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집년이라고 어디가서 꼭 뭣 같은 년을 골라 가지고 와서...."

정옥의 큰절을 받는 둥 마는 둥 담배에 불을 붙히며 혼잣말처럼 중얼대는 영준 어머니의 손은 남자 것 같이 크고 거칠어 보였다.

그렇쟎아도 긴장되고 떨리던 정옥의 가슴이 영준 어머니의 한 마디로 인해 더욱 졸아 붙었다. 정옥은 눈길을 어디다 두어야 할 지 몰라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숨 조차 크게 쉬기 어려웠다.

"어머니도 참. 애를 앞에 놓고..."

영준이 정옥과 자신의 어머니를 번갈아보며 민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의 어머니를 보는 눈엔 안타까움이, 그리고 정옥을 보는 눈에 연민이 담겨져 있었다.

"누가 너더러 벌써 계집년 구해 오랬냐? 예서 직장이나 다니며 자빠져 있지, 대학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대학. 그리고 대학인지 지랄인지를 다니겠다고 나갔으면 얌전히 공부나 마칠 일이지 웬놈의 계집년은 벌써 꿰어 찼어, 꿰어 차길..."

"어머니!"

"난 이 아이가 싫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단 한 군데도 없어!"

정옥은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방문만 열면 곧 술청이 되는 구조였다.

드럼통을 잘라만든 테이블 위에 김치종지 하나만 달랑 놓고 술을 마시던 노동자 차림의 남자 서넛이 정옥을 쳐다 보았다.

'웬 색시를 데려나 놓았나' 하는 시선들이었다.

정옥은 남자들의 호기심에 찬 눈을 뒤로하고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 글쎄 계집년이 벌써 팔자가 세게 생겨 먹었지 않냐? 눈은 짝 찢어진데다 살결은 왜 그리 검노? 딱 보니 남자 두엇을 잡을 관상이고만..."

영준 어머니의 쇳소리 섞인 목소리가 채 닫지 못한 문 틈으로 새어 나와 정옥의 귓가에 날아 와 앉았다.

정옥은 왁자지껄한 시장통을 지나 바다가 있을 법한 곳으로 무작정 걸었다.

영준 어머니의 반응을 미리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정옥의 가슴은 돌덩이를 단 듯 무거웠다.

어느 어머니가 나같은 여자를 좋아할까? 내 자식이 비록 못났다한들 며느리 만큼은 잘 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거늘 대학까지 다니는 자식이 데려와 소개시킨다는 여자가 못배우고 인물마저 어른들이 좋아하지 않은 형에다 공순이니......

정옥은 애써 영준 어머니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처음부터 오지 말아야 할 데를 온 것같은 기분이었다.

 

영준과의 만남이 지속되자 공장 안팎에는 자연히 소문이 났다. 평소에 말 한 마디를 내놓고 하지 않던 애가 어떻게 영준이를 꼬셨냐고 놀라움과 선망의 표시를 모두 나타냈고 그 중에는 입을 비쭉거리며 질투와 적의를 아예 드러내는 여자도 있었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 간다더니 딱 이정옥을 두고 한 말이네..."

"그러게. 유달리 얌전하고 말이 없다 했더니 그게 모두 내숭이었나벼."

명주는 정옥과 영준이 연애를 한다는 소문을 처음 듣던 날 펑펑 소리내어 울며 짐을 쌌다.

"나쁜 기집애. 자긴 아예 남자 같은 건 관심이 없다고? 웃기고 있었네. 뒷구멍으로 호박씨는 혼자 다 깠으면서.그런 것도 모르고 나는 최영준 그 자식에게 접근하려고 별별 수를 다 썼었단 말이야. 너 하고 나 하고 한 방을 쓴 게 벌써 몇 년 째니? 그 사람과 그런 관계이면 내게 한 마디 쯤은 이야기를 해 주어도 되지 않아? 이제와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야 듣게 만들다니, 넌 나를 완전 병신 만들었어!"

"미안해, 명주야. 진짜 미안해."

명주는 만류하는 정옥을 밀친 채 짐을 싸가지고 나가 버렸다.

고향집에 잠깐 다니러 갔던 금희는 어른들의 소개로 선을 보고는 그 길로 바로 시집을 가버렸고 금희가 내던 방세까지 그동안 명주와 정옥이 추렴을 해서 냈었다. 명주가 떠나 버리고 나자 방세는 고스란히 정옥의 몫이 되었다.

영준을 만나게 되면서 화장품과 옷에 신경을 쓰느라 소소하게 지출되는 돈도 많은데다 방세까지 혼자 감당하기엔 정옥의 공장 월급이 턱없이 부족했다.

첨엔 혼자 독방을 쓸 수 있어서, 그리고 마음대로 영준을 놀러 오라고 할 수 있어서 좋았던 정옥은 그동안 조금 저축해 놓았던 돈이 바닥을 보이자 조심스럽게 영준에게 제의했다.

"제 자취방으로 아예 이사를 하면 어떨까요?"

영준과의 관계는 이미 공장 안팎으로 소문이 날대로 났으니 방세를 따로따로 내는 것 보다 그냥 합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정옥이 낸 제안이었다.

그즈음 공장 부근에는 방세를 아끼기 위해 동거를 하는 남녀가 꽤 있었다.

"그래,그거 좋은 생각이야. 그런데 어머니가 밑반찬을 갖다놓기 위해 가끔 내 자취집에 들리시는데 갑자기 오시지 말라고 하면 야단이 날거야.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우리 동거사실을 알리고 허락을 맡는 게 어떨까? 아버지가 나 어릴 때 돌아가시고 지금까지 혼자 술장사를 하며 살아온 분이라 성질이 대단하시지. 그렇지만 언젠가는 만나 뵈어야 할거니까 아예 이번 기회에 만나 보는 게 어때?"

'언젠가는 만나야 할거니까' 라는 영준의 말이 결혼까지 염두에 둔 말 같아 정옥은 영준이 너무나 고마웠다. 한결같이 정옥에게 변함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영준, 그의 듬직함이 눈물이 나도록 고마운 것이다.

결혼하자고 꼬드겨서 몸을 한 번 유린하고 나면 태도가 돌변하는 남자 때문에 자살소동까지 벌이는 여자들이 심심찮은 판에 오로지 정옥만을 사랑하는 변함없는 남자, 영준.

정옥이 생각컨데 사실 그것은 영준에게는 쉬운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영준의 눈길과 관심을 끌지못해 안달하는 여자애들이 공장 안팎에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정옥은 어렵사리 낸 제의를 영준이 선뜻 받아준 게 너무나 고마웠지만 영준의 어머니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운 고민거리로 다가왔다.

아마 나를 마음에 안들어 하실거야...

그렇지만 아침저녁으로 영준의 팔베개를 벨 수 있다는 욕심이 그 두려움을 눌렀다.

그래서 어느 일요일, 신경써서 옷을 차려입고 선물까지 사 들고 인천의 영준 어머니 집을 찾은 것이었다.

정옥은 지저분한 횟집이 올망졸망 늘어 서 있는 바닷가를 천천히 걸었다.

오랫만에 신은 하이힐 때문에 발이 아파왔지만 정옥에게 지금 그런 것 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영준과의 관계가 그 어머니로 인해 끝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정옥의 가슴을 엄습해왔다.

남자 두엇을 잡아 먹을 관상 운운하던 영준 어머니의 사나운 목소리가 생각나서 정옥은 가게 유리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유난히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작은 여자 하나가 겁먹은 얼굴을 하고 거기에 서 있었다.

정옥은 유리문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걸으며 영준과 함께 살겠다는 기대는 일찌감치 단념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잔업을 더 해 방값을 혼자 다 부담하더라도 그냥 이대로 지내는 게 영준 어머니의 화를 막는 길이라고 정옥은 생각했다.

즐비하게 늘어선 횟집이 끝나는 곳에 방파제가 있었다.

정옥은 거기에 앉았다.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갈매기가 끼룩끼룩 울었다.

"여기 있었군. 한참 찾았쟎아"

영준이 다가와 정옥의 어깨를 돌려 안았다.

정옥이 영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훅,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미안하다...."

영준의 손이 정옥의 긴머리를 쓰다듬었다. 영준의 입에서 휴-하고 한숨이 새어 나왔다.

 

"으으, 정옥아......!"

정옥의 몸에 체중을 싣고 뜨거운 입김을 뿜어내던 영준이의 몸이 한순간 활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잠시후 깊은 신음을 내쉬면서 영준이 정옥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너의 몸은 참 굉장해. 섹스를 할 때마다 늘 색다른 기분이 들게 하는 묘한 힘을 가졌어."

영준이 다시 정옥의 젖꼭지를 한번 물었다가 놓았다.

"전혀 싫증이 나지 않아. 할 때마다 새로운 기분이 드니까..."

"고마워요. 항상 좋은 말만 해 주어서..."

정옥이 영준의 벗은 몸을 쓰다듬으며 수줍은 듯 말했다.

"지난 일요일에도 인천에 갔었더랬어요?"

음, 하고 영준이 대답했다.

"다음 주엔 정옥이도 같이 가. 아버지 제사야"

정옥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딱딱하게 굳었다.

"차차 괜찮아 질거야 어머닌..."

영준 어머니의 무서운 얼굴과 사나운 목소리를 생각하면 정옥의 몸에 저절로 식은 땀이 흘렀다.

1년 반 전 첫 대면에서 그렇게 푸대접을 받은 후에도 정옥은 영준을 따라 한 달에 한 번은 꼭꼭 인천으로 갔다. 그러나 1년반이 넘도록 영준 어머니의 반응은 여전히 차갑고 냉정했다. 갈 때마다 대놓고 정옥에게 모욕과 무시의 언사를 퍼붓는 것도 여전했다. 그러나 정옥은 그동안 단 한 번도 싫다는 이야길 하지 않고 묵묵히 영준을 따라 그의 어머니를 찾아갔다.

이번에도 정옥은 가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영준과 결혼 하려면 어차피 영준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야하지 않겠는가. 무섭고 싫다고 찾아가는 걸 기피하면 언제까지나 영준과는 이 정도의 관계밖에 유지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정옥은 했기 때문이다.

결혼도 하지 않고 그냥 이런 관계로만 지내다가 영준의 마음이 변하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정옥에게 생각하기 조차 끔찍한 것이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따뜻한 감정, 처음으로 받아보는 따뜻한 사랑, 그것을 잃고는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정옥에게는 없었다.

그 주 일요일 아침.

정옥은 몇 가지 제수거리를 사들고 영준과 함께 다시 인천으로 향했다.

한복을 차려입고 영준과 함께 탄 버스에서 정옥은 오늘만은 제발 영준 어머니가 자신을 반겨 주길 빌었다.

"여자란 피부가 하얗고 맑아야 심성이 고운 법인데 얘는 일단 피부가 검어서 싫다. 음흉해 보이고 착하지 않아 보인다. 말이 없는 것도 싫고. 말이 없으니 속에 든 마음을 알 수가 있나. 옆으로 치켜 올라간 눈꼬리도, 유난히 물기가 많아 보이는 눈도 마음에 안든다.아무리 좋게 뜯어 봐도 남편 잡아먹을 과부상이다"

그게 영준 어머니가 정옥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이유였다.

영준은 자신의 까만 피부에 매력을 느낀다고 했는데 정작 그의 어머니는 피부색깔 때문에 싫다니 정옥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또한 영준 어머니로부터 '복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는, 남편 잡아 먹을 재수없는 과부상' 이란 악담을 자주 듣게 되니 진짜 자신이 재수 없는 여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내 인생이 지금껏 이렇게 고달팠나...'

그동안의 삶이 고달팠더라도 영준을 만난 이후의 2년은 참으로 따뜻한 나날이었다고 정옥은 생각했다. 공장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영준만 떠올리면 가슴이 설레었고 영준이 옆에 있으면 깊은 단잠을 잘 수 있었다.

"두려워 하지 말고....알았지?"

영준 어머니가 하는 술집이 보이기 시작하자 자연히 걸음이 느려지는 정옥의 어깨를 영준이 감싸며 속삭였다.

정옥은 영준을 향해 애써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우리 왔습니다."

술청에 붙은 부엌에서 무를 썰던 영준의 어머니가 들어서는 영준을 보고 반갑게 맞으려 나왔다. 그러나 영준 뒤를 따르는 정옥을 보고는 안색이 확 바뀌었다.

그녀는 홱 소리가 나도록 몸을 돌리며 말했다.

"쟤는 누가 좋아 한다고 밤낮 달고 오니, 달고 오길?"

영준은 어머니 말에 개의치 않고 양복 저고리를 벗어 방에 던져 넣으며 쭈뼛거리고 서 있는 정옥을 불렀다.

"뭐해, 어서 들어오지 않고. 어머니! 정옥이가 제수거리를 좀 사왔어요. 어머니가 바쁘셔서 아직 장만 못 하셨을 거라고요. 돈도 없으면서 아버지 상에 올릴 거라고 좋고 비싼 걸로만 사던데요. 하하하...."

영준 어머니는 소리나게 칼질을 했다. 그리고 영준이 서 있는 쪽은 쳐다보지 않고 혼잣말처럼, 그러나 이쪽이 다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혀 말했다.

"벌써 계집년 편을 들어 저 놈 말하는 것 좀 보세. 저런 놈을 자식으로 믿고 이날 이 때까지 이러고 있는 내가 죽일년이지..."

"어머니!"

"시끄럽다 이놈아!  이 늙은 에미가 그렇게 말려도 듣지 않는 넌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 아니다!"

영준의 안색이 확 변하는 걸 정옥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러나 영준 어머니는 그릇을 탕탕 던지듯 놓으면서 계속 넋두리를 이어 나갔다.

"아이구 미친 놈,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던 놈이 어디서 굴러먹던 년인지도 모르는 계집년을 하나 꿰어 차더니 이젠 에미 말을 귓등으로도 안듣네. 다 저 잘 되라고 그러는 줄을 모르고 이 여자가 어디가 어때서 반대를 하냐네. 계집이면 다 계집인가? 서방을 부귀하게 만들 상이 있고 서방을 초장에 잡아 먹을 상이 있는데...그 좋은 혼처자리 다 마다하고 지금껏 혼자 이러고 살은 내가 죽일 년이여, 내가 죽일년...!"

"그만 해요!"

영준의 고함소리가 술청을 찌렁하게 울렸다.

술 마시던 손님 두엇이 고개를 빼고 이 쪽을 쳐다보았다.

영준 어머니도 일손을 멈추고 영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기가 딱 막힌 표정이었다.

정옥은 사 가지고 온 제수거리를 풀으려던 손을 거두었다.

부엌과 방 중간에 버티고 서서 자신의 어머니를 노려보고 있는 영준.

정옥은 간절하게 기도했다.

'영준씨, 제발 참아요,제발! 아,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런 씨팔, 집이라고 찾아오면 좀 반갑게 맞아주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아뇨? 우리가 어디 못 올 데를 왔어요? 그리고 우리가 그만큼 굽히고 들어왔으면 조금이라도 숙여 줘야지, 자그마치 1년 반이요, 1년 반! 도대체 정옥이가 뭘 그리 잘못했어요? 잘못한 게 있으면 빌기라도 하지, 단순히 인상이 싫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애를 박대해서 기를 죽게 할 필요가 있냐구요?!"

영준은 그동안의 울분이 한꺼번에 터진 듯했다. 숨을 씨근대며 허공을 향해 주먹을 들었다 놓았다 어쩔 줄을 몰라하는 모습이었다.

정옥은 정신이 아득해 오는 걸 느꼈다.

아아, 이제 저 사람과는 끝이로구나...

"그래애! 이노옴!"

아들의 갑작스런 반격에 놀라서 어이가 없는 듯 입을 벌리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영준의 어머니가 마침내 정신이 드는 모양이었다.

맹수처럼 으르렁 거리며 썰던 무를 부엌바닥에 패대기쳤다. 부엌바닥에 미처 치우지 못하고 놓여져 있던 쟁반 위의 유리 소주잔과 음식 찌꺼기가 담긴 사기접시가 와르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너 말 한 번 잘 했다! 내가 저 계집년의 기를 죽였다고? 저 계집년 알고부터 걸핏하면 내게 눈을 부라리며, 서방 죽고 이날 이때까지 술취한 잡놈 주정받아가며 네놈 하나 바라보고 산 내 기는 네가 왜 죽여 놓느냐? 그래, 이 불쌍한 에미 가슴에 못 박는 건 괜찮고 내가 저 계집년 기 좀 죽이는 건 그렇게 떫더냐, 이 불효막심한 놈아!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이 호로 잡놈아! 너죽고 나죽자아~!"

영준 어머니가 영준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죽일 듯이 사나운 기세로 영준의 가슴을 쥐어 뜯고 때리기 시작했다.

"왜 이러세요,창피하게!"

몸부림 치듯 팔 다리를 휘둘러대는 자신의 어머니를 영준이 붙들었다.

"놔라 놔,이놈아! 네놈이 사람이냐?계집년에 미쳐 늙은 에미를 이렇게 박대할 수 있냐고,응? 아이고오! 동네 사람들아! 이내 말 좀 들어 보소! 여지껏 술 팔아 지놈 하나 뒷바라지 했더니 어디서 굴러먹던 말뼉다귀 같은 계집년 한 년 얻더니 이 늙은 에미가 눈에도 안들어 오나 보네.이런 개같은 경우가 세상에 또 어디 있다요! 제발 이리와서 내 말 좀 들어보소들!"

영준 어머니는 자신의 몸이 아들에 의해 결박당하자 고래고래 목청 높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싸움소리를 듣고 문밖으로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어 안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거 술 맛 떨어지게 싸움질 좀 그만하소. 집구석에 들어가면 계집년이 싸우자고 덤벼들고, 일 하러 나가면 좆만한 십장새끼들이 깝죽거리며 오장육부를 확 뒤집고, 해장국이나 먹으러 들렀더니 여기서까지 싸움질이네. 에이, 재수없어!"

술청안에서 뚝배기를 앞에 놓고 앉었던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바닥에 침을 퉤퉤 뱉더니 일어서 나갔다.

그 뒤를 이어 일어서 나가던 손님 두엇중 하나가 돌아서더니 그 때까지 어머니의 팔을 붙잡고 있는 영준에게 이죽렸다.

"웬만하면 어머니 말 들어 이 사람아. 다 자네 좋으라고 하는 소리 아닌가.계집은 열이고 스물이고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닌 하나 뿐이네. 보아하니 저 여자 때문에 이 난린 것 같은데 자네 어머니 말대로 그리 썩 좋은 인상이 아니야. 방뎅이가 튼실하고 살이 까무잡잡한 게 색은 잘 쓰게 생겼다만..."

영준이 그를 죽일 듯 노려보는 걸 끝으로 정옥은 자리에서 일어서 그 곳을 걸어 나왔다.

가게문 밖 가득히 모여들어 싸움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정옥이 나가자 일제히 길을 터 주었다. 구경꾼들의 시선이 일제히 뒷통수에 꽂히는 걸 느끼며 정옥은 빠른 걸음으로 질척질척한 시장길을 빠져나왔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정옥은 얼른 자취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 가서 문을 걸어 잠구고 몇날 며칠을 죽음처럼 깊게 자고 싶었다.

정옥은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 마악 서울로 출발하기 위해 시동을 걸고 있는 버스에 올라탔다.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버스의 창 밖으로 아이 둘을 앞 세운 부부가 웃으며 걸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가까운데 소풍이라도 가는지 모두 간편한 운동화와 잠바차림에 베낭을 하나씩 메고 있었다. 깡충깡충 앞서서 뛰어가는 아이들을 쳐다보던 정옥은 불현 듯 고향집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자기 자식이 이렇듯 남에게 무시당하고 천대받은 것을 알면 어머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머니는 지금까지 과연 살아나 계실까?

떠나온 지 오래되어 얼굴조차 기억하기 어려운 어머니의 품이 정옥은 갑자기 미친 듯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오늘같이 참담한 기분이 드는 날, 어머니를 찾아가면 어머니는 이유를 묻지 않고 정옥을 반겨줄 것 같았다.그리고 지치고 피곤한 정옥의 육신을 푸근하게 어루만져 줄 것 같았다.

어머니-.

그동안 별로 떠올려 보지않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온통 정옥의 가슴을 들쑤셨다.

그래, 고향에 내려가자. 내일은 공장에 가서 일 주일만 휴가를 신청해야겠다.. 고향집을 찾아 간다고 말하면 별 이유달지 않고 휴가를 허락해 주겠지...

정옥은 동네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고향집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어느 지역이었는지 생각은 잘 나지 않지만 잘만 하면 찾아갈성 싶었다.

자취집에 돌아온 정옥은 거추장스러운 한복을 벗고 간편한 바지와 티셔츠로 갈아 입었다.

새벽 일찍 인천으로 떠나느라 아침을 먹지 못한 뱃속이 쓰려왔으므로 정옥은 뜨거운 물을 끊여 찬밥에 말아 멸치조림이랑 같이 먹었다.

영준 생각만 하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았으므로 정옥은 애써서 그에 대한 생각은 피했다.

고향집에 찾아갈 즐거운 생각만 하기로 했다. 고향집에 갈 생각을 하자 마음이 급해지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 견딜수가 없었다.

밥을 다 먹은 정옥은 시장으로 갔다.

비상금을 털어 어머니와 양아버지에게 줄 내의와 스웨터를 샀다.

언니들에게 줄 빛깔 고운 블라우스도 두 벌 사고 화장품도 몇가지 샀다.

조카들에게 줄 선물도 사고 싶었지만 지금쯤 새로 태어났을 조카가 몇 명인지도 알 수 없었고 또 사내아인지 계집아인지도 몰라서 그만두기로 했다.

한 보따리나 되는 선물꾸러미를 들고 자취집으로 돌아 온 정옥은 빈 가방에 그것들을 차곡차곡 쌌다.

내일 아침 일찍 공장에 가서 휴가를 내달라고 해야지. 가불도 좀 하고....

정옥은 방벽에다 몸을 비스듬히 뉘고 다리를 뻗었다.

정옥의 시선이 바로 가 닿은 화장대 위에는 영준과 정옥이 나란히 찍은 사진 액자가 놓여 있었다.

어느 일요일 한강에 같이 놀러갔다가 직업 사진사에게 돈을 주고 찍은 것이었다.

정옥의 허리를 다정하게 두르고 있는 영준의 팔...

애써 누르고 있던 영준에 대한 생각이 정옥의 가슴으로 아프게 파고 들었다.

지금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머니와의 싸움은 끝이 났겠지만 얼마나 속이 상할까. 너무 상심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정옥이 그냥 서울로 돌아온 줄 모르고 방파제로 나가 자신을 찾아 다녔을지도 모르는 영준을 생각하고 정옥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가 도로 주저 앉았다.

"영주운씨이-!"

짐승같은 울음소리가 정옥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정옥은 방바닥으로 꼬꾸라지듯 그대로 쓰러졌다.

다음날.

정옥은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서 휴가신청을 하기 위해 공장으로 갔다.

마주친 몇몇 동료들에게는 당분간 고향집에 내려 갔다가 올 거라는 언질을 주었다.

정옥이 공장장실의 문을 마악 열고 들어가려는데 문이 벌컥 열리면서 공장장이 나왔다. 정옥을 본 공장장의 얼굴이 흠칫하는 것 같더니 딱딱하게 굳어졌다.

"공장장님, 저 휴가 좀...."

공장장이 황급하게 정옥의 말을 잘랐다.

"방금 최영준씨 어머니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말야..."

정옥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그에게, 영준에게 무슨일이 생겼구나!

"최영준씨가 엊저녁에 자살을 했다는구만. 달리는 기차에 그대로 뛰어들었다고 하는데.. 어제 이정옥씨와 무슨 일이 있었어?"

공장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옥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죽다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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