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를 사주겠다는 말에 혹하지 말았어야했다. 그래서 아예 애초부터 박익준을 따라 나서지 말았어야 했다. 크레딧 카드를 긁어 싸구려를 사 입을 망정, 아니 몇년을 주구장천 입어 소매가 나달나달해지고 보풀이 마구 일어난 코트를 한 해 더 입을 망정 괜찮아요. 코트 한 벌 정도는 저도 사 입을 수 있어요, 하고 당당하게 거절했었어야 옳았다. 그러나 선희는 속없는 여자차럼 앞뒤 생각없이 박익준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박익준이 사주는대로 넙죽넙죽 받아 챙기고 하늘을 나를 듯 기분좋아했다. 그러고 나오다가 그런 수치스런 말을, 꿈에도 잊지 못할 모욕스런 말을 듣고 만 것이다.

“메이드야”

박익준의 입에서 나온 그 말. 조금의 주저함이나 망설임도 없이 나온 그 말. 선희가 혹시 들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안중에도 없는 듯 툭, 내뱉은 듯한 그 말.

메이드야. 메이드야. 메이드야………..

그 소리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서 선희의 가슴을 마구 헤집고 쑤셔대었다. 선희의 가슴에는 피가 철철 흘렀다. 정말이지 죽고싶도록 참담했다. 박익준이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 앉아 돌아 오면서 선희는 속으로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 행여나 박익준이 눈치 챌새라 겉으로는 평온한 얼굴을 하면서.

다 내 잘못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하고 선희는 생각했다.

자신을 가리켜 메이드라고 말 한 박익준에 대한 미움은 손톱만치도 들지 않았다. 선희가 울었던 것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때문이었다. 앞으로 나을 기미는 조금치도 보이지 않는 자신의 궁색한 처지. 말만 공인회계사지 늘상 돈에 쪼들리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메이드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자신의 초라한 처지.그래, 내가 메이드와 다를 게 뭐가 있어, 하는 자괴감과 모멸감.

그리고 못난 자기에 대한 자학때문에도 울었다. 항상 그런 식으로 엉뚱하게 일을 만들고야 마는 자신에 대한 원망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 것은 어찌보면 선희의 고집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코트를 사주겠다는 박익준의 제의를 거절하지 않을 요량이면 시내 백화점으로 가자는 그의 말을 순순히 따랐어야 했다. 여지껏, 1년 가까이 선희가 겪어온 박익준은 몇 푼 돈에 쪼잔하게 구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가 이끄는대로 백화점에 가서 마음에 드는 코트를 고르고 돈은 박익준이 지불하게 내버려두었어야 했다. 그러나 선희는 박익준의 집에서 한 시간 반 가량 거리의 아울렛으로 갈 것을 제의했던 것이다. 비록 박익준의 돈이긴 하지만 니 돈, 내 돈 할 것 없이 조금이라도 아껴보자는 알뜰한 마음에서였다.

아아, 그 아울렛에만 가지 않았어도…….

선희의 인생은 지금껏 그랬듯 눈 앞의 작은 것을 아끼려고 애를 쓰다가 항상 큰 것을 놓치는 일의 연속이었다.

지금 선희가 살고 있는 아파트도 그랬다. 선희가 엄마 아버지를 떠나 독립을 결심했을 때, 제일 먼저 대두된 문제가 아파트를 얻는 일이었다. 마침 직장과도 가깝고 엄마 아버지의 집과도 가까운 지역에 두 곳의 아파트가 있었다. 두 곳 다 아주 오래 전에 지어진 고만고만한 수준의 서민 아파트였다. 한 곳은 얼마 전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를 했다고 했다. 그래서 조금 더 깨끗했다. 그러나 렌트비가  한 달에 80불 정도가 비쌌다.

선희는 한참을 망설였다. 어디로 정해야 하지? 물론 선희가 원하는 곳은 렌트비가 약간 비싸긴 하지만 카페트와 페인트와 부엌 케비넷이 새 것인 곳이었다. 더구나 그 아파트는 방향이 남쪽이었다. 거실 쪽으로 꽤 넓은 창이 있어 그 쪽으로 하루종일 햇볕이 들어온다고 했다. 반면 다른 곳은 건물이 북쪽으로 돌아 앉아 있었다.방을 보러 토요일 1시경에 갔는데 낮에도 불을 켜야 할 만큼 어두침침하고 눅눅했다. 어딜 보더라도 처음 아파트가 나았다. 그러나 80불이 선희의 가슴에 걸렸다. 한달에 80불이 어디야. 80불씩 1년이면 돈이 천불인데 그 돈으로 엄마 옷이라도 한 벌 사주는 게 더 낫지, 하는 생각이 먼저 선희를 지배했던 것이다. 그래서 선희는 나중의 아파트를 계약했고 이사를 했다.

이사한지 며칠도 안 되어 선희는 자신의 내린 결정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크게 후회했다. 햇볕이 사람 사는데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 지 이사를 한 후 알았던 것이다. 그렇지않아도 모든 게 우울하고 걱정거리 투성이인 선희에게 어두침침하고 눅눅한 그 아파트 방은 더욱 그녀를 가라앉게 만들었다. 하루종일 있어도 햇볕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방, 요즘 같은 겨울 날, 집에 있노라면 추위때문에 뼈가 시렸다. 전기로 가동되는 히터를 하루종일 틀어놨더니 전기세가 한달에 3백불이 나왔다. 평소의 네 배 가까이가 나온 것이다. 300불 이라니!선희는 천정까지 펄쩍 뛰어오를 정도로 놀랐다. 그리고 얼른 히터를 껐다. 그리고 집에서는 내복을 껴입고 양말을 두서너켤레를 신고 지내고 있다. 얼른 겨울이 끝나길 기다리면서.

워낙 어릴 때부터 돈에 쪼들리게 살아온 선희였다. 한 푼이라도 아껴보자는 뜻에서 행한 일이 나중에 참담한 결과로 나타나는 일을 참 많이도 겪었다. 눈앞의 작은 이익에만 현혹되었다가 뒤에 따라오는 예상치 않은 큰 손실에 가슴을 친 일이 한두번이 아닌 것이다.

아울렛으로 가자는 선희의 제의에 박익준은 인상을 잠깐 찡그렸다. 그까짓 외투 한 벌을 사러 한 시간이나 넘게 운전하고 갈 필요가 있냐는 표시였다. 그러나 같은 상표의, 그리고 거의 대동소이한 품질의 옷들을 반값 이하로 살 수 있는데 뭐하러 제 가격 다 주고 백화점에서 사냐는 선희의 말에, 그리고 오랫만에 바람도 쐴겸 야외로 나가자는 선희의 제의에 박익준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길에 어디 들러 저녁이나 먹지 뭐……”

박익준은 아파트 문을 나서면서 말했다. 그때까지만해도 박익준의 기분은 별로 나쁘지 않는 듯 했다. 선희는 물론 행복감에 잔뜩 들떠있었고.

박익준이 자신을 생각해 겨울 코트를 사주겠다는 제의를 한 것만으로도 기분이 너무 좋았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내가 초라하고 궁상맞에 그의 눈에 비춰졌으면, 하는 창피함도 없지 않았으나 이왕 사준다니 기쁘고 감사하게 받아야지 하는 마음이 앞섰다.

박익준의 차를 타고 간 아울렛, 처음 들린 옷가게에서 선희는3천 900불짜리 낙타색 롱코트가 1800불의 가격표를 달고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역시 이쪽으로 오기를 잘했어, 하고 선희는 스스로를 마냥 대견해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박익준에게 말했다.

“이것 봐요.이렇게 싸쟎아요. 이게 백화점에 걸려있었다면 이 가격으로는 어림도 없지요. 절대로 이 가격으로는 못 살 거라구요….”

박인준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렇군. 난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네…..

그리고 그는 선희를 향해 물었다. 그 코트 마음에 들어?

선희는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아주아주 맘에 들지만 가격이 너무 쎄서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무리 박익준이 사준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비싼 옷을 감히 집기가 겁이 났던 것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2백불 이상의 옷이나 구두나 백을 가져본 적이 없는 선희였다. 그저 몇백불짜리로도 감지덕지다. 1800불이라니. 좋아보이기도 하지만 웬 옷값이 이렇게도 비쌀까? 1800불이면 엄마 아버지의 한 달 생활비인데…..

선뜻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는 선희를 본 박익준이 말했다.

“마음에 들면 사라”

그리고 그는 손수 그 낙타색 코트를 옷걸이에서 벗겨내 카운터로 가지고 갔다. 박익준이 코트 값을 치루고 있을 때, 카운터에 서 있는 그의 넓고 든든한 등을 쳐다보면서 선희는 구름 위를 걷는 듯 황홀했다. 저 남자가 나를 위해 저 비싼 코트값을 내고 있단 말이지?

그리고 그 코트가 든 두툼하고 큰 종이봉투를 받아들었을 때 선희는 날아갈 만큼 기뻤다. 오오, 1800불짜리 코트! 내 처지에 1800불짜리 코트라니! 선희는 황송에 겨운 목소리로 박익준에게 말했다.

“고마와요. 정말 고마와요!”

그 가게를 나와 다른 옷가게로 갔을 때 선희는 또 마음에 쏙 드는 캐시미어 스웨터를 발견했다. 목주위에 까만 이미테이션 진주가 뿌려놓은 듯이 자잘하게 박힌 연한 하늘색 스웨터. 선희가 그 스웨터를 연신 목에 대보며 만지작거리자 박익준이 말했다.

“마음에 들면 그것도 사라”

“아…아니예요…..”

선희가 질겁을 하면서 그 스웨터를 제자리에 던져놓자 박익준이 다시 그 스웨터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회색 스웨터까지 같이 집어들었다.

“이왕 살 것, 두벌 다 사렴. 이 회색도 괜찮으니까…..”

그리고 그는 계산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놓았다. 선희가 황급히 박익준의 뒤를 따라가서 그의 손에서 스웨터를 빼앗았다. 그러나 스웨터는 박익준의 손에 의해 도로 나꿔채어졌다. 박익준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촌스럽게 굴지말고 가만 있어라. 오늘 내가 너에게 쓸 예산은 5천불이었어.”

그는 흔쾌히 스웨터 두벌 값을 지불했다.

스웨터가 든 쇼핑백을 박익준으로 부터 받아들며 선희는 박익준의 기색을 조심스레 살폈다. 그러나 박익준의 얼굴은 여느때나 마찬가지로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그제서야 선희는 어리둥절한 느낌이 들었다. 왜 박익준이 자신에게 돈을 쓰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남자가 왜 이럴까. 내 생일도 아니고 크리스마스도 아니고 발렌타인데이도 아니다. 한 달동안 일절 연락이 없다가 전화가 왔다. 그리고 일요일에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뜬금없이 코트를 사주겠다며 백화점으로 가자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갑자기 선희에게 돈을 쓸만한 이유가 없다. 그동안 간간히 돈을 얻어쓰긴 했었다. 천불일 때도 있었고 5백불일 때도 있었고 그냥 단 돈 백불일 때도 있었다. 기분내키면 그냥 호주머니에서 집히는대로 집어주는 박익준이었다.

그리고 선희는 여지껏 박익준과 만나 밥먹고 차를 마시면서 단 한 번도 돈을 내보지 않았다. 박익준이 절대 허락하지 않았기에.

박익준으로부터 사랑받고 존중받는다는 기분은 한번도 들지 않았었다. 남자 쪽에서 돈을 도맡아 낸다는 것과 남자로부터 사랑받고 존중받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러나 박익준이 이쪽의 형편을 배려하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던 선희였다. 선희의 경제사정을 헤아리고 있다는 것, 선희의 어깨에 올려진 짐을 가엾게 여기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느낌은 썩 나쁘지는 않았다. 적어도 박익준이 선희를 조금이나마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이니까. 가엾게 여기든 불쌍하게 여기든 어느 쪽으로든 선희를 싫어하거나 혐오하지는 않는다는 증거였으니까.

아직 돈도 다 못갚았는데…..

비싼 외투와 스웨터를 얻었다는 기쁨 속에 박익준으로부터 빌린 만불을 아직도 못갚았다는 걱정이 잠깐 선희의 가슴을 풀잎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돈을 빌린지 몇 달이 지났건만 박익준은 거기에 대해 일절 말이 없다. 한두달만 더 있으면, 하고 선희는 생각했다. 현재 만불이 거의 채워져 가고 있었다. 패스트 푸드점의 싼 햄버거 한개를 사 먹지 않으며 지독하게 모은 덕분이었다.

그 돈을 갚고 나면 늘 미안하고 죄 지은 듯한 마음이 좀 개운해지리라.

다음에 들린 가게는 가죽 제품 전문점이었다. 박익준은 건성으로 가게안을 쓱 둘러만 보았다. 그리고 박익준은 싫다는 선희에게 빨간색 지갑을 억지로 또 사서 들려 주었다.

“가는 길에 한국마켓에 좀 들려요. 장을 봐다가 저녁을 해 드릴께요 ”

길 건너 편의 가게를 가기 위해 파킹랏을 가로지르며 선희는 박익준에게 말했다.

“10분이면 되어요, 10분. 아니 어쩌면 10분도 안 걸릴지도 몰라요. 마켓 안에 들어가기 싫으시면 차에서 기다리셔도 되구요…..”

박익준이 싫다고 할까 봐 선희는 10분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박익준에게 회덮밥을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거의 한 달만에 다시 만난 박익준은 얼굴이 좀 안되어 보였다. 좀 여윈것 같기도 하고 얼굴색이 변한 것 같기도 하다. 선희가 걱정하자 최근 들어 부쩍 입맛이 없고 소화가 안되어서, 라고 박익준이 말했었다.

그래서 지난 한 달 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었나……

새삼 박익준의 건강이 걱정되는 선희였다. 잃은 입맛을 돌아오게 하는 데는 식당밥보다는 선희가 직접 만든 음식이 좋을 것 같았다.그리고 고기류보다는 싱싱한 야채를 많이 넣은 회덮밥이 나을 것 같았다. 선희는 새콤달콤한 고추장을 듬뿍 넣은 회덮밥으로 박익준의 입맛을 돌아오게 할 자신이 있었다. 엄마를 닮아 음식 솜씨 하나는 타고난 선희였다. 그리고 요리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는 선희였다. 박익준이 씻을 동안에 근사하고 맛있는 회덮밥을 뚝딱 만들어 낼 자신이 있었다.

처음에 길을 떠나 올 때 박익준은 돌아가는 길에 아무데나 들러 저녁을 먹고 가자고 했었다. 선희는 박익준의 말을 따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벌써 몇천불 쯤의 돈을 쓴 박익준이다. 더 이상 박익준의 호주머니에서 돈이 나가는 게 싫은 선희였다. 아니,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 밥으로 고마움을 표시하는 게 옳다고 선희는 생각 한 것이다.

“그러지 뭐……”

박익준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리고 저녁으로 뭘 만들어 줄 거냐고 물었다. 회덮밥이란 선희의 말에 회덮밥?그거 좋지,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기까지 했다.

다음 가게는 화장품 전문점이었다. 박익준은 남자용 스킨 로션 한 병을 샀고 선희는 바디 로션과 립스틱 두 개를 샀다. 물론 돈은 박익준이 지불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더 사라는 박익준을 만류하고 가게를 나오면서 선희는 생각했다. 아아, 나의 매일매일이 오늘처럼 이렇게 기쁨으로 충만했으면…..

선희의 인생에 있어 오늘처럼 행복한 날이 있었던가. 없었다. 최근들어 선희는 자신의 인생이 더욱 구질구질해져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두어달 착실하게 페인트 일을 다녀 선희의 입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게 하던 아버지는 아니나 다를까, 그 일을 집어치우고 여전히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다. 선우는 돈 만불을 잡아먹고 나가서는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꿩 궈 먹은 소식이고 양씨를 만나면서 가뭄 끝에 단비 맞은 화초처럼 반짝 생기가 돌던 엄마는 예전의 걱정 많고 한숨 많은 여자로 다시 돌아가 있었다.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처연하고 어두운 기색이다. 엄마는 더 이상 종달새처럼 양 선생님, 양 선생님, 하고 목소리 높혀 수다를 떨지 않는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양씨와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 그리고 박익준으로부터는 거의 한 달동안 아무 연락이 없었다. 정말이지 눈을 씻고 봐도 좋은 일이, 웃을 일이 없던 날들이었다. 을씨년스럽고 스산한 겨울날씨 만큼 선희의 일상도 회색빛이었다. 그런데 우울했던 그런 날들을 보상이라도 하듯 이런 놀라운 일이 선희에게 일어난 것이다.

선희는 항상 주는 쪽에 있었다. 그 나이 되도록 살면서 누구로부터 무엇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철들자마자 아르바이트에 뛰어들면서 필요한 것을 스스로 조달하기 시작 한 것이 이날 이때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유진과 사귀면서도 유진의 형편이 뻔했기에 무얼 받는다는 것은 무리였었다. 생일 날 기껏해야 꽃 한다발, 그리고 별로 비싸지 않은 곳에서의 저녁이 다였다. 그러니까 선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박익준으로부터 그렇게 비싼 선물을 받는 셈이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을까. 선희는 가죽 전문점 가게를 나오면서 코트랑 스웨터를 넣은 쇼핑가방을 한쪽 손에 몰아 들고 조심스레 박익준의 팔짱을 끼었다.

가족들이 사는 동네를 벗어났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다. 오늘따라 무뚝뚝하게 굴지않고 유달리 친절한 박익준의 태도에 자신감이 생겨서였을 것이다.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박익준은 선희의 팔을 털어내지 않았다.

오오, 고맙기도 해라. 평소 때 같았으면 왜 이래,이거?미쳤니?하고 핀잔과 무안을 주었을 박익준이었다. 선희를 무참하게 만드는데 재주가 있는 남자 아닌가.

그런데 박익준은 가만히 있다. 오히려 선희 쪽으로 몸을 약간 밀착하기까지 한다. 그렇게 몸을 붙힌 채, 팔짱을 낀 채 예닐곱 발자욱을 옮겼다. 그리고. 박익준과 선희는 까르르, 맑고 투명하게 겨울 하늘로 울려퍼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옆 가게에서 나오던 한 무리의 동양여성들과 딱 마주쳤다.

그녀들은 선희와 박익준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딱 멈추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무리의 제일 앞쪽에서 걸어오던 여자가 얼어붙은 듯 걸음을 멈추자 뒤에 따라오던 여자들도 반사적으로 다 같이 걸음을 멈추었다고 표현하는 게 옳겠다.

순간, 한국 여자들인 것 같다, 하는 직감이 선희를 강타했다. 그것은 섬광처럼 빠르고 날카로운 직감이었다. 그 직감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선희는 황급하게 얼른 자신의 팔을 박익준의 팔에서 빼내었다.

그러나 무리의 여자 중 제일 앞에 있던 여자, 박익준과 선희를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던 여자가 선희의 그런 행동을 보고야 말았다. 그 여자는 고만고만한 대여섯명의 여성들 중 가장 눈에 뜨이는 여자였다. 빼어난 미모도 미모였지만 특출난 차림을 하고 있었기에 그랬다. 여자는 허벅지를 덮는 빨간색 털 스웨터에 아랫도리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게 타이트한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종아리까지 오는 부츠를 신고 있었다. 풍성한 스웨터로 가려진 몸이었지만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은 몸매의 소유자란 걸 느낄 수 있었고 손바닥만한 선그라스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지만 뛰어나게 아름다운 얼굴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 여자가, 그 여자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박익준과 선희를 쳐다보았다. 짙은 색깔의 선그라스에 의해 눈빛과 얼굴 표정은 가려져있었지만 경악과 당혹, 그리고 충격 그 자체라는 것을 온 몸짓을 통해 나타내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경과된 시간이 5,6초.

“익준씨!?”

석고처럼 굳어 있는 것 같았던 여자의 입에서 드디어 비명처럼 높고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나왔다.

“박익준씨!?”

선희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그 자리에 더 있어서는 안된다는, 얼른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급박한 생각이 들면서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마침내 일이 터진 것이다. 행복한 시간의 끝이 온 것이다.

“웬일이야?”

박익준이 여자를 향해 말했다.

“익준씨야 말로 여긴 웬일이야? 오늘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아, 연기처럼 꺼져버릴 수만 있다면! 선희는 그 자리를 떠나려 서둘러 몸을 돌렸다. 그러나 다리가 굳어버린 듯 걸음이 잘 떼어지지 않았다. 가위에 눌린 듯 몸이, 특히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하나님 도와 주세요. 얼른 이 위기를 모면하게 도와주세요….

“저 여잔 누구야?”

허둥거리며 가까스로 두어걸음 걸음을 옮기는 선희의 귀에 들려 온 여자의 목소리.

“저 여잔 누구냐구?”

여자가 재차 물었지만 박익준은 대답을 못하는 듯 했다.

“설마, 익준씨! 저 여자 당신 집 메이드쟎아!?”

“그래, 메이드야”

그 말을 듣지말았어야 했다.그래, 메이드야, 하는 그 말. 박익준의 입에서 나온 메이드란 말.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

박익준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골똘하게 무엇을 생각하는 듯 했다. 앞만 보고 운전을 하고 있었다. 참담한 가슴을 안고 선희는 박익준의 옆 얼굴을 쳐다보았다. 선희는 궁금했다. 나를 가리켜 메이드라고 말 한 것을 내가 들었다는 걸 알고 있을까. 그렇다면 적어도 한 마디 변명 쯤은 해 주길 바랐다, 선희는.

미안해. 어쩔 수 없었어, 하고.

그래, 박익준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돌발적인 상황에서는.

그 여자의 행동이나 말투로 봐서 현재 박익준이 사귀고 있는 여자였다. 와인잔에 갈색 립스틱 자국을 묻혀놓던. 새하얀 시트와 벼개에 긴 머리카락 몇올을 남겨 놓던. 화운데이션 방울을 욕실 바닥에 흘려놓던.

선희는 그런 걸 봤을 때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왜냐면 박익준은 자신에게 올라가지 못할 나무였으므로. 언감생심 나만 바라 봐 주, 할 수 없는 처지라는 걸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자신이 박익준으로부터 메이드 취급을 당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가서 청소를 해 주고 음식을 해준 것은 박익준을 사랑하고 좋아해서였었다. 별 대가 없이 필요할 때마다 돈을 빌려준데 대한,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자신에게 이것 저것 베풀어 준 박익준을 향한 고마움의 표시였고 감사의 표시였다.

그날 처음으로 선희는 깨달았다. 남녀관계는 동등하게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동등하지 않으면, 한 쪽의 처지가 기울어 수혜를 받는 입장에서는 절대로 정상적인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박익준에게 비굴하게 보였을까. 박익준으로부터 돈을 빌려쓰고 밥을 얻어먹고 돈을 얻어쓰면서 자신도 모르게 굽히고 기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 걸까.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여지껏 박익준의 말을 거역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으므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는. 밤 열두시에 걸려온 전화에도 선희는 짜증을 내거나 귀찮은 내색을 해보지 않았다. 선희의 가슴 속에는 늘 박익준을 화나게 해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박익준의 입속의 혀처럼 굴었다.시녀처럼 굴었다. 아마 선희는 박익준이 발을 씻어달래도 군말없이 씻겨주었을 것이다.

그 결과가 지금 이것이로구나. 선희는 너무 슬펐다. 그리고 너무 아팠다. 상처를 마구 헤집어 굵은 소금을 마구 뿌려대는 것 같은 아픔. 선희는 박익준에게로 향한 눈을 거두어 앞을 쳐다보았다. 계속 그렇게 박익준을 쳐다보고 있다가는 눈물이 펑펑 날 것 같아서.

대시보드에 던져둔 박익준의 전화는 계속 부르르르 떨고 있었다. 진동으로 해둔 전화가 5분 간격으로 몸서리를 쳐대고 있었다.그러나 박익준은 전화기에 곁눈질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앞만 보고 운전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그러다가 그가 한 일은 음악을 튼 일이었다. 운전할 때 방해된다면서 그는 절대 음악을 듣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심경이 복잡하구나, 선희는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선희는 어쨌든 아까 계획했던 것을 실천에 옮겨야 한단 생각을 했다. 박익준이 원하던 원치 않던. 그게 박익준이 쓴 몇천불의 보답이라 생각했으므로.

“한국 마켓으로 가요”

도시가 가까와 졌을 때 선희가 말했다. 박익준은 잠자코 선희의 말을 따랐다. 말없이 차를 한국마켓 주차장으로 갖다 댄 것이다.

“여기 계세요. 잠깐이면 되니까…….”

싱싱한 투나와 살몬. 그리고 상추와 깻잎을 사고 차에 돌아왔을 때 박익준은 시트에 고개를 눕히고 눈을 감고 있었다. 어쩌면 깜빡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선희는 쇼핑 한 것을 발 앞에 조심스레 놓고 조용하게 차문을 닫았다. 그러나 미세한 움직임과 소리에 박익준이 눈을 번쩍 떴다.

“미안 해요. 깨워서. 좀 더 주무시게 조용하려 했는데……”

“아니 안잤어…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야…

아까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처음으로 박익준이 한 말이었다. 박익준의 아파트로 돌아와 선희는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고 박익준은 샤워를 했다.

언뜻 보면 평화로운 일요일 저녁이었다.

선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마지막이다. 오늘로서 여기에 오는 것은. 그리고 음식을 해주는 것도 오늘로서 마지막이다.

선희는 어떻게 해서든 얼른 만불을 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동료에게 모자라는 액수만큼을 빌려서라도 하루빨리 만불을 만들어 박익준에게 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행복한 때도 있었지만 상처받고 비참했던 순간이 더 많았던 박익준과의 관계, 이제 그만 정리해야겠다고 선희는 결심했다.

박익준과 이별하고 나면 많이 괴로울 것이다. 슬플 것이다. 많이 아플 것이다. 그러나. 메이드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박익준에게 빌붙어 지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러나. 앞으로 급하게 돈이 필요할 때가 생기면 어떡하지?

샤워를 마친 박익준에게 울긋불긋 색깔도 화려하고 고운 회덮밥을 내놓자 와 ,이거 근사한데? 진짜 근사해,하고 박익준은 감탄사를 올렸다. 그러나 그는 그 회덮밥을 다 먹지 못했다. 배가 많이 고프긴 한데 오늘 별로 먹히지가 않는 군…….

설거지를 하고 부엌을 깨끗하게 정돈한 다음 선희는 박익준에게 말했다.

이제 다시는 여기 오지 않겠어요. 그리고 앞으로 당신을 두번 다시 보지 않겠어요......

박익준은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 식탁에 팔을 괸 채 눈을 감고 선희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을 뿐.

“다음 달 쯤이면 돈을 돌려드릴 수 있을 거예요..은행으로 바로 송금할테니까 문자로 계좌번호를 아르켜 줘요……..”

박익준은 이번에도 역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냉정하고 차가운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저 때문에 오늘 돈 너무 많이 쓰셨어요…..고…고마와요……”

마지막 말은 울음으로 젖어들었다. 그래서 다 끝을 내지 못했다. 선희는 박익준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잠깐 짚었다 놓고 현관으로 걸어나왔다.

선희가 조용하게 문을 닫고 나올 때까지도 박익준은 식탁에 처음의 그 자세로 굳은 듯 앉아 있었다. 복도를 걸어나와 엘레베이터를 타기 전 선희는 박익준의 집쪽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박익준의 현관문은 성문같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 누구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단단하고 완강하게 닫혀 있었다. 그 닫힌 문이 박익준과 자신의 단절된 사이를 뜻하는 것 같아 선희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렇게 헤어지고 마는구나…….

자신의 차로 돌아온 선희는 그때서야 온종일 참았던 통곡을 터트렸다.

미안하다고 한 마디만 해주지…..어쩔 수 없었다고 한 마디만 해주지…..본의가 아니었다고, 진심이 아니었다고 한 마디만 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