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흐리고 어두침침한 날씨였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하늘은 음산하게 내려 앉아있고 차가운 바람마저 부는.
스산하고 복잡한 내 마음하고 똑같군, 하고 선희는 차창 밖을 내다보며 생각했다.
올 듯 올 듯하며 거의 두 달째 비가 오지 않고 있었다. 한달 내에 비가 오지 않으면 제한급수를 해야 할 판이라고 매스컴에서는 연신 떠들어대고 있었다.
선희는 시계를 보았다. 20분 전 여섯시였다. 불쌍한 엄마는 아직도 부엌에서 종종걸음을 치고 있을 것이다.
정말 비라도 시원하게 좌악좌악 좀 쏟아졌으면. 그러면 안개처럼 짙고 탁하게 온 몸과 마음을 덮고 있는 이 우울한 기분이 가시려나. 그렇게 생각하다가 선희는 한숨을 내쉬며 희미하게 웃었다. 비가 온다고 걷우어질 우울이 아니지, 하는 자조적인 생각에.
선희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항상 우울했던 것 같다. 지난 날을 더듬어 보건데 행복하고 기뻤던 기억이 거의 없다.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하, 웃어 본 일 조차 아예 없다. 철이 나기 시작하면서 짊어지기 시작한 생활에 대한 부담, 어떻게 해서든지 엄마를 도와 동생들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막중한 의무감이 선희를 웃지 못하게 했다. 무능한 아버지를 대신해 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영어 못하는 부모를 대신해 미국생활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절박함이 선희를 일찍 애늙은이로 만들어버렸다. 매사에 심각한 아이가 되어버렸다.
다 힘들고 힘든 나날이었지만 그중 선희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고생하는 엄마를, 자신의 의견 한마디 표출하지 못한 채 아버지에게 바보처럼 짓눌리며 사는 엄마를 보는 일이었다.
엄마는 아버지를 왕처럼 여겼다. 아버지가 아니면 그 누가 배우지도 못하고 능력도 없고 천애고아나 다름 없는 자신을 거두어 주었겠냐며 아버지를 항상 고마워 했다. 그리고 옆에서 보는 사람이 가슴을 치게 답답할 정도로 아버지에게 순종을, 아니 복종을 했다. 그리고 엄마는 항상 선희에게도 자신의 의견을 주입시켰다. 남자는 하늘이란다. 여자가 제 아무리 잘났어도 남자 밑이란다. 남자에게 잘해야 여자가 복을 받지.
저울로 달아도 단 일 그램도 하등 나을 것 없는 조건이었던 유진에게도 손해보고 희생할 것을 엄마는 늘 권유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7년동안 유진과 사귀면서 다툴 일이 여러번 있었지만, 그래서 거의 헤어질 뻔한 일도 꽤 많았지만 선희 쪽에서 그저 참고 누르고 넘어갔던 것은. 남자는 하늘이다, 하는 엄마의 인생관이 은연 중 선희에게도 적용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는 아버지가 주먹을 휘둘러도 반항 한번 하지 않았었다. 말도 되지 않는 트집을 잡으며 엄마의 속을 터지게 했어도 말대꾸 한번 하지 않았었다. 때리면 때리는대로, 몇년에 걸쳐 아둥바둥 부은 곗돈을 빼앗기면 빼앗기는대로, 쫒아내면 몇 시간이고 추운 바깥에서 덜덜 떨 망정 추호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던 엄마였다.
그래서. 그래서 그렇게 평생 남편이란 작자를 떠받들고 산 결과가 고작 이것인가.
엄마가 짐을 싸들고 선희의 집에 찾아왔을 때, 선희는 정말이지 묻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 엄마가 평생 일편단심 몸 바치고 마음 바쳐 희생한 결과가 바로 이거야?
그러나 선희는 묻지 않았다. 그렇쟎아도 마음이 복잡하고 어수선할 엄마였을 테니까. 생애 처음 내린 자신의 결단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혼란스러울 엄마였다. 엄마가 내린 결심을 잠자코 존중해 주는 일이 바로 선희의 일이었다.
선희는 말했었다.
“잘 했어, 엄마. 진작 그랬었어야지. 아무 걱정말고 여기서 지내……”
지금까지 그랬듯 선희는 늘 엄마 편이었으니까.
어쨌든 놀라운 일이었다. 자신의 결심을 실행으로 옮긴 엄마라니!
예전에도 엄마는 속썩이는 아버지 때문에 몇 번 짐을 싼 적이 있었다. 참고참고 또 참다가 심장이 터져버릴 만큼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쯤이면 결연한 표정으로 보따리를 싸곤 했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자신이 싸놓은 올망졸망한 보따리 서너개를 쳐다보며 마냥 눈물만 흘리다가 끝내는 그 보따리를 다시 풀어버리곤 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행여 엄마가 자기와 동생들을 두고 떠나버릴까, 겁에 잔뜩 질려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인 선희를 끌어안고 애닲은 통곡을 토해내곤 했었다.
“걱정 마, 선희야. 엄마 안 가. 가고 싶어도 엄마는 갈 데가 없어…아무 데도 갈 곳이 없어…..”
그렇다면 지금은 엄마가 갈 곳이 있을까? 지금 역시 없었다. 선희가 알기엔 아무 데도 없었다.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선희의 굴속 같은 아파트 방 외엔.
선희는 알았다. 엄마가 이번 가출을 결행한 데는 매니저 양씨의 존재가 크게 작용했다는 것을. 엄마는 믿는 것이다. 아버지가 거두어주지 않아도 자신을 사랑해 주고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존재가 이 하늘 아래에 있다는 것을.
그러나 엄마는 일절 매니저 양씨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선희 역시도 묻지 않았다. 엄마가 준비 되었을 때, 그때 들어도 늦지 않으니까.
엄마랑 같이 사는 생활이 벌써 한 달째,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힘든 일과를 마치고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 와서 직접 손을 움직이지 않아도 따뜻한 저녁밥을 먹을 수 있고 잘 다림질 된 옷을 입을 수 있었으니까. 출근시간에 쫓겨 대충 해놓고 나간 집안은 우렁각시가 왔다 간 것 처럼 늘 정갈하고 반듯하게 치워져 있었으니까.
선희는 엄마 덕분에 구색맞춘 도시락을 싸갈 수 있었고 잘 차린 저녁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선희는 살이 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 한달간 6파운드나 빠졌다. 그렇쟎아도 늘 정상체중을 밑도는 선희였다. 6파운의 살이 빠진 선희의 양볼은 움푹 파져버렸고 어깨는 전쟁난민처럼 앙상해졌다.
엄마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다. 잘 먹는 것 같은데 왜 살이 더 빠지는 것 같을까? 얘, 너 뭐 고민 있니?고민이 있으면 아무리 잘 먹어도 살이 오르지 않는다는데…….”
엄마가 같이 있으므로 불편한 것은 마음놓고 박익준과의 이별을 슬퍼할 수도 없다는 거였다. 선희는 아팠다. 아프고 아팠다. 자신이 먼저 손 흔들어 결별한 것이지만 박익준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에어지게 아팠다. 때로는 너무 보고 싶어서 정신이 다 아득할 지경이었지만 볼 수 없으니 미칠 정도로 안타까왔다. 전화 한 통화면 그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도 있을 테지만 그럴 수 없으니 더욱 가슴이 미어졌다.
박익준이라는 이름 석자를 생각할 때마다 선희의 눈에서는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선희는 마음놓고 울 수도 없었다. 직장에서는 동료와 상사의 눈 때문에. 그리고 집에서는 엄마 때문에. 출퇴근 시간, 차 안에 혼자 있을 때 끄윽끄윽 울 수밖에 없었다. 그것마저도 옆 차선의 운전자가 이상하게 쳐다볼까 봐 마음놓고 할 수 없는 선희였다.
박익준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마다 발 뻗고 통곡이라도 했으면 속이 시원하련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으니 선희는 더욱 힘들고 괴로왔다. 원치 않은 이별을 한 사람은 마약을 끊을 때의 금단증상과 비슷한 증세를 겪는다는 얘기를 선희는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말이 자신에게 백프로 적용된다는 것은 이번에 선희는 알았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다 귀찮았다. 예전에는 가치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아무런 뜻 없이 의미 없이 선희에게 다가왔다. 그냥 살아야 하니까 사는 거고 일을 해야 하니까 하는 거지 몸과 마음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헛깨비같은 느낌이었다.
물 한모금 없이 뜨거운 태양아래 몇십 마일을 뛰고난 마라톤 주자가 이 정도로 고통스러울까. 이러다간 자신도 모르게 숨이 멎는 것은 아닐까, 심장을 지그시 눌러보는 게 일일 정도로 선희 가슴은 갈가리 찢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어떻게 해야만 이 무서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선희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밥을 먹어도 맛을 몰랐고 잠을 자도 늘상 무서운 악몽에 시달렸다.
다행히 엄마는 일에 지쳐서인지 침대에 머리만 대었다 하면 곯아떨어지는 편이었다. 거실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밤을 하얗게 새면서 선희는 소리죽여 울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박익준이 그리웠다.
처음엔 자신이 내린 결단에 만족했던 선희였다. 메이드 취급까지 당하면서 빌붙어 있을 이유가 없다며 스스로 위안했으니까.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날이 갈수록 먼저 작별을 고했던데 대한 후회가 장마철의 강물처럼 무섭게 불어나고 있었다.
메이드란 말, 그냥 못 들은 척, 안 들은 척 태연하게 넘어갈 걸…그랬으면 좋았을 걸… ..그랬으면 박익준이 아직도 내 옆에 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이후로 박익준으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지금 이렇게 선희는 죽을 만큼 아프고 슬픈데 박익준은 빨간 스웨터의 여자와 얼마나 재미있게 알콩달콩 잘 지내고 있는지 전화 한통도 없는 것이다.
하긴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으니까 그 사람이 내게 연락을 해올 이유가 없지…답답한 건 나지 그 사람이 아니지...
그러나 선희는 기다렸다. 박익준의 전화를. 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선희는 기다렸다. 그리고 궁금했다. 나는 이렇게 죽을 만큼 아프고 힘든데 단 한번이라도 나를 생각하는지. 단 한번이라도 나를 가엾게 여겨주는지…….
선희는 무슨 수를 쓰서라도 한번만 더 박익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이제부터 여기 오지 않겠어요.그리고 앞으로 당신을 두번 다시 보지 않겠어요, 하고 선희가 말했을 때 박익준은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었다. 원래 자신의 감정을 잘 나타내지 않는 남자이긴 하지만 자신과의 이별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선희는 알고 싶었다.그리고 선희는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한번만 더 만나 물어보고 싶었다.
제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긴 했지만 저와의 이별, 정말 당신이 원했던 거였어요?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니. 원하지 않았어, 하는 대답을 듣는다면 어떻게 할까. 그런 대답을 듣는다면 그 이후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선희에게 마지막 남은 카드는 박익준에게 돌려주어야 할 만불의 돈이었다.
계좌번호를 문자로 보내달라고 했었다. 그러나 선희는 아직 박익준으로 부터 계좌번호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잘만하면 만불을 돌려준다는 빌미로 한 번 더 박익준의 얼굴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희는 박익준에게 연락할 용기를 선뜻 내지 못하고 있었다. 빨간 스웨터의 여자때문이었다. 그 여자를 생각하면 전화기로 가던 손이 움추려 들었다. 어느 면으로봐서나 자신과는 비교도 안되는 그 여자를 생각하면 비누거품처럼 부풀어오르던 용기가 한 순간에 사그러들고 마는 것이었다.
나는 왜 그런 여자가 되지 못했을까. 살아온 환경이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나는 왜 그렇게 멋있고 세련된 여자가 되지 못했을까. 빨간 스웨터의 그 여자는 선희가 지금껏 살면서 보아온 여자중 가장 멋있고 당당한 여자였다.자신감을 온몸으로 표출하던 여자였다. 그래서 선희는 생전 처음으로 패션 잡지를 사 보기도 했다. 그 여자와 비슷한 빨간색 스웨터를 한 벌 살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희는 생각만 할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지금껏 선희는 단 한번도 원색계통 옷을 입지 않았었다. 항상 검은색, 회색, 밤색 계통이었다. 기껏 변화를 준다고 해 봐야 남색이나 보라색 정도. 튀는 게 싫어서였다. 남의 눈에 뜨이는 게 ,주목을 받는 게 싫어서였다. 항상 뒤에서 움추려 숨는 듯이 사는 게 선희는 편했다.
내 인생에 드리워진 이 음울한 기운은 언제 거두어질까. 내게도 밝은 빛이 비추어지는 날이 있을까…….
선희는 버릇처럼 깊은 한숨을 내쉰다.
지금 선희는 엄마가 일 하는 마켓 주차장에 와 있다. 오늘 저녁엔 엄마와 외식을 하기로 했다. 엄마의 퇴근 시간은 여섯시다. 아직 엄마가 일을 마치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있기에 주차된 차안에서 상념에 젖어 있는 것이다.
마켓 주차장은 물건이 잔뜩 실린 카트를, 혹은 빈 카트를 끌고 왔다갔다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모두들 조금치의 옆눈도 팔지 않는다. 식료품 사는 일을 얼른 마치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일념 한가지로 머리속이 꽉 찬 사람들 같다. 하나같이 바쁘고 급한 발놀림들이다. 하긴 이렇게 음산하고 우울한 날씨에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상책이겠지. 마켓에서 사간 두부를 넣고 보글보글 된장찌개라도 끓여서 식구들이 둘러 앉아 밥을 먹는 게 제일 좋겠지.
그러고 보니 선희는 식구들과 둘러앉아 밥을 먹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한국에서 살 때는 할머니와 넘쳐나는 고모들, 그리고 삼촌들이 먼저 밥을 먹고 난 차례대로 밥을 먹어야 했다. 어떤 땐 부엌에서 선 채로 끼니를 때우는 엄마 옆에서 같이 두어숟갈 얻어먹기도 했다.
미국에 온 이후로도 역시 그렇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늘 일을 가고 없었다. 선희가 저녁 밥을 해야 했다. 아버지를 위해 저녁식탁을 차려야 했고 동생들도 먹여야 했다. 어릴 때부터 선희는 아버지를, 동생들을, 그리고 엄마를 챙겨야 했다. 그러나 정작 선희 자신은 그 누구로부터도 보살핌을, 챙김을, 사랑을, 애정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선희는 다정하고 자상한 남자를 원했다. 진심으로 여자를 위할 줄 알고 사랑해주는 남자. 그래서 별다른 능력이나 매력없는 유진과 7년이란 세월을 사귀었다. 단지 아버지와 다르다는 이유에서. 아버지같이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걸핏하면 폭언을 퍼붓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술을 먹지 않고 여자 위에서 군림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온순하고 착하다는 이유에서.
-절대로 아버지같은 남자랑은 엮이지 않을 거야.-
아버지란 남자때문에 엄마의 일생이 얼마나 피폐하고 고단한지를 눈으로 지켜보면서 선희가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것은 이 세상 남자가 다 사라진다해도 아버지같은 남자와는 아예 사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부모 잘못 만나 온통 춥고 외롭고 스산한 기억으로만 점철된 자신의 삶, 남자만은 좀 따뜻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만난 사람이 유진이었다.
그런데 그런 유진을 뒤로 하고 어찌하다가 박익준이란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차갑고 오만하고 거만하고 도도한. 여자를 하챦게 여기는. 익준에게 끌렸던 것은 무엇일까. 그의 잘생긴 얼굴이었을까. 이십대라고 해도 믿을 만한 그의 튼튼한 몸이었을까. 비지니스 맨을 겨냥한 양복광고의 모델처럼 뛰어난 그의 옷맵시였을까. 다른 회사에서 앞다투어 스카웃해 갈 정도로 뛰어난 능력이었을까. 쪼잔하지 않은 그의 씀씀이었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된 것이겠지만 그중 선희를 가장 사로잡은 것은 박익준의 능력이었다.
평생을 엄마의 갸녀린 어깨에 매달려 무위도식하는 아버지와 적지 않는 월급을 받는다고는 하나 진급은 꿈도 못꾸고 늘상 같은자리에 머물러 있는 유진과 내일 먹을 한 끼 양식만 있으면 일하러 가지 않고 탱자탱자 놀려고만 드는 선미의 남편과 그 형제같은 남자들만 봐 오던 선희였다. 선희의 주위에는 게으르고 무능하고 어떻게해서든지 여자에게 빌붙어 편하게만 살아보려는 남자들만 포진해 있었다.
그런데 박익준은 달랐다. 그는 특출한 실력과 능력을 가진 남자였다. 그런 박익준은 선희에게 존경과 선망의 존재, 빛나는 존재였었다. 박익준에게 정신없이 빠졌던 것은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선희는 박익준이 사 준 낙타색 코트를 생각해냈다. 그 코트는 가게에서 씌워 준 비닐을 벗겨내지도 않은 채 옷장 깊숙히 걸려 있다. 어쩌면 선희는 이 겨울이 다가도록 그 비닐을 벗겨내지 못할 지도 모른다.
박익준이 말했었다. 근사하다. 써니 너한테 어울리는 옷이 다 있군. 맘에 들면 사라.
선희의 일생에 있어 그렇게 말해 준 사람은 박익준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아무 조건없이 그렇게 비싼 물건을 사 준 사람 역시 박익준이 처음이었다.
선희는 기억하고 있었다. 마지막 날 가까이서 보았던 박익준의 얼굴과 표정, 말투, 그리고 그의 몸에서 풍기던 은은한 소나무향의 애프터 세이브 냄새까지.
가슴에 피빛 멍으로 크게 자리잡아 계속 괴롭힐 거라고 생각했던 박익준의 ‘메이드’야 했던 말은 벌써 사라졌다. 박익준의 괴팍한 행동들도, 무시하고 멸시하던 눈빛이나 말투도 벌써 선희의 머리와 가슴에서는 지워지고 없었다. 선희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은 박익준이 어쩌다 지어주던 미소였다. 생각 없이 내뱉는 듯 하나 작은 정이 담겨져 있던 몇 마디의 말이었다. 그리고 선희가 경제적으로 힘들어 하는 듯 보이면 말 없이 툭툭 던져주던 몇백불, 몇천불의 돈이었다.
그러니까 한때는 선희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시리게 하던 박익준의 그 차갑고 무정한 행동들이 이제는 따뜻함이 되어, 그리움이 되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희는 지금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남자와 헤어져버린 것을.
아아, 내 인생에 그렇게 잘난 남자를 또 만날 수 있을까.
그럴 가망성이 전혀 없다는데 선희는 절망하고 또 절망하고 있었다. 지금 선희가 일 하는 곳에는 싱글인 남자가 세명 있었다. 두명은 결혼을 하지 않은 남자들이고 또 한 명은 아이 없이 이혼한 남자였다. 싱글인 여자는 선희 혼자 뿐이었다. 그러나 그 세 사람 중 그 누구도 선희에게 관심을 표해오지 않았다. 지나가는 말 비슷하게라도 커피 한잔 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벌써 겨울도 다 갔다. 선희는 한달 만 있으면 서른 여섯이 된다. 요즘은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게 느껴진다. 메마르고 퍼석퍼석한 피부는 가뭄의 논바닥같다.
눈가에, 이마에 주름은 더욱 늘어났고 이제는 입가에 서서히 팔자주름까지 지기 시작한다. 목에도 선을 그은 듯 선명하게 굵고 깊은 주름이 서너줄 생겨났다.
박익준에게 돌려 줄 만불을 채우고 나서 선희는 백화점에 갔었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텔레비젼에서 선전하는 백불짜리 영양크림을 샀다. 행여 얼굴에 바른 크림이 베개에 묻을까, 피부에 다 스며들기 전까지는 눕지도 않는 정성을 들였건만 한번 맛이 간 피부는 재생될 줄을 모른다.
피부만 간 게 아니다. 이제 머리숱도 눈에 뜨이게 팍 줄었다. 평소에도 별로 많지 않던 머리숱이었다. 며칠 전 뒤로 머리를 묶다가 선희는 경악했다. 삔이 술술 흘내릴 정도로 머리숱이 준 것이었다.
서글프고 참담했다. 푸르던 시절 한번 없이, 빛나던 시절 한번 없이 가족들의 온갖 치닥거리로만 세월을 보내다가 이렇게 속절없이 시들어가나 싶어 선희는 울고 싶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선희는 창밖으로 눈을 돌린다. 선희의 눈에 마켓 정문 앞에 정물처럼 서 있는 엄마가 들어 왔다.
엄마다. 선희는 시동을 걸어 엄마 옆으로 차를 갖다대었다. 무심히 먼산을 향해 있던 엄마의 시선이 선희를 차를 발견하자 반짝, 반가움과 기쁨으로 빛났다.
“많이 기다렸니?”
“아니…….”
“나 한테서 양념냄새 날 텐데…이런 냄새를 풍기면서 식당에 가도 되나 몰라?”
“뭐 어때서 그래…….”
아닌 게 아니라 엄마가 차안으로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생선 비린내와 마늘,된장 등 온갖 혼합된 음식 냄새가 선희의 코를 자극했다. 그리고 곧 그 냄새는 차안을 가득 채우고 만다. 선희는 하마터면 욱, 하고 토할 뻔 했다. 어릴 때 부턴 익숙하게 맡아오던 엄마의 냄새다. 그러나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런지 오늘은 그 냄새가 코에 매우 거슬렸다. 선희는 얼른 차창 문을 여는 것으로 미안해 하는 엄마의 마음을 배려한다.
“엄마 스시 먹고 싶다 그랬지? 한 달전 새로 생긴 일식당이 있어. 아주 잘 한다던데 그리로 갈께…….”
“그러려무나……”
선희는 차를 출발시켰다.
“오늘 어땠어, 엄마? 여전히 바빴어?”
엄마는 대답하지 않는다. 두손을 가지런히 모아 무릎 사이에 끼우고 캄캄한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엄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매니저 양씨는 잘 계셔?”
선희는 엄마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밝게 해볼 요량으로 양씨의 안부를 짐짓 물어본다. 예전에 엄마는 매니저 양씨 얘기만 나오면 얼굴이 환해지면서 종달새같이 목소리가 높아지곤 했으니까. 얼마 전 부터 일체 엄마의 입에서 매니저 양씨에 대한 말이 나오지 않기에 궁금한 것이 사실이긴 하다.
“응”
엄마는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면서 건성으로 대답한다. 선희도 더 이상 묻지않고 잠자코 운전만 한다.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 두 모녀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각자 깊은 생각에 잠긴 채.
한국신문에 광고를 많이 때려서인지 음식이 괜찮다고 입소문이 나서인지 식당은 사람들로 붐볐다. 십여분을 기다려 선희와 엄마는 창가의 작은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선희는 엄마의 의견도 묻지 않고 모듬 사시미를 시켰다. 그리고 우동도 두 그릇 시켰다. 아무래도 뜨끈한 국물을 마셔야 할 것 같아서. 그러면서 선희는 넓은 식당 안을 휘 둘러 본다. 혹시라도 박익준이 와 있지 않나 싶어서다. 박익준과 헤어지고 난 후 새로 생긴 버릇이다. 어딜 가면 안을 휘둘러 살펴 보는 버릇.
“이 집 돈 엄청 벌겠다. 와, 저기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 손님 봐…엄마, 우리 둘이 동업해서 식당이나 차릴까..요즘 돈 버는 덴 식당 밖에 없는 것 같아…...”
선희는 아까부터 침울한 분위기의 엄마의 기분을 띄우기 위해 일부러 높고 명랑한 목소리로 흰소리를 한다. 그러나 엄마는 그저 잠자코 웃기만 할 뿐. 엄마의 웃음이 쓸쓸하고 애처로워서 선희의 가슴이 미어진다. 불쌍한 엄마….
자신을 쳐다보는 선희의 물기 묻은 축축한 시선을 느꼈는지 엄마는 마침내 결심한 듯 선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선희야, 하고 딸을 불렀다.
“선희야. 앞으로 나,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
“호기롭게 짐을 싸서 나오긴 했다만 앞으로 어떻게 정리를 해 나가야 할 지 판단이 서지 않는구나”
주문한 음식이 날라져 왔으므로 엄마는 말을 끊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거였구나!
베개에 머리만 대면 곯아떨어지던 엄마가 지난 며칠 잠 못 이루고 뒤척거리며 한숨을 쉬던 이유가 바로 그거였구나. 며칠 전에 춘자 아줌마로부터 전해 들은 말, 그 말 때문에 엄마는 지금 혼란스러운 것이다….
“아버지한테서 전화왔었어?”
엄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처음 엄마가 집을 나온 후 일 주일 동안 아버지는 매일 전화를 해서 난리를 쳤었다. 선희의 전화로, 혹은 엄마의 전화로.
“다리몽댕이를 분지르기 전에 얼른 들어 오지 못해! 기집년이 어디서 건방지게 짐을 싸 집을 나가! 집을 나가길!?”
선희는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올 때마다 엄마를 다그쳤다.
“엄마. 절대로 지지 말아. 절대로 숙이지 말아. 이번이 아버지의 그 더러운 버릇을 고쳐놓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야. 알았지?”
평생동안 엄마 속만 끓이던 아버지였다. 이번에 아주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선희는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곧 잠잠해졌다.
낮에 점심시간을 이용해 잠깐 들러 본 집은 그런대로 깨끗했다. 밥을 해먹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지만 예전에 엄마가 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때 선희는 조금 실망을 느꼈다. 엄마가 없어졌지만 별반 달라지지 않은 집안의 모습에. 엄마가 없어졌으니 설거지거리와 빨래더미가 산같이 쌓여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선희였다. 그러나 예상외로 집안이 깨끗해 선희는 고개를 갸우뚱했던 것이다. 나중에 춘자아줌마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지만.
“내가 너한테서 마냥 얹혀지낼 수도 없고…그렇다고 내가 아파트를 얻어서 나갈 수도 없고…그러고야 싶지만 돈이 없쟎니……”
그렇다. 문제는 돈이다. 돈.돈.돈…이 세상에서 돈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래도 집으로 도로 들어가야 할까 봐………”
“……..”
며칠 전에 춘자아줌마로 부터 들은 말, 바로 아버지 강호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내연녀로 짐작되는 어떤 여자와 한국식당에서 아주 다정한 모습으로 밥을 먹더라고 했다. 남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둘이 딱 붙어 앉아 있는 모습이 아주 눈꼴시더라고 했다. 아버지가 여자의 입가에 붙은 밥풀을 떼주더라고 했다. 그리고 생선가시를 발라 내연녀의 숟가락에 태연하게 올려놓아 주더라고 했다. 여자에게 생선가시를 발라주다니!
엄마에게는, 하다못해 자식들에게도 한번 하지 않던 일이었다. 그런 일을 아버지가 내연녀에게 하고 있을 줄이야!
그 얘기를 듣고 엄마가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거라는 것을 선희는 알았다. 처음 집을 나올 때의 엄마의 그 호기는, 이제부터 홀로 서기를 해보겠다는 다짐은 시간이 가면서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바람이 서서히 빠지면서 쭈그러들기 시작하는 풍선처럼.
엄마가 없어지므로 아버지가 생활에 큰 불편을 느껴야 할 텐데, 그래서 엄마의 존재가 얼마나 큰 지 느껴야만 할 텐데 오히려 반대가 되어버렸다. 아버지는 바람녀한테 가서 오히려 대접 더 잘 받고 호위호식하며 지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엄마가 굳이 집을 나와있어야 할 까닭이 없다. 그래서 엄마는 집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것이다.그러나 다시 집으로 들어 갈 명분이 없는 거다. 지금이라도 아버지가 전화 걸어 와 당장 들어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면 못이기는 척하고 들어갈 텐데 .
“엄마, 뭘 망설여….”
“…………”
“엄마 집이쟎아. 명의는 아버지와 같이 되어있지만 실질적으로 페이먼트를 하고 있는 사람은 엄마쟎아…….”
“그, 그건 그렇지만……..”
“내 집에 내가 들어가는데 누가 뭐래. 엄마가 정 들어가고 싶으면 내일이라도, 아니 당장 지금이라도 들어 가. 데려다 줄께….. ”
“………..”
“그러나 엄마. 나는 엄마가 좀 더 당당해졌으면 좋겠어…….”
“………..”
“이왕 마음 먹고 가출한 거니까 아버지가 싹싹 빌 때까지는 그냥 버텨줬으면 좋겠어……”
“………..”
“그 바람녀하고 오래 가지 않을 거야……금방 깨질 거야……”
“………….”
“아버지가 다시 엄마를 찾는 건 시간 문제라구……”
“선, 선희야……”
잠자코 선희의 말을 듣기만 하던 엄마가 입을 열어 더듬더듬 말했다.
“나는…나…나는….무섭다…….”
“엄마……”
“너희 아버지가 저러다가……저러다가 나를 잊어버릴까 봐…….”
“………….”
“새로 만난 여자와 푹 빠져서 나를 영영 잊어버리게 될까 봐….그렇게 될까봐 무섭다………”
“엄,엄마………”
“괜히 집을 나온 건 아닌가 싶어…….”
“엄마…….”
“후회스러워…아버지한테 한두번 당한 것도 아닌데 평생을 당해 온 패악인데 그냥 참고 구구로 있을 걸 괜히 보따리 싸가지고 나온 건 아닌지 후회스러워…….”
음식이 나온지 벌써 한참 되었지만 두 모녀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에 흐르는 후회를, 강물처럼 흐르는 후회를 보았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앉아만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