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주문한 음식이 날라져 왔다.
음식을 보자 나는 먼저 포크를 집어들었다.
"우선 식사부터 합시다.전 배가 아주 고프거든요"
나는 분위기를 바꾸어 볼 요량으로 짐짓 명랑하게 말했다.
J씨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우선 밥이나 먹도록 하지. 이 여사 얼른 들어요"
그녀는 앞에 놓인 내프킨으로 코를 플었다. 그리고 천천히 포크를 들어 음식을 집었다.
우리는 잠자코 음식을 먹었다. 자주색 앞치마를 두른 웨이츄레스가 연신 와서 커피를 채워주었다.
"이 여사님은 어디 사세요? 여기 S시에서 한 번도 뵙지 못한 것 같은데..."
"저는 A시에 살아요"
A시라면 이곳에서 차로 40분 가량 걸리는 곳이다.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 침을 맞으러 온다고 했다.
"10여년 동안 남편과 살면서 하도 맞아서 팔이고 허리고 안아픈 데가 없어요. 특히 허리는 쓸 수가 없을 정도예요"
미트로프를 시킨 그녀는 썩 입맛이 당기지 않는지 물만 연신 마시며 나즈막하게 말했다.
"온몸이 골병이 든 것 같더구먼"
J씨가 접시를 밀어 놓으며 거들었다.
"그렇게 맞고도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걸 보면 신기해. 이 여사가 본래 건강체질이었나봐"
"건강체질이 아니더라도 저 같이 잡초같은 인생은 살아가면서 건강하도록 단련이 되나 봐요.이 나이 되도록 감기 같은 것 한 번 걸려 본 적 없거든요. 눈도 한 쪽이 실명되었어요.남편한테 맞아서. 그런데 남은 한 쪽이 잘 보이니까 이렇게 운전까지 할 수 있지 않아요."
입에 짝짝붙던 스테이크 맛이 일시에 달아났다. 실명이 되도록 매를 맞다니...
나는 씹던 고기를 꿀꺽 삼켰다.
얼굴도 모르는 그녀의 남편이란 남자에 대한 맹렬한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어떤 개자식이길래 여자를 실명이 되도록 패나...
"주소 주세요. 제가 이번 주말에 찾아 볼께요. 하루면 되겠어요? 살아오신 이야기를 빼지 않고 쭈욱 해 주시는데 하루면 되겠지요?
얼굴이 밝아진 쪽은 J씨였다.
"그래, 해 보려구? 잘 생각했어. 이왕이면 내 아내랑 같이 가도록 하지. 이 기자 눈도 나쁜데 찾아 갈 수 있겠어? 어쩌면 돌아올 땐 어두울텐데..."
사흘 후 일요일 아침.
나는 J씨의 부인과 함께 그녀가 사는 A시로 향했다.
운전은 J씨의 부인이 하기로 하고 나는 보온병에 담아 간 커피를 마시며 대충 이정옥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 여사가 우리 한의원을 찾아 온 지는 아마 대여섯 달 쯤 전이었을거야. 처음엔 말도 잘 안하고 그저 묻는 말에나 대답하는 정도였지. 한국말도 어눌하고.."
"미국에 오래 살았나 보죠?그러면 영어는 잘 하겠네요."
나는 며칠전 할 수만 있다면 수 천 명이 모인 자리에서 마이크로 자기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싶다던 이정옥씨를 떠올리며 물었다.
"글쎄,영어도 그리 썩 잘하지는 못하나 봐. 영어고 한국말이고 요즘 들어서야 좀 늘었대.처음 발견될 땐 한국말도 영어도 둘 다 못했대."
"발견되다니요, 어느 무인도에 갇혀 있었나요?"
J씨의 부인이 나를 보며 웃었다.
"차라리 무인도에 갇혀 있었으면 좋았게? 어쨌든 오늘 가서 이야기를 들어 봐. 펑펑 울지나 말고. 난 이야기 듣고 일주일을 울었어.우리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고.
처음에 우리 한의원에 왔을 때 몸을 보니 단 한 군데도 성한 데 없이 골병이 들대로 들었는데 왜 그랬는지 도통 말을 안하는 거야. 진맥도 진맥이지만 이유를 좀 알아야 처방을 정확하게 내리고 약을 짓지.말을 안하는 사람을 다그칠 수도 없어서 그냥 지극정성으로 침을 놓고 약을 지어 주었대. 일 주일에 세 번 정도 왔는데 두어달 쯤 되자 돈이 없는지 잘 안오더라는구만. 몸을 제대로 움직이게 하려면 앞으로 서너달은 더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말이야. 얼마만에 이 여사가 다시 왔길래 우리집 양반이 그랬대. 돈은 걱정말고 몸이 괜찮아 질 때까지 계속 치료를 받으라고. 그랬더니 비죽비죽 울더라는 거야. 그 다음엔 자기집 뒷산에서 땄다며 주먹만한 알밤을 한 바구니나 가져오지 않았겠어? 그렇게 점차 친해졌지."
J씨의 부인은 목이 마르는지 내 손의 커피를 가져다 한 모금 마셨다.
"어느 날 이 여사가 우리에게 저녁을 사겠대. 우린 기쁜 마음으로 초대에 응했지. 식사를 마친 후 자기가 어떻게 살아 온 여자인지, 왜 온몸이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었는지 이야기를 해줄 테니 들어보래. 그리고나서 자그마치 세 시간을 쉬지 않고 이야기 했는데 우리 부부는 처음엔 체면도 있고해서 흐르는 눈물을 몰래 닦기만 했었어. 나중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더라구. 셋이 붙들고 엉엉 울었어. 식당주인이 놀라서 달려올 정도였다니까. 이 여사가 그래요. 지금 한 이야기는 자기가 겪은 이야기의 십분의 일도 안된다고..대충 중요한 대목만 추려서 얘기한 거래요. 입에 담기조차 수치스러운 섹스에 대한 대목이 여러번 나왔는데 그게 전혀 더럽거나 추잡하게 들리지 않았어. 그저 어쩌면 이렇듯 불쌍한 삶을 산 여자가 있나 싶기만 하고...그러면서 그래. 자기가 조금만 더 똑똑한 여자였으면 그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겪지 않았을 거라고.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고. 자기 이야기가 세상에 좀 알려져 두 번다시 자기와 같은 불쌍한 인생을 사는 여자가 없어졌으면 하는게 소원이래. 미국에 온 지 25년 째가 되는데 정식으로 자기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나. 발견되고 난 후 그 지역이 온통 이 여사 이야기로 떠들썩하긴 했었지만."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발견되었는데요,하고 묻고 싶은 걸 나는 참았다.
조금 있으면 다 듣게 될텐데..
40분 걸려 도착한 A시는 전형적인 전원도시였다.
2층 이상의 빌딩도 보이지 않았고 차들도 많지 않았다.
한 번 밖에 와보지 않았다는데 J씨의 아내는 이정옥씨의 집을 금방 찾았다.
차고가 있고 길 쪽으로 난 창에 보라색 커튼이 쳐져 있는 평범한 집이었다.
이정옥씨는 우리가 차를 대기도 전에 뛰어 나왔다. 우리는 집안으로 들어 섰다.
어디선가 생선 조리는 냄새가 풍겨 나왔다. 우리를 위해 점심을 준비하는 중이라 했다.
점심을 먹고 나는 녹음기와 노트를 챙겨 이정옥씨와 마주 앉았다.
퍼머한 머리를 뒤로 묶고 빨간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이정옥씨의 몸은 며칠전에 한의원에서 봤을 때보다 조금 살이 쪄서 그런지 쉰 다섯살이라는 나이에 맞지않게 탱탱해 보였다.
"오늘은 무척 젊어 보여요. 피부도 역시 좋으시고요"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긴장을 풀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55년간의 한 맺힌 삶을 막상 풀어 놓으려하자 괜히 당황되고 긴장되어 입이 얼은 이정옥씨를 생각해 나는 우선 몇 마디 편안한 말을 주고 받았다.
J부인과 운전을 해 오면서도 이거 괜한 짓 하는 게 아닌가 마음이 썩 편치 않았던 나는 이정옥씨 기억 저편에 도사린 실오라기 같은 사연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J씨 부인의 입에서 나온 '발견' 이란 단어가 나를 몸달게 했다.
어떻게 하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발견' 될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지 이제부터 확실하게 듣게 되는구나...
이정옥의 어린 시절
글쎄요.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하나. 내 이야기를 누가 시간내어 하루종일 들어만 줘도 고맙겠다 싶더니 막상 들어주려는 사람이 앞에 앉아 있으니 말이 잘 안나오네.
사실 난 한국말도 영어도 둘 다 잘 못해요. 이곳으로 이사 와서 한국 여자들을 두엇 사귀긴 했지만 아직도 어려운 말은 잘 알아 듣지 못하고 할 수도 없어. 반병신이야 내가. 아무것도 속시원하게 할 줄 아는 게 없어. 그동안 짐승처럼 사육되어 왔으니까..
그건 그렇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 어린 시절부터 하라고?
글세 내 어린 시절은 배고픈 기억뿐이라서..
나는 지금 쉰 다섯으로 부산에서 태어나서 서너살 때 전라도 어느 소읍으로 이사를 갔지. 위로 언니 둘이 있었고 내가 막내였는데 아버지는 지독한 노름꾼이었대.
해소병으로 골골하던 중에도 손에 노름은 놓지않던 아버지가 죽은 후 돈이 될만한 건 빚쟁이들이 다 집어가 버리고 살길이 막막해진 어머니가 고무신 때우는 남자한테로 개가를 했어요.
키가 작고 얼굴이 하얀 사람이었는데 아들 둘 딸 하나를 이북에 두고 온 실향민이었어요. 혼자서 외롭게 살다가 우리가 들어가자 사람사는 냄새가 나서 좋아하던 기억이 나는구만. 없는 살림에도 우리에게 과자를 사 주는등 좋은 사람이었는데 술만 먹으면 이북에 두고 온 가족이 생각난다고 통곡을 하고 울더구만. 난 그게 싫어서 양아버지가 술을 먹은 기색이 있으면 얼른 잠을 청하곤 했었지.
인물이 뛰어났던 큰 언니는 산을 두 개나 넘어야 했던 산골로 시집을 갔고 작은 언니는 집안일을 돕기 위해 날품을 팔았지.
국민학교도 갈 형편이 안되었던 난 양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일을 도와야 했고.
불을 지피는데 바람이 일어나게끔 풍로를 돌리는 일이었어.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나 또래의 아이들이 책보를 들고 학교에 가는 것을 보면 부러워서 죽을 지경이란 말이야.그래서 하루는 양아버지에게 나도 학교에 가면 안되겠냐고 했더니 나를 한참 들여다 보다가 한숨을 푹 쉬더군.
"우선 배곯는 일부터 해결해 놓고..."
그때의 우리 형편에 학교란 얼마나 큰 사치였을까.
인근 장터를 돌아다니며 죽으라고 고무신을 때워 봐야 하루 두 끼 먹기도 힘들었는데.
얼마 후 둘째언니도 시집을 갔어.
둘째 언니가 그 무렵 열 네 살이었을거야, 아마.
큰 언니닮아 얼굴도 예쁘고 행동도 조신한 둘째 언니를 어느 부잣집에서 데려 간거야. 말이 좋아 시집이지 팔려가는 거나 마찬가지였을거야. 큰 언니와 마찬 가지로 집에 쌀 두가마니를 남겨놓고 갔으니까.
혼례식 같은 것도 없었어.어느날 보퉁이 하나만 달랑 들고 머슴들이 지고온 쌀 두 가마 대신 지게에 얹혀 갔지.
아웅다웅 싸우긴 했지만 나를 끔찍히도 아껴주던 둘째 언니가 시집을 가 버리자 그야말로 나는 집에서 외돌톨이가 되었지.
장이 서지 않은 무싯날은 양아버지와 어머니는 남의집 날품을 팔았고 그러면 먹을 것도 없는 빈 집에서 나 혼자 덩그러니 하루종일 있어야 했어.
하루는 배도 고프고 시집 간 둘째 언니도 보고 싶어서 동네이름만 가지고 물어물어 둘째 언니네를 찾아갔지.
가파른 고개와 시냇물을 건너 거의 한나절을 걸려 찾아갔는데 마당 우물에서 상추를 씻고있던 언니가 대문안을 기웃거리는 나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뛰어 나오더군.
"얘,여길 어떻게 알고 왔니? 혼자서, 너 혼자서 온 거니?"
보고싶던 언니를 보니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나는 눈물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언니의 행주치마에 묻었어.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