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만나는 사람 없니?”
“……….”
“현재 데이트하는 여자 없냐구......”
“………..”
선희의 물음에 못 들은 척 대답을 하지 않는 유진. 벌써 오래 전에 비운 종이컵을 하릴없이 만지작대고 있는 유진을 선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대답이 없는 것은 아직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설마 아직도 날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 맘이 변하길, 그래서 예전처럼 밥 먹고 차 마시고 일주일에도 몇번씩 용건없는 전화를 하고 가끔 잠도 같이 자고 필요할 땐 돈도 서로 빌려쓰는 그런 사이로 돌아가길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유진아……..”
갑자기 선희의 목이 메인다. 그래, 어떻게 지난 날을 쉽게 잊을 수 있을까. 유진과 함께 했던 7년이란 세월, 그 세월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묻어둘 수 있을까.
유진과 선희는 처음부터 열정적이지 않았던 연인들이었다. 뜨겁게 사랑해서 연인이되었다기보다 같은 처지에 있는 자신들이 딱해서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다가 자연스럽게 가까와지게 되었다. 그들은 그냥 흐르는 물처럼 편안하고 담담한 연애를 했다. 그들은 서로 바빠서 일주일씩 통화를 못해도 걱정을 하거나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되는 사이였다. 그냥 잘 있겠거니 믿고 안심 할 수 있는 사이. 고개를 돌리면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가구같은 사이.
예나지금이나 선희가 유진을 생각하는 것은 사랑이나 그리움과는 다른 것이었다. 애틋하고 애잔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굳이 말하라면 피붙이에게 느끼는 그런 감정이라고 할까. 같은 방향의 길을 함께 걷는 동반자에게 느끼는 친밀감이라고 할까, 그런.
“빨리 좋은 사람 만나........”
선희는 진심을 담아 유진에게 말했다. 자신이 유진의 걱정을 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선희는 잘 안다. 유진을 걱정하다니. 그것은 참으로 주제넘은 일인 것이다. 같이 엮어온 7년 동안이란 세월을 내팽겨쳐버린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아무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뒤도 안돌아보고 훌훌 떠난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선희의 일방적인 이별통고에 아무런 원망과 미움을 보이지 않았던 유진. 좋을대로 해, 하고 한마디 했을 뿐인 유진이었다. 그런 유진을 거의 1년이 가까와오는 싯점에서 만나자고 해놓고 사귀는 사람없냐고 묻고 있는 자신이 얼마나 무례하고 나쁜 여자인지 선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나. 온갖 걱정근심으로 잠이 안 올 때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 있다면 바로 유진이었다. 예전엔 잠 안올 때마다 유진에게 전화를 했었다. 유진아. 이상하게 나 잠이 안와. 넌 잘 자니? 그러면 곤한 잠을 자던 중이라도 유진은 자신의 잠을 깨운 선희를 탓하지 않았다.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어떨 땐 새벽이 올 때까지 선희의 대화상대가 되어주곤 했었다.
그리고 주린 배를 안고 늦은 퇴근을 할 때 투정부리고 응석부려도 괜찮을 사람이 있다면 역시 유진이었다. 유진아. 배 고프고 피곤해 죽겠는데 집에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바빠서 장을 봐놓지 못했거든... 그럴 때마다 유진은 싸구려 중국음식이라도 투고해서, 햄버거라도 투고해서 득달같이 달려와 선희 아파트 문 앞에서 기다리고는 했다.
그랬다. 유진은, 유진은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선희는 다시 과거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예전처럼 가난한 여인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선희는 익준으로부터 풍족하게 산다는 게 뭔지, 돈에 연연하지 않고 즐기면서 산다는 게 뭔지 경제적인 여유라는 게 어떤 건지를 맛보았다. 신호등에 걸려 서 있으면 누구나 한번쯤은 돌아보는 박익준의 럭셔리 스포츠 카를 타 보았고 사방이 유리로 된, 밤 야경이 환상인 아파트에서 잠을 자 보았으며 한 병에 백불이 넘는 최고급 와인과 방금 바다에서 건져올린 싱싱한 해산물과 씹지 않고 넘겨도 아무 탈 없는 연한 스테이크를 먹어보았다.
유진과 함께라면 꿈도 꾸지 못할 그 호사, 박익준을 통해 누려보았다. 그리고 그 호사가 얼마나 달콤하고 매혹적인지도 선희는 알았다. 외식 한번을 하기 위해 어디가 더 푸짐하고 쌀까,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던 예전의 유진과 자신이 얼마나 궁상맞고 구질구질하게 살았는지도 깨달았다. 선희는 이제 다시 그런 연애를 할 생각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익준의 푸대접과 냉담함에 서러움이 복받쳐 오를 때, 그래서 자신이 길가에 놓인 한덩어리의 개똥처럼 초라하다는 자괴감에 견딜 수가 없을 때 선희는 유진의 따뜻한 품을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요즘처럼 박익준으로부터 잊혀진 여자취급을 당할 때 선희는 유진의 선하디 선한 얼굴을 떠올렸다.
거의 한달 째 박익준으로부터는 아무 연락이 없다. 서너번 전화를 해보았지만 전화기는 늘 꺼져 있었고 메세지를 남겼지만 리턴 콜이 오지 않았다.
“이제 청소하러 오지 않아도 돼. 필요하면 전화할 테니까 기다려……”
한달 전 선희에게 박익준이 전화로 한 말이었다. 내가 뭘 잘못해서 그를 화나게 한 것일까. 아니면 그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는 것일까…….
계절은 겨울. 날씨는 스산하고 을씨년스러웠고 선희는 외로웠다.그리고 쓸쓸했다. 좋아하는 남자로부터 늘 배척당하고 거부당하는 심정은 겨울 벌판처럼 황량하고 적막했다. 선희는 따뜻한 위로가 받고싶어졌다.그 누구로부터든. 그래서 유진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얼른 좋은 사람 찾아.언제까지 그렇게 혼자 있을래….”
위로를 받고 싶어 불러낸 유진이었다. 그러나 대화는 반대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있다. 유진은 처음 나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침울한 얼굴이다. 그리고 별 말을 하지 않고 있다. 하긴 자신을 버린 여자가 뭐가 그리 예쁘고 고마와서 떠들어댈 것인가. 만나서 커피 한잔 하자는 제의를 거절하지 않고 나와준 것만도 고맙고 황송하지.
선희의 눈에 유진의 낡은 구두가 눈에 뜨였다. 몇년 전 발렌타인 데이 때 선희가 큰 맘 먹고 사준 구두.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 주구장천 신어대서 실처럼 가는 금이 가기 시작하는 밤색 구두.
“선희야….”
고개를 숙인채 빈 커피잔만 만지작거리던 유진이 마침내 선희의 얼굴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행복하니?”
“………”
유진의 물음에 이번엔 선희가 고개를 숙이고 만다. 행복하냐구?글쎄. 과연 내가 행복할까?
“그 남자, 그 박익준이라는 남자, 너 한테 잘 해줘?”
선희의 눈이 커진다.
“그 사람 이름, 어떻게 알았어?”
“………..”
“그 사람 이름 어떻게 알았냐구”
“그게 뭐 그리 중요해?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거 아냐? 이 도시에서 너희 둘을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
“………”
“선희야…..”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너만 행복하면 난 아무래도 괜찮아. 그런데……”
“…………..”
“네가 썩 행복해 보이지가 않아……..”
“……………”
“너나 나나 별로 신날 것도, 기쁠 것도 없이 그냥저냥 살아가는 인생이었지만 예전의 네 얼굴은 지금처럼 그렇게 어둡지가 않았어. 원래 밝고 환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고뇌에 가득 찬 얼굴은 아니었단 말이야. 지금 네 모습, 한겨울에 발가벗겨져 밖에 세워둔 아이 같아….”
한겨울에 발가벗겨진 아이라는 유진의 말에 선희의 등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유진의 말이 맞을지 모른다. 선희는 지금 춥고 허망하고 쓸쓸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확신이 없는 게 선희를 불안하고 비참하게 만든다. 앞으로의 삶에 대한, 그리고 박익준과의 관계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이.
박익준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한 달 전이었다. 그 마지막 만남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딱 죽고 싶다. 정말이지 가족이라는 굴레가 없는 데로 도망가고 싶다. 박익준을 돈 때문에 또 만난 것이다. 돈을 빌리러 박익준을 만난 것이다.
몇달에 걸쳐 죽기살기로 돈을 모은 끝에 겨우 나머지 5천불을 갚았다. 박익준은 연장을 빌려주었다가 도로 받는 사람처럼 무심하게, 그리고 대수롭지않게 선희가 돌려주는 돈을 받아넣었다. 그리고 그 사흘 후 선희는 돌려준 그 5천불에 또 5천불을 보태 다시 빌려야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에는 선우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잘 아는 사이의 친구를 시비 끝에 가볍게 쳤는데 앞니가 나갔다고 했다.치료비를 포함해 1만불을 당장 현찰로 내놓지않으면 경찰에 고소를 할 거라고 상대방이 으름장을 놓고 있다고 했다.
“선희야. 선희야, 선희야!”
여지껏 무슨 일이 터지면 그랬던 것처럼, 돈이 필요할 때 그랬던 것처럼 엄마는 이번에도 득달같이 선희에게 전화했다. 엄마는 다른 데 돈을 융통해 본다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선희는 엄마에게 마법의 문이었다. 열려라, 하면 턱 열리고 돈 내놔라, 하면 척척 돈을 내놓는.
정말이지 선희는 이번에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앞뒤가리지 않고 엄마에게 마구 퍼붓고 싶었다. 내가 불쌍하지도 않느냐. 내가 돈 찍어내는 기계냐. 정말 지겨워서 못살겠다. 나는 더 이상 모르겠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알아서들 해라.
그러나 그렇게 퍼부어본들 달라지는 것은 뭐가 있을까. 불쌍한 엄마 가슴만 더 아프게 할 뿐 아닌가. 엄마도 사는 게 너무 힘든 사람이다. 그런 엄마에게 자기마저 괴로움을 보탤 수는 없는 일이다.
“으응, 엄마. 너무 걱정마. 내가 어떻게 해볼께…..”
1만불이란 돈을 어떻게 구하는가에 대한 걱정보다는 엄마가 이번 일로 또 마음 상해 건강을 해칠까봐, 걱정이 되는 선희였다. 어릴 때부터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면서 겪어 온 온갖 고생이 이제야 나타나는지 엄마는 갖은 병을 달고 살고 있었다. 고혈압, 심장병, 당뇨. 그리고 추운 마켓에서 하도 오래 서 있어서 무릎도 시원챦다. 곧 빠른 시일 내에 무릎 수술을 받아야 할 판이다. 그야말로 엄마는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다. 그런 엄마의 건강이 걱정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몇날 며칠을 끙끙대다 선희는 결단을 내렸다. 박익준에게 부탁을 하기로. 사실 아무리 사방팔방을 둘러봐도 돈을 빌릴 곳은 박익준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박익준은 돈의 용도에 대해 묻지않았다. 퉁명스럽지만 별다른 꼬투리 없이 1만불의 돈을 선희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에게 그런 치사하고 굴욕적인 부탁을 할 때 마다 점점 자신이 작아지고 초라해져 가는 것을 선희는 느낄 수 있었다.
울고 싶었다. 정말이지 땅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싶었다.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밑바닥까지 가게 되었을까. 그러나 선희는 한편으로 이자를 주지않아도 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서너개 있는 크레딧 카드는 목에까지 꽉 발란스가 찼고 매달 겨우 미니엄만 내어서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바늘 한끗 들어갈 틈없이 빠듯한 살림에 이자까지 쳐주어야 한다면 선희로서는 정말로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돈을 빌린 사흘 후 선희는 박익준의 전화를 받았다. 청소하러 오지말라는. 필요하면 부를테니 그때 오라는.
“그 남자 소문이 아주 안좋아……”
“…………”
“여자 잘 바꾸어치기로 유명한 인사던데?”
“그것도 그 사람 능력이야”
선희는 웬지 박익준을 변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인물, 재력, 실력 모든 방면에서 출중하니까 여자가 자연적으로 따를밖에. 나부터도 말이지. 그러는 유진이 넌 거의 1년이 넘도록 여자하나 못만나고 있쟎아…….
“나 만나는 사람 있어, 요즘…..”
선희의 심중을 읽은 듯 유진이 툭 던지듯 말했다.
“데이트하는 여자 있다고”
“!”
“만난지 서너달 됐어…..”
“그..그으래?..…….”
유진은 팔순이 가까워 오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사남매의 장남이다.홀어머니랑 주렁주렁 시누이들이 딸린 유진을 좋아할 여자가 없을 줄 알았다. 일년 열두달 가도 근사한 레스토랑 가서 비싼 식사 한번 사주지 않고 실반지 한개 사주지 않는, 만나기만 하면 거머리같이 자기 선혈을 빠는 식구들에 대한 원망과 푸념으로 아까운 데이트 시간을 보내는 남자인 유진을 마음에 들어할 여자가 없을 줄 알았다……..
“한동안 긴가민가했었어. 그 여자랑 인연을 시작해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어. 네 어머니한테 전화했었지. 너 한테 연락하기가 좀 그랬었어.그래서 어머니한테 전화해 네 소식을 물었지. 어머니가 그러더군. 네가 아주 행복하게 지낸다고. 나같은 건 안중에도 없이 지금 남자와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고. 그때 만약 네가 행복하지 않다는 말을 들었더라면 그길로 너한테 연락했을지도 몰라. 그리고 말했겠지. 선희야. 우리 다시 시작하자……”
“…………”
“네 어머니가 그러더군. 유진아. 선희는 깨끗하게 잊어라. 선희는 벌써 너를 잊었을 거야. 그러니 더이상 선희에게 미련두지 말아라. 이제 너도 나이가 있으니 얼른 좋은 여자를 만나야하지 않겠니?”
가슴이 텅 비는 것 같아 선희는 고개들어 천정을 한번 올려다 본다. 그대로 유진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완전히 타버린 장작의 잔해같은 사이인 줄 알았던 유진과의 관계였다. 사실 따지고보면 단 한줌의 미련도 아쉬움도 유진에게 남은 게 없다. 그런데 왜 이리 공허할까. 아이들이 다 돌아가버린 운동장 한구석에 혼자 남아있는 듯한 느낌. 조금 전 유진의 표현대로 추운 겨울에 발가벗겨져 밖에 버려져 있는 느낌. 춥고 두렵고 공포스럽고.
“뭐, 뭐하는 여잔데?”
선희는 가까스로 입을 열어 말한다. 그대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는 정말이지 울어버릴 것 같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야”
“유학생?”
“간호원 공부를 해”
“나중에 정식 간호원이 되면….. 돈은 많이 벌겠네…..”
말을 해놓고 선희는 아, 한다. 그녀는 모든 것을 돈으로만 연관짓는 버릇이 있다. 한 직장 동료가 근사한 옷 한 벌을 사 입고 오면 다른 동료들은 일단 브랜드 네임이 어디꺼냐부터 묻는데 선희는 얼마 주었냐부터 묻는다. 누가 집을 샀다하면 다른 사람들은 위치가 어디냐, 단층이냐, 이층이냐, 몇 스퀘어 피트냐를 묻는데 선희는 대뜸 집이 얼마인지 그것부터 묻게 된다. 그런 자신이 끔찍하도록 싫지만 고쳐지지가 않는다. 어릴 때부터 돈돈돈, 돈에 연연하며 살아온 선희다. 그녀는 돈이 있어야만 제대로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고 나아가서 인간의 가치가 높아진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선희는 애써 밝은 표정과 밝은 목소리를 낸다.
“간호원이 아무나 되는 게 아닌데…. 그 여자 똑똑한가봐…..”
“아직은 잘 몰라. 그만하면 괜찮다 싶어 사귀고 있는 거야….”
“참 잘 되었네.추,축하해……”
그러나 유진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있다. 마치 명절 며칠 뒤 냉장고 구석에서 찾아낸 떡 조각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다.
“선희야. 난 네가 그런 남자랑 얽혀 있는 게 싫어. 난 그 박익준이라는 남자, 정말로 마음에 안들어”
“…………”
“언젠가는 네가 상처 받을 게 뻔하니까……”
선희는 각오하고 있었다. 박익준과 자신의 관계가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것을.예전엔 실낱 같은 희망이랄까, 기대
랄까, 그런 게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이 박익준의 정식 애인이 될 거라는. 나아가서는 아내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마음을 접은지 오래다. 그냥 그가 베풀어주는 물질적인 혜택과 그와 나누는 섹스에만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박익준이 이별을 고해오면 깨끗하게 떠나가 주기로 마음을 먹고 있는 것이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나는 네가 누구보다 행복했음 좋겠어……”
“………..”
“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행복했던 순간이 거의 없었쟎니. 나 역시 마찬가지지만 난 남자라 괜찮아. 난 아무렇게나 살아가도 돼…..”
“……….”
“집에 가서 거울을 좀 봐. 지금 네 얼굴이 얼마나 안되었는지. 그리고 네 어깨가 얼마나 움츠려들어 있는지”
“…………”
"선희 너도 이제 네 살 궁리를 좀 해...."
"..........."
“ 난 말이야. 만약 지금 사귀고 있는 이 여자와 결혼을 하게되면 난 더 이상 가족을 위해 희생하지 않을 거야. 어머닌 모셔야겠지. 왜냐면 어머니가 기댈 데라곤 나밖에 없으니까, 내가 유일한 기둥이니까 말이야. 그러나 나는 더이상 누나들 뒷바라지를 하지 않겠어. 죽을 먹든 밥을 먹든, 아파트 세를 못내 한겨울에 길거리로 쫒겨나가든, 차를 못고쳐 10마일을 걸어 직장에 가든 이제 더이상 내 알 바가 아니야. 난 지금까지 할 만큼 했고 이제 지쳤어. 아니, 더 이상 여력이 없어…”
“그..그게 맘대로 되겠니? 누나들이, 여지껏 네가 부양해 온 누나들이 가만있을까?
선희는 가까스로 입을 열어 말했다. 남비닦을 때 쓰는 철수세미처럼 거칠고 우왁스럽기 그지없는 유진의 세 누나들을 떠올리면서.
“가만 있지 않으면?”
“………”
“다른 주로 이사를 가 버릴 거야…..”
이사를 가면서까지 가족이 지운 멍에로부터 멀어져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유진이 측은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유진이 부럽다. 선희는, 선희는 이사를 간다고해서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사를 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엄마에 대한 걱정으로 매일 피가 마를 것이다. 속은 상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곳에 있는 게 낫다……
“선희야. 부디 건강하고 행복해야 해. 가능하면 그 남자 박익준과 관계 빨리 정리하고…..”
유진과 헤어져 터덜터덜 파킹랏으로 걸어가면서 선희는 생각했다. 고향이 있다는 것은, 고생스럽고 외로울 때 언제든지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인가. 박익준에게 상처받고 내팽개침 당했을 때 언제든지 유진에게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유진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선희가 돌아가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면 언제든지 두 팔 벌리고 환영해 줄 줄 알았다그러나 그건 선희의 오산이었다. 착각이었다. 이제 선희에게 돌아 갈 고향은 없다.
선희는 운전대에 얼굴을 묻었다. 굴속같이 컴컴하고 좁은 아파트 방으로 가는 것은 정말 싫다. 누구에게든 이 참담한 마음을 위로받고 싶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선희를 품어주고 다독거려 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선희는 망설일 것도 없이 박익준에게 전화를 했다. 박익준, 그의 목소리를 듣지않고는 숨이 막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절박함을 느끼며. 제발, 제발 박익준이 전활 받기를. 전화를 받지 않으면 받을 때까지 걸겠다는 간절한 마음의 선희.
또르르,또르르, 하는 신호가 두번 가고나서 박익준이 전화를 받았다. 음, 하는 단 한 음절의 짧은 목소리에 선희의 마음이 튀어오르는 용수철처럼 환희로 가득 찼다. 오, 하나님, 그가 드디어 제 전화를 받았습니다아…….
“선,선희예요”
“알아. 오랫만이다………”
“잘 계셨어요?”
“그래”
“그냥 전화 한 번 해봤어요. 잘 계시나 하고…”
“그렇쟎아도 너에게 전화하려고 했었는데…”
“ ! ”
“내일 일요일이지?다른 약속 있니?”
다른 약속이 있을 턱이 없다. 아, 아니요. 다른 약속 없어요, 하고 선희는 숨이 차게 말한다.
“내일 오후에 좀 나올래?”
일요일. 선희는 박익준을 만났다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