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에 앞서.
저는 이정옥이라는 사람입니다.
내 이야기를 대필해 준 이계숙 씨를 만나기 전 까지만 해도 저는 자주 밤잠을 설치곤 했습니다.
나의 가슴 속에 피빛 멍으로 자리 잡고 있는 한 많은 내 삶을 끝끝내 누구한테도 털어놓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게 아닌가 하는 조바심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내 이야기를 풀어 놓으려 하니 두렵고 겁이 났습니다.
'그 무슨 좋고 자랑스런 이야기라고 세상에 소개까지 하려 하나..' 라고 할 사람들의 반응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 이야기는 여자로서는 도저히 이야기 할 수 없는 부끄럽고 창피한 이야기 입니다.
추잡스럽고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감히 입 밖으로 내어 말하기조차 거북한 대목도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야기를 꺼내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혼자 간직하고 혼자 삭여 무덤 속으로 가져 가기에는 너무나 억울하고 분해서, 너무도 가슴이 아파서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간절히 찾았습니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글로써 세상에다 알려 줄 사람을 정말이지 저는 간절하게 찾았습니다.
다행스럽게 저는 이계숙 씨를 만났고 제 소원은 풀렸습니다.
제 가슴 속에 구비구비 서린 원한을 다 털어놓은 지금 저는 시원하고 담담합니다. 제 이야기를 들을 사람들의 반응이 겁이 나긴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혹시 내 이야기가 소개되는 것을 계기로 40년 동안 소식이 끊긴 언니들을 만나 볼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큰 언니(이기숙 64세)와 작은 언니(이숙자 60세)는 지금쯤 모두 며느리와 손주를 본 할머니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은 물론 세상을 뜨셨을 거구요.
그리고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편안하던 6개월을 같이 보낸 강우 씨.
특히 비가 올 때는 그의 얼굴이 가끔 떠 오릅니다. 제가 한국을 떠나 올 때도 비가 엄청 왔거든요.
내가 비 맞을까 봐 자신의 코트로 꽁꽁 여며주며 그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미국에 도착하는대로 즉시 편지하라고...
그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그토록 내 가슴을 끊이던 딸이 곧 결혼을 합니다.
결혼을 하기까지에는 가슴 아픈 사연도 많았고 속상한 일도 많았지만 그런대로 대충 해결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을 앞두고 행복에 젖어 있는 딸을 보면 기쁘기도 하지만 걱정도 됩니다.
평범하지 못한 가정에서 평범하지 못하게 자란 딸아이가 결혼생활을 잘 영위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 때문입니다.
평범한 삶.
인간으로 태어나서 평범하게 사는 것 이상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을까요.
'제발이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평범하게만 살아다오'. 이것이 평범하지 못한 일생을 살아 온 저의 딸에 대한 간절한 바람입니다.
저의 변변치 못한 말솜씨를 끝까지 인내로 들어 주고 글로써 정리해 준 이계숙 씨, 그리고 내 인생에 있어 하나의 커다란 기둥이 되어 준 윤 여사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소개할 제 이야기에는 과도한 폭력과 섹스에 대한 표현이 많이 있사오니 임산부나 마음이 여리신 분은 읽으시는데 조심할 것을 권합니다.
이정옥,그녀와의 만남.
내가 그녀, 이정옥을 만난 것은 1994년 어느 가을날 오후 오른 쪽 어깨의 아픔으로 인해 찾아갔던 한약방에서였다.
평소 친분이 있던 한의사 J씨는 환자를 보는 중이었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대기실에는 필리피노 같아 보이는 동양여자 한명이 무료히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비어 있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필리피노로 보이는 동양여자는 나와 반대편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잡지같은 읽을거리가 없던 나는 요즘 들어 원고를 쓰느라 더욱 아픔이 심해진 어깨를 연신 주무르면서 그녀를 무심히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피부는 검은 편이었고 짧은 머리는 퍼머를 했는데 검은 피부가 반짝반짝 윤이나고 있어서 어떤 묘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여자였다.
나이는 오십대 초반 쯤 되었을까?
옅은 하늘색 블라우스와 같은 색의 바지가 그녀의 윤나는 피부와 잘 어울려 보였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약간 웃어 보였다. 나 역시 계면쩍게 웃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