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정해진 근무시간은 하루 여덟 시간이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 혹은 필요에 따라서 열 시간이 될 수도 있었고 열두 시간으로 늘어날 수도 있었다. 마켓의 부엌에는 그 여자를 비롯한 네 명의 직원이 있었다. 주 7일을 오픈해야 하는 마켓이었고 언제 어느 때 음식주문이 들어올지 모르는 부엌의 특성상 네명의 직원이 꽉 물린 톱니 바퀴처럼 빡빡하게 짜여진 일정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 직원 중 누가 병이 났다거나, 급한 일로 출근 하지 못하거나 예상치도 않은 많은 양의 김치나 음식 주문이 들어온 상황, 그런 돌발적인 상황에는 누구라도 근무시간 외의 일을 더해야 했다.

오늘도 그런 상황이었다. 2주 전에 주문받은 돌 잔치 음식으로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판에 갑자기 50명분의 집들이 음식 주문이 들어온 것이었다. 때문에 여자는 아침부터 커피 한잔 여유있게 마실 시간이 없었다.

“ 하루아침에 갑자기 생각나서 한 이사도 아닐 테고 집들이를 할 거면 미리미리 주문을 하든지 해야지 어떻게 저녁에 할 집들이 음식을 아침에 급하게 주문한대?”

여자가 급한 손놀림으로 잡채를 무치면서 혼잣말처럼 한 마디 했다. 그렇쟎아도 정신없이 바빠죽겠는 판에 샌디 아줌마까지 빠져버렸다. 아침 먹은 게 잘못되었는지 복통이 생겼다고 얼굴을 찌프려대더니 집으로 가버린 것이다. 정말이지 하루 온종일 말 한마디 주고받을 여유없이 콩 튀듯 팥 튀듯 동동거렸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 것도 억지로 참아가며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겨우 음식을 다 마련해 놓고나니 벌써 저녁 여섯시가 넘어있었다.

시계를 보면서 그때서야 그 여자, 은봉은 자기가 점심도 먹지 않은 채 하루종일 바삐 움직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또한 한 시간 초과근무를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침 여덟시 부터 시작했으니 다섯시면 퇴근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벌써 여섯시를 넘었다.

음식이 다 마련되는 것과 동시에 춘자를 비롯한 다른 한명의 동료는 꽁지가 빠지게 나가버렸다.

“음식 픽업하러 오는 손님은 매니저 양씨가 알아서 하겠지. 우리가 맡은 책임은 다했으니까 얼른 퇴근하자구”

춘자가 나가면서 한 말이었다. 은봉 역시 그러고 싶었다. 그렇지만 일단은 손님들이 음식을 가져가는 걸 보고 퇴근하더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겠다고 은봉은 생각했다. 얼른 한시라도 빨리 이 눅눅하고 냄새나는 부엌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하지만 돌잔치 음식, 집들이 음식이 각각 다른데 어떤 걸로 내주어야 할지 난감해 할 매니저 양씨를 생각하면 퇴근시간 되었다고 나 몰라라 팽개치고 나가버릴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은봉은 일단 고무장갑을 벗어 간이 건조대에 빨래집게로 찝어서 걸었다. 그리고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받았다. 인스턴트 커피라도 한 잔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정말 바쁘고도 긴 하루였다. 이제 더 이상 동동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은봉을 느긋하게 했다.

은봉은 커피를 타서 근무 중 잠깐잠깐 쉴 수 있도록 마련된 의자에 걸터 앉았다. 온갖 양념과 물이 튄 앞치마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질척질척한 바닥을 하루종일 딛고 서 있었던 양발은 차디차게 얼어 있었다. 하루종일 고무장갑에 갖혀있던 손은 감각조차 없이 얼얼해서 하마터면 컵을 떨어트릴 뻔했다.

은봉은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열몇 시간을 잠시도 쉬지 않고 분주하게 움직였던 몸은 의자에 앉자마자 암초에 부딪친 배처럼 마냥 가라앉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갈 일이 까마득하다. 그리고 한 시간 가까이나 버스에서 흔들릴 일을 생각하니 선희 생각이 간절하다. 차로 바로가면 15분이면 도착 할 것을. 이럴 때 선희가 차로 데리러 오면 얼마나 좋을까. 선희의 퇴근시간은 정확하게 오후 다섯시였다. 다섯시도 되었다가 여섯시도 되었다가 여덟시도 되는 등 왔다갔다하는 출근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퇴근시간이기 때문에 선희의 차를 얻어타기가 어렵다. 그래서 그냥 버스를 타고 다닌다. 선희의 집에서 생활한 지 한달이 넘었지만 선희의 차를 얻어탄 건 손꼽을 정도다.

그나저나 선희의 아파트로 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하다. 자신에게 침실을 내어주고 거실 소파에서 웅크리고 자는 선희에게 미안하고 눈치보여서.

이날 이때까지 군소리 한 번 안하고 항상 엄마 편을 들어주는 착한 딸, 선희였다. 짐을 들고 선희의 집을 찾아갔을 때도 앞뒤 따져보지도 않고 무조건 대환영을 하던 선희였다. 그래서 선희네서 마냥 있어도 괜찮을 줄 알았다. 마음이 편할 줄 알았다. 그러나 날이 가면 갈수록 좌불안석이 되었다. 자꾸 선희의 기색과 기분을 살피게 되고 무심코 툭 던지는 말도 쟤가 지금 나랑 같이 지내는 게 지겹고 싫어서 그런 건 아닌가, 하는 노여운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계속 선희네서 지내다가는 딸과의 사이까지 멀어질 수도 있겠다 싶은 불안감이 은봉의 가슴에서 스멀스멀 피어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숙이고 집으로 들어 가야지.……

은봉이 요며칠 심각하게 고민한 후 내린 결론은 집으로 다시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홧김에 집을 나와버린 것은 잘못한 것이었다고 은봉은 생각했다. 자신의 크나큰 판단착오였다고 은봉은 후회했다. 남편, 강호성은 지금 자신이 집을 나간 걸 기쁘고 시원하게 생각하고 있다.

첨에 짐을 싸 선희의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은봉은 두번 다시는 강호성을 안 볼 생각이었다. 딴 건 몰라도 직장까지 찾아가 매니저 양씨에게 패악을 부린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해도 은봉은 혼자 살아갈 자신이 있었다. 선희의 도움을 좀만 받으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자립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적으로, 경제적으로도. 자립이라! 얼마나 매력적인 말인가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정 안되면 매니저 양씨라도 찾아가지 뭐, 하는 생각이 일말 있었다. 매니저 양씨가 자신을 내치지는 않을 거라는 실오라기 같은 희망. 어쨌든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같은 것.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얼마나 허황되고 부질 없는 생각인가. 매니저 양씨의 도움을 받다니.

이번 일이 남편, 강호성이 자신과 양씨와의 사이를 의심해서 일어난 일 아닌가. 양씨와 불륜이라도 저지른 게 아닌가, 억측을 부려서 벌어진 일에 양씨의 도움을 받을 생각을 하다니. 그렇게 되면 강호성의 억지에 시인하는 꼴이 아닌가 말이다.

어쨌든 당분간은 강호성을 다시 볼 생각이 전혀 없었던 은봉이었다. 강호성이 먼저 굽히고 들어오라고 애걸복걸할 때까지는 절대 집에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니 애걸복걸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시는 다른 여자만나지 않고 가정에 충실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낼 때까지, 끝까지 버팅겨 볼 심산이었다. 그 기간이 일년을 넘어 이년, 오년, 십년이 걸리더라도.

그런데 은봉이 예상했던 것과는 일이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다. 은봉이 집을 나온 후 두어번의 전화 외에는 강호성으로부터는 일절 연락이 없다. 오히려 바람녀와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만 들려 온다.

설상가상으로 선희의 집에서 지내는 게 갈수록 바늘 방석처럼 느껴지고 있는 형편이다. 딸 밥은 서서 먹고 아들 밥은 앉아서 먹고 남편 밥은 누워서 먹는다는 말을 은봉은 요즘 절감하고 있었다. 선희가 극진하게 자신을 위하지만 뭔지 모르게 편하지가 않았다.

아파트를 얻어나갈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첫째는 돈이 문제였고 그렇게 되면 남편 강호성과 이어지는 가느다란 실마저 끊어지게 만드는 일 같아서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어쨌든 엄연히 법적인 남편이 살아있는데 혼자 방을 얻어 따로 나간다는 게 영 내키지가 않았던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남편 그늘이 최고라는 것을 은봉은 갈수록 새록새록 느끼고 있는 것이다. 비록 돈 한푼 벌어오지 않는 난봉꾼, 놈팽이,양아치, 건달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얼마나 잘난 신랑인가. 그 좁아터진 시골에서, 끼니를 밥 먹듯 거르는 그 어려운 시절에 고등학교까지 나온 사람이 아닌가. 국회의원 보좌관을 지냈을 만큼 똑똑하고 대단한 사람 아닌가. 지금도 양복을 차려입으면 영화배우처럼 훤칠한 인물이 아닌가.

강호성이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는 것도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잘났으니까 그런 것이라고 은봉은 생각했다. 잘생기고 잘났으니까 뭇여자들의 관심과 구애를 계속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훌륭하고 멋진 남자가 나 같이 무식하고 보잘 것 없는 여자를 데리고 살아주는 것만도 감사하고 황송한 일이지......

집을 나올 때의 패기와 용기는 어느새 다 쭈그러들고 만 은봉이었다.

돌아오는 토요일, 집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면서 은봉은 종이컵에 깔린 마지막 커피를 마셨다.

가서 무조건 머리를 숙이리라. 여차하면 서너마디의 구정물같은 욕을 얻어먹겠지. 어쩌면 주먹다짐을 또 받게 될지도 몰라. 주먹이 날라오면 날라오는대로, 발길질을 당하면 당하는대로 그저 가만 엎드려 있으리라. 설마 죽이기야 하겠나. 어쨌든 지 새끼를 셋이나 낳아준 내가 아닌가. 뭐라고 하든지 꾹 참아야지, 무릎이라도 꿇으라면 꿇어야지 별수 있나. 그러면 다시 예전의 평범한 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무슨 서러움, 무슨 서러움해도 서방 없는 서러움이 가장 크다는 샌디 아줌마의 말을 다시금 되새겨 보는 은봉이었다. 삼십대, 사십대에 두번 결혼했으나 두번 다 남편이 병사하므로 그 후부터는 오늘 날까지 아이도 없이 혼자 사는 샌디아줌마였다. 외로움이 뼈에 사무친다고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결혼을 한번 더 할 걸. 평생 돈을 못벌어도 좋고 섹스를 못하는 고자라도 좋고 다리 한쪽을 저는 장애인이라도 좋으니 외롭고 허전할 때 품고 잘 수 있는 남편을 만들어 놓을 걸, 하는 후회로 밤마다 가슴을 친다는 샌디 아줌마였다.

“야야, 너희들은 모른다. 새벽에 잠 깨서 내 옆 자리에 아무도 없다는 걸 느낄 때의 그 허망함과 외로움은 서방있는 너희들은 절대 모른다. 모르고 말고……..”

일단 선희에게 제 아버지, 강호성을 한번 만나보라고 할 참이었다. 무조건 짐을 들고 들어가 강호성을 놀라게 하고 화를 돋구느니 일단은 운을 떼어놓고 들어가는 게 좋을 듯 싶었다.

“강여사?”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은봉은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출입문을 등지고 매니저 양씨가 서 있다. 예의 그 온화하고 인자한 웃음을 얼굴 가득 띄우고.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해요? 두번이나 불렀는데 못듣네요”

“……….”

“왜 아직 안 가시고 계세요? 음식은 완벽하게 다 준비가 끝난 것 같은데?”

“예에…그냥……..”

“오늘 정말 수고가 많으셨어요. 정말 강여사가 애써주시지 않았으면 큰일 날뻔 했지 뭡니까. 갑자기 그렇게 많은 음식주문이 들어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

“갑시다. 퇴근합시다……”

“음식을 찾으러 올 텐데…..”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집들이 음식이 어느 것이고 돌잔치 음식이 어느 쪽인지만 제게 말씀해 주세요. 총매니저에게 잘 말해 둘 거니까요. 퇴근 시간에서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습니다…얼른 퇴근 하세요…..”

매니저 양씨가 몸을 돌려 나가면서 다시 한번 손짓을 했다. 강여사. 피곤하실 텐데 지체말고 얼른 퇴근하세요.

“예에..그..그러지요….”

“경리과 미스 김에게 한 시간 초과근무 수당 잊지 말라고 말해 놓을께요…..”

“예에…고..고맙습니다…..”

은봉은 서둘러 앞치마를 벗었다. 그래, 이제 퇴근해야지…얼른 집에 가서 선희에게 말해야지. 얘야. 내일이나 모레쯤 시간을 내서 아버지를 만나 보렴. 만나서 엄마가 곧, 그러니까 빠르면 이번 토요일 경에라도 집으로 들어갈 거라고 말해 놓으렴…...

은봉이 사물함에 있는 가방을 꺼내고 외투를 걸치고 있는데 매니저 양씨가 다시 문을 밀고 들어왔다.

“강 여사….”

“예에…”

“딸이 데리러 와요, 오늘?”

“아,아니예요….”

“그럼 버스타고 갈 거예요?”

“예에…..”

“그럼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려요. 내 금방 따라 갈테니……..”

“……...”

손을 씻고 가방에서 튜브로 된 로션을 꺼내 손에 바르고 부엌 한쪽 벽에 걸린 거울을 보고 립스틱을 바르고 머리를 다시 올려 묶으면서 은봉은 드디어 기회가 왔다는 생각을 했다. 매니저 양씨에게 사과를 할 수 있는 기회. 지난 번 호성이 찾아 와 행패를 부렸다는 얘기를 춘자로부터 전해 듣고도 지금까지 거기에 대한 사과조차 변변히 못하고 있었던 터였다. 마음은 간절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 출근하자마지 정신없이 돌아가는 부엌 일에 휩쓸리다보면 매니저 양씨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들 있는데서 사과를 할 수도 없는 문제고 단 5분만이라도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기회만 엿보다가 시나브로 시간이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마켓 밖을 나오니 해는 벌써 지고 어둑어둑한 어둠이 몰려들고 있었다. 찬바람이 은봉의 얼굴을 사정없이 할켰기에 은봉은 몸을 움츠렸다. 올 겨울은 비가 오지 않고 날씨가 봄처럼 계속 따뜻했었다. 이렇게 그냥 봄이 오려나 했더니 꽃샘추위인지 다시 쌀쌀하고 을씨년스러운 날씨의 연속인 것이다.

은봉은 목에 두른 스카프를 고쳐 매고 버스정류장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인도에는 인적의 그림자가 전혀 없었다. 헤드라이트를 켠 차들만 쌩쌩거리고 달려가고 있었다.

지난 한달여동안 캄캄하고 암울한 심정으로 이 길을 걸었었다. 거의 40년을 같이 산 아내가 짐을 싸 집을 나갔는데도 전혀 아랑곳없이 내연녀와 신바람나게 지내는 남편에 대한 노여움과 분노, 섭섭함 때문에 울면서 이 길을 걸었었다. 남이 볼새라 고개 숙여 땅만 보면서 흘린 눈물이 한바가지였었다.

그리고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막막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 때문에도 은봉은 많이 울었었다.

철이 든 날부터 이날 이때까지 남 속이지 않고 착하고 착하게, 그저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온 자신이건만 어찌 이 추운 겨울에 지친 몸을 누일 방 한칸이 없을까 싶은 기막힌 마음에 은봉은 또 울었었다. 자신의 신세가 떠도는 부초같다는 생각에 마냥 울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마음이 한없이 가뿐하다. 강호성이 뭐라든 일단 집으로 들어가겠다고 결심을 굳힌 탓일 것이다.

여느 때처럼 버스정류장엔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반 투명 유리로 만든 부스엔 누가 버리고 갔는지 빈 음료수 캔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은봉은 치마를 모두어 쥐고 나무 의자에 걸터 앉았다.

왜 매니저 양씨가 금방 따라오겠다고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 늦은 밤은 아니었으나 인적이 거의 없는 지역이다. 가끔 버스를 타고 다니는 여인들을 상대로 금품을 강탈해가는 등 강력 범죄가 심심찮게 벌어지는 좋지 않은 지역인 만큼 매니저로서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을 이 험한 지역으로 혼자 걸어 가게 한 게 매니저 양씨는 불안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이 올 수도 없고 얼른 뒤쫒아 갈 테니 먼저 가 있으라고 했을 것이다. 그의 따뜻한 배려에 마음이 훈훈해져서 은봉은 빙긋, 하고 웃었다.

2,3분도 안되어 매니저 양씨가 은봉이 앉아 있는 부스에 도착했다. 그는 혼자 오드카니 앉아 있는 은봉을 보고 미소지었다.

“춥지요?”

“예에…조금....”

매니저 양씨가 손목 시계를 내려다 보면서 말했다.

“이번 버스 6,7분이면 오겠네요. 이번 버스 말고 다음 버스가 언제지요?”

“아마…”

은봉도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하면서 대답했다.

“아마 한 시간 후일 거예요……”

“그럼 우리 저기 저쪽 패스트 푸드점에 가서 뜨거운 감자 튀김이라도 먹을까요? 커피를 한잔 하든지……추우니까요……”

“…………”

“갑시다. 강여사....”

매니저 양씨가 손을 뻗어 은봉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놓았다. 그리고 성큼성큼 앞장서 부스 밖으로 걸어나갔다. 은봉은 잠깐 망설이다가 매니저 양씨의 뒤를 따라갔다. 양념이 튀고 배여 냄새나는 옷에 신경이 쓰이는 은봉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앞치마를 두 겹으로 입을 걸……

밝은 불이 어항속 처럼 켜져있는 패스트 푸드점은 한산했다. 틴 에이저로 보이는 두 흑인 여자가 연신 낄낄거리며 햄버거를 먹고 있을 뿐 가게 안은 거의 비어 있다시피 했다.

“뭘 드실래요? 커피 마실까요?”

매니저 양씨의 말에 은봉은 고개를 끄덕했다. 배가 무지 고팠지만 뭘 먹을 기분이 아닌 은봉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렇게 아무도 없는 호젓한 곳에서 매니저 양씨와 단둘이 앉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에 설레고 기분이 좋았을 은봉이었다. 그러나 오늘 은봉은 마음이 급했다. 집에 들어갈 결심을 완전히 굳혔다는 사실을 선희에게 털어놓고 강호성을 만나보라는 얘기를 할 생각에.

은봉은 구석진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잎사귀가 크고 넓은 식물 화분으로 인해 앉은 사람이 거의 잘 보이지 않을 구석진 곳으로.

매니저 양씨가 플라스틱 쟁반에 커피 두 잔을 받쳐들고 왔다. 매니저 양씨는 프림과 설탕을 넣어 저은 후 은봉에게 컵을 건네주었다.

내세에서라도 부부나 오누이의 인연으로 다시 만났으면 싶었던 매니저 양씨가 바로 눈 앞에 있다. 그러나 은봉은 덤덤했다. 몇달 전의 그 아련하고 애틋한 감정이 언제인 듯 싶게.

매니저 양씨가 은봉을 바라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사는 게 힘들지요?”

“……….”

“저도 힘듭니다”

“………..”

“어쩌면 그렇게 항상 조용하세요, 강여사는?”

“……….”

“원래 말수가 없습니까?”

“마..말 재주가……”

은봉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제..제가 말..말재주가 없어서요…..”

“강여사를 보면 깊은 바다를 보는 것 같아요. 수심이 아주 깊은 바다. 너무 깊어서 웬만해서는 속이 들여다 보이지 않는 바다…….”

양씨가 그윽한 눈으로 은봉을 바라보았다. 양씨의 말에, 그리고 눈길에 덤덤하던 은봉의 마음이 잠깐 흔들렸다. 잔잔하던 호수면에 돌이 던져진 듯 잠깐 물결이 일었다. 여지껏 자신을 향해 그렇게 말해 준 사람이 있었던가.

“강여사 따님말입니다. 공인회계사라고 했지요?”

“예에…….”

“경리과 미스 김이 강여사 따님을 잘 알더군요. 알고 보았더니 우리 마켓 붘키핑을 따님네 회사에 맡기고 있더구만…..”

“그, 그래요?……”

“그래서 언제까지 딸네에 있을 거요…….”

매니저 양씨가 은봉의 얼굴을 주시하면서 물었다.

은봉이 집을 나와 선희네서 기거하고 있다는 것을 온 마켓 내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춘자에 의해 그렇게 알려지게 되었다. 춘자가 별로 말이 많은 편이 아닌데 이번에는 입을 가만두지 못했던 것이다. 은봉이가 집을 나왔대…남편이 또 바람을 피웠대..... 은봉이가 이번엔 참을 수가 없었대. 그래서 집을 나와 딸네 집에서 살고 있대……

“딸과 같이 사는 것, 불편하지 않아요? "

이 남자가 오늘 왜 이럴까. 매니저 양씨야말로 과묵한 사람이다. 말수가 매우 적은 사람이다. 그런데 오늘 참 말이 많다.

은봉은 의아한 눈으로 매니저 양씨를 바라보았다. 은봉의 눈길을 매니저 양씨가 느낀 것 같았다. 잠깐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약간 주저 하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강여사 남편을 만났어요”

“ ! ”

“일 주일 전쯤 나를 찾아왔더군요……”

은봉의 눈이 놀라움과 경악으로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만날 이유가 없다고 했더니 꼭 할 얘기가 있다고 했어요…..”

“저…저의 남..남편이 왜요?! 왜, 왜 양 매니저님을 만나자고 하던가요!”

은봉이 몸서리를 치면서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아아, 그 인간이 매니저 양씨를 왜?어떤 흉계를 꾸며 무슨 사기를 치려고?

“……….”

“뭐라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던가요…..”

가슴이 후들후들 떨리고 입술이 바들바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인간, 그 비열하고 야비하고 사악한 인간이 왜 매니저 양씨를 만나자고 했을까.

은봉은 알았다. 강호성이 절대로 좋은 일로 매니저 양씨를 만나자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양 매니저님!”

은봉은 바들바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입술을 깨물어 힘을 주면서 소리쳤다.

“말씀해 보세요…, 양 매니저님! 왜 그 인간이 매니저님을 만나자고 했는지 얼른 , 얼른 말씀해 보세요!”

“혹시 따님이 나 만났단 얘기 안하던가요?”

“예에?”

“강 여사 딸도 어제 만났더랬어요……”

“뭐, 뭐라고요? “

선희를 왜!? 은봉의 얼굴이 점점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강여사의 심경이 궁금했어요. 그래서 따님을 만났어요. 따님이 아무 말 안하던가요?”

“아,아니요…아무 말도, 아무 말도 안했어요.그 아이로부터 아무말도 듣지 못했어요!”

"사실은....."

매니저 강씨가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사실은 당신 남편이 돈을 달라고 했어요….”

“예에?”

파랗게 질렸던 은봉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경악과 당혹과 배신감으로 하얗게,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뭐, 뭐….뭐라구요?”

그럼 그렇지! 이번에도 또 돈, 돈이로구나!

은봉이 미친 듯 소리쳤다. 그 나쁜 인간이 돈을 달라고 했다구요?!

“그..그런데 ….그 인간이 왜 양 매니저 님한테서 돈을 달라고 해요?”

“강여사랑 이혼해 주겠다구요…”

“뭐, 뭐라구요?”

“돈 2만불을 주면 깨끗히 이혼하겠다고……”

“얼..얼마나?”

“2만불….”

“ ! ”

“2만불을 현찰로 달라고 했어요. 돈을 받는 것과 동시에 이혼서류에 사인을 해 주겠다고……”

“……….”

“내가 강여사의 딸을 만난 것은 강여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였어요….”

“………..”

“집으로 다시 들어갈 의향이 있는지, 아니면 계속 딸네서 기거를 할 건지….”

“따님이 그러더군요. 아마 수일내에 집으로 들어갈 것 같다고…”

“………..”

“이 얘기를 해야할 지 말아야 할지 많이 망설이고 고민했어요.. 그러나 강여사의 부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최소한 그 사실만은 알려줘야 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선..선희한테,제 따..딸..딸한테 그 2만불 얘기를 했나요”

매니저 양씨가 측은함이 가득 담긴 눈길로 은봉을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안 했어요……”

“고..고마와요..... 고마와요 양 매니저님……..”

그래서, 그래서 2만불을 주겠다고 했냐고 은봉은 묻지 못했다. 너무나 참담했다. 그리고 비참했다. 돈 2만불에 걸레쪽처럼 떠넘길 만큼 자신이 형편없는 존재였다는 걸, 하챦고 별볼일 없는 존재였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한 기분은 정말이지 참담하고 비참했다. 화도, 노여움도, 분노도 일지 않았다. 은봉을 휩싸고 있는 것은 자괴감이었다. 평생을 묵묵히 헌신하고 살았지만 그 남자 강호성에게 단돈 2만불의 가치밖에 없는 여자였다는 자괴감이 그녀를 절벽으로 떨어지는 듯 아득하게 했다.

은봉은 고개를 숙이고 울었다. 울지 않고는 칼로 난도질 당한 듯 아프고 쓰라린 가슴을 감당할 방법이 없어서. 두볼이 젖도록 은봉은 울고 또 울었다. 매니저 양씨가 말 없이 내프킨을 갖다가 은봉의 손에 쥐어 주었다.

“양 매니저님”

은봉이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면서 양씨를 불렀다.

“예에, 강여사….”

“그 돈 2만불 주세요.”

“………”

“빚을 내서라도 좋으니, 크레딧 카드를 긁어서라도 좋으니 그 돈 2만불 던져주세요. 개 한테 썩은 뼉다귀를 주듯이 던져 줘버리세요….."

“그..그럴까요?”

매니저 양씨의 대답에 은봉이 고개를 잠시 숙였다. 그리고 퍼뜩 고개를 들더니 얼굴 표정을 표독하게 바꾸면서 소리쳤다.

“아. 아니예요! 아니예요! 매니저님!”

“그 돈을 왜 주어요? 왜, 왜 그 돈을 주어야 해요? 2만불이요? 단돈2천불도 아니, 2백불도, 2전도 주어서는 안돼요!절대 안돼요!”

“강여사…”

“이혼이요?내가 누구 좋으라고 이혼을 해 줘요? 나 이혼 안해요. 오늘 저녁 당장 집으로 들어갈 거예요. 그 인간한테 끝까지 거머리처럼, 거머리처럼 찰싹 붙어 살거예요. 저 이혼 못해요! 정말이지 저 억울해서, 억울하고 분해서 이혼 못해요! 절대 못해요!”

악을 쓰며 울부짖다가 으흐흐흐, 하고 마침내 짐승처럼 은봉은 포효하기 시작했다.

양씨는 보았다. 은봉의 눈에서 철철 흐르는 눈물과 함께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용광로처럼 솟구쳐 오르는 세차고 뜨거운 분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