세에 눌려 단념하고 말았던 것이다.
운전을 한다는 게 이렇게 절실할 줄 알았다면 다른 일을 다 제쳐놓더라도 배워 놓을 건데....
은봉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버스가 왔다. 은봉은 손가방을 곶추잡고 버스에 올랐다.
"하이...."
"하이...."
1시간 일찍 타는 버스이므로 운전사가 다를 줄 알았는데 예의 그 흑인 할아버지 운전사였다.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얼굴. 한국에 몇 년 나가 있었다며 몇마디의 한국말도 할 줄 아는 할아버지. 그러나 은봉은 영어를 전혀 못한다. 맘 같아선 흑인 할아버지 옆 좌석에 앉아 마음껏 한국에 대한 수다를 떨고 싶었다. 떠나온 지 20년이나 된 내고향 산천이 얼마나 아름답고 수려한지, 사람들의 인심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수다를 떨고 싶지만 은봉은 그럴수 없다.
운전도 못하고, 영어도 못하고 완전 반병신이지 뭐....
속으로는 자기비하에 속이 있는대로 상하지만 얼굴에는 천치같은 웃음을 함빡 흘리고는 은봉은 뒷자석으로 걸어 간다. 앞에 앉았다가 혹시라도 흑인 할아버지가 말이라도 걸면 그 감당을 어찌하나 싶어서 은봉은 늘 뒷좌석을 찾아 앉는 것이다.
그런데.
" ! "
오오, 이런 꿈 같은 일이!
늘 비어있다시피 한 뒷 좌석에 남자 한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바로 매니저 양씨였다. 아침 내내 은봉의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던 남자, 매니저 양씨!
"안녕하세요..."
매니저 양씨가 먼저 은봉에게 인사를 했다. 은봉은 얼이 빠져버린 사람처럼 그냥 손잡이를 잡고 서 있다. 버스가 출발하고 흔들리면서 은봉의 몸도 같이 휘청거리며 흔들렸건만 은봉은 얼른 자리를 찾아 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왜냐면 버스에 매니저 양씨가 타고 있으리라곤 꿈에도, 꿈에도 생각못한 일이므로 너무 놀란 것이다. 정말이지 너무 놀라운 일이 버스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다 넘어지겠어요......"
손잡이에 매달린 채 이리저리 휘청대는 은봉을 매니저 양씨가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다가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서너걸음 성큼성큼 걸어서 은봉에게로 다가 간다. 양씨가 한 일은 은봉의 손을 잡아 끌어다 자기 옆자리에 앉힌 일이었다.
"............"
은봉은 죄지은 사람처럼 양씨의 옆자리에 앉았다. 엉거주춤 앉은 자세가 금방이라도 날아 갈 듯 위태롭다. 그런 은봉을 양씨가 염려스럽게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자리 잘 잡고 앉으세요. 그러다 버스가 급정거라도 하면 저만치 날아가 떨어질 수 도 있으니까...."
".........."
"미세스 강, 이 버스 타고 다니세요?"
"............"
"집이 이 근처인가보죠?"
"............"
"내가 이 버스에 타고 있는 게 그리 놀라워요?나 매일 아침 이 버스로 출근합니다..."
"..........."
매니저 양씨의 물음에 아무 대답을 못하는 은봉이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러다가 팡, 하고 폭발이라도 하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 들 만큼. 은봉이 대답을 하지않자 양씨도 더 이상 묻지 않는다. 고개돌려 그저 묵묵히 창밖만 바라볼 뿐.
고개를 숙인 은봉의 눈에 양씨의 손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리고 손가락에 낀 결혼반지도 은봉의 눈에 들어온다. 버스 천정에 달린 불빛을 받아 그 결혼반지는 희미한 색깔로 반짝거리고 있다.
그 결혼반지를 보면서 은봉은 갑자기 목이 메인다. 마나님이 세상을 떠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결혼반지를 그대로 끼고 있는 남자. 그 어떤 여자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바늘 끝만큼도 안보이는 것 같은 절망감이 목구멍으로 쳐받쳤기 때문이다. 왜 그런 절망감을 은봉이 느꼈을까. 은봉의 절망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니저 양씨는 그저 차창밖으로 눈길을 주고 있고 버스는, 은봉과 매니저 양씨를 태운 버스는 새벽의 찬 공기를 뚫고 앞으로 계속 내달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