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는 나를 집 뒤란으로 얼른 데리고 들어가더니 곧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과 국을 가지고 왔어.

나는 허겁지겁 퍼 먹었지.

정신없이 밥을 먹는 나를 보고 언니는 치맛자락으로 코를 팽팽 풀며 울더군.

"아버지 어머닌 잘 계시니?"

나는 대답할 새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어. 우선 밥먹는 게 급했으니까.

밥 한 그릇을 국에 말아 후딱 비우고 나자 언니가 숭늉을 가져다 주었어.

언니가 준 숭늉을 마시며 부엌이며 마당 쪽을 기웃거려 봤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고 조용하기만 했어. 시댁 식구들은 모두 일을 나간 모양이었어.

뒤란에서 가마니를 깔고 좀 쉬다가 나는 언니한테 집에 돌아 가겠다고 했어. 언니의 시댁식구들이 돌아 와 나를 보면 그리 좋을 거는 없다는 생각이 어린 마음에도 들더군.

언니도 나를 잡지 않았어. 대신 내 손에 삶은 계란 두 개를 쥐어 주었어.

"가다가 배 고프면 까먹으라잉. 산 길 조심하고..."

올 때는 배가 불러서인지 별 힘을 들이지 않고 쉽게 올 수 있었어. 시냇물에 세수를 하기도 하고 솔방울을 주워 장난질을 치기도 하고.

집에 돌아오니 날이 어둑어둑 했는데 어머니는 기집애가 늦게까지 돌아다닌다고 야단을 하더군. 둘째 언니네 갔다 왔다는 얘기는 못했지.거길 갔다고 하면 더 혼이 날 건 뻔하고 다음부턴 못 가게 막았을테니까.

그 후로도 아마 서너번 둘째 언니네 집을 찾아 갔을 거야.

양 아버지와 어머니가 집을 비운 틈에 혼자서 슬슬 걷다보면 어느새 발길은 둘째 언니네 집으로 가는 길목에 들어서 있는 거야. 길이 익숙해지니까 혼자 산길 걷는 게 그리 무섭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더라니까.

서너번은 둘째 언니네 시댁 식구들이 아무도 없었는데 몇 번째인가는 갔는데 식구들이 모두 마루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더군.

대문안에 들어 선 걸음, 도로 나오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하고 있으니까 부엌에서 언니가 나를 본거야. 언니는 어쩔줄을 몰라하더니 내 손목을 잡아 끌어서는 마루의 어른들에게 인사를 시켰어.

"제 동생인데요, 제가 보고 싶다고 왔나 봐요...."

둥그런 상에 앉아 밥을 먹던 서너명의 어른들이 수저질을 멈추고 일제히 나를 보더군.

그들 중에는 머슴들이 지게에 언니를 지고 간 후 한 달 있다 언니와 같이 닭 한 마리를 보자기에 싸가지고 우리집에 와서 하룻밤 자고 갔던 언니 신랑이란 사람도 있더군.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어.

"남은 밥 있음 먹여 보내."

그리고는 도로 밥상으로 눈을 가져가는 거야. 밥상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다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수저질을 시작하더군.

언니가 내 손목을 아프게 거머쥐고 뒤란으로 끌고 들어 갔어.

아야, 나는 잡힌 손목이 아파서 조그맣게 비명을 지르며 따라갔지.

" 이 눈치도 없는 것아.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오면 어떡해!"

언니는 목소리를 최대한으로 낮추어 내게 말했어.언니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어.

"어른들은 니가 여길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는 걸로 생각할 게 아니야? 너 한테 뭘 숨겨보낸다거나 하는 생각은 안했으면 좋으련만..."

언니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내 귀에 대고 단호하게 말했어.

"언니가 점심차려 줄테니까 먹고 가. 그리고 이제부터는 여기 오지마! 응? 네 조카 낳으면 그때 내가 데리고 집에 한번 갈테니까. 알았니? "

그때서야 나는 행주치마를 맨 언니의 배가 도보록히 불러 있는 걸 발견했어.

'언니가 늘 들로 내어가던 점심을 집에서 먹는 건 언니가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었구나...'

언니가 내 점심을 챙기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 간 사이에 나는 그 집을 나와 버렸어. 그리고 산길을 걸어 도로 집으로 왔지.

그후로는 언니집에는 두 번 다시 가지 않았어.

때론 언니가 쥐어주던 찐계란의 유혹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나 때문에 언니가 시댁식구들에게 미움을 받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했지.

그러던 어느 여름날이었어.

고픈 배를 움켜쥐고 마루에서 깜박 잠이 들었나 봐.

이웃집 감나무의 매미우는 소리에 잠을 깼는데 어디선가 낭랑하게 책 읽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겠어?

-개미가 여행을 떠납니다.

-가랑잎 배를 타고 시냇물을 따라 여행을 떠납니다.

-개미를 태운 가랑잎배는 시냇물을 따라 계속 흘러갑니다.

어린 가슴에 뭔가 와 닿는 느낌이 든 건 그때였어.

'그래 여행을 떠나자.개미처럼, 가랑잎을 타고 떠나는 개미처럼!'

나는 벌떡 일어나 문 밖으로 뛰어 나갔어.

그리고 동구밖을 지나고 둘째 언니네 집으로 가는 산길의 반대방향으로 접어들어 걷기 시작했지. 부지런히 걸었더니 세 시간 쯤 후엔 읍내로 나올 수 있었어.

세 시간을 걸어 나오는 동안 한 번도 집 쪽을 돌아다보지 않았어.

그게 부모님과 고향집과의 마지막인 줄 알았더라면 한 번 돌아나 봤을 텐데...

그때가 내 나이 열 한 살이었을거야.

읍내로 나온 나는 기차역을 찾아 들어가 정차한 기차의 짐칸에 숨어들 수 있었어.

짐더미 속에 몸을 눕히고 있는데 조금 후 기차가 덜컹 움직이더군.

웬지 두렵다거나 무서운 생각은 들지 않았어.머리속에는 가랑잎 배를 타고 시냇물을 따라 강으로 바다로 여행을 떠나는 개미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했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돈을 잔뜩 벌어야지.돈을 벌어서 맛있는 것도 실컷 사 먹고 양아버지와 어머니의 옷도 사 주고, 둘째 언니도.. 참 둘째 언니 아기의 장난감도 사야지..."

달콤한 상상을 하다 깜박 잠이 들었나 봐.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니 푸른색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더군.

내가 눈을 뜨자 늙스구레한 남자가 내게 물었어.

"얘야 넌 어데서 왔노? 이름은 뭐꼬?"

억센 경상도 사투리의 늙은 남자가 무릎을 세우고 앉아 이것저것 캐물었어. 겁에 질린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지.

늙은 남자는 나를 잡아 일으켰어.

"보아하니 집 없는 아이 같은데 가자, 우리집에. 배가 억수로 고파 보인다"

나는 늙은 남자의 자전거에 태워져 어느 판자 집으로 갔어. 그는 혼자 사는 남자였어.

호롱불을 켜고 나를 방안에 앉게 하더니 저녁상을 차려 오더군. 나는 밥 그릇에 코를 박고는 정신없이 먹었어.

"천천히 먹거라"

급하게 먹던 내가 사래가 들자 남자는 내 등을 쳐주며 이것저것 물었어. 내가 대답을 잘 않자 부모없는 아이라 판단했음인지 혼자 중얼거렸어.

"배 선생집으로 데려다 주면 되겠구먼"

그때 왜 대답을 안했냐고? 부모가 있다고 하면 부모가 얼마나 못됐길래 어린 아이를 길에 떠돌게 하냐고 욕을 할까 봐였어. 어린 마음에도 부모가 욕을 먹는 건 싫었거든.

늙은 남자는 허겁지겁 밥을 먹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끌끌 혀를 차더군.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어른 입에도 껄끄러운 꽁보리 밥을 이렇게 달게 묵을꼬"

밥을 다 먹은 내가 상을 물리자 대강 방을 훔치고 베개와 이불 한 장을 던져 주더군.

"바닷가라 바람이 시원할끼다. 모기가 물지도 모르니까 이불로 몸을 공꽁 싸거라"

담배냄내가 진동하는 이불을 받아 든 나는 그때서야 여기가 어딜까 궁금해졌어.

"할아버지 여기가 어디예요"

나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물었어.

"어디긴 어디고. B시지. 아까 네가 타고 있던 그 열차는 Y시를 거쳐서 K시에서 온거고."

K시라면 내가 살던 동네지. 그때 내가 탔던 열차는 몇 동네나 거쳐서 그곳 B시로 간거 아닌가. 그렇게 많은 지역을 거쳐 기차가 B시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잠만 자고 있었던거야.

양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는 동네와는 너무나 먼곳에 내가 와 있다는 생각을 하자 괜스레 겁이 나고 서러워지는 것 있지.

나는 비죽비죽 울기 시작했어. 엄마가 보고 싶어지기 시작한 거야.

방바닥에 다리를 뻗고 울음을 터트리는 나를 보고 남자가 허허,하고 헛웃음을 웃더군.

"기껏 데려다가 잘 멕여 놓았더니 울기는 와 우노? 내일이면 부잣집에 가서 잘 얻어묵고 잘 얻어 입을텐데..."

다음날 나는 남자를 따라서 배선생이란 사람의 집으로 갔어.

이른 아침이었어. 키가 크도 얼굴이 하얀 남자는 현관에 서 있는 우리를 힐끗 보고는 그냥 나가 버리고 목이 길고 바짝 마른 여자가 우리를 맞더군.

"아이 둘을 감당하긴엔 얘가 너무 약한 것 아니예요?"

여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얼이 빠져 바보같이 서 있는 나를 요모조모 뜯어 보았어.

"약하긴요. 아이 둘이라 해 봤자 두 살,세 살난 갓난 아이아입니꺼? 얘가 돌보기는 충분할낍니더"

남자는 두손을 비비며 머리를 조아렸어.

"글쎄요.우선 여기다 두고 가세요. 며칠 두고 보다 정 안될 것 같으면 도로 돌려 보낼테니까..."

말을 마친 여자는 안으로 들어 가더니 지폐 몇 장을 들고 나와 남자에게 주더군.

"아이구,이렇게나 많이! 감사합니다요.얘가 보기는 이래도 똘똘하고 야무져서 시키는대로 잘 할낍니다요."

몇 번이나 허리를 굽히던 늙은 남자는 가 버리고 나는 현관에 혼자 남겨졌어.

여자가 내게 날카롭게 소리를 지른 건 그때였어.

"얘, 뭘 그렇게 멍청히 서 있니?부엌으로 가서 설거지 좀 해!"

나는 바보처럼 비척비척 거리며 여자가 가리키는 부엌으로 들어갔어.

그 집은 일본식 목조건물로 그 당시엔 보기 드물게 입식이었었는데 키가 작은 내 팔이 그릇을 담가 놓은 싱크대에 닿지 않는 거야.

혼자 애를 쓰다가 도로 거실로 나와서 신문을 보고 있는 여자에게 팔이 짧아 싱크대에 닿지 않는다고 말했어.

여자는 대번에 신경질을 확 부리더군.

"이렇게 쪼그만 기집애를 어디다 써 먹으라고 데려 왔담. 아이, 짜증나!"

그 때 방문이 열리며 작은 남자 아이가 와아, 울음을 터트리며 걸어 나왔어.여자가 달려가서 아이를 안아 올렸어.

"아유,우리 도련님 이제 일어 나셨군.이불에 쉬는 안하셨나?"

열린 방문 틈으로 보니 또 다른 아이가 자고 있는 모습이 보이더군.

"뭘하고 있는 거니? 설거지를 못하겠음 빨래라도 해야지! 마당 수돗가에 나가 봐. 함지에 담가 놓은 빨래를 빨아. 나중에 보고 제대로 안빨아졌으면 다시 시킬테니 알아서 해!"

여자가 가리킨 대로 마당 수돗가에 나갔더니 세상에,내 몸이 들어가도 남을 만한 고무함지에 빨래감이 가득 담겨져 있는 거야. 자그마치 세 개나 되는 함지에!

나는 빨래판과 비누를 찾아들고 다리를 벌리고 앉아 빨래를 시작했어.

집에서도 빨래는 많이 해본 경험이 있었으므로 빨래는 그리 힘들지 않았어.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허리와 팔이 아으기 시작하더군. 잠시 허리를 펴고 쉬고 싶었지만 여자가 오며가며 표독스런 눈으로 나를 감시하고 있었으로 나는 쉬지 않고 계속 일을 해야 했어.

아침부터 시작한 빨래는 해가 서쪽으로 설핏 기울 무렵에야 끝났지.

여자는 일일이 내가 해 널은 빨래를 조사하더군.

자기 마음에 들었는지 여자가 아무소리 않대.

그리고 날 데리고 부엌으로 가서는 식은 밥 한 덩어리를 주더군. 그 때까지 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빨래만 했기 때문에 배가 등허리에 붙어 있는 상태였어.

그러나 난 여자가 던져 준 식은 밥 덩어리에 달려들지 못했어.

가슴이 꽉 메면서 눈물이, 눈물이 쏟아졌기 때문이었어.

'앞으로의 내 인생은 이 찬밥 덩이처럼 고달프고 처량할 것이다..'

열 한 살짜리 기집애가 그 무슨 청승맞은 생각이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이미 나는 내 고단하고 힘든 인생을 운명적으로 미리 예견하고 있었었나 봐.

열 한 살 때 집을 나와 평생동안 마음 편하게 다리뻗고 잠 한 번 제대로 자 본 적 없던 내 서러운 인생을 말이지. 단 하루도 가슴 조이지 않는 날이 없었던 내 가엾은 인생을...

아무튼 1 년 정도 그 집에 있었는데 청소를 비롯하여 빨래, 심부름,애보기 등 온갖 궂은 일을 다 해야 했어.

그런데 주인집 여자가 매일 나를 꼬집고 때렸어.

고향집에서는 배는 곯았어도 매는 안맞고 살았는데 이 여잔 걸핏하면 나를 두들겨 패는 거야.

심부름 갔다가 늦게 온다고,청소를 깨끗히 하지 못했다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파리채고 방망이고 손에 잡히는대로 때리고 구박하는데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

매도 매였지만 하루에도 몇 함지 씩 해야 하는 빨래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어.

주인 여자는 병적으로 깔끔해서 하루에도 몇 번 씩 옷을 갈아 입었고 아이들 옷도 몇 번 씩 갈아 입혔는데 그 많은 빨래를 나 혼자 다 해야 했어.

여름엔 좀 괜찮았지만 겨울엔 손발이 동상에 걸려 쩍쩍 갈라지고 피가 났지.고무장갑도 없던 시절에 독한 비누를 가지고 하루에도 몇 번 씩 빨래를 했으니 그럴 수밖에...

하루는 아이를 울렸다고 또 여자가 내 머리채를 휘어 잡고 패기 시작하는데 도저히 견뎌낼수가 없더군.

그래서 무작정 그집을 나와버렸어.

막상 나왔지만 갈 데가 있어야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시장 모퉁이에 서 있는데 양손에 보퉁이를 잔뜩 든 뚱뚱한 여자가 다가와 나보고 갈 데가 없냐고 묻대. 그렇다고 했더니 보따리 하나를 내게 안겨주며 자기를 따라 오래.

여자를 따라갔더니 마당에서 탁구를 하던 건장한 남자들이 쫒아 나와 짐을 받더군. 그중 누가 물었어

"웬 여자아이입니까?"

"시장가서 하나 주워 왔다. 옥자년 시집 가고나서 나 혼자 밥 하고 빨래 하느라 밑이 다 빠질 지경인데 잘 되었제?"

그 여자는 열 다섯 명이나 되는 남자학생들을 하숙치는 여자였어.

나는 지금도 그 집만 생각하면 진저리가 다 쳐지는 것 있지.

열 다섯 명의 남자들 뒤치다거리를 나 혼자 다 했으니까.

새벽 세시에 일어나 밤 열 두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단 10분도 궁둥이를 바닥에 부치고 앉아보질 못했어. 밥도 서서 먹어야 했어.

밥도 커다란 가마솥에 두 번을 해야 했고 계란 프라이를 한 번 할 때도 열 다섯 명을 먹이려면 서른 개를 부쳐야 했지.

먹을 것이 귀하던 때라 삼시 세 끼 밥만 먹는 건장한 청년들의 식사시중만으로도 하루 해가 모자랄 지경이었는데 김치는 왜 그리 자주 떨어지던지..

김치 한 번을 하려면 왼종일을 동동거려야 했어. 배추를 다듬어 절이는 건 둘째치고라도 수십 통이나 되는 마늘 까야지, 파 다듬어야지...

저녁엔 열 개가 넘는 연탄 아궁이를 일일이 돌아다니며 연탄을 갈아 넣어야 했고 아침엔 청년들이 나가고 난 빈 방을 청소해야 했지.

참 빨래도 해야 했었지.

열 다섯명이 벗어 놓고간 빨래거리를 방마다 돌아 다니며 거두어서는 속옷은 속옷대로 삶아 빨고 겉옷은 겉옷대로 빨아 널었지. 다 마르면 그것들을 거두어서 다릴 건 다리고 개킬건 개켜서 제자리에다 갖다 두어야 했어.

또 한 달에 한 번 씩 이불 빨래도 해야 했는데 이불과 요까지 합쳐 서른채가 넘는 그것들을 빨고 삶아 풀 해 널어서 다시 꼬매는 일은 중노동중의 중노동이었어.

처음 그 집에 갔을 때는 매를 맞지 않아 살 것 같더니만 일이 너무 힘에 부쳐서 죽을 지경이었어.

열 두살 어린 아이에게 새벽 세시부터 열 두시까지의 중노동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 아니겠어. 코피는 늘 달고 살았고 빨래를 하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함지박으로 꼬꾸라지기도 수십 번 했을거야.

월급을 받았냐고?월급은 무슨.

그저 먹여주고 재워 주는 것만으로 감지덕지 했는데..

일은 고되었지만 삼시 세 끼 더운 밥을 먹을 수 있었거든.

그런데 어느날 주인여자가 집 뒷켠에다 방을 세개 더 들이고는 다섯 명의 하숙생을 더 받을 계획을 꾸미는 소리를 내가 듣게 된거야.

여기 있다가는 내가 일에 치여 죽겠다 싶은 생각이 얼른 들대. 얼른 다른데로 가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딴데 갈 곳이 마땅하지 않았지.

그랬는데 다행이 나를 불쌍하게 본 사람이 있었어.

심부름을 다니던 반찬가게 주인이었는데 돈만 아는 구두쇠가 멀쩡한 아이하나 잡겠다고 하숙집 여자에게 욕을 퍼부으며 나를 자기 먼 친척된다는 플라스틱 공장 사장집에 식모로 넣어 주었어.

비쩍 마른 아이가 일에 치이고 잠이 모자라 항상 비실비실거리며 다니니까 불쌍해 보였나 봐.

당장 보따리를 싸 가지고 나오라고 하더군. 편한데 취직시켜 주겠다고. 그래서 가게 된 곳이 플라스틱 공장 사장집 식모자리였어.

그러고 보면 내가 어린 나이에 이집저집 어지간히 전전하며 돌아다녔지? 그게 다 집을 나온 죄지 뭐.

물론 집에 돌아 가고 싶었지.

어머니가 보고 싶어 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야.그렇지만 어떻게 돌아가?수중에 돈 한 푼 없었는데. 그 때까지 내 손에 1전짜리 한 장 누가 쥐어 줘 본적이 없어. 일만 뼈 빠지게 시키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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