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내리면서 은봉은 거의 휘청, 하고 넘어질 뻔 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가볍게 풀쩍 뛰어내리던 버스였었다. 그런데 오늘은 자신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스르르 풀리면서 갑자기 몸이 앞으로 쏠린 것이다. 은봉은 죽을 힘을 다해 몸의 중심을 바로 잡으려 애를 썼고 몇 초의 시간이 지난 뒤 가까스로 두 발을 안전하게 땅에 닿게 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하고 버스 운전기사가 걱정스런 눈으로 은봉을 향해 물었다. 아임 오케이, 아임 오케이, 하고 은봉은 바보스런 웃음지어 보이면서 말했다.그리고 손짓으로 얼른 버스를 출발시키라는 시늉을 했다.

버스 운전기사는 그래도 은봉이 못 미더운지 몇분 더 주저주저하더니 천천히 버스문을 닫았다. 버스가 떠나고 은봉은 길에 혼자 남았다. 늦은 밤이라서 그런지 길에는 차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일요일 밤이었다. 모두들 노오란 전등불이 켜져있는 따뜻하고 아늑한 집안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잠자리에 들었거나 가족들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거나 내일 출근 준비를 하고 있을 일요일 밤이었다.

그러나 은봉은 아침부터 지금까지 거의 열몇시간을 차갑고 축축하고 냄새나는 마켓의 부엌에서 서서 김치를 담구었다. 등이 내려앉고 팔이 빠지는 듯한 심한 노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바람이 휘리릭 불어 길에 쌓여 있던 낙엽과 쓰레기들을 날렸다. 은봉은 목도리로 머리와 목을 단단히 싸맨 다음 집쪽으로 몸을 돌렸다. 차가운 겨울 밤이었다. 별마저도 싸늘한 겨울날씨에 움츠러들었는지 보이지 않는 겨울 하늘을 이고 은봉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몸이 천근같이 무거웠다. 하루종일 부엌에서 서 있어서인지 아예 감각조차 없는 다리를 은봉은 힘겹게 질질 끌면서 걸었다.

후유, 하고 은봉의 입에서 한숨소리가 새어나왔다. 먹고사는데 편한 일이 어디있겠느냐마는 마켓 부엌일은 정말이지 너무나 힘들고 고달팠다. 하루종일 질척질척한 바닥을 딛고 서 있는 일이. 양말을 두 켤레나 신고 거기다 솜이 누벼진 버선까지 덧신었지만 시멘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냉기를 막아주진 못했다. 그리고 아무리 조심을 한다해도 물이 발로 튀었다. 그래서 하루종일 발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 축축하고 찝찝한 느낌이 제일 견디기 힘든 은봉이었다. 샌디아줌마처럼 나도 장화를 사서 신어볼까. 아니면 세탁소로 다시 자리를 옮겨 볼까. 하긴 그 일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눈을 찌르는 밝은 전등불 밑에서 하루종일 웅크리고 바느질을 해야 하는 일이었다. 허리가 아팠고 어깨가 아팠으며 옷에서 나는 먼지로 인해 목이 늘 칼칼했다. 그리고 걸핏하면 재봉바늘에 손가락을 찔렸다. 은봉의 열 손가락은 예전 세탁소 일 할 때 찔린 바늘자국으로 상처투성이었다. 깊이 찔려 피가 철철 나는데도 행여나 옷에 피가 묻을까봐, 그리고 주인의 지청구를 들을까봐 아프단 말 한마디 못하고 전전긍긍해야하는 세탁소일. 하긴 이젠 눈이 나빠서 누가 써주지도 않으니까…..

은봉은 종종걸음을 쳤다. 나 같은 나이많은 여자를 써주고 급료를 주는 것만도 황송하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세탁소로 옮겨보려는 생각을 은봉은 접기로 했다. 그리고 호성을 생각했다. 오늘도 변함없이 소파에 파묻혀 한국드라마 삼매경에 빠져있을 호성을. 저녁이나 제대로 찾아먹었으려나. 설마 이 시간까지 내가 돌아와 차려주길 바라면서 먹지않고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은봉의 퇴근 시간은 일곱시였다. 그런데 오늘은 일요일인데도 퇴근이 늦었다. 독감을 이유로 아줌마가 하나 빠져 일손이 딸리는데다 갑자기 김치를 열 두병이나 담아달라는 주문이 들어와서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으실 건데 정말 미안합니다만…..”

촉박하게 주문이 들어온 게 자신의 잘못이 아니건만 양씨는 몇번이나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은봉으로서는 시간외 근무가 오히려 고맙고 다행한 일이었다. 오버타임으로 급료를 쳐서 받을 수 있으므로.

양 선생님……

은봉은 양씨의 눈빛을 떠올리곤 가슴이 서늘해졌다. 은봉을 쳐다보던 눈빛. 뭐랄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안타까운 심경이 그대로 담겨있는 듯한 눈빛. 양씨는 가끔 그런 눈빛으로 은봉을 바라보았다. 두어달 전. 감옥에 갇힌 호성때문에 며칠간 잠 못자 핼쑥한 얼굴로 출근을 할 때에도 양씨는 그런 복잡하고 안타까운 눈빛으로 은봉을 쳐다보았었다.

자신을 그런 눈빛으로 바라봐 주는 사람은 일생동안 오직 양씨 한 사람이었다.은봉은 양씨의 그 눈빛이 무얼 말하는지 잘 알았다. 고마와요, 양 선생님. 그리고 미안해요, 양 선생님……

내세(來世)라는 게 있다면,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새로운 세상이 있다면 그때는 꼭 양씨와 부부의 연을 맺고 싶었다. 아니 굳이 부부가 아니더라도 여동생으로라도 반드시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게 은봉의 마음이었다. 그만큼 은봉이 양씨를 생각하는 마음은 간절했다. 좋아하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기에 더욱 간절하고 절실한지도 모를 일이었다.

은봉은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가슴에 손을 모았다. 그리고 기도했다.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큰 길가를 지나 집이 가까와 오기 시작하자 은봉의 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은봉은, 은봉은 지금 집에 들어가기가 싫은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도 양치도 않은 채 하루종일 넝마처럼 소파에 널부러져 있을 호성을 마주하기가 싫은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지금 은봉이 돌아갈 곳은 그 집, 호성이 있는 그 집 뿐 인걸.

집앞에서 은봉은 잠시 서 있었다. 집안의 불은 커져있었다. 은봉은 심호흡을 한번 한 다음 현관문을 열기 위해 손지갑에서 열쇠를 찾아 들었다. 안에 호성이 있지만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열쇠로 집 문을 여는 것은 은봉의 습관이었다.

그런데 현관문이 잠기지 않은 채 신문 서너부가 들어갈 만큼 빼꼼히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문틈으로 들려오는 호성의 호탕한 웃음소리. 은봉은 잠시 멈칫했다.누가 왔나?

“하하하하….. 그러니까 말이야. 당신, 정말 사람 보는 눈이 있구만. 지금은 여기서 이렇게 볼품없이 찌그러져 있지만 내가 한국에서는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니까. 한때는 국회의원 대변인을 지냈었지. 내가 미국에 오지만 않았어도 국회의원직에 출마를 한번 해보는 건데…..”

호성은 한국에서 장팔군 국회의원의 선거운동을 맹렬히 쫓아다닌 적이 있다. 그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장팔군 의원이 당선되고나서 대변인으로 잠깐동안 활동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호성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직책이었다. 석달을 채우지 못하고 쫒겨난 것이었다. 정확하게 두달하고 엿새 였다. 그 짧은 기간동안 대변인 노릇을 한 걸 가지고 두고두고 우려먹는 호성이었다.

후유,하고 버릇처럼 한숨을 내쉬고 은봉은 열쇠를 지갑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문을 열려던 은봉은 다시 한번 멈칫했다. 갑자기 호성의 목소리가 낮아지는가 싶더니 우리 와이프?하고 되묻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진작 내가 당신같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어야 하는데…..”

은봉은 숨을 죽였다.

“무식해. 아주 무식하지. 말이 안 통하는, 대화가 되지 않는 여자야. 당신하곤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은봉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심장뛰는 소리가 가슴을 뚫고 나와 바깥에까지 들릴 듯 해 은봉은 두 팔로 가슴을 감싸안았다.

“그래, 내 팔자라서 그런 무식하고 못난 여펜네랑 이날 이때까지 이러고 산다.기회만 되면 언제든지 내치고 싶지. 그래, 당신이 나랑 결혼해 준다면 지금이라도 이혼하지 뭐. 뭐? 뭐라고 ?농담이라고?......”

낄낄대는 호성의 웃음 소리에 은봉은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마치 구정물을 뒤집어 쓰는 듯한 역겨움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서.

“그나저나 당신 오늘 환상적으로 이뻤어. 그래, 우리 언제 다시 만날까?”

오늘 아침 은봉이 출근할 때까지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있었던 호성이었다.

“아침밥 식탁에 차려났으니 일어나거든 잡숴요. 국은 데우기만 하면 돼요”

은봉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눈을 감고 있던 호성을 뒤로하고 일을 나갔던 은봉이었다.

언제 나갔다 왔을까. 언제 나가서 여자를 만나고 들어왔을까. 소문으로만 듣던 호성의 바람을 오늘 은봉 자신의 귀로 직접 들은 것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호성이 페인트 잡역부로 몇 달 일하던 무렵, 여자의 집에 페인트칠을 하러가서 만나게 된 것이라고 했다. 미국인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사는 여자라고 했다.호성이 먼저 수작을 걸었고 호성의 잘 생긴 모습에 호감을 갖고 있던 여자도 얼씨구나 호응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로 둘이 눈이 맞아 신나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직장동료의 입을 통해 전해 들었을 때 은봉은 놀라지 않았었다. 지금까지 겪어 온 숱한 호성의 외도 중 하나였으니까. 그동안 호성의 외도는 열 손가락으로 세지도 못한다. 은봉은 아예 면역이 되어 있었다.

“그래. 나도 보고 싶어. 하루종일 보았는데도 또 보고 싶네…….”

은봉은 팔짱을 낀 채 대문 앞에서 한참동안 서 있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으시시한 한기가 은봉의 몸을 떨게 했다. 이제 머리까지 아파오는 듯 해 은봉은 이마를 짚었다. 열도 좀 있는 것 같다.

은봉은 입술을 깨물면서 문을 열었다. 호성이 한쪽 손으로는 전화기를, 그리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텔레비젼 리모콘추럴을 들고 있다가 어?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

호성은 이제 막 들어왔는지 외출복 차림이었다. 선희가 사준 빨간색 브이 넥 스웨터에 회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무능하고 거친 난봉꾼이라는 선입견 없이 보면, 길 가다가도 한번 돌아볼 법한 잘 생긴 중년 남자. 그러나 은봉에겐 호성의 모습이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가증스럽고 가소로왔다. 그 잘난 인물로 또 어떤 눈먼 여자를 꼬드겼단 말이지……

은봉은 호성을 외면했다.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은 은봉이었다. 이날 이때까지 손끝에 물 마를 날 없이 아둥바둥하며 식구들 부양하는데 몸 바치며 살아온 자신을, 세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허튼 짓 한번 하지 않으며 아내로, 엄마로 충실하게 살아온 자신을 말 안 통하는 밥통으로 정부에게 흉을 보는 남자와는 정말이지 단 한 마디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은봉은 참담했다. 바닥에 퍼질러 앉아 피울음을 토해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호성이 보는 앞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게 은봉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당신이 날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당신을 버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고 은봉은 생각했다.

은봉은 호성을 지나쳐 안방으로 들어가면서 얼음처럼 싸늘하게 일갈했다. 계속 해요. 내가 들어왔다고 중단 할 건 없쟎아요.

은봉은 안방 문을 닫았다. 꼬르륵 소리가 나도록 배가 고팠고 하루종일 온갖 양념들 속에서 일을 한 터라 머리카락과 몸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나고 있었지만 은봉은 샤워를 할 힘 조차도 없었다. 은봉은 그냥 침대로 쓰러져 누웠다. 죽은 듯이 자고 싶었다. 아무 생각없이 그냥 죽음처럼 깊은 잠을 자고 싶었다. 그러나 은봉의 그 작은 바람은 호성에 의해 깨졌다. 호성이 거칠게 안방문을 열고 들어온 때문이다.

“야, 나 배고파 죽겠는데 저녁 안 줘? "

대답대신 은봉은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제발 나 좀 건드리지 말아 줘. 제발, 제에발.

그런다고 그냥 물러날 호성이 아니었다. 그는 꽥 소리질렀다. 이 여펜네야. 밥 달라니까?!

은봉이 이불속에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서 좀 찾아 먹어. 지금 당신 밥 차려 줄 기분이 아니니까……

“ 이 여편네가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호성의 우왁스런 손이 은봉이 덮고 있던 이불을 왁살스럽게 벗겨냈다.

은봉이 갑자기 눈을 찌르는 전등 불빛에 눈쌀을 찌프리면서 힘 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시간이 몇시야? 여지껏 저녁도 안 먹고 어딜 하루종일 나돌아다니다 오셨나? 그리고 내가 당신 몸종이야? 알아서 찾아 먹어. 당신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호성이 허허,하고 천장을 올려다보고 웃었다.

“나원참, 살다보니 별 희한한 꼴을 다보겠네. 이것 봐. 너 지금 유세하는 거야?그까짓 꼴랑한 돈 좀 벌어온다고 지금 유세하는 거냐고?”

“그까짓 꼴랑한 돈이라니?그래서 당신은 그 꼴랑한 돈이라도 벌어와 봤어?”

“뭐라구? 이년이 오늘 간뎅이가 완전 배 밖으로 나왔구만”

그때였다. 거실쪽에서 제발 그만들 해요,하는 벽력같은 고함소리가 들려온 것은.

“하루이틀도 아니고 지겹지도 않아요? 제발 그만들 좀 하란말이야!”

선우의 목소리였다. 한 달에 한두번 집에 들어올까말까한 선우가 호성과 은봉이 싸우고 있는데 날 잡은 것 같이 들이닥친 것이다.

“도대체가 이놈의 집구석엔 왜 항상 싸움질만 해? 예나 지금이나 싸우는 게 일이야?”

“저놈의 자식이!”

호성이 거실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에이, 씨팔! 내 이놈의 집구석에 다시 발을 디디나 봐라! 하는 선우의 목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그리고 현관문이 콰앙, 소리를 내며 닫혔다.

호성이 바람같이 현관문을 열고 쫒아나갔다. 다다다다,하는 급하고 어지러운 발자욱 소리와 함께 너 이놈의 자식 거기 서지 못해?!하는 호성의 고함소리가 바깥에 쩌렁쩌렁 울려퍼지고 있었다.

은봉은 될대로 되라하는 심정이었다. 이제는 다 포기 상태다. 정말이지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아득바득하며 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은봉은 다시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썼다. 몸살이라도 날려는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온몸도 욱신거리고 아프다. 배는 고프다 못해 등허리까지 붙은 것 같다. 아, 따뜻한 국이라도, 따뜻한 라면 국물이라도 좀 먹었으면.

은봉은 손가락 한 개 까닥할 힘이 없었지만, 내일 월요일은 비번이지만 어쨌든 몸이 아파서는 안될 것 같았다. 태산같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은봉은 부엌으로 나갔다. 그리고 식탁에 놓여 있는 액체로 된 감기약 두껑을 열어 두어모금 꿀떡꿀떡 삼켰다. 수면제가 섞인 감기약이다. 오늘 밤 아무 생각없이 푹 잠을 자게 해주리라.

안방으로 돌아 온 은봉은 침대에 다시 누웠다. 그러나 은봉은 금방 돌아온 호성의 의해 잠 들 수가 없었다.

“야. 너 좀 일어나봐!”

은봉은 마지못해 일어나 앉다가 움찔,했다. 호성의 눈, 눈에서 불길이 활활 일고 있었다.

“내 자존심 상해서 그냥 가만히 넘어갈려고 했는데 말이야. 더 이상 못 참겠어”

은봉이 열에 들뜬 눈으로 호성을 쳐다보았다. 지금 이 작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양기훈이란 새끼가 어떤 새끼야?네가 일 하는 마켓에서 매니저로 일 하는 새끼 맞지?”

오, 하나님! 은봉의 눈과 입이 놀라움으로 크게 벌어졌다. 호성의 입에서 양씨의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언제부터인지 네 년의 태도가 변했어. 그래서 내 이상하다 생각했었지.오늘 왜 늦었지? 오늘도 그놈하고 놀아나다 이제야 들어온 거구만?”

덜덜덜, 은봉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추워서, 그리고 두려움으로. 입술을 떨며 은봉이 가까스로 대꾸했다. 그..그런..그런 사이 아니예요…

“하, 참 나도 미친 놈이지. 이렇게 사지 멀쩡한 남편을 두고 딴 놈팽이랑 놀아나는 년을 여편네라고 여지껏 끼고 있었으니……”

“…….....”

“.그래, 언제 부터야? 니들 두 년놈이 붙어 먹은 게?”

“그그..런 사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예요…그 사람 매니저 양씨와는 정말 아무런 사이 아니예요…..”

“야, 이년아. 아무런 사이가 아닌데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물원 구경을 다녔어? 솔직하게 불고 용서를 구하면 내 그냥 넘어갈려고 했더니 발뺌을 하네? 이거 도무지 안 되겠네?”

“그..그렇지만…. 그렇지만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짓도 안했어요…..”

“그 말을 믿으라구?다 큰 년놈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물원 구경을 다닐 정도의 사이이면서! 그래, 그럼 너희들 유치원생이냐? 그 병신같은 새끼가 고자냐구?”

“그렇게 말하지 마요.”

“어쭈구리? 이제 그 새끼 편까지 들어?”

호성의 주먹이 은봉의 얼굴로 날아왔다. 은봉이 잽싸게 고개를 숙였기에 호성의 주먹은 은봉의 뺨으로 미끄러져 나가면서 허공을 갈랐다. 그 바람에 호성의 몸이 앞으로 넘어질 듯 쏠렸다.

“이년이?”

호성의 입에서 더운 김이 뿜어져 나왔다. 약이 잔뜩 올랐다는 표시라는 걸 은봉은 알았다. 싸움이 더 커지기 전에 얼른 몸을 피해야한다고 은봉은 생각했다. 그러나 지칠대로 지치고 몸살끼까지 있는 은봉이었다. 침대에 앉은 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아아, 이대로 땅으로 꺼져버렸으면……

호성의 주먹이 다시 슈욱, 하고 은봉을 겨낭하고 날랐다. 은봉은 호성의 주먹을 더 이상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퍽, 하는 소리와 함게 호성의 주먹은 은봉의 입가를 강타했고 금방 찝찔한 피가 입안으로 흘러들어갔다. 이어서 호성의 주먹과 발길질이 새우처럼 웅크린 은봉의 몸위로 소나기처럼 퍼부어졌다.

그래, 죽여라 죽여. 정말이지 더 이상 이런 삶을 살고 싶지도 않아!

은봉은 호성을 향해 숨죽여 악을 썼다. 그 와중에도 은봉은 선희를 생각했다. 행여라도 울음소리와 악쓰는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가 누가 경찰에 신고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호성이 감옥에 가는 것은 개의치 않을 일이지만 선희가 또 놀라면 어쩌나. 새파랗게 질려 아버지를 구해내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면 어쩌나. 일도 빠져가면서 보석금을 구하느라 전전긍긍하면 어쩌나, 걱정이 먼저 앞서는 은봉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양씨에게 혹시라도 영향이 가면 어쩔까, 그게 걱정인 은봉이었다.

호성은 뻔뻔하고 비열하고 야비한 남자였다. 양씨에게 찾아가 온갖 협박을 해 얼마든지 돈을 뜯어낼 수도 있는 남자였다. 호성이라면 얼마든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제발 양씨에게 피해가 가지 않아야 할 텐데. 맘만 먹으면 호성이 양씨의 집을 알아내는 것은 시간 문제일 터였다. 호성이 찾아갈 것에 대비를 미리하라고 얘기를 해주어 할 텐데.. 그러나 은봉은 양씨의 전화번호도 모르고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내일 월요일. 은봉도 양씨도 비번이었다. 마켓에 전화하면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테지만 대체 무슨 핑게를 대고 전화번호를 알아내나.

내가 이 매를 다 맞으므로 선희랑 양씨에게 아무런 해가 가지 않는다면, 하는 심정으로 은봉은 묵묵히 호성의 주먹질과 발길질을 감수해냈다. 얼마동안을 미친듯 발광을 하던 호성은 마침내 체력이 딸렸는지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는 휭하니 집을 나갔다. 아무도 없는 집안. 은봉은 차라리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않고 잠으로 빠져들었다. 은봉이 간절히 원했던 죽음보다 깊은 잠.

전화벨은 몇번 울다가 쉬고 몇번 울다가 쉬고를 반복했다. 은봉은 꿈속에서처럼 전화벨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은봉은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떴다. 그리고 기듯이 가서 화장대 위에서 다시 울고 있는 휴대전화를 받았다.

“여..여보세요….”

“은봉이야? 오늘 쉬는 날이지?”

같이 부엌에서 일하는 춘자였다. 친하게 지내는 직장동료 춘자. 나이도 비슷해서 그냥 춘자야, 은봉아,하고 부르는 사이의 직장 동료.

“으응.. 웬일이야. 이렇게 일찍 전화를 다하고….”

“일찍이라니 지금 오후 두시가 넘었어……”

“으응 그래?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어?.....”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어디 아파?아픈 목소리인데?”

“아니. 여지껏 잤어. 자다가 이제 일어나서 그래….”

“선희 아버진?”

“………..”

은봉은 전화기를 귀에 댄 채 거실로 나갔다. 늘 왕왕대던 텔레비젼이 꺼져 있다. 그리고 호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제밤 나가서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다.

“웬일이야?웬일로 전화했어?”

은봉은 알았다. 마켓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진중하고 입이 무거운 춘자다. 웬만해서는 전화를 잘 안 하는 여자다. 춘자가 전화를 했다는 것은 뭔가 놀랄 만한 사건이 있었다는 증거다.

“조금 전에 난리가 났었어……”

은봉의 가슴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 앉았다.

“당신 남편이 마켓에 찾아와서 패악을 부리고 난리가 났었단 말이야”

오전엔 정신없이 바빴지만 오후에는 좀 한가했다고 했다. 마침 양씨와 몇명이 김치부침개로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데 마켓에서 부엌으로 들어오는 출입문이 덜컹,하고 열렸다고 했다. 그리고 눈에 핏발이 벌겋게 선 호성이 들이닥쳤다고 했다.

“양씨가 누구야? 남의 마누라와 붙어먹은 양씨란 새끼가 누구야?”

호성은 다짜고짜 그렇게 고함을 지르더니 양씨에게로 가서 멱살을 잡았다고 했다.

“오호, 네 놈이 바로 그 양씨란 새끼로구나……”

사람들이 달려오고 누가 경찰을 부르겠다고 소리쳐서야 호성은 양씨를 내려놓았다고 했다. 놀라운 것은 그런 몹쓸 봉변을 당한 양씨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침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연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호성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나가서 얘기하시죠.”

그때까지 펄펄 뛰던 호성이 침착한 양씨의 기세에 눌렸는지 아무 말 않고 양씨의 뒤를 따라 나갔다고 했다.

“사람들이 다 놀랐지 뭐야. 역시 학교선생님을 하던 분이라 대처하는 방법이 다르구나, 모두들 감탄들을 했지……”

은봉은 조용히 일어났다.

어제 저녁도 먹지 않은 빈속에 들이부은 감기약으로 인해 어질어질했지만 은봉은 벽을 짚으면서 목욕탕으로 들어 갔다. 양치를 하고 수세미같이 헝크러진 머리를 빗고 피딱지가 내려 앉은 얼굴을 닦아냈다. 그리고 은봉은 클로젯으로 가서 가방을 내렸다. 은봉은 얼굴은 단호했다. 그녀는 침착하고 조용한 몸짓으로 옷가지를 싸기 시작했다.

춘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은봉이 내린 결심, 더 이상 호성과는 살고 싶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이제 호성을 떠나겠다는 것이었다. 일단은 선희에게로 갈 생각이었다. 선희에게서 당분간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는 어디로 갈까.  그리고는 어디로 갈까. 그리고는 어디로 갈까.

육십평생 이날 이때까지 죽어라 일만 하며 앞만 보고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고단한 육신하나 의탁할 곳이 없는 처량한 신세라 생각하니 서글퍼졌다. 은봉은 옷가지를 싸다말고 팔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다.

“선희야……”       

은봉은 다시 선희를 불렀다. 내 딸 선희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너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것도 없으면서 자꾸 짐을 얹어주어서 정말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