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진찰실 문이 열리면서 J씨가 나타났다.

그는 특유의 환한 웃음으로 반색을 하며 나를 맞았다.

"오랫간만이야 이기자. 얼굴이 좋아졌구만. 그동안 잘 있었어?"

"잘 있긴요, 팔이며 어깨가 아파 죽을 지경이구만..."

"흠, 젊은 사람이 왜 그래? 어디한번 진찰해보지. 참 그건 그렇고 이 분과 인사했어?"

J씨는 그때까지도 의자에 앉아 눈으로만 웃고 있는 여자를 가르켰다.

"아니요. 그럼 이 분, 한국사람이세요? 난 필리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말을 해놓고 나는 아차, 했다. 실수했구나. 그렇쟎아도 검은 피부 때문에 타인종으로 오해받을 일이 많았을텐데 나까지 그랬으니...

얼굴이 굳어질 줄 알았던 그녀는 내가 미안해 하는 얼굴을 보이자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미안해 할 필요없어요. 처음 보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한국사람이 아닌 줄 알아요. 캄보디아 사람인 줄 아는 사람도 있는데요, 뭘..."

J씨가 큰 소리로 웃었다.

"나도 처음에 당신을 봤을 때 한국여자가 아닌줄 알았어. 필리핀이나 인디안 계통사람인 줄 알았다니까. 그래, 몸은 좀 어때요? 지난번에 침 맞은 자리는 좀 좋아졌어?"

J씨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는 꽤 들어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이같은 천진함이 엿보였다.

"그렇쟎아도 이계숙씨와 이정옥씨를 만나게 해 주려고 했었는데 마침 잘 되었군. 둘 중에 누가 먼저 왔지?먼저 온 순서대로 진찰을 하고 우리 요앞 식당에 가서 저녁이나 먹을까? 이제부터는 환자도 없을테니까 말이야."

J씨의 제의대로 차례대로 진찰을 받은 우리는 한의원에서 멀지 않은 곳의 식당으로 갔다.

각자 음식을 주문하고 나자 J씨는 여지껏 보여온 장난기 서린 표정을 거두고 짐짓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 여사의 살아온 이야기를 발표할 만한 데가 없을까? 이여사가 지금껏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옮겨놓으면 꼭 읽힐만한 이야기가 될텐데 말이야."

나는 거의 반넘어 하얗게 센 J씨의 머리카락이 불빛에 반짝거리는 걸 보며 ' 아이구야,오늘 잘못 잡혔구나' 하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내 이름 석자가 신문이며 잡지에 심심찮게 오르내리게 되자 가장 흔하게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 책으로 묶으면 몇 권은 될 한맺힌 삶의 이야기'를 가진 인생들이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30년, 40년 혹은 50년동안을 살면서 웬 인생의 역경과 굴곡들이 그렇게도 많은지, 모두 다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만큼 가슴 아프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없을 거라고 입을 모았다.

'오늘 저녁 식사를 맛있게 하기는 글렀구나...'

이 여사라 불리우는 그 여자는 계속 웃음띈 얼굴로 나와 J씨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검은 피부가 전등 불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마치 까만 차돌멩이를 보는 것 같았다.

"이 여사의 경우는 아주 특이해요"

내가 흥미없어 하는 걸 눈치챘는지 J 씨는 약간 다급한 목소리로 나의 주위를 환기시켰다.

"자그마치 십 몇 년을 남편의 병적인 섹스와 폭행을 당해온 케이스야. 하루도 안맞고 안당하고 넘어간 날이 없었대. 자그마치 십 몇 년을. 듣고 있어요?"

나는 들고 있던 물컵을 내려놓았다.

십 몇 년을 섹스와 폭행에 시달렸다고? 가만, 폭행은 그렇다치고 병적인 섹스는 뭐야?

내가 반짝, 관심을 갖는 걸 알아챘는지 J씨는 넥타이를 끄르면서 ' 자그마치 십 몇 년 씩이나 말이지' 하고 되뇌었다.

"이 여사가 겪은 경우는 참으로 특수한 것 같아. 누구나가 태어나서 이런 일 저런 일을 겪고 고생들을 하며 살아가지. 그게 인생 아니야? 인간의 삶이 처음부터 스무드하게 평탄하기만 하다면 무슨 인생사는 재미가 있겠어? 고난을 당하면서, 그리고 그것을 헤쳐 나가면서..그리고 고난을 헤쳐나간 뒤엔 반드시 대가가 있기에 모두들 기를 쓰고 열심히들 살아가고 있지 않나. 그런데 이 여사는... 언제 시간내서 이 여사 살아온 이야기 좀 들어봐. 일단 이야기를 듣고나면 아마 이기자가 먼저 쓰자고 덤벼 들걸?"

나는 그 여자를 유심히 바라 보았다.

J씨가 말한, 십 몇 년 동안의 성폭행이나 폭력을 당한 것 같은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평범하게 늙어온 중년 여자의 모습이었다.

"제 이야기를 써 주세요."

지금껏 조용히 웃기만 하던 여자가 간곡한 얼굴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가 자기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다는 걸 알았음인지 그녀의 얼굴에 부끄러움도 약간 있었지만 매우 단호한 모습이었다.

"저는 지금껏 살아온 내 한 많은 인생을 여러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이 세상에는 나같은 인생이 있다는 걸, 그 누구도 상상 못할 무시무시한 일들을 겪으면서도 끈질기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내 이야기를 속시원하게 털어놓고 싶어요. 만약 내 살아온 이야기를 그냥 가슴에만 묻어두고 죽는다면 너무 억울해서,정말이지 너무 억울해서 눈을 감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지금도 가끔 자다가 한밤중에 깨어서는 가슴을 두손으로 감싸고 누르지요.그렇지 않으면 내 가슴 속에 쌓인 내 응어리진 사연들이 그냥 참지못하고 입으로 터져 나올 것만 같아서...정말 나는 이야기 하고 싶어요.할 수만 있다면 몇 천 명이 모인 자리에서 마이크에다 대고 소리소리 지르며 이야기 하고 싶어요.바보같이, 천치같이 한 남자에 철저하게 짓밟혀 살아 온 회환의 삶이 여기 있다고..."

그녀의 마지막 말은 울음으로 잦아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손바닥으로 입을 막고 소리죽여 울었다.

격정을 참는지 어깨가 들먹들먹했다.

"걱정 말아요 이 여사"

J씨가 그녀의 어깨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이 기자가 당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 줄 거예요.잘 듣고 글로 써서 세상에 알려줄 거예요."

뭐가 있구나.

나는 어린애 달래듯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는 J 씨와 울고 있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의 커다란 이야기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계속-

-이계숙의 더 많은 작품은 http://kyesook.com 로 오셔서 읽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