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듯 들려왔던 아줌마의 그 목소리가 결코 평온한 목소리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잠결에 전화를 받은 나는 처음엔 아줌마가 내게 전하려는 멧세지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줌마는 그냥 경찰에 전화를 걸어달라고 말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렇게 이른 아침에 경찰은 왜요? 도둑이라도 들었어요?"

수화기 속에서 바람소리 같은 정적이 잠시 이어지다가 다음과 같은 말이 흘러 나왔다

 

"애 아빠가 죽었어. 뒷뜰 감나무에 목을 맸어........."

 

".........."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아줌마의 말이 너무나 현실감이 없어서 나는 한동안 수화기를 들고 멍하니 있었다.

 

"너무 무서워서 있을 수가 없어...집엔 나 혼자야...빨,빨리 경찰을......"

 

우려했던 일이 결국 벌어지고야 말았다.

아줌마와 남편이 자신의 딸아이가 흑인 남자와 어울려 다니는 걸 결국 알고 만 것이었다.

 

남편의 인종차별에 대한 생각을 진작 반대하고 있던 아줌마야 그렇다 쳐도 '내 자식만은,내 딸만은 절대 타 민족인들과 어울리지 않을 것' 이라는 철저한 신념 하나로 타민족과 어울리는 남의 자식들을 흉보고 손가락질 해 온 아줌마 남편의 충격과 상심은 글로 표현하지 못 할 정도였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부터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달고 살았다.

지난 15여년 동안 단 한번 도 빠지지 않고 성실하게 다니던 직장을 병가를 핑게로 한 달여나 빠졌다.

자신의 자식이 흑인과 어울려 돌아 다니는 줄 모르고 걸핏하면 남의 자식들을 욕했으니  한국인 동료들이 자신을 얼마나 비웃겠냐며 직장을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직장동료야 남이니 그렇다치고 그동안 거품을 물고 욕을 해댔던 형님네는 또 자신을 보고 뭐라고 하겠냐며 아줌마의 남편은 괴로워 했다고 했다.

 

"백인이나,아니 차라리 멕시코인이었더라면 괜찮었을거라고 매일 되내었어..술만 마시면 자기가 하도 타민족들을 싫어하고 무시해서 벌 받는 거라고 괴로워 했어....."

 

아줌마 남편이 죽기 전날 저녁, 남자를 사귀기 시작하며 외박을 밥 먹듯 하던 딸이 그 흑인남자와 함께 집에 찾아 왔다고 했다.
찾아온 이유는 임신이었다.

딸은 부모에게 당당하게 임신했음을 알리며 이제부터 학교를 그만둘 것이며 그 흑인 남자와 살림을 차리겠다고 통고했다는 것이다.

 

희한한 건 아줌마 남편의 태도라고 했다.

아줌마가 전해준 말로는 펄펄 뛰며 생난리를 칠줄 알았던 남편이 딸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멀거니 쳐다 보기만 했다고 했다.

"이상하다 했지, 그렇게 잠자코 있을 양반이 아닌데...임신까지 했다니 아예 체념을 해 버렸나 하는 생각도 했지...죽으려는 마음을 그때부터 먹고 있는지도 모르고....아이구 미련하기는..내가 그 때 알았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옆에서 지키고 있을 걸.."

아들은 친구집에서 잔다고 미리 초저녁에 나갔고 딸도 가 버리고 나자 집안에는 아줌마와 남편만 남았다고 했다.

"그저 아무말 없이 응접실에 앉아 술만 마시더라고....딸년 일에 너무 신경을 써서 기진맥진했던 내가 소파에 쓰러져 깜박 잠이 들었다가 깨어 났을 때도 그냥 똑 같은 모습으로 술을 마시고 있어 나는 그냥 안심하고 들어가 잤지. 그런데 새벽에 깨어나 옆을 보니 아이 아버지가 없길래 이 양반이 아직도 술을 마시나하고 응접실에 나가 보니까 술병만 뒹굴고 있는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뒷꼍에 나가 볼 생각을 못 했지 뭐야...하도 안돌아 오길래 혹시 바람 쐬러 뒤꼍에 나갔나 하고 나가 봤더니 글쎄...."

아줌마 남편의 장례식 날엔 비가 많이 왔다.

평소 괴팍했던 그의 성격답게 장례식장엔 조문객이 별로 없었다.

몇 안되는 사람들 틈에서 파리한 얼굴로 울고 있는 아줌마 딸의 모습이 보였다.

내 눈이 저절로 그 아이의 아랫배로 향했다. 별다른 표시가 나지 않아 보였다.

'이것아,니 아빠 성격을 잘 알면서 어쩌자고 그랬니, 니 아빠에게 충격을 좀 덜 주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작고 연약한 아줌마 딸아이의 어깨에 평생 따라다닐 죄책감을 생각하며 나는 장례식 내내 우울했다.

아줌마 남편이 그렇게 세상을 떠난후 나는 일부러 아줌마 집엘 가지 않았다.

내가 옆에서 무슨 말로 위로한들 가슴에 난 상처가 치유될까,그저 조용히 혼자서 슬픔을 삭히라는 내 의도였다.

그러다가 내가 한국을 방문할 일이 있어 출국일을 며칠 앞두고 인사를 하러 갔더니 아줌마 집 앞에 'FOR SALE' 싸인이 붙어 있었다.

"집안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그이의 체취 때문에 살수가 없는 거야. 싸게라도 이 집을 팔고 멀리 이사가서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조용히 살고 싶어. 사람이 자살해 나간 집이라 제 값을 못받겠지만 지금 내 심정은 그냥 임자 있으면 공짜라고 주고 나가고 싶은 심정이야"

괴팍하긴 했어도 부인한테만은 끔찍하게 했던 아줌마 남편의 체취가 아닌게 아니라 집안 곳곳에 남아 있었다.

한달이 넘었는데도 아줌마 남편이 돌아 가셨다는 느낌이 와 닿지 않았다.

내가 이럴진데 아줌마야 오죽 할까.

 

"잘 생각 하셨어요.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면은 아저씨 생각이 좀 덜 나겠지요"

머리도 식힐겸 나랑 같이 한국에 나가면 어떻겠냐는 내 제의에 아줌마는 머리를 흔들었다.

딸 때문이었다.

자기 때문에 아빠가 자살했다는 죄책감에 딸이 지금 제 정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옆에서 딸을 돌 봐 줘야 한다고 했다.

냠편을 죽게 한 딸이지만 그 딸로 향하는 어쩔수 없는 모정이 눈물겨워 가슴이 아파 왔다.

그로부터 한 달 후.

한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와 짐을 푸는등 마는 둥 하고 아줌마 집에 부터 가 보았는데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젊은 인도인 부부가 마당에 호스로 물을 주다가 나를 맞았다.

"모른다.어디로 갔는지...우리는 그냥 집이 싸서 샀을 뿐이다.집 주인 여자는 집구경 하러 왔을 때 딱 한번 봤을 뿐이다"

 

같은 고향출신이라고 몇 년을 친형제같이 지내놓고 이사가면서 연락처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나 버린 아줌마에 대한 원망은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그냥, 어딜 가던지 남편 잃은 슬픔일랑 깨끗이 잊고 잘 살아 주길 바랐다.

 

딸의 뱃속에 든 아이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조금도 일지 않았다.

낳아 키우든,지워 버리든, 그저 잘 생각 해서 결정 하길 바랄뿐이었다.

 

그 후 몇 년.

나는 결혼을 했고 가슴속에 멍처럼 자리잡고 있던 아줌마 가족에 대한 생각은 점차 지워져 갔다.

 

그러나 지금도 쇼핑몰에서 동양 여자와 흑인 남자가 손잡고 다니는 걸 볼 때마다 가끔 아줌마와 딸 생각이 불현듯 떠 오른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동안 일 뿐 '어디 가서 잘 지내고 있겠지' 하며 잊으려고 애쓰고 있다.

 

아줌마 가족이 사는 곳을 알아내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들이 먼저 나를 찾지 않는 이상 내가 먼저 그들을 찾아 내고 싶지는 않다.

세월이 흘러 어쩌면 조금씩 아물어져 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처를 나로 하여금 들쑤시게 하고 싶지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