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혀는 강하고도 부드러웠다. 혀는 여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구석구석을 미끄럽고 유연하게 핥고 쓸다가 갑자기 한 부분을 흡입할 듯이 세차게 빨기도 했다. 뜨거운 입김과 함께 귓속을 마구 파고들던 혀는 어느새 여자의 목언저리를 핥았고 젖꼭지 근처를 물어뜯을 듯이 희롱하다가 배꼽으로 내려가 잠깐 원을 그리며 머물기도 했다. 물고기의 등판처럼 끈적끈적하고 축축한 남자의 혀가 몸위를 지나갈 때마다 여자는 미칠 듯한 쾌감으로 자지러졌다. 그러다가 정신을 깜빡 놓기도 했다.

이대로 죽어도 좋아!

여자는 침대 시트가 벗겨지는지도 모르고 세게 잡아당겨 움켜 쥔다. 그녀의 입에서는 쉬임없이 하악,하악 달뜬 신음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시트를 쥐고 있던 열 손가락이 허공을 향해 허우적대다가 남자의 등을, 어깨를, 그리고 머리통을 온 힘을 다해 끌어안는다. 남자의 온몸은 여자의 타액과 땀과 그리고 애액으로 미끈거리고 있었다.

정말 이대로 죽어도 좋아!

절정을 다해 줄달음치면서 여자는 마침내 울음을 터트린다.

오오,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정말 죽을 만큼 사랑해!!

여자의 몸위에 얹힌 남자의 몸이 활처럼 뒤로 팽팽하게 당겨지다가 끄응 소리를 내며 옆으로 나가떨어진다. 여자는 마침내 참았던 숨을 한숨에 폭풍처럼 몰아 내쉬고. 그리고 잠깐 동안의 정적이 따른다.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듯 고요한 정적.

여자가 부시럭대고 몸을 일으킨다. 얼른 차가운 물로 몸을 씻어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그러나 그녀는 반쯤 몸을 일으킬 뿐 침대 밖으로 걸어나가지는 못한다. 그냥 그대로 쓰러져 죽음처럼 잠에 빠졌으면 좋겠다는 나른함과 노곤함이 그녀를 침대 밖으로 밀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여자는 잠시 그러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화장대 거울을 본다. 섹스가 끝난 후 늘 보게 되는 거울. 호텔방엔 의레껏 큰 거울이 달린 화장대가 놓여 있다. 그것도 침대에서 고개를 들면 바로 보일 위치에. 그 장소에 거울 달린 화장대를 놓을 생각은 누가 했을까?

"................."

거울을 보면서 선희는 자괴감으로 괴롭다.

죽어도 좋고 세상이 당장 끝나도 좋을 것 처럼 뜨겁게 달아올라 몸부림치다가 마침내 몸이 차갑게 식으면 마음도 차갑게 같이 식어 버린다. 폭풍같이 세차게 휘몰아치던 몸과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발가벗겨 길바닥에 마구 내팽겨쳐져 있는 듯한 수치스런 심정이 되고 마는 것이다. 문어처럼 남자의 몸에 끈끈하게 달라붙어 요동을 친 자신이 끔찍하고 징그럽단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선희는 얼른 고개를 돌려 익준 쪽을 쳐다 본다. 거울 속으로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 보다는 별로 친절하지는 않지만 멋지고 잘 생긴 남자의 얼굴을 보는 게 나으니까.

"넌......."

침대에 기대어 자신을 보고 있는 선희에게 익준이 일어나면서 툭 던지듯 말한다.

"넌 참 알 수 없는 여자야. 아무리 생각하고 연구해도 이해 할 수 없는 여자야.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처럼 애타게 쾌락을 갈구하던 여자는 대체 어디로 갔지? 섹스가 끝난 후엔 금방 백팔십도로 다른 여자가 되고 만단 말이야. 지금 네 표정을 봐. 만사가 시들해서 따분해 죽겠다는 표정이야....."

"..........."

"네 보이프렌드, 유진인가 뭔가 하는 친구는 네가 이렇게 색녀인 줄 알고 있었니? 비실비실하고 허여멀겋게 생겨갖고 어떻게 널 감당했는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널 만족시키느라 온갖 용을 다 써버려서 그렇게 비실비실하는지도 모르겠군."

어찌보면 여자에게 모욕적인 말일지도 모르는 말을 익준은 낯색하나 붉히지 않고 내뱉는다. 마치 입속에 고인 침을 찍, 하고 뱉듯이. 조금도 망설이거나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익준의 말이 선희의 가슴에 상처로 날아와서 박힌다. 지금처럼 이죽거리며 말한 게 처음이 아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선희는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모닥불을 뒤집어 쓴듯 얼굴이 화끈거리고 붉어진다. 조금 전까지 미칠 것 같은 정염으로 같이 불타올랐던 남자가 이 남자가 맞나 싶어 선희는 새삼스레 익준을 다시 쳐다본다.

익준의 몸은 언제봐도 훌륭하다. 너무 훌륭해서 눈이 부신다. 익준의 표현대로 비실비실하고 물컹물컹하고 허옇기만 한 유진의 몸에는 댈 게 아니다. 군살 한군데 없이 탄탄하고 잘빠진 몸. 갓 구워낸 식빵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청동으로 만들어진 동상처럼 단단한 몸. 속옷광고에서나 볼 수 있는 미끈한 몸.

익준은 자신의 몸이 훌륭하다는 걸, 그래서 여자들이 감탄하면서 쳐다본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는 항상 벗은 채 돌아다닌다. 할 일을 끝내고 지쳐서 축 늘어진 자신의 심볼을 덜렁덜렁 자랑스럽게 흔들면서 호텔방 이곳 저곳으로 돌아다닌다.

지금은 힘이 빠져 있지만 익준의 그것은 언제든지 전투에 임할 태세를 취하고 있다. 고지에 오르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세차게 강행군을 했다하더라도 2, 30분후면 언제 내가 그랬더냐는 듯 다시 싱싱하고 힘있게 살아나는 것이다.

"나는 하루에도 네다섯번 씩 섹스를 할 수 있어!"

처음 만나 섹스를 한 날, 바닥을 드러낸 샘에 다시 물이 차오르듯 금방 딱딱하게 일어서는 자신의 그것을 선희에게 만져보게 하면서 익준이 자랑스럽게 한 말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느냐는 얼굴로 쳐다보는 선희에게 익준은 킬킬거리면서 말했다.

"왜냐면 나는 잡놈이거든. 잡놈이 아무나 되는 줄 아니? 여자가 필요로 할 때 언제든지 충족시켜 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놈만이 잡놈이 될 수 있는 거야"

그날 익준은 선희에게 세 번의 절정을 맛보게 해주었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한 번도 선희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선희가 잡놈인 익준을 좋아하게 된 것은 어찌보면 익준이 갖고 있는 그 단단한 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왜냐면 시니컬하고 함부로 구는 익준은 선희가 제일 싫어하는 남자의 유형이었던 까닭이다. 어찌보면 강단없이 우유부단한 유진과 이날 이때까지 관계를 이어온 것은 유진의 따뜻한 마음씨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지겨운 가족이지만 차마 내치지 못하고 이날 이때까지 묵묵히 부양해 온 유진이다. 선희는 유진의 그 선한 마음을 좋아했기에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에게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대하는 남자는 아버지로 족하다. 제멋대로인 남자에게 정말이지 질린 사람이 선희다. 이 세상의 남자가 다 씨가 마른다해도 아버지같은 남자와는 절대로 엮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선희는 익준과 엮였다. 폭력만 안 쓴다 뿐이지, 욕설만 안 한다 뿐이지 여자를 무시하고 여자의 감정을 아랑곳않는 익준의 그 오만방자한 태도 때문에 선희가 벌써 몇 번의 상처를 받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선희는 익준에게 이별을 고하지 않고 있다. 아니,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렇게 대낮에 호텔방에 같이 있다. 그것도 번번히 선희가 먼저 만나자고 애걸을 해서.

'전화를 안 했어야 했어............'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 구석에 넝마처럼 널부러져 있는 속옷을 주워입으면서 선희는 입술을 깨문다. 조금 전에 익준이 화장실로 가면서 발로 툭, 차 던진 속옷이다. 앞 부분에 커다란 빨간색 하트가 그려진, 익준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비싼 돈 주고 산 야시시한 속옷이다. 익준의 발에 채여 구석 쪽으로 나가떨어지는 속옷을 보면서 선희는 굴욕감으로 얼굴이 빨개졌었다.

제발 그런 무례한 짓 좀 안 할 수 없어요? 왜 남의 속옷을 발로 차고 그래요? 하고 노여움을 담아서 당당하게 말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다. 당당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속옷 발로 차지 말고 집어서 이리로 좀 던져 줘요, 하고 부드럽게라도 부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선희는 그게 안된다.

선희는 고개를 떨군다. 왜 이리 가슴이 추수 끝난 들판처럼 허허롭고 황폐해지는지 선희는 알 수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이 미칠 듯이 그리워서 다급하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만나서 육체의 향연을 나누었다. 그런데 왜 울고 싶은지, 참담한 후회로 가슴이 미어지는지 모를 일이다.

유진을 만날 때는 이러지 않았다. 보호받는 느낌이 들었고 좀 미흡하긴 했으나 비오는 날 우산 밑에 있는 듯한 안도감과 안정감이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해도 이 남자가 나를 보호해주고 지켜줄 거야, 하는 든든함. 병아리가 암탉의 품에 안겨져 있는 듯한 안정감. 그러나 익준에게서는 그런 느낌을 가질 수가 없다.

같이 만나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키스를 하고 서로의 몸을 애무하고 섹스를 나누어도 이 남자가 내 남자다, 하는 느낌을 전혀 가질 수가 없다. 모래를 움켜쥐고 있는 것 같다. 조금이라도 손을 느슨하게 풀면 수수수, 바람처럼 빠져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모래.

"고마와요"

샤워를 마치고 나온 익준에게 선희는 말한다. 뭐가 고맙냐고 익준은 물어보지도 않는다. 선희가 말한다. 바쁘다고 말하지 않고 바로 만나러 와 주어서 고마와요....

"진짜로 바쁘지 않았으니까......."

익준은 입술을 비틀며 웃는다. 진짜로 바빴으면 내가 너 따위나 만나러 여기에 있겠냐는 빈정거림같은 웃음. 그 웃음이 선희의 가슴을 다시 한 번 싸하게 한다.

"판매세가 오를 것 같다지요?"

"개새끼들......."

연방정부니 주정부니 카운티니 모두 할 것 없이 만성적인 적자로 시달리고 있다. 궁여지책으로 판매세를 올려서라도 적자를 만회하고 싶은 안간힘인지 이번에 판매세가 또 올랐다.

한국인 손님이 대부분인 선희의 사무실 전화는 문의 전화로 매일 불티가 난다.

"만만한 게 시민들이니까.지금 캘리포니아 대부분의 카운티의 판매세가 전 미국에서 제일 높은 것 알고 있겠지?거의 10%에 육박한 카운티가 한두군데가 아니란 말이야. 근데 여기서 또 판매세를 올린다 말이야? 그럼 앞으로 10달러짜리 물건을 사면 1달러를 판매세로 내야한다는 계산이쟎아. 병신 새끼들이 생각한다는 게 고작. 아이그. 그런 돌대가리들은 그냥 확 쓸어서 지옥에 던져 넣어버려야 하는데...."

아차, 싶어 선희는 입을 다문다.

익준과는 별다른 얘기거리가 없다. 만나서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고 바로 호텔로 직행해서 섹스를 하고 조금 미적거리다가 각자 호텔을 걸어 나가는 일이 늘 이어진다. 선희는 익준과 대화, 대화를 하고 싶었다. 빈정거림과 이죽거림이 아닌 따뜻한 대화를. 굳이 둘만의 이슈가 아니라도 좋았다. 관심있는 화제면 족했다. 그래서 던져 본 판매세 이야기. 그러나.

샤워를 하고 옷을 주워입은 익준은 벌써 방을 나갈 준비를 완벽하게 하고 있다. 그동안 선희가 한 건 속옷을 주워입고 브래지어도 안한 상체에 블라우스를 걸쳐입은 것 뿐.

"여기 나가서 뭐할 건가요?"

금방이라도 나 간다, 하고 바람처럼 익준이 나가버릴 것 같아 선희는 초조해 하면서 묻는다.

"왜?넌 뭐할 건데?"

".............."

아프다고 조퇴를 하고 나왔기에 다시 회사로 돌아가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굴속같은 방 하나짜리 아파트로 들어가기도 어중간한 여름날 오후.

"지금 몇신데요?"

커튼이 쳐진 실내가 어둑해서인지 익준은 눈살을 약간 찌푸리며 시계를 내려다 본다. 3만불을 호가한다는 금딱지 시계를 내려다 본다.

"3시 반이 넘었어"

"그, 그럼 우리 어디 드라이브라도 가면 안돼요?"

"드라이브?"

"어디 가까운데......호수나 산이 있는 곳으로...."

"야, 넌 내가 하루에 운전하는 시간이 얼마인 줄 알고 그런 소리를 하니?"

".............."

"운전이라면 신물이 난다. 드라이브는 무슨......"

유진이라면, 유진이라면 어땠을까, 하고 선희는 생각한다. 드라이브? 그래 어느 쪽으로 가고 싶어? 좀 피곤하긴 하지만, 운전이라면 신물이 나긴 하지만 너랑 드라이브 하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은데? 하는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남자는, 이 박익준이라는 남자는 두 번도 생각하지도 않고 단번에 제의를 거절하고 만다. 무참하고 참담하게.

"일어 나, 어서. 침대에서 그러고 있는 것 보기 싫어. 섹스가 끝난 후 옷도 입지 않고 뭉기적거리고 있는 여잘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 줄 알아?"

"..........."

무슨 생각이요, 하고 선희는 묻지 않는다. 왜냐면 익준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소리는 절대 아닐 것이다. 화대를 기다리는 싸구려 창녀 같아, 라든지 한 번 더 했으면 싶어서 껄떡대는 색녀 같아, 라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선희는 익준에게 익숙해져가고 있다. 상배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그 무례함과 뻔뻔함에 선희는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야! 네 젖꼭지는 왜 이리 거봉 포도송이처럼 크고 검으냐? 징그럽게스리, 는 말을 익준으로 들었을 때도 선희는 아무 항변을 할 수 없었다.

그게 그래요. 가슴이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랬어요. 바보같이 애매한 웃음을 흘리면서 더듬더듬 변명만 했다. 젖꼭지 큰 것이 죽을 죄인 것 같은 기분으로.

저 남자와 더 이상 시간을 보내겠다는 생각을 포기하자, 하고 선희는 자신에게 타이른다. 선희는 비척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샤워실 쪽으로 걸어들어가면서 익준에게 말한다.

"지금 바로 나갈 거죠?"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래, 하고 익준은 말한다. 그럼 잘 가요, 하고 선희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한다. 고개를 들었다가는 마악 눈에 맺히기 시작하는 눈물을 보일 것 같아서다.

이제 다시는, 다시는 당신에게 전화하지 않겠어, 하고 선희는 자신에게 다짐한다. 보고 싶고 당신의 몸을 안고 싶어 미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지. 당신에게 연락하는 대신 당신 땜에 한동안 뜸했던 유진에게 전화를 하겠어........

선희는 고개를 숙인 채 블라우스를 벗는다.

"써니야"

샤워 부스 손잡이를 잡는 선희를 익준이 부른다. 심상치 않은 선희의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뜻밖에도 익준의 목소리가 부드럽다.

".............."

익준이 선희 쪽으로 걸어온다. 그리고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선희의 등을 뒷쪽으로 껴안는다.

"침대 위에 돈을 좀 두었어........."

"............."

"난 손님 만날 약속이 있어 나가 봐야 해. 샤워하고 나가서 쇼핑을 좀 하도록 해. 여름이니까 여름 옷을 몇 벌 사렴....."

"..............."

익준은 선희의 머리 위에 입을 맞추고 걸어나간다. 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선희는 몸을 돌려 침대로 급하게 걸어 간다. 침대 위에는 백불짜리 지폐가 부채살처럼 쫙, 펼쳐져 있다. 선희는 그 돈을 집는다. 그리고 하나하나 다시 세어 본다. 천불. 틀림없는 천불이다.

이건 무슨 경우인가. 섹스를 하고 난 남자로부터 돈을 받다니. 그러나 천불이라는 적지 않은 액수에 선희의 가슴이 봄날처럼 금방 환해지고 만다. 와, 이 돈이면 엄마에게 좋은 옷을 두어벌 사 드릴 수 있겠네...........

참 괜찮은 남자야, 하고 선희는 생각한다. 다시는 전화하지 않겠다는 선희의 다짐이 백불짜리 열장에 눈 녹듯이 풀어진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천불이나 되는 거액을 선희에게 선뜻 주고 간 그 마음이 너무 고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라고 애써 금방 변한 자신의 마음을 합리화한다.

오, 이 남자는 날 싫어하는 게 아니었어. 원래 태도가 그렇게 막되먹은 남자일 뿐이지....

7년을 사귀었으면서도 백불짜리는 지폐는 커녕 늘 선희의 돈을 쓰지 못해 안달하던 유진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익준의 씀씀이에 선희는 감격하고 만 것이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샤워를 마친 선희는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않은채 백에서 전화기를 집어든다. 네 번이나 신호가 가도록 받지 않던 전화기 저쪽에서 엄마의 가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엄마...."

"으응. 선희구나....."

"왜 금방 전화를 안 받아? 지금 바빠?"

"아아니, 손에 양념이 잔뜩 묻어서 씻고 받느라. 웬일이야, 이 시간에? 너야말로 안 바쁘니?"

"응. 안 바빠. 엄마, 오늘 퇴근하고 할 일 없지? 나랑 쇼핑 갈까?"

"쇼오핑?"

"응, 오랫만에 엄마 여름 옷이나 두어벌 사줄까 하고......"

"그으래. 좋지. 그렇쟎아도 마땅한 여름 옷이 없어서 좀 그랬는데 잘 되었다 얘......"

"..............."

엄마가 변했다!

찬바람 한줄기가 가슴 한 가운데를 쓰윽 지나가는 느낌에 선희는 잠시 멍하다. 얘, 여름 옷은 무슨 여름 옷. 나 옷 많아. 지금 있는 옷만 입어도 다 못 입고 죽을 건데. 나 괜찮아. 돈 아껴서 네 옷이나 사 입어라. 응당 엄마는 그렇게 나왔어야 했다. 그러면 선희는 온갖 감언이설로 엄마를 꼬드겨야 했었다. 별로 비싸지도 않은 옷 한벌, 신발 한 켤레를 사주기 위해 늘 치루었던 즐거운 실갱이. 이제 엄마와는 그런 실갱이를 할 수 없는 것일까.

요즘은 오히려 선희에게 대놓고 요구까지 한다. 지난 달이었다.

"얘, 선희야. 내가 머리할 때가 되어서 말인데 늘상 하는 꼬불꼬불 아줌마 퍼머말고 웨이브 퍼머를 하면 어떨까? 그런데 그게 거의 백불이 넘는다네. 팁까지 합치면 이백불 가까이 하는 곳도 있다던데. 근데 그 머리를 하면 십년은 젊어 보인다던데....."

선희는 엄마의 그런 요구가 반갑고 기뻤다. 오, 엄마가 이제야말로 여자로 돌아오는구나. 매니저 양씨때문이었던 어쨌든 엄마에게서 처음 들어보는 요구가 신선하기까지 했었다. 그래서 기쁘게 엄마를 모시고 미장원에 가서 그 웨이버 펌 머리 값을 치루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희는 이제 엄마의 그런 태도가 실망스럽다. 엄마의 자리에서 여자의 자리를 찾은 엄마가 이제는 조금 섭섭하기까지 하다.

"그럼 네가 퇴근 후에 날 데리러 올래? 마켓 앞에서 기다릴께. 오, 오늘은 지겨운 버스 안 타도 되겠구나. 쇼핑 마치고 네가 집까지 태워다 줄 거니까......"

엄마 집과 마켓까지는 차로 바로 가면 15분이면 되는 거리다. 그러나 버스를 타면 이곳저곳으로 돌기 때문에 1시간이나 넘어 걸린다. 엄마는 오히려 버스 타는 시간이 편하다고 했었다. 집에서는 아버지의 온갖 시중, 마켓안에서는 산처럼 쌓인 일더미 속에 묻혀 사는 엄마였던지라 편안하게 앉아 이 생각 저 생각하고 바깥 구경하면서, 때로는 깜빡깜빡 졸기도 하면서 버스를 타는 게 좋다던 엄마였다.그러나 엄마는 이제 버스 타는 게 지겹단다.

"으응.....엄마 퇴근 시간에 맞추어 데리러 갈께......"

전화를 끊고 선희는 침대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는다. 엄마도 변해가고 자신도 변해가고 다 변해가는 것 같다. 대낮에 남자와 호텔방에서 몸을 섞은 후 그 남자가 던져주는 지폐 몇장에 희희낙락하는 여자. 그리고 그 돈으로 옷을 사 주겠다고 조금치의 거리낌도 없이 밝은 목소리로 엄마에게 전화하는 여자. 그리고 단 한 번의 형식적이고 으레적인 사양도 없이 딸이 사 주는 옷을 대뜸 받아 입겠다는 엄마라는 여자.

내가 지금 무슨 돈으로 엄마의 옷을 사 주려는 줄 알아? 어떤 남자와 섹스를 하고나서 받은 돈이야. 창녀처럼 말이지 엄마, 하고 다시 전화해서 말 하고 싶은 충동을 선희는 느낀다. 원인 모를 심술이 한여름 낮 밖에 내어둔 막걸리처럼, 이스트를 잔뜩 넣은 밀가루 반죽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그렇게 말하면 엄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랬으면 어때. 너도 즐거웠쟎아. 그럼 됐지 뭐,얘, 얼른 옷이나 사러 가자. 그렇게 나올까. 설마. 그렇지는 않을 거야.

요즘 엄마는 많이 변했다. 예전부터도 별로 좋은 사이는 아니었지만 아버지와 싸우는 횟수가 최근에 더욱 늘었다. 엄마는 날이 갈수록 기세가 등등해졌고 반면 아버지가 많이 죽어 지내는 것 같은데도 싸움은 더 잦아진 것이다. 또한 요즘들어 엄마는 비번인 날, 가끔 행선지 모를 외출도 한다.

집에 전화를 하면 아버지가 받을 때가 많다. 엄마는요? 하고 물으면 몰라, 하고 아버지는 짧게 말한다. 어디 간다고 말 안했어요,하고 선희가 재차 물으면 글쎄, 마켓에서 일 하는 아줌마들하고 점심을 먹으러 간다던가, 하고 건성으로 대답한다. 같이 일하는 아줌마의 손주 돌잔치에 갔다고 할 때도 있다.

아버지. 제발 이제 엄마 좀 챙기세요, 하고 말하고 싶지만 선희가 입을 다문다. 그렇게 말한다해도 들을 아버지도 아니지만 이제 엄마도 인생을 좀 즐길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 때문이다.

그러나.

딸과 몸을 섞은 남자가 던져준 돈으로 산 옷을 입고 아버지가 아닌 외간 남자를 만나러 나가는 엄마를 상상하는 것은 괴롭다. 차라리 엄마에게 전화를 하지 말걸. 선희는 몸을 떤다. 호텔 방 안의 에어컨 바람이 너무 세서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참담한 후회 때문에 가슴이 떨리고 몸이 떨린다.

이게 뭐예요? 화대라면 도로 넣어둬요. 내가 화대받으려고 당신과 잔 것 아니니까요! 하고 호기롭게 그 돈을 다시 익준에게 돌려주지 못한 후회, 부챗살처럼 펼쳐져 있는 지폐를 보고 전깃불이 들어오듯 잠시 기뻐했던 데 대한 후회. 앞 뒤 생각없이 엄마에게 전화해 옷을 사주겠다고 제의한 후회.

아,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추레하고 구질구질할까. 선희는 침대에 앉은채 앞으로 고꾸라진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돈에 쩔쩔매는 일만 없었더라면. 그랬다면 박익준이 준 돈 천불에 이러지는 않을 텐데......

적지 않은 월급이지만 학비론에다 부모의 생활비 보조금, 아파트 세, 차 월부금 등을 제하고 나면 햄버거 한 개도 맘 놓고 사 먹을 여유가 없는 선희다.

익준이 놓고간 돈 천불 때문에 이러저런 갈등에 휩싸이게 된 선희,그녀는 끝내 흐흐흥, 어린 아이같이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