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최영준
"얘, 사무실에 급사가 하나 새로 왔다더라"
명주는 최근 솟기 시작한 이마의 여드름 두어개를 연신 손으로 짜내며 벽에 세워둔 거울 속으로 정옥을 보면서 말했다.
"그래서..."
정옥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공장 사무실에 급사 하나 새로 들어온 게 무슨 대수람.
정옥은 솜이불을 머리끝까기 끌어 덮었다. 아까 동네 목욕탕에 간다고 나가는 금희더러 연탄 아궁이 불마개를 좀 더 열어놓고 가라고 했건만 잊어버리고 그냥 가버렸는지 방구들은 계속 미적지근했다.
한달에 두 번 노는 일요일.
뜨끈뜨끈한 방에 누워 몸을 지지며 낮잠이나 푹 자보려는데 방바닥이 차서 영 틀린 것 같다. 그렇다고 자신이 나가서 불마개를 열기는 싫어 정옥은 애꿎은 이불자락만 끌어 당겼다.
"기집애, 내숭 좀 떨지마!"
명주가 거울을 방바닥에 놓고 돌아 앉더니 정옥의 이부자락을 확 걷어버렸다.
얇은 내의만 걸친 정옥의 맨몸이 그대로 들어났다.
"아이, 왜 이래 추워. 이불 줘."
정옥은 팔을 확짝 뻗어서 명주가 빼앗아 간 이불을 도로 뺏어 보려고 허우적거렸다. 명주는 그런 정옥의 모습이 재밌는지 깔깔대고 웃다가 도로 이불을 던져주었다.
"난 네가 참 이상해. 나이가 열아홉인 가시나가 어쩌면 그렇게 남자에 관심이 없을까. 본래 성격이 그러니, 아님 내숭이니?"
빙글빙글 웃으며 정옥을 놀려대는 명주의 얼굴이 이마의 여드름 몇 개로 인해 더욱 귀여워 보인다. 유난히 뽀얗고 결좋은 피부의 명주는 요즈음 이마에 나는 여드름이 여간 신경이 쓰이질 않는지 시간만 나면 잡아뜯고 짜대고 야단을 해대는데 정옥에게는 그 여드름이 오히려 명주를 더욱 귀엽고 청순하게 보이는 듯 했다.
정옥은 명주의 말에 대꾸를 않고 이불을 다시 몸으로 돌돌 감고 베개를 베고 누웠다.
남자 이야기는 적어도 정옥에게는 관심밖의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까무잡잡한 피부로 인해 깜둥이니 연탄이니 하는 놀림을 늘 받아왔던 정옥은 자신의 외모에 많은 열등감이 있었다.
어느 눈삔 남자가 나 같은 애에게 관심을 가져줄까 하는.
혹 관심을 가지는 남자가 나타난나손 치더라도 정옥은 값싼 국수집 아니면 동시상영의 삼류영화관이나 돌아 다니는 데이트는 하고 싶지기 않았다.
정옥이 다니고 있는 메리야스 공장에는 스무살 전후의 처녀총각이 3백 명이 넘었다.
모두 한창 때인지라 일하면서 눈이 맞아서 데이트니 연애들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무개가 아무개의 애인이고 누가 누구하고 여관에 가는 걸 봤다더라 하는 식의 소문이 하루가 멀다하고 공장네에 퍼졌다. 또한 남녀가 만나면 일이 나는 건 뻔한 이치라 누가 누구의 아이를 배서 수술을 했다더라 하는 소문도 자주 들리곤 했다.
공장내의 연애 이야기들 뿐 만 아니라 메리야스 공장이 공장지대인 K동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타공장 사람들과의 연애사건도 심심찮게 들렸다. 그동안 정옥이 들었던 연애사건만해도 벌써 열 손가락이 넘었으니까.
"새로온 급사는 사장님의 먼 친척이래. 스물 네 살인데 지금 야간 대학에 다닌대나 봐. 두어번 지나가는 걸 봤는데 키도 크고 인물도 참 좋더라. 옥희년은 벌써 그 사람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 것 있지. 야간대학이지만 어쨌든 대학생인데 그 사람과 데이트를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진짜 꿈에서라도 좋으니 그 사람 품에 한번만 안겨봤으면..."
명주는 꿈꾸는 얼굴로 말했다.
정옥은 베개를 밀어놓고 일어나 앉았다.
"명주는 넌 얼굴도 예쁘고 날씬 하쟎니. 누구든지 너를 좋아하니까 어쩌면 그 사람도 너를 맘에 들어할지 몰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명주는 화들짝 달려들어 정옥을 얼싸안았다.
"진짜지?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니? 정옥이 넌 진짜로 진정한 내 친구야!"
그때 방문이 열리며 젖은 머리를 늘어뜨린 금희가 들어왔다.
"웬 수선들이야?"
명주가 정옥을 안았던 팔을 풀고 한쪽 눈을 찡긋해보였다. 아무말도 말라는 표시였다.
월요일 아침.
공장에 출근했던 정옥은 아가씨들간의 화제가 온통 사무실에 새로 온 대학생 급사에 대한 이야기뿐인 걸 알았다.
탈의장에서 작업복을 갈아 입으면서도,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점심식사 후 잔디밭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햇볕을 쬐면서도 온통 새로온 대학생 급사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을 몰라했다.
그녀들의 크트머리에 잠자코 듣기만 하던 정옥은 급사의 이름이 최영준이며 나이는 24살,그리고 집은 인천으로 공장 근처에서 자취를 하면서 야간대학을 다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입으로는 말들을 하면서 아가씨들의 눈은 모두 사무실 쪽으로 가 있었다.
정옥이 근무하는 메리야스 공장은 공장건물 외에 식당과 매점, 사무실이 붙은 건물이 따로 있었다. 사무실에는 사장과 간부급 사원들 그리고 경리들이 예닙곱명 근무했다. 새로 온 급사도 사무실에서 근무를 했는데 행여나 서류 심부름이라도 하러 사무실 밖으로 나오지 않을까하는 기대로 아가씨들의 관심은 일제히 사무실쪽으로만 쏠려 있는 것이다.
중학교 학력이 최고 학력이고 대부분 국졸, 아니면 대부분 정옥처럼 학교 문앞에도 못가 본 여공 아가씨들이었다. 비록 야간대학이지만 대학생을 가까히 접한다는 호기심에 그리고 잘만 하면 그의 애인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과 설레임에 아가씨들의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났고 얼굴엔 생기들이 돌았다.
그러나 정옥에게만은 그런 것이 아무런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저렇게 잘 생긴 남자가 나 같이 예쁘지 않은 여자에게 관심을 가져줄리 없지, 하는 열등감이 정옥으로 하여금 일찌감치 모든 걸 포기하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기회는 뜻밖에도 엉뚱하게 찾아 왔다.
월급날이었다.
월급을 받는 날의 잔업은 모두 싫어하고 꺼렸다.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는 날, 일찌감치 퇴근해서 맛있는 것을 사먹고 평소 보아두었던 예쁜 옷도 사자는 들뜬 마음들이 수당을 더 쳐주는 잔업을 기피하게 만들었다.
잔업할 사람을 찾으러 온 공장장은 자기가 지명한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젓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정옥이 앞으로 나섰다.
월급을 탔으나 딱히 쓸데도 없고 자취방에 가 봤자 아무도 없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금희는 요즘 고향집에 다니러 가서 없고 명주도 나가고 없을 것이다.
"그래? 고맙군 아무도 안하려 해서 골치였는데..."
공장장의 지시대로 세 시간의 잔업을 마치고 나온 공장밖의 공기는 겨울로 막 접어든 11월의 날씨에 맞게 차고 매웠다.
정옥은 공장 주변에 늘어선 상점들의 불빛을 바라보며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천천히 걸었다.
어디선가 닭발 굽는 냄새가 풍겨왔다.
배가 고파와서 정옥은 걸음을 빨리했다. 집에 찬밥 남은 게 있을려나..
그때 누군가가 다가오더니 정옥의 어깨를 잡았다.
정옥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빼며 상대방을 적의에 찬 눈으로 올려다 보았다. 부근의 불량배려니 하고.
"나예요, 나. 무서워라.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손바닥을 확짝 펼쳐보이는 남자, 그는 뜻밖에도 사무실 급사 최영준이었다.
"웬일이세요?"
정옥은 갑자기 온몸의 힘이 스르르 빠지는 걸 느끼며 모기소리만하게 물었다.
이 사람을 여기서 만나다니...
"월급날이라고 공장 아저씨들이 소주를 한 잔 사겠다고 해서...포장마차 틈으로 아가씨가 지나가는 게 보이길래 얼른 쫒아 나왔어요."
날 보고 쫒아 나왔다고...?
그는 정옥과 걸음폭을 같이 하며 나란히 걸었다.
공장 안팎의 아가씨들이 흠모하고 관심을 갖는 주인공과 나란히 걷는 정옥의 가슴은 곧 터질 것 같았다. 정옥은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심호흡을 하면서 생각했다.
괜스리 엉뚱한 기대하지 말자. 아픈 상처만 생기기 전에...
그런데 영준이 자기를 보고 쫓아 나왔다는 말이 정옥을 설레게 했다. 정옥의 온몸이 구름위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다. 발걸음이 땅을 딛는 것 같지 않았다.
돌뿌리에 걸려 정옥이 휘청, 하자 영준이 잽싸게 정옥의 팔을 잡았다.
"술 먹었어요? 어디서 오는 길이예요?"
"......"
정옥은 영준에게 잡힌 팔을 얼른 빼내었다.
근처 식당이나 포장마차에 공장사람들이 많이들 있을텐데...
정옥은 고개를 푹 숙였다.
영준과 둘이 걷고 있는 걸 누가 보고 있을까 봐, 그리고 영준의 숨결이 가까히 있다는 게 꿈같이 느껴져서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영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아무 생각 말자. 아는 사람이라고 반가와서 뛰어 나온 거겠지...
정옥이 애써 마음을 추스리는데 영준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내일 시간 있어요?"
"........"
"만나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만나 줄래요?"
"나, 나는 예쁘지도 않은데...."
거의 울상이 되다시피한 얼굴로 더듬거리는 정옥의 말에 영준은 푸웃,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정옥은 영준을 올려다 보았다.
내가 한 말이 그렇게 우습나...
한참을 웃던 영준이 웃음을 그치고 허리를 굽혀 정옥의 얼굴을 잠깐 들여다 보았다. 어두웠지만 길가 음식점에서 새어나온 불빛으로 정옥도 가까이 온 영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정옥, 이정옥 맞죠? 정옥은 내가 지금까지 본 어떤 아가씨보다 예쁜 여자야. 아주 예쁜 여자예요. 내일 저녁 일곱 시, 요앞 가보리 다방으로 나올래요? 일곱 시가 너무 이르다면 여덟 시도 괜찮고...."
어떻게 자취방으로 돌아왔는지 정옥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가, 최영준이 나를 예쁜 여자라고 했다! 자신이 지금껏 만난 어떤 여자보다 예쁘다고 했다! 그리고 내 이름도 알고 있었고 만나고 싶다고 했다!
가슴이 터질 듯 해서 정옥은 손으로 가슴을 놀렀다. 솜사탕처럼 달콤하다는 말이 바로 이런 기분을 말 하는 것이라고 정옥은 생각했다.
배는 고팠지만 정옥은 밥 먹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런 기분이라면 며칠을 안먹어도 살 것 같았다.
정옥은 엉망으로 늘어진 방을 치울 생각도 않고 방바닥에 배를 대고 엎드렸다.
정옥인 예쁜 여자야. 지금껏 내가 보아오던 그 어떤 여자보다도 더....
아아! 영준, 영준씨!
영준의 목소리가 귀에 생생하게 다시 들리는 듯 해 정옥은 진저리를 치며 방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었냐고? 그거야 어렵지 않지. 공장장한테 물어보면 금방인데 뭐. 왁자지껄 웃고 떠는 아가씨들 틈에서 유난히 입을 다물고 있는 아가씨가 눈에 띄길래 지나가는 말처럼 공장장한테 물어 봤지. 저 얌전한 아가씨 이름이 뭐냐고."
그 다음날 저녁, 가보리 다방.
정옥은 영준과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목을 두어번 접은 회색셔츠를 입은 영준은 공장 여자애들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생기고 깨끗한 얼굴이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온 그의 이마는 서늘했고 선이 분명하고 단정한 입술이 그의 얼굴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어쩌면 저렇게 잘 생겼을까.
정옥은 생각했다.
그는 우유를, 정옥은 사이다를 시켰는데 우유를 마시느라 얼굴을 숙일 때마다 보이는 깍은 듯한 콧마루 부분이 특히 정옥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완전 조각이네, 조각.
정옥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름을 알아내고 난 후 더욱 정옥일 유심히 살펴 보았지."
바깥에서는 사무실 안쪽이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사무실 안에서는 바깥쪽을 볼 수 있었나보았다. 점심을 먹고난 여자애들이 공장건물과 식당앞 사이에 있는 잔디밭에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대부분 영준에 대한 이야기)피우곤 했었는데 정옥도 명주를 따라 자리를 몇번 같이 했었다.
그때 영준이 정옥의 모습을 관찰 한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남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정옥의 얼굴이 저절로 붉어져 왔다.
"몇살이지, 정옥인?"
"열아홉이요."
"고향은?"
"............"
"부모님은 다 살아 계셔?"
어머니-.
열한 살에 집을 나와 8년 동안 한 번도 보지못한 어머니.
정옥은 그후 어머니에 대한 소식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닌 지금 어떻게 살고 계실까? 양아버지는?
거의 잊고 있던 고향집에 대한 이야기를 영준이 묻자 정옥의 가슴이 싸하게 아파왔다. 그러나 그것은 미칠듯한 그리움이나 살붙이에 대한 애틋한 보고픔이 아니었다.
기회가 되면, 돈을 많이 벌면 찾아가 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미루어 오던 고향집에 대한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정옥의 머리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어머니의 얼굴조차 가물가물 해져가고 있었다.
영준이 묻는 말에 정옥이 대답을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자 영준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팔을 뻗어 숙인 정옥의 얼굴을 들게 했다.
"정옥이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말이야. 글쎄, 뭐라고 표현할까. 항상 추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지금 추워?"
"아,아니예요"
다방안은 석유난로가 가운데 자리잡고 있어서 전혀 춥지 않았다. 오히려 정옥의 얼굴은 영준과 마주앉은 긴장감으로 인해 빨갛게 달아 올라 있었고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이번 일요일 노니? 나랑 인천 가지 않을래? 거기 조그만 절이 있는데 심란할 때마다 혼자 잘 가거든. 정옥일 한 번 데려가고 싶어."
정옥은 고개를 끄덕했다. 영준이 가자고만 한다면 지옥의 끝이라도 못 따라갈 것 없었다. 영준, 그가 가자고 한다면.
"공장 생활 힘들지?"
"아니, 그냥 견딜만해요"
"점심을 먹고 난 후 20여분 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에도 모여 앉아 웃고 떠들어대는 여자애들을 보면 참으로 밝게들 사는 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힘든 야근에, 부실한 식사에 시달리면서도 저렇게들 항상 웃고 사는 구나...."
여자애들이 모여서 항상 자기이야기를 하는 줄 이 사람은 알까. 입으로는 말을 하면서도 눈과 귀는 영준이 있는 사무실쪽으로 쏠려 행여나 서류 심부름이라도 하러 밖으로 나와 자신들이 있는 곳을 지나쳐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가슴을 졸이는 여자애들의 마음을 이 사람은 알까?
"정옥이도 그렇게 살아. 항상 밝게."
"여자애들이 거길 무척 좋아해요"
더 참지 못하고 정옥이 입을 열었다.
영준은 잠깐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마에 주름을 모았다.
"잘 생기고 키도 크고 대학생이고....."
"나는..."
영준이 정옥의 말을 잘랐다.
"나는 정옥일 좋아해. 이정옥을. 알겠어?"
"........"
영준이 눈이 정옥의 경직된 얼굴에 가 머물렀고 영준의 강렬한 눈빛을 감당할 수 없었던 정옥은 얼른 앞에 놓인 사이다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이러지 마세요. 아아, 이러지 마세요. 제발..."
"가만 있어. 그냥 얌전히만 있음 돼"
영준의 손은 집요했다.
정옥이 뿌리치고 꼬집고 때려도 정옥의 속옷을 향해 들어오는 영준의 손 움직임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러지 마요. 제발 좀..."
정옥은 울면서 영준의 손을 벗어나 보려 애썼다. 그러나 영준의 힘은 완강했다.
영준과의 만남을 위해 특별히 사 입은 정옥의 초록빛 원피스 뒷 단추가 열려지고 속옷이 벗겨졌다. 희미한 전등 불빛에 정옥의 마르고 까만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넌 흑진주야. 흑진주같이 매력있는 여자야"
영준이 정옥의 알몸을 내려다 보며 탄성을 질렀다.
정옥은 드러난 젖가슴을 두손으로 가리며 이제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인천근교에 있는 절을 구경하고 내려오는 길에 만난 때 아닌 겨울비를 피하기 위해 여관에 들른 것부터가 잘못된 거라고 정옥은 생각했다.
어떻게 순순히 여관을 따라 들어 올 생각을 했을까. 겨우 두 번째 만났을 뿐인데...
영준의 눈빛이 너무 따뜻해서였을 거라고 정옥은 애써 자위했다.
지금껏 누구로부터 따뜻한 말 한마디 들어 본 적 없는 정옥으로서는 영준의 친절이 커다란 홍수였다. 그 홍수의 물살이 영준에게 가슴을 열게 했고 여관까지 쉽게 따라오게 했는지도 모른다.
"정옥아."
영준의 숨결이 눈을 감고 있는 정옥의 얼굴로 다가왔다.
"나 정옥이 좋아해. 잔디밭에 앉아 있는 널 첨 보았을 때부터...."
누워 있는 자세에서 정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까닭모를 눈물이 정옥의 눈에 차오르고 있었다.
절 구경을 마치고 돌아 설 때부터 내리던 비는 점점 세차게 내리는 듯했다.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 소리가 요란했다.
"불을, 불을 꺼 주세요."
영준이 일어나서 불을 껐다.
어둠속에서 영준이 옷을 벗었다. 그리고 곧 정옥에게 다가갔다.
"무서워 하지 마."
영준의 혓바닥이 정옥의 이마를, 뺨을, 그리고 입술을 핥았다.그리고 영준은 정옥의 오른쪽 젖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조심스러우나 세차게 그것을 빨기 시작했다.
아아, 하고 낮게 비명을 지르면서 정옥은 생각했다.
곧 아픔이 올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나를 예쁜여자라고 말해 준 남자에 의해 내 몸이 열려질 것이다. 오늘 날까지 단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하고 칭찬 받아보지 못한 내 몸이 영준에 의해 열려질 것이다.
정옥은 눈을 감고 창밖으로부터 들려오는 빗소리를 들었다.
슬프다거나 아깝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눈물이 났다. 이유도 없이.
영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옥의 젖가슴에서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정옥의 다리사이로 자신의 몸을 밀어 넣었다.
아아,하고 정옥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정옥이 생각했던 대로 아픔은 예리했다. 영준의 몸이 파도처럼 움직일 때마다 아랫도리에 부서지는 듯한 통증이 왔다
정옥은 이를 악물며 영준의 등을 부여잡았다.
정옥은 얼른 이 행위를 끝내고 영준의 가슴에 안겨 달고 긴 잠을 자고 싶을 뿐이었다.그것은 소박하고도 강렬한 바람이었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