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끝난 건가요?"

".............."

"익준씨, 익준씨, 말 좀 해봐요. 진짜 우리 관계는 이제 정리된 거냐구요....."

".......끝났다고는 안 했어......."

"그럼 그동안 왜 전화 한번 안했어요?"

".............."

"이제 제게 전화해 줄 거예요?....예전처럼 전화도 자주 해 주고 만나주고 그럴 거예요?"

"그건 두고 봐야 알겠어......."

"익준씨!"

"나 지금 너무 피곤해. 얘기할 기운 없으니까 다음에 통화하자"

"다음에 언제? 언제요? 제 전화 안 받을 거쟎아요. 메세지 남겨도 리턴 콜 안할 거쟎아요.오늘도 거의 일주일만에 간신히 통화된 건데...."

"나 귀찮게 하지마. 이런 식으로 나한테 매달리는 것 우리관계 개선에 별로 도움이 되지않아......내가 생각나면 전화할께....."

"언제요? 언제 다시 전화할 건데요?"

"글쎄. 안 바쁠 때......안 바쁠 때 전화할께....."

"당신은 항상 바쁘쟎아요. 바쁘지 않을 때가 없쟎아요....."

"안 바쁠 때 다시 연락한다고 했쟎아....."

"알았어요....."

여자의 마지막 말이 울음으로 잦아 든다. 아마도 익준의 마음이 예전같지 않다는 걸 그제서야 감지한 것 같다. 그러나 여자는 미련의 끈을 쉽게 놓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정말 안타깝게도. 여자는 안 바쁠 때 다시 연락한다는 익준의 말에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걸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부터 기다릴 것이다. 화장실에 가면서도 샤워를 하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두 귀를 쫑긋하게 전화기 쪽으로 세운 채 전화벨이 울리기만을 기다릴 것이다.

기차는 떠났단다. 이 여자야, 이 어리석은 여자야, 하고 익준은 여자에게 말하고 싶다. 그러나 익준은 그 말을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하지 않는다. 그냥 속으로만 말한다. 대신 그는 최대한의 상냥함과 다정함을 담아 여자를 다독거린다.

"어쨌든 잘 있어. 밥 잘 먹고. 직장 잘 다니고 알았지?내가 전화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박익준. 그는 그 여자에게 금방 전화하지 않을 것이다. 여자가 전화를 기다리다 지쳐나가 떨어질 때 쯤, 그러니까 두 주일이나 삼주일 후 쯤 전화를 한다. 여자는 금방이라도 울 듯이 감격에 겨워 전화를 받는다. 언제 얼굴을 볼 수 있냐고 묻는다. 그러나 박익준은 요즘은 너무 바빠서 안돼, 하고 차갑게 말한다. 나 바쁜 것 잘 알면서 왜그러니? 하고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여자를 나무란다. 그리고나서 그동안 잘 있었냐고, 잠은 잘 자고 직장은 잘 다니느냐고 아버지가 딸의 안부를 묻듯이 일상적인 대화만 나누고 끊는다. 그러고나면 여자가 참지 못하고 전화를 다시 해 온다. 그러면 아까처럼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짧게 끊으면 된다. 그러기를 두어번 정도하고 나면 여자는 확연하게 깨닫는다. 아아, 이 남자가 확실히 변했구나. 내게서 마음이 멀어졌구나......

더 이상 남자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안 여자는 마침내 마음을 다잡는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면서 익준에게 전화를 한다.그리고 자신의 심정을 통보한다.

알았어요. 이제 귀찮게 하지 않을께요. 우리 관계는 이것으로 끝난 걸로 알께요......

박익준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면서 말 할 것이다.

그래?그렇다면 할 수 없지 뭐.어쨌든 그동안 고마웠어.다음에 혹시 만나더라도 우리 웃으면서 인사나 하자.........

그러면 게임 끝인 것이다. 가볍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음 여자를 찾아 떠나면 되는 것이다.

몇 분을 더 질질 울어대던 여자는 그럼 연락기다려요. 꼭 연락주셔야 해요, 하는 말을 남기고 먼저 전화를 끊었다.

박익준은 양팔을 한껏 벌려 기지개를 켰다. 이제 반쯤은 해결되었구나. 앞으로 전화가 오더라도 위에서 얘기한대로만 하면 된다. 그러면 여자는 깨끗이 단념하고마니까.아니다. 어쩌면 이번 여자는 좀 더 시간을 질질 끌지도 모른다. 쌈빡하고 시원하게 생긴 것과는 달리 여간 미련해빠진 여자가 아니다. 이렇게 곰퉁이인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시작을 하지도 않았다.

박익준이 제일 질색하는 부류의 여자가 미련하고 아둔한 여자이다. 속된 말로 손에 쥐어주어야 아는 여자. 학력을 떠나서, 머리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앞뒤로 꽉 막힌 맹한 여자들이 가끔 있다.

여자가 연락하기 전에 먼저 이쪽에서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고 여자의 연락을 받고도 즉각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벌써 이쪽의 마음이 떠나갔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그 엄연한 사실을 모르는 여자들이 꽤 많다. 바빠서, 전화 밧데리가 나가서, 깜빡 전화를 차에 두고 내려서 등등의 뻔한 이쪽의 변명을 곧이곧대로 믿는 여자들이 많다는 사실에 박익준은 짜증이 난다.

여자들에게, 지금 연애중인 많은 여자들에게 박익준은 고하고 싶다. 매일 전화해주던 남자가 사흘 이상 전화를 해오지 않는다던지 전화를 받지 않아 두 번 이상 멧세지를 남겼는데도 금방 리턴 콜이 오지 않는다던지 만나자는 이쪽의 요청에 이리저리 뺀다는 낌새를 보이는 것 같으면 미련 없이 마음을 접으라고 박익준은 말하고 싶다. 마음먹고 여자를 길들이기 위해 일부러 전화를 하지 않는 경우를 빼놓고는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전화를 잘 하게 돼 있다.

여자는 남자를 좋아한다하더라도 표현을 잘 못하고 몸을 사리는 경향이 있지만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게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좋아하는 표현을 온몸으로 한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여자에게 전화를 한다. 오줌 누는 시간을 잠깐 빼서라도 말이다. 그리고 늘 만나자고 보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이 없을 만큼 회사일에 지쳐 있다하더라도 좋아하는 여자의 얼굴을 단 5분 동안이라도 보기 위해 2시간을 운전해 갈 수 있는 동물이 바로 남자란 동물인 것이다.

박익준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글래스 가득 따른다. 귀찮은 여자를 떼낸 후인데 가만 있을 수 있나. 축배를 들어야지.

박익준은 먼저 여자에게 이별을 고하는 법은 없다. 여자가 지쳐서 먼저 이별을 고하게 만든다. 그것만이 뒷끝없이 여자를 깨끗하게 떼어내게 하는 방법이기에. 그리고 여자의 자존심을 한껏 세워주는 일이기에.

중고등학교를 한국에서 나온 박익준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을 믿는 편이다. 여자들에게는 절대 자신이 먼저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면 안된다. 그런 이별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한을 품은 여자가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르니까.

여지껏 수십명의 여자와 사귀고 헤어진 일을 반복한 박익준이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은 여자의 자존심을 조금도 다치지않게 잘 헤어진 까닭이다. 그렇다. 연애도 중요하지만 뒷끝없이 '잘 헤어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박익준에게 이별을 고한 여자들은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닐 것이다. 박익준 알지? 그 잘난 척 잘 하고 한껏 도도한 자식 말이야. 나랑 좀 사겼었거든? 근데 몇 달 사귀어 보니 영 아니더라구. 그래서 내가 먼저 그만 만나자고 했지. 그러니까 내가 그 자식을 헌 축구공 차듯 뻥 차버렸단 말이야.

여자들이 뭐라고 떠들고 다니던 그건 박익준이 알바 아니다. 그에게 중요한 사실은 자기 입으로 이별을 고해온 여자들은 더 이상 한여름의 엿처럼 끈적거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게중 미련이 남아서 다시 연락을 해오는 여자들이 더러 있기도 하지만 박익준의 이 말 한마디면 깨끗하게 상황은 종료된다.

"야. 네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쟎아. 난 사실 절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았는데 네가 먼저 그만 만나자고 했쟎아. 그래서 억지로 마음을 정리했는데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하자면 나 보고 어쩌라고....."

여자는 가슴을 치면서 스스로 나가떨어진다.

아, 그래, 맞다. 내가 먼저 이별하자고 했었지.내가 먼저 헤어지자 해놓고 미쳤지. 내가 왜 다시 연락을 했을까.....

박익준. 올해 사십 세 살의 남자. 17년차의 공인 회계사다. 미국내 굴지의 회사에서 서로 스카웃 해가려고 공을 들일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석달 열흘 빗지않은 거지여자의 머리카락처럼 무섭게 꼬여 있는 일도 그의 손을 거치면 해결되지 않는 일이 없다. 국세청에 탈세혐의로 걸린 기업체를 구제하는 일이 그의 주된 업무이다. 털어 먼지 안나는 놈 없다는 말처럼 국세청에서 맘 먹고 덤벼들면 안 걸려들어 갈 사업체가 단 한 군데도 없다. 제 아무리 유리알같이 투명하게 동전 한닢까지 낱낱히 세금 보고를 했다하는 기업도 일단 국세청에서 털기 시작하면 반드시 서너군데의 헛점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그렇게 '탈세'라는 죄명으로 꼼짝없이 옭아 넣어진 기업체가 박익준의 손님이었다. 국세청과 딜을 해서 벌금을 덜게 해주고 앞으로 국세청의 세무감찰을 받더라도 두 번다시 같은 죄목으로 걸려들지 않게끔 자문하는 일이 박익준의 일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뻣뻣하기가 한겨울에 꽝꽝 얼려놓은 동태같은 국세청 직원도 박익준이 두어번 만나고나면 갓 만든 찹쌀떡같이 말랑말랑해지고 유순해지고 마는 것이다. 박익준에게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상대방을 꼼짝못하게 하는 힘. 상대방을 사로잡는 힘. 그 힘을 이용해 박익준은 승승장구했다. 같은 연륜과 같은 경륜을 가진 공인회계사에 비해 거의 배나 되는 연봉을 받으면서 쭉쭉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문제였다. 사람을 끄는 그 힘이 여자들에게 더 크게 작용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겨드랑이와 아랫도리에 털이 나기 시작한 이래부터 박익준은 항상 여자에 둘러쌓여 있었던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는 이웃 서너개 여고 여학생들의 우상이었다. 우체통과 대문간엔 크고 작은 선물꾸러미며 편지가 항상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학을 접어 바치는 여학생에서부터 몇 개월을 떴다는 스웨터와 목도리를 임금님에게 진상하듯 조심스레 가져오는 여학생에 이르기까지

박익준의 관심 받기를 원하는 여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박익준은 심드렁했다. 자신의 눈에는 한참 어린 아이로 보이는 여학생들의 관심이 그저 귀찮기만 했던 것이다. 온갖 구애를 바치는 여학생들에게 둘러 쌓여있으면서도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당시 막 배우기 시작한 기타나 복싱등 그 또래의 남자들이 흔히 갖는 취미생활에만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박익준에게 첫사랑이라 일컬을 수 있는 여자가 나타났다.

교생실습을 나왔던 스물 다섯 살 아가씨에게 박익준이 그만 반하고 만 것이다. 고작 열일곱살의 남학생이 여덟살이나 많은 여자에게 혼을 뺏기고 만 것이다. 그 여자의 이름은 서영이라 했다. 서영 역시 박익준을 좋아했었기에 그들은 곧장 열애관계에 빠졌다. 그러나 고등학생인 것이 금방 표나는 박익준과 서영이 같이 갈 수 있는 곳은 고작 아이스크림 가게, 그리고 청소년 관람가의 극장, 놀이동산이었다. 그들은 목이 말랐다. 애가 탔다. 남의 눈을 피해 만날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그런대로 사는 집의 외동딸이었던 서영은 자신의 돈으로 외곽에 방 하나를 얻었다. 그리고 그들은 매일 그곳에서 만나 육체를 불태웠다. 이웃의 고자질로 박익준의 부모가 이 사실을 알기까지 오개월동안 그들은 단 하루도 빠짐없이 그곳에서 만났다. 그 오개월 동안 박익준은 여자의 몸을 알게되었다.

박익준의 부모가 나서서 서영과의 관계를 정리하게 되던 마지막 날 서영이 한 말을 박익준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박익준. 너는 앞으로 엄청난 바람둥이가 될 거야. 왜냐하면 너 한테는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아주 신비한 힘이 있어. 키 크고 몸 좋고 얼굴 잘 생긴 놈들은 많고 많지만 너 같이 씨익, 한번 지어주는 미소로 마음을 녹아내리게 하는 남자는 정말이지 첨이야. 유치한 말이지만 나 나름대로 잘나가는 여자였거든. 지금도 외출하면 만나서 차 한 잔 하자는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 몇 개는 우습게 받아 올 정도로. 그런데 너 앞에선 내가 무지 작아지는 것 같아. 너에게 정신없이 함몰해가는 내 자신이 무서워. 본의 아니게 너를 지금 잃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잘되었다고 생각해. 하루라도 빨리 너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으면 나는 불행해지고 말 거니까......"

그녀, 서영이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까 사람을, 여자를 꼼짝 못하게 하는 아주 신비한 힘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데는 시간이 얼마걸리지 않았다. 두어달 후 박익준과 담을 나란히 하고 있던 여학교의 여학생 하나가 그만 음독을 한 것이다. 수십차례 편지를 보내고 선물을 보내며 익준에게 구애를 해도 별 반응이 없자 유서를 써놓고 약을 먹은 것이다. 그 유서 내용이 양쪽 학교내의 화제거리로 떠올랐다. 바로 이런 내용때문이었다.

-어느 날 오후 하교길에서 처음 박익준이란 남학생을 보았다. 그가 무심코 나를 쓱 쳐다보았는데 그때부터 나는 박익준의 포로가 되었다. 박익준, 그에겐 여자를 뇌살시키는 뭔가가 있다. 그의 관심을 받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겠다.....-

부모가 익준을 부랴부랴 작은 아버지가 살고 있는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 것은 그 일이 있고난후였다.

제발 좀 착실하게 공부만 하는 놈으로 만들어 다오.여기 한국에 그냥 두었다간 천하에 없는 잡놈이 되겠다.

그러나. 집에서 새는 바가지 들에 나가도 샌다는 말처럼 미국에 온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대학에 들어가서도,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어서도 박익준이 있는 곳에는 항상 여자가 들끓었다. 미인대회 출신인 여자와 결혼해 4년만에 파경을 맞은 것도 박익준의 여자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박익준은 이 문제에서만은 억울하다는 생각을 지금도 한다. 왜냐면 자신은 결백하니까. 이쪽에서는 아무런 호감이나 신호를 보내지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여자쪽에서 먼저 좋아죽겠다고 난리를 쳐댄 거니까. 이쪽에 엄연히 아내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만나주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 여자들이 먼저 전화하고 이메일을 보낸 것을 우연히 아내가 알게된 것 뿐이니까.

박익준은 사실 이혼하고 싶지 않았다. 박익준은 아내를 많이 사랑했으니까.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5분 단위로 전화해 안부를 확인하는 병적인 집착증을 가진 아내와의 결혼생활은 쉽지 않았다. 처음엔 박익준도 결혼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아내와 같이 손잡고 가서 카운셀링도 받아보고 아내를 정신과 의사에게 보내도 보고.

"여보! 왜 저 여자를 그렇게 유심히 쳐다봐?"

"으응? 누구 어떤 여자?"

"저어기 저 핫팬츠 입은 여자 말이야!"

"글쎄. 난 저 여자가 이 근처에 있는 것도 몰랐는 걸?"

"거짓말 하지마. 내가 보니까 아주 얼굴색까지 변해가면서 유심히 쳐다보던데? 저 여자 엉성이가 투실투실해서 그래? 아니면 유방이 커서 그래? 왜 쳐다봐? 남의 여자 엉덩이며 유방을 왜 쳐다보냐구?"

바늘끝만큼 사소하고 하찮은 일로 싸우기를 매일. 마침내 이혼 서류에 싸인을 하면서 박익준은 결심했다. 흠. 내게 여자를 끌게 하는 힘이 있댔지? 그래. 그 힘을 지금부터 맘껏 발휘해보지. 남의 여자의 머리끝 한 마디도 쳐다보지 않고 착실하게 결혼생활을 유지하려 애쓴 나였는데 내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이거지. 좋아. 이제부터 잡놈이 한번 되어보는 거다.

세상은 넓고 여자는 많았다. 거름 한줌 주지 않았는데 마냥 우리집 담을 타고 넘어오는 아이비 넝쿨같이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굴러들어오던 여자들이었는데 박익준이 맘 먹고 나서니 널린 게 여자였다. 그리고 박익준에게 오는 여자들은 달랑 몸만 들고 오지 않았다. 웬만한 봉급쟁이의 한달 월급을 털어야 할 만한 최고급 양복을 가져왔고 한 켤레에 천불이 넘는 구두를 들고 왔으며 현찰이 두둑한 봉투를 들고 왔다. 그렇게 온갖 물질과 돈과 시간과 몸을 갖다바치면서도 여자들은 행여나 박익준에게 버림받을새라 벌벌 떨었다. 입속의 혀처럼 박익준이 시키는 것은 다 했다. 하해와 같은 임금의 성은을 입고저 죽을 힘을 다하는 무수리들처럼.

이혼 후 지금까지 8년. 수많은 여자가 박익준을 거쳐갔다. 여자를 손에 넣기 위해 조금치의 노력을 기울여 본 적 없지만 온갖 여자가 박익준에게 다가왔다가 사랑하다가 멀어져갔다. 그중에는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앳띤 아가씨도 있었고 한국내 굴지 기업의 손녀딸도 있었으며 약혼자를 두고 미국에 유학온 여자도 있었다.

그렇게 온갖 종류의 여자들을 두루두루 거치면서 박익준의 여자에 관한 한 도사가 되어 갔다. 그 남자만큼 여자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그는 알았다. 만나서 딱 5분만 대화를 나누어보면 여자의 성격부터 집안까지, 어떤 종류의 잠옷을 선호하는지까지 감이 딱 잡혀오는 것이다.

그러나 박익준에게 아직까지 알 수 없는 여자가 딱 한명 있었으니 바로 그 여자가 선희이다. 선희를 마지막으로 본 게 거의 한달이 다 되어 간다. 선희와 처음 자고 난 후 박익준은 확신했다. 선희가 자신에게 빠져들었다는 것을. 몽롱한 선희의 눈빛을 보며 박익준은 비웃었다. 너 역시 여느 여자들과 다를 바 없구나. 하긴 나한테 빠져들지 않는 여자가 이상한 여자지......

운동으로 다듬은 단단한 몸과 수려한 얼굴을 가진 남자. 수만불 짜리 시계에 수천불짜리 양복을 입은 남자. 십만불이 넘는 스포츠 카를 타는 남자. 온갖 기교와 체위로 침대 위의 여 자를 깜빡 자지러지게 하는 남자.

그 남자의 각본대로라면 선희가 벌써 연락을 취해왔어야  한다. 조심스럽고 공손한 목소리로 박익준의 안부를 먼저 물은 뒤 바쁘신 줄 알지만 우리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어요, 하고 물어와야 한다. 박익준은 거만한 태도로 말 할 것 이다. 아, 우리가 못본지 벌써 그렇게 되었나? 아, 미안. 내가 그동안 너무 바빠서 말이지 하고. 그리고 대충 얼버무리고 웃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나서 나는 그저 당신의 처분만 기다릴 뿐이라는 마음으로 조마조마해 하며 박익준의 다음말을 기다리는 여자에게 적선하듯 한 마디 할 것이다.

음. 내일 모레 시간이 좀 있네. 퇴근 후 술이나 한잔 할까?

그러나.

박익준의 예상은 빗나갔다. 나흘이면, 일주일이면, 열흘이면, 하고 기다리고 있는 참인데 벌써 한달이 가깝도록 선희쪽에서는 아무 연락이 없는 것이다. 혹시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겨 남자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나 싶어 선희쪽의 동향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선희는 아무 일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꼬박꼬박 출근해 일을 잘하고 있었으며 부모집에 간간이 들리는 것 외엔 혼자 사는 아파트로 빠짐없이 귀가하고 있는 거였다.

거 참 이상하고 묘한 여잘세.....

박익준은 선희에게 바짝 더 구미가 당겼다. 자신이 짜놓은 각본대로 움직이지 않는 여자라니. 색다른 맛이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실 선희는 박익준이 만나온 수십명의 부류와는 조금 다르다면 다른 여자였다. 일단 외모부터가 그랬다. 다른 바람둥이들처럼 박익준 역시 외모가 출중한 여자를 좋아했다. 결혼해 살 것도 아닌 이상 보기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잠깐 데리고 놀 여자라면 이왕이면 예쁘고 멋있고 섹시한 여자가 좋지않은가. 선희는 결코 예쁜 여자가 아니었다. 한 판에 놓여진 계란처럼 오히려 아무런 특징이 없는 평범한 여자축에 속했다.그런데 왜 박익준은 선희를 점찍었을까.눈빛 때문이었다.

세상을 다 산 듯 처연하고 지쳐보이는. 그리고 모든 사물에대한 기대를 접은 듯한, 어찌보면 체념한 것 같은 심드렁한 눈빛. 박익준은 선희의 그 묘한 눈빛에 이끌렸던 것이다.

선희를 점 찍어놓고 박익준은 선희에 대해 알아 보았다. 적을 치려면 일단 적을 알아야하니까. 그런데 선희의 백그라운드 조차도 실망스러웠다. 술 주정뱅이의 무능한 부모와 동생들 뒷치닥거리로 서른이 넘도록 시집도 못가고 지금까지 있다가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취득함과 동시에 아파트로 독립해 나온 여자.

아둥바둥, 치열한 삶을 산 여자는 박익준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런 여자의 마음은 각박하고 메말라있다. 항상 남자를 경계하며 마음의 문을 잘 열지 않는다. 널린 게 여자인데 그런 여자에게까지 공을 들여가며 내 여자를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흠. 미친 척하고 내가 먼저 전화를 한 번 해 봐?가만 있자. 선희의 전화번호가 아직 입력이 돼 있는지 모르겠다.

여자다루는데 선수인 그 남자 박익준, 그는 과연 선희에게 전화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