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도시에서 가장 화려하고 고급스럽다는 아파트 'Zera'에 박익준이 살고 있었다.

도시의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변 옆에 위치한 30층짜리 아파트. 4면, 혹은 2면이 통유리로 마감되어 있어 날씨가 좋은 날엔 100마일 인근의 경치까지 다 볼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추었다는, 인간이 먹고 입고 쓰는데 필요한 모든 생필품을 조달할 수 있다는, 그래서 크레딧 카드와 셀폰과 컴퓨터만 있으면 문밖 출입을 한 발자국도 하지 않고도 생활이 가능하다는 그 맨션 아파트 28층 265호가 박익준이 사는 공간이었다.

그 남자, 박익준은 웬만한 주택의 한달 페이먼트를 훌쩍 넘는 렌트비를, 선희가 내는 아파트 렌트비의 다섯배에 가까운 돈을 지불하면서 거기에 혼자 살았다.

선희는 그 아파트의 로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 항상 위축되는 자신을 느껴야 했다. 아무 잘못 저지른 것도 없으면서도 웬지 당당하지 못하고 부자연스러운. 잘 닦아놓은 거울같이 반들반들하고 미끄러운 대리석 바닥에 자칫 잘못해 미끄러질까 염려가 되어서가 아니었다.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보던, 카드 한 장으로 출입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최첨단 시설 때문만도 아니었다. 공기때문이었다. 그 곳은 공기가 벌써 달랐다. 엘리베이터 안에 단둘이 타게 되어도 아는 척은 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는 그 아파트 사람들의 냉랭하고 쌀쌀한 공기. 그것은 선희같은 보통 사람들의 손길을 단연코 환영하지 않는 오만하고도 도도한 공기였다. 선희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가진 자, 성공한 자만이 만들 수 있는 특별한 공기였다.

선희는 대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사물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컴컴하고 한여름의 대낮에도 오소소 한기가 도는, 축축하고 습한 느낌이 도는 자신의 아파트를 떠올렸다.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나는, 지옥과 천당 만큼이나 차이가 나는 박익준과 자신의 아파트. 그것은 참으로 싫은 일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떠오르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사람이 사는 것 같지않게 조용한, 특히 아이들을 전혀 볼 수 없는 박익준의 아파트와는 달리 선희가 사는 아파트엔 늘 사람들이 들끓었다. 온갖 연장들을 땅바닥에 늘어놓고 내장을 드러낸 고물차를 고치는 남자들. 그리고 그 옆에는 항상 술에 불콰해진 얼굴의 늙고 젊은 남자들이 맥주병을 든 채 히히덕거리고 있기 마련이었다.

남루한 옷을 걸친 아이들은 고삐풀린 망아지같이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여자들은, 끈만 달린 원피스로 허연, 혹은 검은 살과 풍선처럼 튀어나온 배를 간신히 가린 여자들은 세탁바구니를 들고 오가면서 아이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게중에는 F자를 섞어가며, 때로는 MF자를 섞어가며 욕설을 퍼붓는 여자들도 있었다.

차에서 내릴 때, 아니면 차를 주차한 후 건물 뒤를 한참 돌아가야 하는 위치에 있는 아파트방으로 걸어 갈 때, 이른 저녁이던 늦은 밤이던 사람의 무리를 만나지 않은 적이 거의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고물차를 뚝딱거리고 고치는 남자들은 선희에게 늘 수작을 부렸다. 휘파람을 불고 킬킬대면서.

헤이, 아가씨. 오늘 저녁 나랑 맥주 한잔 어때? 나, 물건 엄청 실하다고. 한번 맛볼 용의가 있어, 없어?

그 남자들 무리를 지나치면서 선희는 늘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었다. 아아, 나는 언제 쯤이나 이 소굴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언제 쯤이나 치마만 둘렀다하면 헤롱대는 저 같쟎은 인간들을 안 보고 살 수 있을 것인가. 선희는 결혼만이 그 소굴을 탈출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른 사람말고 박익준과 결혼만이 자신을 그곳에서 구해내 줄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은 선희를 한동안 절망케했다. 선희가 절망한 것은 자신의 그 바램이 죽었다 깨어나도 요원한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박익준의 30층 고층 아파트와 자신이 사는 2층 짜리 아파트의 빌딩 높이 차이 만큼이나 거리간 먼 이야기였다.

박익준과의 결혼, 그것은 가능하지 못했다. 선희는 시간이 가면서 그것을 다시금 새록새록 느끼고 있었다.

처음 박익준을 만나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섹스를 나눌 때까지만해도 선희는 손톱끝 만큼의 가능성을 두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가치관이나 환경, 생활방식등 자신과 달라도 한참 다른 남자였지만 궁극적으로보면 여자와 남자였다. 남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가 별 것 있는가. 마음 맞고 뜻 맞고 서로 좋아하면 되지. 그러면 결혼도 할 수 있는 거지.

그러나 박익준을 만나 관계를 이어온지 1년이 가까와 오는 지금 선희는 그런 가능성을 접었다. 왜냐면 박익준은 결혼이란 제도에 관심이 아예 없는 남자라는 걸 알았으므로. 그 남자의 관심사는 오직 어떻게 하면 오늘 하루를 즐겁게 보낼까에 국한되어 있다는 걸 알았으므로.

그렇다면 왜 선희는 아직까지 박익준의 옆을 얼쩡거리고 있는 것일까. 죽어도 자신은 박익준의 아내가 될 수 없다는 걸, 오늘 밤이 지나면 내일의 해가 뜬다는 사실처럼 자명한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왜 선희는 박익준의 옆에 머무르고 있는 것일까.

오늘만해도 그렇다. 지금 선희는 박익준의 집을 청소하러 온 길이었다.

한달 전. 선희는 바쁜 업무 중 박익준의 전화를 받았다. 타주로 급하게 출장갈 일이 생겼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은 지금 반드시 마쳐야만 할 중대한 일이 있으므로 도저히 집에 가서 짐을 쌀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거였다. 선희로 하여금 자신의 집에 가서 출장준비를 해다달라는 부탁이었다.

선희는 박익준의 전화를 받자마자 매니저에게 엄마가 응급실에 실려갔다는 당치도 않은 거짓말을 둘러대고 회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박익준의 회사로 급하게 차를 몰아가서 출입카드를 건네받아 다시 바람처럼 박익준의 아파트로 날아간 것이었다.

콩 튀듯 팥 튀듯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박익준의 출장준비를 하면서 선희가 느낀 것은 뿌듯한 행복감이었다. 박익준의 속옷과 세면도구를 가방안에 챙겨넣으면서, 여별 양복을 구김가지 않게 잘 개켜넣으면서 선희는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낀 것이다. 마치 자신이 박익준의 아내가 된 것 같은 착각, 그리고 충족감. 그것보다 선희를 행복하게 한 것은 온갖 여자들을 섭렵하고 다니는 박익준이었지만 그래도 출장준비를 해달라는 부탁을 할 만큼 가까운 여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마치 수백명의 시녀 중에서 간택받은 기분이었다. 왕의 시은(施恩)을 입은 시녀처럼 선희는 황송해서, 어쩔 줄 몰라하면서 박익준의 부탁을 마무리 했었다.

그때. 선희는 딴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박익준이 자신에게 그런 일을 부탁한 것은 그만큼 자신을 쉽고 만만하게 보아서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박익준의 출장준비를 해준 후 얼마 안돼 이번에는 집에 두고 온 서류를 갖다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날 박익준의 집에 들렀던 선희는 일주일에 한 번 온다는 메이드와 맞닥트렸다. 그리고 선희는 경악할 만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방금 변기를 닦은 걸레로 부엌 카운터를 훔치는 장면을. 그걸 본 선희는 강력하게 출입 카드를 달라고 박익준에게 요구했다.

"아무리 빠른 시간내에 청소를 마쳐야만 해도 그렇지. 아무리 주인이 보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지. 사람에겐 윤리라는게 있고 도리라는 게 있고 양심이라는 게 있는 거예요. 어떻게 화장일 변기를 닦은 걸레를 부엌에서 다시 쓸 수 있냐고요!? 자기 집이라면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한달에 천불 가까운 청소비를 주었단 말이예요? 카드 줘요. 이제부터 당신 집 청소는 내가 책임질 거야. 그 청소부 당장 해고 해요"

박익준은 별다른 토를 달지않고 출입 카드를 선희에게 내주었다. 요리과정을 일절 보지 않고 먹는 음식이 맛이 있듯이 그냥 집이 깨끗하면 그런가보다 했지, 청소과정이 어떤지 전혀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면서. 청소를 마친 날 집에 들어가보면 부엌에서 나는 세제냄새나 화장실에서 나는 세제냄새가 거의 똑같아서 이상하게 생각은 했다면서.

선희가 박익준의 아파트로 청소하러 가는 날은 대부분 박익준이 바빠서 집에 늦에 들어오는 날이었다. 마음이야 박익준의 얼굴을 매일 보고 싶지만 청소를 해줍네하는 핑계로 자주 찾아가는 것은 속 보이는 일 같아서.

선희는 퇴근후 박익준의 아파트로 곧장가서 청소를 해놓고 박익준이 돌아오기 전에 돌아왔다. 그리고 청소를 마친후 가끔 저녁을 해놓을 때도 있었다. 세련되고 깔끔한 생김새와는 달리 박익준은 토속적인 입맛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음식은 된장찌개였다. 할라피뇨 고추와 굵은 파를 잔뜩 썰어넣은 된장찌개.

"살면서 여지껏 먹어본 것 중 제일이야. 된장찌개는 일단 된장이 맛있어야 하는데 진짜 제대로 된 된장인 것 같아...."

박익준은 선희의 된장찌개 끓이는 솜씨를, 그리고 엄마의 된장 담그는 솜씨를 아낌없이 칭찬했다. 엄마는 이상하게 물었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면서 요즘은 웬일로 된장을 그리 많이 가져가니, 하고.

집에서 밥을 일체 해먹지 않는 박익준이었으므로 유리컵 몇 개, 와인 글래스 몇 개 외엔 살림도구가 아예 없다시피했다. 선희는 박익준의 저녁을 짓기위해 뚝배기와 냄비등 몇가지의 살림살이들을 자신의 집에서 가져다 놓아야 했다.

오늘도 청소를 마친 후 저녁을 해줄 생각으로 선희는 이것저것 가져 왔다. 오늘의 메뉴는 굴보쌈이었다. 엊저녁에 미리 해 둔 김치양념과 소금에 절였다가 물기를 뺀 노란 배추속이 비닐 봉지에 담겨 선희의 가방속에 있었다. 퇴근후 들린 미국가게에서 선희는 얼리지 않은 굴을 한 파운드 샀다. 박익준이 도착할 때 쯤 되어서 뜨거운 밥을 지어 같이 내놓을 생각이었다. 회사에서 바로 집으로 올 박익준은 배가 적당히 고파있을 상태일 것이다. 갓지은 하얀 쌀밥에 싱싱한 굴 보쌈이라니. 박익준이 얼마 좋아할 것인가.

엘레베이트를 타고 올라가면서 선희는 언제부터인가 박익준의 기분에 따라 자신의 기분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박익준의 기분이 유쾌하면 자신도 유쾌하고 박익준의 기분이 저조하면 자신의 기분도 저조했다. 그리고 박익준의 기분이 저조할 때면 그 기분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하기 위해 애를 쓴다는 사실이다. 애교도 부리고 객쩍은 농담도 하면서.

야. 교태부리지 말아. 소름돋는다. 언젠가 극도로 저하된 박익준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선희에게 박익준이 툭 내뱉은 말이다. 그때 선희는 얼마나 참담했던지. 그러나 선희는 항의 한마디 못했었다. 속으로만 아파했을 뿐. 왜 자신이 점점 박익준에게 꼼짝못하는지 자신도 모를 일이다.

아마 돈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철들 무렵부터 단 한시도 선희를 자유롭게 해주지 못했던 그 괴물, 그 지긋지긋한 것, 돈.

사실 따지고보면 박익준의 연락을 애타게 기다리면서도 선뜻 먼저는 나설 생각을 전혀 못했던 선희가 박익준에게 전화를 하게 된 것도 어찌보면 돈 때문이랄 수 있다.

한살, 세 살, 네 살짜리 아이들에 치여, 궁핍한 살림살이에 치여 수세미처럼 헝클어져 사는 동생 선미가 선희를 찾아왔을 때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얼마가 필요한가부터 우려했었다. 왜냐면 선미는 돈이 필요할 때만 선희를 찾았으므로.

선미는 우선 자신이 또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선희는 얼마나 화가 치밀었는지 모른다. 피임과 낙태를 죄악시하는 종교를 가진 남미계통의 남자와 결혼을 했다지만 벌써 세 아이를 두고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서 입에 풀칠만 하는 정도로 근근히 살면서 또 다시 아이를 가지다니!

"니네들은 밥 먹고 하는 짓이 그 일밖에 없니? 어쩌면 그렇게 생각없이 또 임신을 할 수 있단 말이니?"

생명의 잉태는 축복된 일이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손이 귀한 집안에 해당되는 일이지, 발로 차이는 게 아이들인 선미네 집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선희는 선미를 나무랬다. 형제만도 열 둘이라 명절날 그 배우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혼이 쏙 빠진다며 시집식구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 선미였다. 네 번째의 임신이 선미의 남편 집안에선 축하받을 일도, 경사스런 일도 아니었다. 여자들의 임신은 그 집안의 일상사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리고 선희가 알기로 선미 남편을 비롯한 그 열두 형제 중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고 번듯한 가정을 꾸미는 집은 한 집도 없었다. 모두 정부의 극빈자 보험 혜택과 현금보조를 받아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 거였다.

"그래서 아이 셋을 다 정부 의료보험 혜택으로 낳았다면서 이번에도 또 그럴 거니? 아이 클때까지 우유니 기저귀까지 다 받아 먹을 거고? 넌 이 나라에 기여하는 거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으면서 정부가 주는 혜택이란 혜택은 다 받아챙기는구나? 미안하지도 않니?"

그리고 선미가 찾아온 게 네 번째 아이의 임신소식을 전하러 온 게 아니라 트럭이 고장 나서 잔디깎는 일을 업으로 하는 선미 남편이 며칠째 일을 못나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러 온 것이라는 걸 알았을 때 선희는 폭발해버렸다. 선희는 이성을 잃고 소리질렀다.

"정말로 못말리는 인간들이로구나. 그래서 트럭 고칠 돈이 없어 벌써 일 주일째 일을 못나가고 있다고?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고 앉은 거니? 정 안되면 형제들한테 꾸어서라도 일은 나가게 만들어야 할 것 아냐? 어쩌면 그렇게들 주변머리가 없을까?그래서 니네들, 나 아니었으면 어떡할려구?!"

그렇게 펄쩍펄쩍 뛰었으면서도 결국은 트럭 고칠 돈을 내주고 만 선희였다. 10년도 더 된 중고차를 이제 그만 폐차하고 쓸만한 차를 사려고 몇 달전부터 모으기 시작한 돈이 있었다. 선희의 피 같은 돈, 1천 5백불. 그 돈을 또 내주고 만 것이다.

예전에는 가족들을 돕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업이라고 선희는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일을 당연시했었다. 왜 자신은 철들 무렵부터 이날 이때까지 가족들에게 희생하고 퍼주어야만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왜냐면 선희가 아는 사람들이 모두 다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었으므로. 유진을 비롯해 선희가 알고 있는 몇몇 한국인 친구들도 별반 다를 바 없어보였으므로.

그러나 공인회계사 사무실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선희는 또다른 세상을 보게되었다. 적지않은 월급을 고급차와 비싼 의상을 사는 데만 쓰는, 오로지 입고 바르고 걸치고 자신의 몸을 가꾸는 데만 돈을 투자하는 사람들이 지천으로 있다는데 선희는 무척 놀란 것이다. 결혼한 사람들이야 물론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이 부양하는 사람들은 배우자와 자식에 국한되어 있었다. 부모와 형제를 위해 자신이 번 돈을 고스란히 갖다바치는 사람은 선희밖에 없는 듯 했다.

선희는 자신의 삶이 뭔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그러려니하고 살아온 자신의 사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다른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누구에게나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자신의 부모가 궁핍하고 가난하게 살면 그냥 그렇게 살게끔 내버려두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었으므로. 그러나 선희는 자신이 달려들어서 그것을 개선시켜보려고 지금까지 별별 노력을 다해 온 것이었다.

선희가 죽도록 공부해 공인회계사가 된 것도 어찌보면 선희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가족들을 위해서였다. 한푼이라도 더 벌어 엄마 아버지에게 더 많이 보태주어야 했고 마음을 못잡고 방황하는 동생 선우에게 작은 가게라도 하나 차려주어야 했고 아이들을 데리고 작은 아파트에서 복닥거리고 사는 선미가 쓰러져가는 집 한채라도 살 수 있도록 다운페이먼트라도 보태주어야 겠다는. 그러나 지금 선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선미에게 수중의 돈을 다 털어주고 난 다음 날 아침. 출근하기 위해 옷장 문을 열었다가 선희는 울고 말았다. 입을 만한 옷 한벌이 없는 자신이 불쌍해서. 명색이 공인회계사인데도 거의 매일을 같은 옷을 입고 출근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딱해서.

그날, 선희는 격정과 슬픔을 가슴 가득 안은 채 출근했다가 충동적으로 박익준에게 전화를 하고말았다. 박익준의 전화번호를 누르면서 선희는 간절하게 기도했다. 제발 박익준이 전화를 받아 주기를. 그래서 자신을 만나주기를.

처음엔 유진에게 전화를 했었다. 그러나 유진은 선희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셋째 누나가 자동차 사고가 났어. 백프로 이쪽 잘못인데 문제는 누나가 보험이 없다는 거야. 보험없이 운전하지 말라고 그렇게 누누히 타일렀건만. 아아, 젠장할! 지금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 상대방은 꽤 크게 다쳤거든. 병원에 현재 입원중인데 병원비만도 몇십만불이 나올 것 같아. 상대방 차, 누나차 다 폐차시켰는데 당장 누나는 일을 하러 갈래도 차가 없으니 어떡해. 몇천불짜리 중고차라도 사주어야 하는데 식구들은 모두 내 주머니만 쳐다보고 있는거야. 야, 선희야. 나 진짜 미치겠다. 우리 가족들은 왜 하나같이 그 모양일까. 거머리떼같이 내 선혈을 빨지 못해 안달하며 사는 사람들인 것 같애....... "

유진의 푸념과 하소연이 끝나기 전에 선희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선희는 박익준을 떠올렸다. 박익준이라면 위로가 될 것 같았다. 이때까지 살면서 돈에 대한 압박감은 전혀 받아보지 못했을 것 같은, 궁핍함이라는 건 전혀 모르고 살았을 것 같은 박익준. 박익준의 그 유쾌하고 밝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훨씬 상쇄될 것 같았다.

선희의 간절함이 전달되었는지 박익준이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반갑게 전화를 받아주었다. 그것은 예외였다. 심드렁하게 자신을 대해도 어쩔수 없다고 선희는 생각했었다. 자신은 그저 다른 세상의 사람을, 추레하고 구질구질하고 가난한 이쪽 사람들과는 다른 분위기의 사람을 만나고 싶을 뿐이라고 애써 자위하면서 전화를 했던 선희는 박익준이 반갑게 전화를 받자 거의 울 만큼 기뻤다. 그리고 감동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박익준의 관계. 그리고 그후 선희는 박익준에게 자주 전화했다. 밥 먹자고 전화했고 커피 마시자고 전화했다. 여자가 먼저 남자에게 전화해 만나자고 매달리는 게 남녀관계에 얼마나 마이너스가 되는 일인지, 여자의 값어치를 얼마나 떨어트리는 일인지 생각하고 고민할 여유도 없었다.

걸핏하면 일어나는 엄마 아버지의 싸움. 이제 겨우 이십대 후반이면서 사십은 훨씬 넘어 보이게 생활에 찌들어 사는 선미, 그리고 엄마 생일에 사다 준 몇백불짜리 핸드백까지 몰래 갖다 팔아 먹는 선우로 인해 숨이 막힐 때, 가슴에 불덩이 같은 뭔가가 치밀어 오를 때 선희는 박익준에게 전화했다.

근사한 저녁을 얻어 먹고 그와 폭풍같은 섹스를 나눌 때 선희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박익준의 얼굴을 보고 그의 알몸을 만지고 섹스를 하고나면 적어도 당분간은 힘이 나는 거였다. 그러니까 박익준은 선희의 비타민 같은 존재였다.

박익준이 선희를 어떻게 생각하든 어떻게 대하든 그것은 상관없었다. 자신을 여자로 사랑해주고 좀 더 존중해주고 귀하게 대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지만 선희는 감히 그런 것까지 바라지 않았다. 자신의 전화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주고 내치지 않고 자신을 만나 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할 형편이었으니까.

때로는 박익준이 자신을 너무 함부로 대할 때, 길가에 구르는 돌덩이 취급을 할 땐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왜 내가 저 남자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그럴 때마다 선희는 더 이상 박익준에게 전화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박익준에게 더욱 얽매이게 되는 일이 생겼다.

2만불의 돈을 빌리게 되면서부터였다. 2만불을 빌리게 된 동기는 물론 부모, 아버지때문이었다. 아버지, 그 괴물같은 인간. 지금까지 선희의 인생에서 단 한번도 아름답고 예쁜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은 사람, 아버지.

선희가 엄마의 다급한 전화를 받은 것은 일요일 새벽이었다. 전화벨이 울릴 때 선희는 짐작했었다. 오, 또 싸웠구만. 그러나 이번은 사건이 소소하지 않았다. 엄마와 아버지가 싸우는 소리를 듣고 옆집에서 신고를 했다는 거였다.

그동안은 일방적으로 엄마가 당하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구정물같이 더러운 욕을 퍼부으면 퍼붓는대로 주먹으로 치면 치는대로 물건을 던지면 던지는대로 다 당하면서 살아온 엄마였다. 옆에서 선희가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희생하고 감수하면서 살아온 엄마였지만 얼마전부터 엄마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선우에 대한 기대를 접게 되면서 엄마는 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소리지르면 같이 소리질렀고 아버지가 던지면 같이 던지면서 대들었다.

엄마의 변화가 놀랍기도 하고 속시원하기도 했지만 선희는 마음이 늘 조마조마 불안했다. 저러다가 언젠가는 사단이 나고 말지.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고 같이 싸우는 건 좋은데 저러다가 언젠가는 일이 벌어지고 말지. 엄마의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멍든 걸 볼 때마다 선희는 간곡하게 아버지에게 주의를 주었다.

"아버지. 제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둘이 싸워도 좋아요. 근데 제발 말로 하라구요.물건을 던지거나 손을 대지 말라니까요. 미국엔 여자에게 손대는 게 살인 다음으로 무서운 죄라구요.까닥 잘못하다간 아버지, 한국으로 추방될 수도 있어요."

선희가 그렇게 간절하게 말하는데도 아버지 강호성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추방이라구?추방할 테면 하라지. 나 역시 이런 좆같은 미국땅에 아무 미련없으니까.....

그러다가 마침내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늦은 밤 오징어 회에 석류주를  같이 마시다가 싸움이 벌어졌는데 아버지가 참지못하고 술상을 뒤엎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패악은 엄마에게 울고 싶은 데 뺨 때린 격이었나보다. 미친 것처럼 울고불고 소리지르며 대들고 난리를 피웠다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들은 이웃에서 신고를 했고 경찰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경찰은 앞 뒤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아니, 자초지종을 물었어도 영어를 못하는 아버지와 엄마와는 단 한마디도 대화를 못했을 테지만. 어쨌든 힘이 센 아버지를 수갑채워 연행해가고 만 것이었다.

"피 한방울 나지 않았어. 맞은 것은 아니니까. 근데 엎질러진 초고추장과 석류주 때문에 일이 커진 거야. 내 옷과 방바닥에 엎질러진 버얼건 색깔이 경찰들 눈엔 피로 보였나봐. 선희야. 이를 어쩌지? 이를 어쩌면 좋니?"

일요일 새벽의 곤한 단잠을 깨운 엄마의 전화를 받고 한달음에 쫓아갔을 때 엄마는 초죽음이 되어있었다. 짚북데기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오물로 앞섶을 칠갑을 하고 얼빠진 여자처럼 널부러져 있다가 선희가 들어서자 구세주를 만난 사람처럼 꺼이꺼이 통곡했다.

"선희야 어떡하니. 네 아부지 불쌍해서 어떡하니?"

선희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엄마가 그랬을까, 동정심도 측은지심도 들지 않았다. 왜 내 인생은 저 바닥에 범벅이 돼 있는 초고추장처럼 갈수록 엉망일까, 하는 자괴감만 들었다.

다음 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이리저리 뛰어다닌 결과, 아버지에겐 2만불의 보석금이 책정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이번 기회에 뜨거운 맛을 보게 해주자구. 고생하게 나두어 버려. 절대 보석금 내어주지 마"

2만불은 커녕 당장 2천불도, 아니 단돈 2백불도 수중에 없는 선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어찌보면 그게 진심이기도 했다. 그러나 엄마는 선희의 말에 입에 거품을 물었다. 단 하루라도 아버지를 차가운 감옥에서 지내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불쌍한 사람이 네 아버지 아니니? 네 할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서 살림을 털어먹는 일만 없었어도 네 아버지 인생이 이렇게 곤두박질 치지 않았을 거야. 나 같은 여자를 만나지도 않았고. 좋은 대학 나와 좋은 직장 잡고 네 아버지와 걸맞은 여자를 만나 잘 살았겠지. 어찌 인생이 꼬이려다보니 나 같은 일자무식의 여펜네를 만나서 고생이 많은 거야....."

엄마는 한 시간에 한번씩 전화해서 선희를 닥달했다. 어떻게해서든 아버지를 빠른 시일내에 풀려나게만 해준다면 절대로 싸우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다. 다시는 이런 일로 선희를 괴롭히지 않겠다는 맹세도 했다.

그리고 화요일 아침, 선희는 엄마가 마켓에 출근해서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미친 듯이 달려 간 병원에서 선희는 엄마의 심신이 무척 약해진데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그렇게 되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선희는 박익준에게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엄마를 살려야 했으므로. 주위에 있는 사람 중 돈 2만불을 쉽게 조달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박익준밖에 없었으므로.

"한달이면 되어요. 한달이면 전액 다 돌려 드릴 수 있을 거예요"

스트레스와 피곤으로 허옇게 각질이 일어난 입술에 연신 침을 발라가면서 선희는 박익준에게 말했었다. 직접 만나 얼굴을 보지 않고도 용건을 해결 할 수 있는 전화라는 물건이 있어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박익준이 만약 현재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불쌍하게 생각할까. 두 번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말을 하지 않을까. 며칠을 잠 못 자 누렇게 뜬 얼굴을 하고 수치감과 절망감에 쪼그라들 것 같은 마음으로 남자에게 돈 얘기를 하고 있는 여자.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수모스러운 일을 해야하나, 하고 선희는 생각했다. 별 스스럼 없는 사이라해도 돈과 연관된 부탁은 내키지 않는 일이고 껄끄럽기 그지 없는 일이다. 그런데 하물며 몸과 마음을 주고 있는 상대에게 돈 얘기를 하는 신세라니.

다행스럽게도 박익준은 어디에 쓸 돈인지 묻지 않았다. 돈의 용도를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도 선희에겐 큰 숙제거리였었다. 거지 발싸개같은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고. 거짓말을 한 대도 뭐라고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선희였다. 정 급하면 동생 선우 때문이라고, 선우가 말썽을 피웠기 때문이라고 둘러댈 작정이었다. 그러나 박익준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2만불의 돈을 선뜻 내주었다. 돈의 용도에 대해 묻지 않는 걸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 선희였다.

박익준이 내준 2만불로 아버지는 석방되었다. 그러나 선희는 박익준에게 2만불 전액을 도로 돌려줄 수 없었다. 선우가 5천불을 슬쩍 해간 것이었다. 그 얘기를 전해들으면서 선희는 그냥 주저앉을 뻔 했다.

"아, 생전 들어오지도 않던 놈이 화장대 서랍에 돈이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나 몰라! 어떤 사람은 돈 냄새를 귀신같이 맡는다더니 그놈에게 그런 재주가 있었던 모양이야!"

2만불에서 5천불이 빠지는 돈을 박익준에게 돌려주면서 선희는 처음 돈을 빌려갈 때보다 더한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코가 땅에 닿게 머리를 숙이는 선희에게 박익준은 대수롭지않게 말했다. 걱정 말고 생기는대로 천천히 갚아. 그러다가 정 안 생기면 할 수 없는 거고.

박익준에게 당당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적어도 유진과의 관계에선 당당까지는 아니더라도 비굴하진 않았었다. 피차 형편이 비슷했으므로. 유진도 가끔 선희로부터 돈을 융통해 갔고 선희 역시 급할 때마다 유진에게 부탁을 했었다. 그래봤자 기껏 몇백불 몇천불에 지나지 않았지만.

박익준의 아파트는 여느 때처럼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여기저기 팽겨쳐진 옷가지들, 책들 신문들, 서류들. 자로 잰 듯 반듯하고 깔끔하게 하고 다니는 모습과는 달리 집은 항상 그 모양이었다. 선희는 일단 쌀을 씻어 밥솥에 앉혔다. 쌀이 불을 동안 청소를 할 작정이었다.

선희는 블라인드를 젖히기 위해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보았다. 유리 탁자에 놓여 있는 빈 와인병을. 나란히 놓여있는 두 개의 와인잔을. 와인잔 한 개에 묻어 있는 갈색의 립스틱 자국을.

박익준에게 여자가 많다는 걸, 같이 만나고 잠자는 여자가 선희 자신뿐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는 했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선명하고 뚜렷하게 증거를 발견하기는 처음이었다. 선희는 천천히 걸어가서 두 개의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 바닥에 두어방울 쯤 남아 있는 투명한 액체.

질투를 하거나 시기를 할 수 없는 입장임을 너무나 잘 아는 선희였다. 자신은 그저 박익준이 심심할 때 한 번씩 불러다 가지고 노는 장난감, 삼시 세끼 내리 먹은 쌀밥이 물릴 즈음 생각나는 보리밥 같은 대용품, 권태가 나거나 싫증이 나면 미련없이 내쳐질 소모품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선희였다. 그러나 박익준이 다른 여자와 같이 시간을 보냈다는 자명한 사실 앞에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선희였다. 왜냐면 선희는 박익준을 많이 사랑하고 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