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선생님이 말이지. 우리 아줌마들에게 꽃을 사주셨거든......"

 

선희는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엄마가 변한 것 같다는 느낌을 감지한 건 두어달 전쯤이다. 오늘도 그동안 알고 있던 엄마와는 뭔가 다른 것 같은 느낌이다. 어딘지 모르게 허둥지둥 정리가 되지 않고 약간 들떠있는 듯한 느낌, 뭐를 감추고 있는 듯 야릇한 비밀의 느낌이 엄마로부터 전해져 온다. 무엇일까. 엄마를 변하게 한 것은. 짐작이 안가는 건 아니지만 선희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엄마를 바라본다.

"지난 마더스 데이에 말이야. 양선생님이 부엌에서 일하는 네 명 모두에게 꽃다발을 사주셨어....."

"그 양 매니저 아저씨는 돈도 많네. 마더스 데이를 기해서 꽃 값이 얼마나 비싼데? 그것도 네명 모두에게. 그나저나 엄만 언제부터 양 선생님이 되었수? 매니저 양씨지 어떻게 양 선생님이야?그 영감이 엄마를 가르쳐?그래서 선생님이야?"

"그건 아니지만........"

아까부터 엄마는 선희에게 등을 보이고 있다. 예전에는 없던 일이다. 설사 스토브 위에서 찌개나 국이 펄펄 끓는다해도 일단은 선희의 얼굴을 봐 가면서 얘기도 하고 부엌일을 하던 엄마다. 그러나 지금. 엄마는 삶은 국수를 찬물에 헹구어 소쿠리에 건지면서도, 국수 위에 얹을 김을 잘게 부시면서도, 그리고 냉장고에서 열무김치를 꺼내 보시기에 담으면서도 선희 쪽을 쳐다보지 않는다. 선희에게 말을 시키고 자신도 쉴새없이 입을 놀리면서도 정신과 생각은 꼭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같다. 몇십년에 걸친 부엌일, 눈 감고도 문제없이 할 수 있는 부엌일을 지금 하면서도 몇 번이나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양념간장에 넣어야 할 다진 파를 그냥 개수대에 털어넣는가하면 국자를 손에 들고도 찾느라 몇 번이나 캐비넷 서랍을 열었다닫았다 한다.

"어쨌든 선생님은 선생님이쟎니? 한국에서 중학교 교장선생님이셨대잖아"

"그치만....."

"얘는? 양선생님이면 어떻고 매니저 양씨면 어떻니? 편하게 부르면 됐지. 나 말고도 양 선생님이라 부르는 사람이 마켓안에서 몇몇 돼. 캐쉬어하는 오씨 아줌마도 그렇게 부르고 식품부 김씨 아저씨도 그렇게 부르고....."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선희가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다는 걸 엄마가 눈치챈 것 같다. 허둥지둥하던 몸놀림이 조금 진정되어진 것 같긴 하지만 여전히 말이 두서가 없다. 횡설수설이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잠깐. 내가 방금 하려던 말이 뭐였지? 지금 내가 양념간장에 후춧가루를 넣었나, 안넣었나? 그나저나 선희 너도 알지? 엄마랑 같은 시기에 입사한 샌디 아줌마. 그 아줌마가 아이가 없쟎아. 남편도 없고. 그래서 그 나이되도록 평소 때는 두말 할 것도 없고 마더스 데이에 꽃 한송이를 누구로부터 받지 못했다는 거야....."

"그래서?"

"그래서 양 선생님이 그걸 눈치채고 꽃을 사다 주신 거지. 그 마음이 너무 정겹고 고맙지 않니? 자기 밑에서 일 하는 아줌마의 마더스 데이까지 챙기는 그 아름다운 마음씨 말이야......"

엄마의 말투도 변했다. 정겹다는 말. 아름답다는 말. 예전에 엄마는 그런 우아한 말을 쓸 줄 몰랐었다. 그리고 엄마는 말이 많아졌다. 선희가 35년동안 보아온 엄마는 지금처럼 저렇게 수다스런 여자가 아니었다. 길어봤자 1분이상 말을 잇지 않는 여자였다. 그러나 지금 엄마는 마치 출근길에 꼬리를 물고 늘어선 자동차처럼 말이 길다. 끝없이 줄줄 말을 해대는 것이다.

일요일. 국수를 먹으러 오라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 온지 한 시간. 엄마는 선희에게 그동안 잘 있었냐는 인사도 묻지 않았다. 지난 번에 가져간 김치 떨어지지 않았냐는 말도 묻지 않았다. 유진은 요즘 잘 지낸다니, 하는 미래의 사위에 대한 안부 조차도 아랑곳 없다. 그저 양 선생님,양 선생님, 양 선생님. 처음부터 끝까지 양 선생님이야기다.

아버지가 듣지 않기에 망정이지......

선희는 흘낏 아버지 쪽을 쳐다 본다. 거실 소파에 파묻혀 한국드라마 삼매경에 빠져 있는 아버지. 부엌에서 굿을 하던 지지고 볶던 안중에도 없다는 모습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선희는 가늘게 한숨을 내쉰다. 저러고 있으니 엄마가 딴 생각을 하지.....

"근데 그 양 매니저가 왜 네명 모두에게 꽃을 주었냐는 말이야, 내 말은. 샌디 아줌마가 불쌍하고 안되어서라면 그냥 그 아줌마에게만 사주면 될 거쟎아........."

"글쎄, 그러니까 말이야......"

엄마는 대접에 담은 국수를 식탁으로 옮기는 척 하면서 고개를 길게 빼 한국드라마에 정신이 팔려있는 아버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선희에게 얼굴을 돌린다. 집에 온지 거의 한 시간만에 처음으로 선희 쪽으로 얼굴을 보이는 것이다.

"샌디 아줌마만 주면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쟎아. 그리고 남은 우리 세 사람이 섭섭하게 생각하겠어? 안하겠어? 자식이 있든 없든 우리도 여자인데 말이야. 좋아하고 존경하는 매니저로부터 꽃을 받고 싶은 건 당연하지......근데 선희야. 중요한 건 말이야....."

엄마가 은밀한 얼굴로 선희 쪽으로 두어걸음 걸어 온다. 엄마가 가까이 왔을 때 선희는 향수냄새를 맡는다. 샤넬이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 선희가 선물로 사다준 샤넬 넘버 5. 사다 준 첫날 두껑을 열고 냄새만 맡아보고는 장롱서랍에 모셔만 놓은 걸로 알고 있던 향수. 아끼지 말고 뿌리라고 그렇게 성화를 해대도 건드리지도 않고 있던 향수 냄새를 지금 엄마로부터 맡고 있는 것이다. 와아, 이거 사건인데, 하고 선희는 엄마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다. 엄마는 사랑에 빠진 것이다, 지금. 그 매니저 양씨라는 사람과!

지난 한 달동안 전화통화를 하든 오늘처럼 직접 집에 찾아오든, 엄마 입에서 매니저 양씨 얘기가 나오지 않은 적이 거의 없다. 첨엔 아주 사소한 이야기였다. 김치 매상이 쑥쑥 올라가서 매니저 양씨가 기분이 매우 좋다는 이야기, 매니저 양씨가 독한 감기에 걸렸는데도 하루도 쉬지않고 일을 하러 나와서 딱하다는 이야기, 그리고 김치에 불순물이 들었다는 트집으로 상습적으로 공짜 쿠폰을 바라는 손님을 점잖게 한방 먹여서 찍소리도 못하게 했단 이야기 등 모두 일에 관계된 이야기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면도를 한 매니저 양씨의 푸르스름한 턱이 아주 매력적이라든지(그때 엄마는 말했었다. 얘, 네 아버진 수염이 없어서 면도를 해도 하나마나였거든. 그런데 면도를 막 마친 남자의 턱이 그렇게 멋있는 줄은 매니저 양씨를 통해 알았지 뭐니, 하고.)

마나님이 세상을 떠난후에도 몇 년이 지나도록 끼고 있던 반지가 어느 날 부터인지 매니저 양씨의 손가락에서 안보이더라는 이야기. 어느 날 우연히 직원 휴게실에 갔다가 매니저 양씨와 단둘이 있게 돼 어색해서 혼났다는 이야기.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이른 아침 주방에서 우연히 둘이 커피를 마시게 되었는데 십여분동안 아무도 오지를 않아서 본의아니게 단둘이 시간을 갖게되었다는 이야기등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희는 엄마의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그런데 최근 엄마의 표정을 보면서, 황홀하고 들뜬 표정을 보면서 엄마의 심중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엄마는, 선희가 지금까지 봐 온 엄마는 교과서에 나오는 엄마의 표본이었다. 자식과 남편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는.열여덟살에 결혼한 이래 자식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에 정신을 쏟으며 단 한번도 다른 곳으로 한눈을 판 적 없는 엄마였다. 그런 엄마가 지금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가 있는 것이다.

"중요한 건 나만 제일 좋은 장미를 받았단 사실이야. 양선생님이 사온 네 개의 꽃다발중 나만 제일 화려하고 예쁜 걸로......."

".............."

"꽃다발 세 개는 빨강이랑 노랑, 그리고 흰 장미가 마구 섞여져 있는 거였고 유독 하나만 새빨간 장미로만 만들어진 거였거든? 양선생님이 그 꽃다발 네 개를 가슴에 안고 들어오실 때 속으로 생각했었지. 음, 저 새빨간 장미는 당연히 샌디 아줌마에게로 가겠군....근데 그 장미가 나한테로 왔다니까...."

오호, 아까 엄마의 방에서 본 마른 장미가 바로 그거였군. 선희는 침을 꿀꺽 삼킨다. 양볼에 발갛게 홍조까지 띈 엄마의 얼굴. 그 얼굴을 보면서 선희는 엄마도 어쩔수 없는 여자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남자에게 관심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여자. 그러나 그 상대가 아버지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매니저 양씨라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였더라면.

"그게 그리 좋았수? 양씨 아저씨가 별뜻 없이 사다가 별뜻없이 전해준 걸 수도 있쟎아. 우연히 그 장미가 엄마한테 갈 수도 있었던 걸로 보는데, 나는?"

선희는 짐짓 딴청을 피우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엄마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도대체 얼마만인가. 미국와서 저렇듯 꿈을 꾸는 듯 행복해하는 모습을 여지껏 본 적이 없는 선희다. 엄마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선희 역시 행복하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된다. 적어도 사회규범상, 도덕상 모녀가 같이 행복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희는 일부러 딴청을 피워보는 것이다. 미안해요. 엄마. 같이 기뻐해주지 못해서.....

선희의 말에 엄마는 펄쩍 뛰는 시늉까지 한다. 그리고 그게 무슨 섭섭한 소리냐는 듯 손까지 휘휘 내젖는다.

"아니야. 절대 우연히 아니야. 나중에 양선생님이 내 귀에 대고 슬쩍 그랬걸랑. 나를 위해 빨간 장미를 산 거라고....."

"아이고 엄마. 장미고 뭐고 빨리 국수나 먹읍시다. 나 배고파요."

선희는 얼른 화제를 바꾼다. 계속 이야기를 하다간 엄마입에서 도저히 들어서는 안될 발언이 나올 것 같아서다. 얘. 선희야. 나 양 선생님 좋아하나 봐. 이 마음이 감당이 안되는구나.너한테라도 털어놓아야겠구나. 엄마가 만약 그렇게 나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좋아하는 남자 생긴 것을 축하해요, 엄마.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엄마 그래선 안돼. 우린 어떡하라구, 그리고 아버진 어떡하라구,어쩌고 도덕선생님같은 설교를 할 수는 없다. 여자로서 사랑받지 못하고 보호받지 못하고 일만 하면서 살아온 춥고 외로웠던 엄마의 일생을 아는 선희로서는 그런 식으로 말해서 엄마의 들뜬 마음에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더더욱 없는 것이다.

선희는 고개를 빼 아버지 쪽을 다시 흘깃 본다. 엄마가 다른 남자에게로 마음을 뺏기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여전히 코를 박을 듯 텔레비젼에 열중해 있다. 선희는 아버지가 가엾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매니저 양이라는 사람과 엄마가 좋은 관계로 발전되었음 싶은 바램이 든다. 다만 육체관계쪽으로는 가지않았으면, 하는 주문은 하고 싶다.

왜냐면 나이 든 사람들이 육체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구역질이 나오려 하기때문이다. 정신적이어야만 인정해주고 축복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나이 든 사람들의 사랑은 육욕(肉慾)이 빠져야 고귀하고 아름다울 것 같다. 매니저 양씨나 엄마나 이제와서 서로 살림을 합쳐 살 것 아니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저물어가는 황혼길 인생들이다. 다 늦은 이 시점에 가슴 두근거릴 대상이 생겼다고 해서 굳이 나쁘게 볼 것이 없지않나 하는 게 선희의 생각이다. 그러나.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관계만 아니라면 말이다.

선희의 얼굴이 문득 붉어진다. 박익준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익준에게서 연락이 끊긴 게 벌써 일주일이다. 세상 밖으로 꺼져버렸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몸과 마음이 지쳐있던 어느 날 밤 걸려온 박익준의 전화. 그후 박익준은 매일, 하루에 한번씩 전화를 해왔다. 전화가 이어지던 일주일만에 둘은 만났고 바로 그날 밤에 육체관계를 맺었다. 둘이 처음 만났던 식당이 호텔에 붙어있는 식당이었고 식사와 더불어 두어잔 마신 술로 인해 자연스레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앞에 앉아 국수를 먹으면서도 눈과 귀는 텔레비젼으로 가 있는 아버지의 얼굴이 보기 싫어 고개를 푹 숙이며 선희는 박익준을 생각한다.

요즘 같이 좀 덜 바쁘고 덜 피곤하고 덜 지쳐있기만 했었어도 만나는 당일 바로 자러가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텐데.......

선희는 그날 벌어진 일이 단지 실수였다고 생각하고 싶다. 박익준이 어떤 남자인지도 모르고 선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도 모르고 그저 전화통화 몇번 한 남자와 잠을 자버린 것은 어떤 식으로 생각해도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때는 내가 너무 힘들어 있어서 그랬던 거야. 나는 누구한테로든 그 어떤 식으로든 위로받고 싶었어. 바로 그것 뿐이야...

선희가 아직까지 걱정했던 것은 익준이 자기를 얼마나 쉽고 헤픈 여자로 생각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선희는 익준에게 고귀하고 순수한 여자로 기억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익준은 선희의 그런 걱정과 우려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한바탕 파도같은 격정의 순간이 끝났을 때.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남은 것은 쾌락의 소진 뒤에 오는 미적지근한 여운과 참담한 후회 뿐이었다. 선희는 일단 방바닥에 널부러진 옷부터 줏어 입었다. 그리고 익준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자신의 의중을 내비추었다.

"미..미안해요.. 이렇게까지 될 생각은.....그러니까 이렇게 쉽게, 빠르게 이럴 생각은 전혀 없었었는데......우리가 너무 성급했지요?"

그때 보았던 익준의 표정. 침대 앞에 놓인 화장대 거울로 보았던 익준의 표정을 선희는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표정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에 서늘한 얼음 한줄기가 훑고 지나가는 것 같다. 제발 좀 촌스럽게 굴지 말라는 듯한, 네가 조신한 척 해봤자 남자따라 호텔이나 온 여자밖에 더 되느냐는 듯한, 숫처녀도 아니면서 유난떨지말라는 듯한,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던 익준. 그 익준의 얼굴표정이 아직도 안타까움으로 선희의 가슴에 남아있는 것이다. 괜찮아, 우리 서로 좋아해서 한 행위쟎아. 그런 쓸데없는 생각안해도 돼, 하고 다정하게 말해주고 가볍게 안아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지금 이렇듯 쓸쓸한 마음이 들지는 않을 텐데.

자신을 그렇게 비웃는 것 같다는 느낌을 그날 밤 익준의 표정에서 읽었던 것은 첫만남에 남자에게 몸을 허락한 여자의 자격지심이었을까. 그 후에도 박익준은 매일 전화를 해왔으며 밥을 같이 먹었으며 몇 번 더 관계를 가졌다. 여느 연인들처럼 그렇게. 그렇게 4월이 갔고 5월이 왔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박 익준은 뭐가 그리 바쁜지 일주일 째 연락이 없다. 뜨거운 철판위에 올려진 고양이처럼 정신없이 사람을 뛰게 만들던 텍스 시즌도 끝났고 이제는 별로 바쁠 일이 없는 공인회계사들이다. 선희가 알기로도 박익준이 일 주일째 전화 한 통 못할 정도로 바쁠 일이 없다. 하긴 그는 워낙 유능한 사람이니까. 나 같은 공인회계사 반년차인 새내기하고 같겠어?, 하고 선희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바쁘겠지. 바쁠거야. 아암, 바쁘고 말고.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도 첫 날밤 자신에게 보이던 그 얼굴 표정이 떠오르는 것과 함께 가슴 한구석이 뚫린 것처럼 공허해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불안감이 엄습해오는 걸 어쩔 수 없다. 왜냐면, 왜냐하면 지난 4월 텍스마감시즌이 코앞에 닥쳐 있을 때. 그야말로 화장실가는 것도 주위동료와 상사에게 눈치가 보일 정도로 콩 튀듯 팥 튀듯 바쁠 때에도 박익준은 꼬박꼬박 선희에게 하루에 두 번씩 전화와 문자를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써니, 뭐하니. 나 지금 미팅 중이다. 오늘 하루 잘 보내라는 단 두줄짜리 문자를 보내기도 했고 어떤 땐 달랑 한 줄, '보고 싶다 써니야'라는 문자가 날라오기도 했다. 지금 화장실이라며 1,2분 동안 전화를 해오기도 했고 지금 투고해온 중국음식을 사무실에서 먹고 있는 중이라며 음식씹는 소리와 함께 통화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땐 단 30초만에 전화를 끊을 때도 있었다. 써니씨. 나야. 오늘도 바쁘지?나도 엄청 바빠. 그냥 세이, 하이, 하려구....

그랬던 박익준이었다. 그런데 지금 아무 언질도 없이 일 주일째 전화를 뚝 끊고 있는 거였다.

무슨 일이 있나. 내가 먼저 전화를 해볼까?

아무런 맛도 모른 채 국수 국물을 마시며 선희는 생각한다. 지난 두어달동안 선희가 박익준에게 전화를 한 적은 거의 없다. 왜냐면 선희가 전화를 하기 전에 박익준이 항상 미리 먼저 전화를 해왔으니까.

엄마가 만든 음식은 항상 입에 짝짝 붙을 정도로 맛있다. 그러나 현재 선희는 엄마의 음식을 음미할 만한 정신적인 여유가 없다. 머릿속이 온통 박익준이 왜 갑자기 전화를 하지 않을까, 에만 가득차 있는 것이다.

"얘, 국수 좀 더 줄 거냐고 묻쟎니?"

엄마가 선희의 팔을 툭 치는 바람에 선희는 화들짝 머리를 들었다. 오, 지금 나는 엄마집에 와 있지.....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길래 몇 번을 물어도 못들어?국수 좀 더 줄까? 지난 두어달 세금보고 시즌에 너무 혹사를 당해서 그런지 네 얼굴이 영 안되었다,얘. 국수가 아님 뭐라도 좀 더 먹어라. 아침에 끓여놓은 동태알 찌게도 있고........"

내 얼굴이 안되어 보인다면 그건 다 박익준 때문이다. 그가 나를 잠 못들게 하고 못먹게 하고 혼란스럽게하고 불안하게 한다.......

선희는 애써 웃으며 엄마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국수 사리를 더 받는다.

정말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뚝 연락을 끓을 만한 이유가 없다. 마지막 밤, 그러니까 익준의 아파트에서 관계를 가질 때만해도 별다른 낌새는 없었다. 약간 마른 듯한, 까무잡잡한 선희의 몸을 칭찬해주었고 벗은 몸으로 나가서 글라스에 와인을 따라 선희에게 갖다주면서 '둘의 행복한 관계가 영원하기를'를 제의하며 건배까지했다. 그리고 언제 날 잡아 둘이 당일치기로 여행을 다녀오자는 제의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날 밤 내가 너무 달라붙어서인가. 정말이지 익준은 여자를 다룰 줄 알았다. 여자를 미치게 할 줄 알았다. 그는 연주자였다. 여자의 몸이라는 악기를 노련하게 다루는 연주자. 때로는 섬세하게, 때로는 거칠게.

선희는 익준의 손길만 생각하면 몸이 달아오른다. 7년을 사귀었던 유진과의 관계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그런 뜨거움. 유진과 육체관계를 끝낸 후는 늘 미진하고 아쉬운 느낌이었다. 나무 제일 높은 꼭대기에 달린 사과에는 손도 대보지 못하고 언저리에 달린 사과만 딴 것 같은 안타까운 여운이 늘 남았던 것이다.

그러나 익준과의 관계에서는 그런 미적지근함이 없다. 불꽃놀이의 향연이었다. 펑,펑,펑, 선희의 몸안에서 온갖 현란하고 아름다운 색깔의 불꽃이 마구 터졌다. 그리고 마지막 한방울의 에너지까지도 쥐어짜서 소진하면서 불꽃놀이가 끝났을 때 선희는 후련함과 만족감으로 죽음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

너무 밝히는 여자로 오해를 했을까. 아니다. 나는 절대 밝히는 여자는 아니다. 그를 사랑했고 사랑하는 남자의 몸을 좀 더 오래 공유하고 싶었을뿐.

부모님을 앞에 놓고 남자와의 섹스를 생각하는 자신이 부끄러워서 선희는 그만 국수그릇을 놓고 일어 선다.

"왜, 밥을 먹자마자 일어서니? 설마 벌써 가려는 건 아니겠지?

엄마가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선희를 올려다본다. 그 눈은 말한다. 얘, 나 너랑 아직 할 얘기가 더 남았어. 양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야한단 말이야.........

선희는 엄마에게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인다.

"응, 엄마. 이상하게 오늘 좀 피곤하네. 일찍 들어가서 좀 쉬어야겠어. 다음 주말에 또 올게...."

엄마의 아쉬운 눈길을 뒤로하고 선희는 집으로 돌아온다. 엄마가 자신에게 양 매니저에대한 이야기를 다 털어놓듯이 선희 역시 엄마에게 현재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고 싶다. 그러나 선희는 그러지 못한다. 그렇쟎아도 삶의 무게가 만만찮은 엄마에게 자신의 고민까지 얹어 엄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래서 선희는 그저 속으로만 말한다. 엄마. 나, 가슴이 아파. 박익준이라는 남자 때문에 가슴이 아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