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속에서
정옥은 힘겹게 눈을 떴다. 근심스럽게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서너명의 얼굴이 보였다.
"이정옥 괜찮니?정신이 드니?"
정옥이 눈을 뜬 기색을 보이자 그 중 하나가 정옥의 어깨를 흔들었다.
".........."
정옥은 대답대신 몸을 일으켰다. 정옥의 이마를 덮었던 물수건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괜찮아?걸을 수 있겠어?"
옆에서 누가 또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정옥은 사방을 휘둘러 보았다. 공장의 구내식당 안이었다. 정옥을 눕혀 놓은 곳은 다섯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긴 나무의자였다. 자신의 푸른색 운동화가 식당 한켠에 얌전하게 놓여 있는 걸 정옥은 보았다.
그녀는 비틀비틀 나무의자에서 내려 왔다.
"신발을 좀 갖다 줘"
정옥은 누구에게랄 것 없이 말했다.
서 있던 여자애 하나가 얼른 신발을 가져다 정옥의 발치에 놓아주었다. 정옥은 천천히 신발을 신었다.
가야한다, 하고 정옥은 생각했다.
가야한다. 최영준, 그가 있는 인천으로. 그의 얼굴을, 영준씨의 얼굴을 봐야 한다....
정옥은 일어섰다. 그녀가 휘청거렸으므로 옆에 있던 누군가가 얼른 정옥의 허리를 잡았다.
머리가 휑하니 빈 것 같아 정옥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머리속에 하나 가득 영준의 죽음이 들어 와 있었지만 그녀는 도저히 그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달려오는 기차에 뛰어들었다는 게, 죽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쩌면 나를 두고, 나를 두고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정옥은 식당밖으로 나왔다. 정옥을 지켜보던 여자애 두엇이 같이 정옥을 쫒아 나왔다.
정옥은 밝은 햇살이 눈부셔 손으로 잠시 눈으로 가렸다.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떼놓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때였다. 공장안으로 들어 오는 큰 문이 활짝 열린 것은. 그리고 머리를 귀신같이 산발한 영준의 어머니가 뛰어들어 온 것은.
"네 이년! 배를 갈라 간을 빼내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네 이년! 내 아들 잡아먹고 네 년이 아직도 하늘에 머리를 두고 새파랗게 살아 있었구나! 너 오늘 내 손에 죽어 봐라!"
입에 거품을 물고 두 눈에 시뻘겋게 핏발이 선 영준의 어머니는 성난 맹수처럼 그대로 정옥에게 돌진했다. 정옥이 피할 새도 없었다. 무방비 상태로 서 있던 정옥의 몸이 영준 어머니에 의해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땅바닥에 쓰러진 정옥의 머리채를 영준 어머니의 억센 두 손이 감아 쥐었다. 우두둑, 하고 한 웅큼의 머리카락이 정옥의 머리에서 뽑혀져 나갔다. 영준어머니의 주먹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정옥의 코에서 피가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 아주머니가! 이봐요! 이러다 사람 잡겠어요! 이것 놓지 못해요?"
연락을 받고 쫒아온 공장 사람들이 영준어머니를 정옥의 몸에서 떼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있는 힘을 다해 정옥의 몸에 엉겨붙은 영준어머니를 떼어내긴 불가항력인 듯했다.
정옥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주먹질을 그대로 당했다. 이렇게 맞음으로써 영준이 살아 돌아올 수만 있다면 이까짓 매는 얼마든지 맞을 수 있다고 정옥은 생각했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코에서 흘러나온 피로 정옥의 몸이 피칠갑이 되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입술이 터지든, 얼굴에 온통 깊은 손톱자국이 나든, 그녀는 반항하지 않고 그냥 영준 어머니의 손길에 몸을 내맡겼다.
정옥은 식당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영준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 공장장이 자신을 놀려주기 위해 일부러 한번 해 본 소리려니 애써 생각하려 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달려드는 이성 잃은 영준 어머니의 모습에서 영준의 죽음이 확실한 것임을 정옥은 절감했다.
영준씨, 아아, 영준씨....
발작을 하듯이 팔 다리를 휘두르던 영준 어머니는 달려온 공장장에 의해서 가까스로 정옥의 몸에서 떼어내졌다.
영준 어머니는 정옥의 몸에서 떼어지자 시멘트 바닥에 그대로 철퍼덕 주저 앉더니 다리를 쭉 뻗었다. 그리고는 손으로 바닥을 치면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아이구우~ 생때같은 내 아들! 내 불쌍한 아들! 원통하고 분해서 어찌할거나~ 계집년 한 년 잘 못 만나 피어보지도 못하고 철도길에 귀신이 되고 말았네. 다 저 잘되라고 그랬는데 그게 에미가슴에 대못을 박고 죽을 정도로 섭섭하였나~아이구우, 내 아들아아~ 내 불쌍한 아들아아~앞으로 나는 너 없이 어이 살거나~ 너 없이 어이 살거나~ 내 아들 영준아아!"
영준 어머니는 바닥에 누워 뒹굴면서 몸부림 치기 시작했다.
정옥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널부러져 영준 어머니의 통곡 소리를 죄다 들었다.
이가 흔들거리고 온몸에 상처가 났는데도 아프다는 생각은 정옥에게 전혀 들지 않았다.
사랑하는 남자를 잃었다는 동질감에서였을까, 오히려 영준 어머니를 얼싸안고 같이 울고 싶은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정옥은 누가 자신의 피범벅인 얼굴을 닦아 주려고 갖다대는 물수건을 뿌리쳤다. 그리고 통곡하고 있는 영준 어머니에게로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잠이 안오더라도 하루 세 알 이상 먹으면 안됩니다."
입고 있는 가운만큼이나 얼굴이 새하얀 의사는 직업적인 어조로 무뚝뚝하게 말하며 약봉지를 정옥에게 건네주었다.
그럼요, 저는 단지 잠이 안와서 이것을 사 갈 뿐이예요, 하는 표정을 애써 약사에게 지어 보이며 정옥은 약봉지를 받아 들었다.
핸드백 안에는 또 한 봉지의 수면제가 들어 있었다.
정옥은 걸음을 빨리하여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공장과 자취방 부근의 두 군데의 약방을 돌아다녔지만 다행히 아는 얼굴을 마주친 것 같지는 않았다.
정옥은 그날 이후부터 공장에 나가지 않고 있었다. 온몸의 힘이란 힘은 다 빠져나가 단 10분도 서 있을 수가 없었을뿐더러 무엇보다 공장사람들의 시선이 두렵고 무서웠다. 모두 영준 어머니처럼 정옥 때문에 영준이 자살한 거라고, 정옥의 거센 팔자 때문에 영준이 잡아먹힌 거라고 손가락질하고 수근댈 것만 같았다.
영준 어머니로부터 입은 상처에 약도 바르지 않고 일 주일을 누워만 있던 정옥은 불현 듯 영준의 뒤를 따라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 충동은 매우 강렬하게 정옥에게 다가왔다.영준을 따라가는 방법만이 유일한 해결책처럼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 길로 정옥은 동네 약국으로 달려나간 것이었다.
정옥은 수면제가 든 핸드백을 방안에 들여 놓고 머리를 감기 위해 세숫대야와 비누를 찾아들었다. 일 주일을 감지 않은 머리는 수세미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피까지 엉켜붙은 머리카락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는 정옥 자신이 맡기에도 역겨웠다. 자신의 주검을 치워 줄 누군가에 자신이 지저분한 여자였다는 인상을 남기긴 싫었다. 그래서 일단 머리를 감아야겠다고 정옥은 생각했다.
세든 사람이 공동으로 쓰는 펌프가에는 주인 아주머니가 막 삶은 국수를 헹구고 있었다.
정옥은 눈부시게 흰 국수가락이 아주머니의 손가락에서 헹궈지고 있는 것을 펌프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무심히 구경했다.
"일 안 갔어?"
소문을 들어서 다 알고 있을터인데도, 그리고 그 때까지도 낫지 않은 정옥 얼굴의 상처를 보면서도 주인 아주머니는 모른 척하고 물었다.
"..........."
정옥은 대꾸할 기운도 없어 미소만 지어 보였다.그리고 펌프질을 하기 위해 일어섰다.그런데 갑자기 견딜 수 없는 욕지기가 치받아 올라왔다. 정옥은 그대로 주저앉아 목을 꺾었다. 견딜수 없이 가슴을 치받는 구역질과는 달리 목구멍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일 주일을 아무것도 먹지 않았더니...."
의혹에 찬 주인 아주머니의 시선을 뒤로하고 정옥은 방으로 뛰어 들어 갔다. 그리고 벽에 붙은 달력을 낚아채 내렸다.
"아!"
벌써 석 달째 생리를 건너 뛰고 있었다.
임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정옥의 다리를 부들부들 떨리게 했다.
내가 그의 아이를 가졌다!
정옥은 벽에 붙은 거울에 얼굴을 비추고 허둥대며 대충 머리를 빗었다.그리고 쟈켓을 걸치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급하게 걷느라 몇 번이나 넘어질 듯 하며 정옥은 시장통 입구에 있는 산부인과 건물에 도착했다. 푸른 십자가 그려져 있는 산부인과의 유리문 손잡이를 잡고 정옥은 깊은 심호흡을 했다.
"먹여 주고 재워만 주면 된다고?"
키가 작고 유난히 배가 나온 뚱뚱한 여자는 의심에 찬 눈초리로 샅샅히 정옥의 몸을 훑어내렸다.
그녀의 눈길은 도둑을 취조하는 형사처럼 맵고 날카로왔다.
정옥은 풍성한 블라우스 속의 부른 배가 행여나 그녀 눈의 뜨일까 숨도 크게 못 쉬며 서 있었다.
빨래비누를 사러 온 아낙네와 몇마디 말을 주고 받은 뒤 여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다시 정옥의 몸을 훑어보더니 퉁명스레 한마디 했다.
"아이 가졌구만"
정옥은 대답을 못한채 고개를 숙였다.
이 세상이 끝난 듯한 절망 끝에 정옥을 찾아온 찬란한 희망 한줄기, 그것은 영준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었다.
아아, 그는 비록 죽었지만 내 몸에 자신의 흔적 한 점을 남기고 갔구나!
그것은 그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벅찬 기쁨이었고 환희였다.
죽기 위해 수면제를 두 봉지나 샀던 정옥에게 영준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다시 삶의 욕구를 강렬하게 생기게 해주었다.
나는 영준의 아이를 낳을 것이다! 낳아서 보란 듯이 잘 키울 것이다! 내 한몸 고생하더라도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영준의 아이는 잘 키워내고야 말것이다!영준의 아이를 영준을 보듯 볼 것이다!
병원에서 임신 소식을 확인한 후 정옥은 터질 듯이 기쁜 마음으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영준 어머니도 자신의 손자가 생긴 걸 알면 나를 며느리로 받아 줄거야!....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임신소식을 알리기 위해 조심스레 찾아갔던 인천에서 정옥은 지금껏 받았던 그 어떤 수모보다 지독한 수모를 받고 쫒겨났다.
"뭐어? 영준이 아이를 뱄어? 이런 순 화냥년을 봤나?야 이 개같은 년아! 네 뱃속에 들은 그 씨가 우리 영준이 것인지 어떻게 아냐? 너 같이 결혼도 안하고 아무놈에게나 가랭이를 쩍쩍 벌려주는 년이 어느 잡놈에게 또 가랭이를 벌려주고 씨를 받았는지 내가 어떻게 아냐고? 우리 영준이가 네 년의 그 잘난 아랫도리에 반해서 같이 잠은 잤을 지언정 너같이 배운 것 없고 본데 없는 년에게 함부로 씨를 뿌릴 아이가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여기가 어디라고 네 년이 감히 발걸음을 했느냐? 내 생때같은 아들 잡아먹은 화냥년! 잡아서 찢어죽여도 시원챦을 이 개같은 년!"
눈에 푸른 불을 켠 채 손톱을 세우고 정옥에게 달려드는 영준 어머니.
정옥은 기세에 눌려 더 이상 말도 못붙여 보고 도망치듯 그 곳을 빠져 나왔다.
"임신 3개월 째입니다"
정옥이 그렇게 생각해서일까.그녀에게 임신 사실을 통보하는 젊은 의사의 목소리는 무척 다정했었다.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가지셨군요.
어쩌면 의사는 정옥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직업상 참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정옥은 생각했다. 그만큼 임신 소식은 정옥에게 주위사람을 넉넉하게 포용할 여유를 가질 만큼 기쁜 소식이었다.
영준 어머니가 자신에게 부린 행패쯤은 얼마든지 참아 넘어가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정옥은생각했다.
내가 자기 자식의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알고 나면 영준 어머니도 나를 따뜻하게 받아 줄 것이다. 그러면 나 또한 영준 어머니를 용서해 주리라. 비록 영준은 가고 없지만 그의 어머니와 한 집에서 서로 위로해 가며 한 평생 같이 살리라. 아이가 자라나는 걸 낙으로 삶으며, 영준 어머니가 영준을 바라보며 한 평생 살았듯이 나도 내 아이 커 가는 걸 보며 혼자 살리라...
그렇게까지 작정하고 찾아갔던 영준어머니 집이었다.
자취방으로 돌아온 정옥은 며칠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 아이를 지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준 어머니는 아이를 낳아 데리고 간다 하더라도 도저히 자신의 손주로 받아 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정옥 혼자서 아이를 낳아 기를 수는 도저히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겨우 스물 두 살의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아버지도 없는 아이를 낳아서 어떻게 키운단 말인가.
정옥이 아이를 보란 듯이 낳아 잘 키우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영준 어머니가 자신을 며느리로 받아들일 것을 전제하에 해 보았던 결심이었다.
영준씨, 저를 용서해 주세요. ...
영준이 남기고 간 마지막 선물을 지킬 수 없다는 죄책감에 정옥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이 아팠다. 그렇지만 하늘에 있는 영준도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없는 정옥의 사정을 감안하고 용서해 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작정을 하고 산부인과를 찾아갔던 정옥은 고개를 떨구며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수술비가 예상외로 엄청났기 때문이다.
정옥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 공장으로 돌아갔다. 수술비를 마련하려면 어쩔수 없이 일을 해야 했다.
공장측은 일손이 빠르고 착실했던 정옥을 순순히 받아들여 주었다. 그러나 동료들의 수근거림과 멸시의 눈초리는 정옥으로서 견디기 힘들었다.
정옥은 이를 물었다.
두 달만, 딱 두 달만 일을 해서 수술비를 마련한 후 아이를 지우고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겠다고 정옥은 생각했다. 모든 걸 참고 두 달만 견디어 내자고 정옥은 결심했다.
그러나 공장 곳곳에 남아 있는 영준의 기억은 정옥을 너무나 아프고 힘들게 했다.
큰 키에 항상 미소띈 얼굴을 하고 공장 안을 걸어 다니던 영준.
금방이라도 영준이 나타나 자신의 이름을 부를 것만 같아, 그리고 항상 그랬듯이 말 없이 그윽한 얼굴로 어디에선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 것만 같아 정옥은 일을 하면서도 하루에 몇 번씩 눈물을 쏟았다.
미안해요, 영준씨. 당신을 뒤 따라가지 못해 미안해요....
겨우겨우 두 달을 일 해 정옥은 수불비를 마련했다. 그러나 수술비를 들고 찾아간 병원에서 정옥은 또 한번 절망하고 말았다.
"임신 5개월, 벌써 6개월 째로 접어들고 있군요. 수술할 시기를 놓쳤습니다.낳을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선생님, 아버지가 없는 아이입니다. 저 혼자서는 키울 수가 없어요.제발 지워 주세요!"
정옥은 의사의 가운 자락을 잡고 애원했다. 의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수술하면 산모도 위험 할 수 있습니다."
3개월이 넘으면 소파수술이 어렵다는 걸 정옥은 전혀 몰랐었다.
바보같이..이 일을 어찌 할까.....
힘 없이 자취방으로 돌아온 정옥은 방안에 넋나간 사람처럼 한참을 앉아 있었다. 몇 시간을 그러고 있다가 그녀는 불현 듯 일어나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여기를 떠나야지....
워낙 마른 몸이라 아직 아무 표시도 나지 않았지만 그대로 있다간 공장 사람들 눈에 뜨이기 쉬울 터여서 일단은 몸을 숨기기로 정옥은 작정했다.
워낙 단촐한 살림이라 짐싸기는 한 시간도 안돼 마쳐졌다.
이불과 부엌 살림살이 등은 이웃 자취생에게 넘겨주고 정옥은 옷가지만 챙겨넣은 가방을 챙겨들고 그 곳을 떠났다.
D동 쪽으로 갈 생각이었다.
유난히 절과 암자를 즐겨 찾았던 영준을 따라 D동에 위치한 절에 몇 번 가 보았던 기억이 정옥을 그 쪽으로 향하게 했다.
D동에 도착한 정옥은 곧 어느 한식당 부엌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새벽 5시부터 영업시간이 끝나는 밤 11시까지 잠시도 쉴 새 없이 그릇을 씻고 야채를 다듬는 일이었다.
잠은 영업시간이 끝난 식당안에서 테이블을 서너개 붙여서 잤다.
죽은 영준을 생각하며 슬퍼할 틈 조차 없는 바쁜 나날이었다. 하루 웬종일 동동거리며 일에 치이다가 밤에는 딱딱한 의자에 몸을 뉘자마자 지쳐 곯아 떨어져야 했다.
그러나 정옥은 그 식당에서조차 2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쫒겨나오고 말았다.
불러오는 배를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시집도 안 간 새파란 처녀가 얼마나 행실이 안좋았기에 애를 배갖고 돌아 다녀? 우리식당에는 그런 행실 더러운 여자는 쓰지 않아. 당장 나가! 나 원참, 우리 딸들 보고 배울까봐 겁나네"
다시 오갈데가 없어진 정옥.
그녀는 끼니는 길가의 싸구려 국수로 해결하고 잠은 가장 값이 싼 여인숙을 얻어 자면서 매일 일자리를 찾아 발이 부르트게 돌아다녔다. 아이를 낳아야 했으므로 가정집 식모자리가 제일 적합할 듯 싶었다. 정옥은 식모를 쓸 성 싶어 보이는 큰 집들마다 대문을 두드리고 자신을 써줄 것을 애원했다.
그러나 주인들은 하나같이 난색을 표했다.
"글쎄. 지금 식모가 필요하긴 한데...신원이 확실한 사람이라야 하거든..."
정옥은 앞일이 막막한 걸 느끼고 깊게 절망했다. 신원이 확실치 않은 자신을 받아들여 줄 집이 아무데도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가야, 이제 너와 나는 어쩌면 좋니. 앞으로 날은 점점 추워 올 텐데 앞으로 우린 어떡해야만 하니...'
몇날 며칠을 하루 두 끼 국수만 먹고 대문을 두드리고 다니던 정옥은 어느날 현기증을 느끼며 길가에 주저앉고 말았다.
'진짜 이제 어떡해야 하나...'
이 넓은 세상에서 자신의 몸 하나를 받아주는 곳이 없다는 사실이 정옥을 절망케 했다. 정옥은 길에 주저 앉은채로 눈물을 쏟고 말았다.
한참을 길에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조그만 구멍가게 하나가 얼른 눈에 들어왔다. 잡화며 쌀, 연탄까지 파는 구멍가게였는데 가게 한쪽은 손님에게 막걸리 등을 팔 수 있게 나무 탁자까지 있는 구멍가게였다. 규모는 작았으나 들락날락 하는 손님이 여간 많아 보이지 않았다.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여자 혼자서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바쁘게 움직여대고 있었다.
저기다. 어쩌면 저 곳에서 일을 거들어 주며 머무를 수 있겠구나.
정옥은 힘을 내어 벌떡 일어났다.
"갈데도 없을 것 같구만 그 몸을 해 가지고 어딜 간다고 돌아 서, 돌아 서길! 얼른 들어가서 가방놓고 나와 일이나 좀 거들어"
아, 여기도 틀렸구나, 하고 돌아서는 정옥을 주인여자가 잡았다. 말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으나 목소리엔 연민과 동정이 담겨 있었다.
"대신 월급은 못 줘. 쓸데없이 사람만 많이 들락거리지 돈 남는 장사하고 있는 것 아니니까"
"돈은 필요 없어요. 그냥 아이만 낳게 해 주세요"
"돈이 필요없으면 아이 낳아서 뭘로 입히고 먹일래? 그렇게 물러빠졌으니 젊은 게 아이나 배어서 돌아다니지. 똑똑하게 생겨서는...월급이랄 거는 없지만 일한 만큼은 쳐서 줄테니 잘 모아 둬.몸이 약해서 아이나 잘 낳을지 걱정이구만..."
심술궂게 생긴 얼굴과 퉁명스런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주인 여자는 인정이 많은 것 같았다. 혼자 살면서 적적하던 차에 잘 되었다며 바쁜 중에도 들어가서 밥상을 차려내왔다.
"보아하니 그동안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한 것 같은데 어여 먹어. 산모는 그저 잘먹고 잘 쉬어야 하는데, 쯪쯪쯪...에미 잘못만나 뱃속의 아이가 고생이 많네..."
보리가 드문드문 섞인 밥과 자반 고등어, 그리고 김치가 차려진 밥상이었다.
그동안 굶주리고 있었던 정옥이지만 정옥은 선뜻 숟가락을 들지 못했다. 목이 메이면서 눈물이, 눈물이 정신없이 흘렀기 때문이다.
"여자란 자고로 몸 관리를 잘해야 하는 법이야. 이제 아이를 낳아봐. 평생 혹으로 따라다닐테니... 어떤 사연으로 어떤 남자의 아이를 가지게 됐는지 모르지만 자네의 고생길이 벌써 눈앞에 훤하게 보이는 듯 하구만"
".........."
"그만 울고 어여 밥 먹어. 앞으로 울 일이 줄기장창 있을텐데 벌써부터 울면 어쩌나"
눈물을 삼키며 밥을 먹고난 정옥은 설거지를 한 후 주인여자를 도와 가게일을 거들었다.
가게는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은 빈민촌 한 가운데 있어 비누 한 장, 쌀 한 됫박, 국수 한다발등 자잘한 물건을 사러오는 사람들로 온종일 바빴다. 그러나 하루종일 손님이 들끊어도 매상은 신통챦은지 늦은 밤 주인 여자는 가게문을 닫고 들어 와 전대를 끌러놓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가게세 내고 나면 입에 풀칠이나 할런지 모르겠네"
찬밥 남은 걸로 저녁을 먹고 정옥과 주인여자는 불을 끄고 나란히 누웠다.
"자나?"
"아니요"
"사는 게 힘들제?"
"..........."
"어쨌든 뱃속의 새끼를 봐서라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 나는 서방과 자식을 하루아침에 사고로 잃고도 입에 밥을 넣으며 이렇게 살려고 버둥대고 있니라. 살다보면 좋은 날이 있을겨.더구나 자네는 젊으니까..."
주인여자의 말을 따뜻하게 가슴에 받아새기며 정옥은 서서히 잠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제는 길에서 헤매지 않아도 된다는, 아이를 낳을 때까지 머물 곳이 생겼다는 안도감이 정옥을 안심하고 잠들게 했다.
한참 후.
정옥을 깨운 것은 소리는 낮추었으나 윗목쪽에서 또렷하게 들려오는 주인여자와 어떤 남자의 목소리였다.
"아이구, 참 누가 있다니께..."
"있으면 어때, 난 지금 임자의 몸이 너무 안고 싶은 걸"
눈을 뜬 정옥의 얼굴에 술냄새 섞인 후덥지근한 공기가 덮쳐왔다.
"내가 가끔 오는 줄 알면서 사람을 있게 하면 어떡하노.이제 내가 여기 오는 것 싫여? 임자 마음 변했는감?"
"맘이 변하긴 누가 변했다고 그래. 저나나나 똑같이 아이를 밴 것 같은데 불쌍해서 그냥 보낼 수가 있어야지"
"뱃속의 내 아이는 잘 자라고 있겠지? 제발 아들이어야 할텐데..."
"흥, 딸이면 나 안 볼꺼야?"
"누가 안본대? 마누라쟁이한테 딸 년이 다섯이나 되니까 이왕이면 아들이었으면 하는 거지"
"아이,어디다 손을 넣고 그래?
"언젠 손 안넣었나? 새삼스럽기는. 가만 좀 있어보라니까. 7개월 넘었으니까 이제는 해도 되지? 앞으로는 배 때문에 좀 그러니까 뒤로 해볼까?"
씨근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정옥의 귀로 들려왔다.
정옥은 얼굴을 붉히며 이불을 뒤집어 썼다.
뚱뚱한 게 아니고 임신을 한 거였었구나...
다음날 아침.
"오늘은 내가 봐주지만 내일부턴 일찍 일어 나도록 해. 할 일이 사방에 쌓였는데 언제 다 하누"
그릇 부딪치는 소리에 정옥은 눈을 떴다.
주인여자는 벌써 윗목에 상을 펴놓고 밥을 먹고 있었다.
이불은 말끔히 개어져 방 한 켠에 밀어져 있었다. 엊저녁 남자는 집으로 돌아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정옥이 황급히 일어나 이불을 개고 머리를 빗었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 세수를 하고 방으로 들어 왔다.
정옥은 조심스레 상 앞에 앉았다.
주인여자가 정옥을 쳐다보지도 않고 밥 그릇을 내밀었다.
"산달이 언제야?"
"내년 1월 쯤..."
주인여자는 물김치 국물을 뜨며 중얼거렸다.
"공교롭게도 나랑 같은 달이군. 좋은 징존지 나쁜 징존지 모르겠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