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윤승준은 과묵하고 진중한 남자였습니다. 약봉지로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일부 표현해 놓은 후에도 별다른 말도, 행동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매일 다방에 들르는 것은 여전했습니다. 산책시간을 보고 이웃사람들이 시간을 짐작했다는 독일의 철학자 ‘칸트’처럼 5시 15분이면 어김없이 다방문을 밀고 들어왔습니다. 단 1분도 늦는 법이 없었습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 고 매일 그 시간에 모습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리고 늘 자신이 앉는 자리에 앉아 무심히 앉아 있다가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의 눈길이 오직 나를 향해 있다는 것을. 나를 향하는 그의 눈길이 매우 뜨겁다는 것을.

내가 느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습니다. 윤승준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안 다른 레지들이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그가 올 때 쯤해서 들어온 커피배달 주문을 일부러 나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 곳에서 일 한지 몇년이 되었다고는 하나 레지 중 내가 제일 신참내기라 싫다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윤승준이 올 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커피배달을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커피배달을 나가면 일부 짖궂은 손님들이 나를 잡습니다.

“야, 좀 놀다가 가….”

나는 그들의 요구를 뿌리지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커피를 팔아주는 엄연한 손님들이었으니까요. 마음은 지금 쯤 다방에 와 있을 윤승준에게 온통 가 있으면서도 나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손님들과 이런 저런 알맹이도 없는 얘기를 나누어야했습니다. 그리고 적당한 때 얼른 그 자리를 빠져나옵니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많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손님들의 비위를 맞추어주며 시간을 보내야 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헐레벌떡 커피배달을 다녀오면 그가 가버리고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의 그 실망감이란. 허망함이란.

“그 남자, 네가 언제 돌아오나 계속 출입문만 쳐다보다가 갔어”

주방 아줌마가 전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윤승준과 나의 관계도 아무런 진전없이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행복했습니다.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그가 매일이면 나를 보러 와 준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나는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굳이 손을 잡지 않아도 몸을 밀착시키지 않아도 잠을 자지 않아도 좋고 황홀했습니다.

어두컴컴하고 답답한 다방안이 그가 들어오면 형광등 백 개를 한꺼번에 켜놓은 것 처럼 환해졌어요. 내 마음도 같이 환해졌어요. 그리고 나의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어오릅니다. 푹신하고 포근한 구름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윤승준이 우리 다방에 오기 시작한 지 꼭 1년이 되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5시 15분, 그가 문을 밀고 들어왔습니다. 마침 다른 레지들이 모두 커피배달을 가고 없었습니다. 그때 쯤이면 가끔 들어와 있던 사장님도 오지 않았습니다. 자연히 윤승준이 주문한 커피를 내가 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주 흔치 않은 기회였습니다.

나는 커피잔을 쟁반에 받쳐들고 윤승준에게 다가갔습니다. 가슴은 두근두근, 다리는 후들후들, 손은 덜덜. 정신이 내 정신이 아니었습니다.나는 가까스로 별 실수 없이 커피잔을 윤승준이 앉은 탁자위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커피잔을 내려놓고 돌아서는 나를 그가 불렀습니다.

“은영씨!”

나는 돌아보았습니다. 그의 귀티나고 하얗고 잘 생긴 얼굴이 바로 내 눈 앞에서 웃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은영씬 쉬는 날이 없어요? 가만보니 한 달 내내 여기에 있는 것 같은데 언제 쉬어요? “

쉬는 날은 한 달에 한 번밖에 없었습니다. 매달 첫째 일요일이었습니다.그날 하루만은 내 자유였습니다. 낮잠도 자고 목욕탕도 가고 보고 싶었던 영화도 보고 시장에 나가 이것저것 생필품도 샀습니다.

“매..매달..첫..첫째 주 일요일이요…..”

그 말 한마디 하는데 왜 그리 힘이 들던지.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습니다. 그가 미간을 좁히며 벽에 붙은 달력을 보았습니다. 운명의 신은 그때 내 편에 서 있었을까요. 마침 그 첫째 주 일요일이 내일 모레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우리 만나요.”

윤승준이 말했습니다.

“저 큰 길가에 우체국 있지요? 그 우체국 앞에서 만나요”

첫 만남. 첫 키스. 첫 경험. 첫 눈. 뭐든지 ‘첫’자가 붙는 것은 특별하고 아름답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때, 윤승준과의 첫 데이트를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내 생애 처음의 데이트. 그것도 다른 여자들이 선망의 대상이고 동경의 대상인 남자와의 첫 데이트.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국민학생들이 소풍가기 전날 밤 너무 좋아서 잠을 못잔다고들 하던데 바로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흥분과 기대와 설레임으로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았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윤승준이 나를 좋아한다는 걸 막연히 느끼고는 있었지만 1년이 되도록 아무런 표현을 해오지 않아 사실 나는 긴가민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지쳤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갑자기 불쑥 데이트 신청을 해오다니!

당일 아침. 나는 새벽같이 일어났습니다. 잠 한숨 못잤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목욕탕에 갔습니다. 나는 정성들여 머리를 감고 온몸을 깨끗하게 씻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곱게 화장하고 하얀색 블라우스와 남색 치마를 입었습니다. 미나와 정희가 입을 비쭉거렸습니다.그러나 미나는 항상 내 편이었습니다.

“야, 잘 하고 와. 첫 데이튼데 실수하지 말고. 이왕이면 오늘 만리장성까지 쌓고 와라”

문을 나서는 나를 보고 미나가 말했습니다. 나는 미나를 향해 웃어주었습니다.그럼 잘 하고 말고. 내 생애의 첫 데이트인데 잘 해야지.

그와 만나기로 한 곳은 내 자취방과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는 벌써 나와있었습니다. 큰 키의 그가 장승처럼 우체국 앞에 서성거리며 있었습니다. 멀리서 보기에도 그는 멋있는 남자였습니다.

“오, 나와 주었군요”

나를 보자 그가 활짝 웃었습니다.

“안 나올 줄알고 걱정했었어요”

그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나는 그 손을 마주 잡았습니다.

“어디를 갈까요? 첫 데이튼데 좋은 데로 가야지요?”

그가 미소지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디든 상관없었습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가는 곳이라면 지옥이라도 기쁘게 따라 갈 생각이었으니까. 그는 일단 나를 데리고 근처의 식당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물망초’라는 예쁜 이름의 경양식집었습니다. 이름 만큼 실내도 예쁘고 정갈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영어로 씌어진 메뉴판을 찬찬히 살펴본 후 나를 위해 주문을 해주었습니다. 영어 모르는 나를 위해 친절히 설명까지 곁들여서.

“아, 정말 꿈만 같아요”

웨이츄레스가 주문을 받고 물러가자 윤승준이 앞으로 몸을 숙여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보면서 말했습니다.

“25시 다방에서 은영씨를 처음 본 순간 내가 숨이 멎을 만큼 놀랐던 것 알아요?”

“………..”

“세상에 저렇게 단아하고 고운 여자가 있나 하고요”

“……….”

“은영씨는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그 어떤 여자보다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자예요”

“………..”

“조신하고 조용하고 아무에게나 웃지 않고……”

보통 다방에서 일 하는 여자들은 아무하고나 말을 섞고 농담을 합니다. 어떻게보면 그게 직업이니까. 커피도 팔고 웃음도 팔고 형편에 따라 몸도 파는 게 당시 레지들의 생존방식었으니까.

그러나 윤승준은 여자들이 그러는 게 참 싫었답니다. 가정형편상 그런 데서 일하는 거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좀 정숙하고 현숙할 수 있을 텐데 헤프게 행동하는 게 싫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가만히 지켜보니 그러지를 않더랍니다. 항상 말이 없고 얌전하더랍니다. 손님 앞에서도 함부로 웃거나 농담을 하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저 여자는 다르구나, 하고 나를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윤승준의 말에 나는 속으로 쓴 웃음을 지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계모로부터 학대받으며 움추려들고 기죽어 살며 형성된 성격이 사는 데 도움이 될 때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그렇게 시작된 윤승준과의 데이트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내가 쉬는 날마다 우리는 만났습니다. 극장도 가고 야외에도 놀러갔습니다. 나는 매일매일 꿈같이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뒤돌아 보건데 내 인생에 있어 그 때 만큼 행복하고 가슴 벅찬 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내 인생의 가장 따뜻하고 화사한 봄날이었습니다.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여자는 사랑에 빠지게 되면 저절로 예뻐집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 꾸미고 가꾸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여자의 본능입니다. 쓸데 없는 데는 돈 한푼 쓰지 않는 짠순이였던 나였지만 비싼 옷도 사고 화장품도 많이 사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장원에 가서 머리도 자주했습니다.

내가 윤승준을 사귄다는 얘기가, 그래서 내 자신에게 돈을 쓰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레지들 사이에서 돈 건 당연한 귀결이겠지요. 그리고 그 얘기가 주변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갔습니다. 물론 사장님 귀에도 들어갔겠지요.

사장님은 별다른 말을 안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야무지고 똑똑한 내가 선택해 사귀는 사람이니 어련하려니, 하고 생각한 듯 같았습니다. 그러나 윤승준이 어떤 사람인지는 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한 듯 싶습니다.

사장님이 알아낸 그 사람의 배경은 어마어마했습니다. 그 남자, 윤승준은 나랑은 비교가 되지 않는 조건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다섯 형제의 막내였고 부모가 50이 넘어서 본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누나와 형들은 산부인과 의사로, 고등학교 교사로,그리고 고급 공무원으로 사회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고 부모들도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윤승준은 서울의 유수한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유학까지 갔다온 인텔리였습니다. 미국유학을 다녀온 만큼 영어에 뛰어났겠지요. 그는 서울에 본사를 두고 있는 한 무역회사 의정부 지사의 해외 상담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집안 좋고 학력 좋고 직장 좋고 그 어디를 보나 나랑은 차이가 나도 너무 차이가 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남자를 진정으로 사랑하니?”

“………..”

“넘어야 할 산이 첩첩인데 네가 견뎌낼 수 있겠니?”

윤승준의 배경을 전해주면서 사장님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내게 물었습니다.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짐작은 했었지만 윤승준이 그 정도로 훌륭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도저히 나랑은 맞지 않는 남자였습니다.정말이지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검은색과 하얀색 만큼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국민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나. 계모 밑에서 학대받다 남의 집 식모로 다방 레지로 전전하며 성장 한 나. 그때까지 나는 집에도 일절 연락을 끊고 있었습니다.집에서는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있을 겁니다.

무엇하나 내세울 것 없는 초라하고 변변치 못한 내 주제를 생각하자 눈물이 났던 것입니다. 아무리 윤승준의 나에 대한 마음이 굳건하다해도, 내가 윤승준을 하늘 만큼 바다 만큼 사랑한다해도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습니다. 이루기엔 너무도 험난하고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야 했습니다. 그 고갯길이 바로 눈 앞에 뻔히 보였던 것입니다.

그 사람을 포기 해야 하나.그리고 내 주제랑 비슷한 사람을 만나야 하나.

나는 그날 이후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5시 15분에 어김없이 오는 윤승준의 그림자만 봐도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사랑하지만 가질 수 없는 사람, 이룰 수 없는 관계라는 걸 알자 그저 서러움에 눈물만 났습니다.

“임신을 해버려”

미나의 말이었습니다.

“아이를 배면 어쩔 수 없이 며느리로 받아들여 주겠지”

윤승준과 나는 그때까지도 잠을 자지 않은 사이였습니다. 나는 그를 위해 모든 걸 바칠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윤승준은 무슨 이유에선지 내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아니지. 이 새대가리야”

정희가 미나에게 핀잔을 주었습니다.

“처녀가 임신하는 것은 절대로 안돼.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라고 그쪽 어른들이 더 천대시 할 지도 모른단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습니다.

윤승준의 태도에는 여전히 별다른 변화가 없었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들렀고 늘 그랬듯이 나를 바라보다 돌아갔습니다. 나 역시 아무 얘기 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울 망정, 초조하고 불안해서 끼니를 거를 망정 내가 나서서 먼저 이러고 저러고 말 할 입장이 아니었지요.

사장님은 아침에 잠깐 들르거나 오후에 들러 다방안의 동태를 살펴보거나 아니면 늦은 저녁에 들러서 그날의 수입급을 챙겨가는 게 다였습니다. 그러나 윤승준이 나랑 사귄다는 것 을 알고 난 후, 그의 집안이 나랑 비교가 안되게 좋다는 걸 안 후 5시 15분, 윤승준이 올 때 쯤에 어김없이 다방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다방 카운터나 구석에 앉아 윤승준을 유심히 주시했습니다. 나는 알 수 있었습니다. 사장님이 윤승준을 관찰한다는 것을.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나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다방 안을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사장님이 나를 불렀습니다.

“그래, 아직도 윤승준하고 만나니?”

“예……”

“어떻게 할 생각이니?”

“잘 모르겠어요.어떻게 해야 할지”

“헤어질 생각은 없니?”

“…………”

“많이 사랑하니, 그 남자?”

“예……….”

내가 대답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윤승준 그 남자를 사랑하는데 만은 자신이 있었으니까요.

“내가 본 바로는 그 남자 썩 좋은 남자가 아니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습니다. 좋은 남자가 아니라니!

“남자는 일단 가슴이 따뜻해야 한다. 가슴이 따뜻한 남자가 여자를 배려하고 잘 위해줄 줄 알지. 그런데 윤승준은 그게 없어. 차갑고 냉정해. 그리고 폭력적인 성향도 있는 것 같다……”

“아니예요. 사장님. 그는 매우 좋은 사람이예요”

처음으로 나는 사장님께 반기를 들었습니다. 얼마나 내게 잘 해주는데요. 큰소리 한번 치지 않은 사람이예요…..

열몇살 때부터 온갖 험한 험한 세상을 보고 겪으며 살아 온 사장님이었습니다. 어쩌면 사장님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는 윤승준을 더 믿었습니다. 사장님의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쟎아도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이었습니다. 어쩌면 신분의 벽 차이로 윤승준과 헤어져야 할지도 몰라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데 게다가 좋은 남자가 아니라니! 폭력적인 성향까지 있는 남자라니! 정말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고 아득했습니다.

“울지 마라”

사장님이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네가 그렇게 좋아 한다니 나도 할 말이 없다. 이래라, 저래라 말을 못하겠다. 그러나……”

사장님이 말을 끊었습니다. 사장님은 약간 망설이는 기색이었습니다.그러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만 질질 끌고 일단 쇼부를 보는 쪽으로 해라”

“어..어떻게요…..어떻게 쇼부를 봐요….”

헤어지자면 헤어질 것이고 앞으로 계속 관계를 이끌어 가자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나였습니다. 처분만 기다리는 입장인데 내가 나서서 어떻게 사장님 말대로 ‘쇼부’를 봅니까.

그러다가 큰 사건이 생겼습니다. 다방 25시를 그만 두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전혀 계획치 않았고 예기치 않았던 사건!

그 날은 권투 중계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우리 한국 선수가 일본에까지 원정가서 벌이는 중요한 시합이었습니다.

당시 텔레비젼이 있는 집은 거의 드물었습니다. 권투나 축구경기같은 중요한 시합이나 대통령 담화문 발표같은 특별한 방송이 있을 때는 모두 텔레비젼이 설치된 다방으로 몰려들었지요.

아침부터 다방은 권투경기를 보겠다는 손님들로 넘쳐났습니다. 권투경기는 오후 5시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텔레비젼 화면이 잘 보이는 자리를 미리 잡아놓겠다는 손님들이 일찍부터 꾸역꾸역 몰려들었습니다.

나를 비롯한 우리 레지들은 하루종일 동동거려야 했습니다. 점심도 채 먹지못하고. 높은 하이힐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불편한 차림새로 하루종일 서 있어야 했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자 나는 탈진상태가 되었습니다.어릴 때부터 제대로 얻어 먹지 못하며 영양상태가 부실한 나는 몸이 아주 약했습니다.

쓰러질 듯 힘이 들어 겨우겨우 걸음을 떼놓으며 손님들의 차를 나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이 불쌍하고 딱해보였나 봅니다. 시장 쌀집 아저씨가 나를 불렀습니다.

“은영아. 이리 와라. 이리 와서 좀 앉아라”

쌀집 아저씨가 옆에 앉은 다른 남자를 저쪽으로 밀게하고 작은 틈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루종일 얼마나 힘드니? 여기 잠깐만 앉아 쉬어라”

“아..아니요..괜찮아요”

나는 몇년동안 그 다방에서 일했지만 손님 옆에 앉아 노닥거려 본 적이 없습니다. 몸을 헤프게 굴리지 말자, 하는 게 내 철칙이었으니까요.

“괜찮다. 네 사장님한테는 내가 말해줄 테니 걱정말고 여기 좀 앉아”

쌀집 아저씨의 권유에 나는 더 이상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정말이지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딱딱하고 좁아터진 하이힐에 하루종일 갇힌 발가락이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팠습니다. 쌀집아저씨 옆에 앉은 시간이 2,3분 되었을까.

갑자기 누군가가 내 앞을 떡 버티고 서 있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습니다.

“ ! ”

윤승준, 바로 그사람이었습니다. 나를 노려보는 그의 눈은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더러운 년!”

그의 입에서 벽력같은 고함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 다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 귀에 다 들릴 만큼 크고 우렁찬 소리였습니다.

그는 바람같이 몸을 돌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방문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오오, 이일을 어떻게 합니까!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몸 힘든 데 정신이 쏠려 윤승준이 그 시간에 올 거라는 생각을 깜빡했던 것입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그저 정신만 아득했습니다.

미나가 쫒아오더니 내 팔을 잡아 끌었습니다.

“얼른 쫒아 가. 쫒아 가서 승준씨를 잡아!”

나는 허둥지둥 고꾸라지듯 쫒아 나갔습니다. 저만치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가고 있는 윤승준의 뒷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죽을 힘을 다해 그를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팔을 잡았습니다. 그가 흠칫하면서 걸음을 우뚝 멈추었습니다.

“승준씨!”

나는 숨이 턱에 차서 헐떡거리며 말했습니다.

“미….미안해요.. 그러나..그러나 제발 어쨌든 제 말 좀 들어 봐요…..”

그가 몸을 돌리는 것 같더니 솥두껑같이 크고 우악스런 손으로 나의 뺨을 후려쳤어요.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힘없이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이 갈보같이 더러운 년이 어디다 대고 입을 놀리고 있어?!”

1년이 넘는 동안 그를 보아오면서 한번도 듣지못했던 거칠고 험한 욕설이었습니다.

“이 창녀같은 년아! 너무 실망이다! 그런 돼지같이 뚱뚱하고 늙어빠진 놈 옆에 앉아 좋아서 희희덕거리는 꼴을 내게 보이다니 !”

그는 구둣발과 주먹으로 나를 마구 밟고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억센 주먹과 딱딱하고 뾰족한 구두굽을 이용한 폭력이 소나기처럼 마구 나의 몸 위로 쏟아졌습니다.

“이 나쁜 년아. 내가 너 같은 년을 좋아했다니 너무 수치스럽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나는 길바닥에서 개 처럼 맞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반항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맞아도 싼 여자였으니까요. 싸구려 창녀처럼 남자 옆에 함부로 앉은 여자였으니까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우 몰려들더니 둘러서서 우리를 구경했습니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길바닥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광경이 심심찮게 있을 때였습니다. 여자는 남자한테 맞아도 된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을 시절입니다. 맞을 만하니까 맞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나는 무지막지하게 맞으면서도 내가 잘못했으니까, 승준씨가 나를 사랑하니까 때리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변명이나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그 매를 다 맞았습니다.

나는 참 어리석고 순진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무지했습니다. 한 번 여자 몸에 손을 댄 남자는 앞으로도 계속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걸 그 때 알아채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사랑했습니다.

골방 구석에서 아무도 돌봐 주는 이 없이 혼자 아파 누워 있을 때 약을 사다 준 남자였고 내 손을 잡아 준 남자였고 은영아,가 아니고 은영씨라고 불러준 남자였습니다. 나를 데리고 극장 구경을 시켜 준 남자였고 공원에도 데리고 가 준 남자였습니다. 나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의 어깨를 감싸 안아 준 남자, 윤승준, 그는 내가 사랑한 남자였습니다. 그래서 내 몸 위로 가해지는 폭력을 ‘사랑의 행위’라고 믿었습니다. 정말 어리석게도 말이지요.

그 때 누가 ' 아무리 잘생기고 돈이 많고 집안이 좋고 학력이 높은 남자라해도 여자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손을 대는 남자는 안된다' 고 한 마디라도 일러주었더라면, '절대로 절대로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고 말해 준 사람이 있었더라면 내 인생의 방향이 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런 충고나 조언을 해준 사람이 내 옆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정신없이 내게 폭력을 퍼붓던 윤승준은 힘이 빠졌는지 발길질과 주먹질을 멈추었습니다. 그 틈을 타서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빌었습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싹싹 빌었습니다.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다시는,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을께요….”

“정말이지?정말 다시는 다른 남자 옆에 함부로 앉지 않을 거지?”

“예에. 용서해 주세요. 이번만 용서해 주세요”

그가 나를 일으켜 세워 품에 안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지금 당장 가서 다방을 그만 두겠다고 말 하고 와!”

“예에?”

“너는 이제부터 내 여자다. 내가 널 먹여 살릴 테니까 넌 일 하지 않아도 돼”

“승준씨?!”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다방에 가서 그만두겠다고 얘기를 하고 와. 지금 얼른!”

“알…알았어요”

나는 몸에 묻은 먼지와 흙을 털어내고 손바닥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었습니다. 머리를 대충 매만진 다음 다방으로 뛰어갔습니다. 미나가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나를 보자 뛰어나왔습니다.

“은영아! 괜찮니?”

“으응.괜찮아”

“근데 네 꼴이 그게 뭐야?”

“………..”

“누가 때렸어?설마 윤승준이 그러진 않았을 거구 도대체 누가 널 이 지경으로 팼니?”

“미나야. 나 여기 오늘 부터 그만 둘거야.”

미나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습니다.

“뭐,뭐라고?”

“사장님 들어오셨니?”

“으응. 좀 전에….”

“가서 사장님 좀 나오시라고 해 줄래?아직 안에 사람들 많지? 내 꼴이 이래서 들어갈 수가 없구나”

미나가 고개를 갸웃대며 들어가고 곧 사장님이 나왔습니다.

“사..사장님….”

“무슨 일이니?”

나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어요. 지난 몇년 동안 친오빠처럼, 친 삼촌처럼 나를 보살펴주고 챙겨주었던 사람입니다. 이제 그를 떠나야 한다 생각하니 눈물이 저절로 났습니다.

“저.. 여기 그만 둘려구요….”

“…………”

“윤승준씨랑 같이 살기로 했어요”

사장님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 없이 내 어깨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낮으나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괜찮겠니?”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하니 사장님의 ‘괜찮겠니’ 란 그 말에는 무척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었어요. 사장님은 벌써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윤승준이랑 같이 가는 내 인생이 결코 괜찮치 않을 거라는 것을.

“진짜 괜찮겠어?”

사장님은 다시 한번 물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안 괜찮아도 어쩌겠어요. 나는 이미 윤승준의 여자가 되기로 약속을 해 버린 걸…..

사장님이 옆에 걱정스런 표정으로 서 있는 미나에게 말했습니다.

“들어가서 은영이 짐 좀 싸다 줘라”

사장님은 내게 말했습니다.

“조심해라. 그 남자, 네가 생각하는 만큼 착하고 좋은 남자가 아닌 것 같다…..”

“………..”

“힘들거든 언제든지 다시 돌아오렴. 알았니?

미나가 내 짐을 싸들고 나왔습니다. 나는 그 짐을 받아들었습니다.

“그동안 너무 고마왔습니다.”

나는 사장님께 꾸벅 절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갑자기 너를 잃다니 믿어지지가 않는구나…..”

“안녕히 계세요, 사장님. 미나야. 너도 잘 있어”

“어쨌든 윤승준이랑 잘 살아라”

사장님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며 내 얼굴을 한번 쓰다듬었다 놓았습니다.

미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사장님의 말에 모든 걸 짐작했는지 나를 껴안았습니다.

“결국 그렇게 되는구나. ”

나는 가방을 들고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혹시라도 윤승준이 나를 기다리다 지쳐 가버렸을까봐 조바심을 내면서 앞만 보고 달려갔습니다. 오오, 윤승준은 그 자리에 아직 있었습니다. 시간이 꽤 지체되었는데도 가버리지 않고 담배를 피우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초조한 표정으로 있다가 내 모습을 발견하더니 울듯한 표정으로 소리쳤습니다.

“오, 은영아. 와 주었구나!”

그가 가방을 받아들며 내 손을 꼭 잡았습니다.

“네가 도망가버린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제가 도망을 왜 가요?”

“그래. 와 줘서 고마워. 이제부터 아무 걱정 마. 널 행복하게 해 줄께”

윤승준에게 손목을 잡혀 걸어가면서 나는 생각했습니다. 난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