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생활은 참으로 따뜻했습니다. 내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행복이요,편안함이요, 안락함이었습니다.

동거 생활을 할 때도 행복하긴 했었지만 결혼을 하지 않고 같이 사는 것과는 벌써 마음이 달랐고 기분 자체가 달랐습니다. 결혼을 함으로 가족들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사회로부터 일단 인정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만해도 동거하는 남녀는 사회로부터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선 ‘동거’라는 말 자체가 음습하고 건강치 못한 냄새가 나잖아요. 그러니까 결혼은 하고 싶으나 떳떳하게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는 남녀들의 임시방편이 동거였습니다. 또한 이상한 관계의 남녀들이나 십대의 철부지들이 어른들의 눈을 피해 동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그랬기에 일단 동거하는 남녀는 색안경을 끼고 보았습니다.

불안한 동거생활을 청산하고 결혼식까지 올린 나는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확실한 신분상승을 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정식으로 결혼식을 하고 내가 윤승준의 아내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못했었어요. 나 같이 형편없이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윤승준같이 대단한 남자의 사랑을 잠깐동안이라도 받은 것으로도 과분하다고 생각했더랬습니다. 그가 내게 싫증이 나서 떠나간다해도, 다른 여자를 본다해도 나는 무조건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더랬습니다. 기쁘게 보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더랬습니다. 원망이나 미움같은 것은 아예 바늘끝 만큼이라도 품어서는 안 된다고 항상 자신에게 다짐을 해왔더랬습니다. 그랬는데 내가 윤승준의 아내가 된 것입니다.그의 호적에 이름을 올린 것입니다!

동거할 때도 그랬지만 윤승준은 오후 5시가 넘어서면 칼 같이 집에 들어왔습니다. 단 하루도 한눈을 파는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점심 때 집에 들러 밥을 먹고 가는 것도 여전했고 불현듯 허겁지겁 들이닥쳐 내가 집에 잘 있나를 확인하고 가는 것도 여전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장을 가더라도, 세탁소를 가더라도 미장원을 가더라도 늘 불안했습니다. 언제고 들이닥칠 윤승준을 대비해 집에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딴짓(윤승준이 생각하는 그 ‘딴짓’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안 하고 얌전하게 집에 있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나와의 생활이 그를 안정시킨 것인지 아니면 원래 실력이 뛰어난 사람인지 결혼 후 몇개월만에 윤승준은 승진을 했습니다. 서른 몇살의 나이에 높은 직위에 올라 기사 딸린 승용차까지 제공받았습니다. 회사에서 승승장구했던 것입니다.

월급도 많이 올랐고 내가 알뜰살뜰 살림을 한 덕택에 곧 우리는 방 두개짜리 작은 단독주택으로 이사 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전세였지만, 낡은 한옥이었지만 주인 눈치 보지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집에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남편 잘 만나 단독주택에 자가용까지 둔 사모님이 된 것입니다. 정말이지 상상조차도 못했던 일들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헐벗고 못먹으며 계모한테 온갖 구박과 설움을 받던 가엾은 소녀가, 남편을 잘 만나니 만사가 술술 풀려나갔습니다. 걱정근심없는 등 따시고 배 부른 팔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 생활이 1년여가 지속되었습니다. 나는 그 안락한 생활에 젖어들었습니다. 아침에 윤승준을 출근시키고 하루종일 집에서 책 보고 음악 듣고 낮잠 자는 여유롭고 편안한 생활.

나는 내 인생이 계속 그렇게 물 흐르듯 순탄하게 흐를 줄 알았습니다. 어린 시절의 혹독했던 고생을 보상이라도 받듯 따뜻하고 한가로운 봄날이 영원히 지속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편하게 살 팔자가 아니었나 봅니다. 내게 주어진 운명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고 만만하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안락함과 행복이 1년만에, 유리그릇 깨어지듯 깨어지고 만것입니다. 산산조각이 나고 만것입니다.

그날. 생각조차 하기 싫은 그날. 우리의 행복한 결혼생활에 불길하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던 그날은 겨울이 마악 시작되려하던 11월 초순이었습니다.

그날 나는 마당에서 김장을 하기 위해 배추를 절이고 있었어요. 자그마치 100포기나요. 시어머니네도 갖다드리고 누님네도 나누어 주기 위해 많이 준비를 한 것이지요. 나같은 사람을 며느리로 기꺼이 받아들여주신 분들입니다. 아까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고춧가루도 최상급으로, 마늘로 최상급으로만 준비해 김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일로 단련된 몸이라 100포기의 김장을 혼자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콧노래를 부르며 배추를 칼로 가르고 있을 때였습니다. 대문이 시끄럽게 흔들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나는 고무장갑을 벗고 얼른 대문을 향해 뛰어나갔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윤승준인지라 그가 또 왔으려니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대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밖을 향해 물었습니다.

“누구세요?”

거칠게 문을 흔들 때는 언제였는지.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장난을 쳤나?

“누구시냐니깐요?”

내 목소리가 자연적으로 높아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내 목소리와 함게 동시에 터져나온 고함소리.

“나야. 빨리 문 열지 못하고 뭐해?!”

윤승준이었습니다. 예상했던대로라 나는 서둘지 않고 천천히 대문을 열었습니다.그런데 놀라운 광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승처럼 우뚝 서 있는 윤승준. 그의 얼굴과 양복에 피가 낭자한 것입니다. 보기에도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버얼건 피로 칠갑을 한 채 그가 멍한 얼굴로 서 있는 것입니다.

“여보오!?”

내가 놀라서 외마디 비명을 질렀습니다. 윤승준은 나를 되는대로 밀치더니 집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나는 황급하게 윤승준을 따라 같이 집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게, 이게,이게 대체 무슨 일이예요?!”

내가 울상이 되어 물었습니다. 추운 겨울 냉수 한 바가지를 입에 들이부은 것 처럼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와들와들 떨려왔습니다.아침 잘 먹고, 입가심으로 커피까지 한 잔 마시고 여느 때와 똑같이 출근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몇 시간도 채 안 되어 옷에 피칠갑을 한 채 들어왔습니다. 진짜로 놀랄 일 아닙니까.더구나 윤승준은 ‘피’라는 물질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앞에서 몇번 말했지만 조용하고 점잖은 학자같은 사람이었어요.

윤승준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터져나왔습니다.

“개새끼!씨팔새끼!”

“여보오?”

윤승준의 말에 의하면 어떤 놈이 자기를 구렁텅이로 떨어트리기 위해 일부러 화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윤승준이 하는 일은 수출 업체의 물품을 검사하는 일이었습니다. 외국으로 나가는 물품에 하자가 있는지 견적서와 똑같이 만들었는지, 수량은 정확한지를 확인한 후 도장을 찍어주는 일이었습니다 . 그런데 몇몇 기업체에서는 물건은 얼렁뚱땅 대충 만들고는 윤승준에게 뇌물을 먹여 합격 도장을 받으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꼬장꼬장하고 정확하기가 시계 바늘같은 윤승준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가 없습니다. 몇번 퇴짜를 놓았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기업체 사장이 앙심을 품었던 모양입니다. 오늘 회사로 윤승준을 찾아왔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계속 깐족거리며 부아를 치솟게 하고 시비를 걸었다고 했습니다.

“거의 두 시간을 내 옆을 맴돌며 염장을 지르게 했어. 내 화를 머리 끝까지 나게 했어. 이를 악물고 참았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 놈을 흠씬 두들겨 패주었지”

“!”

“제일 먼저 내 손에 잡히는 게 굵기가 내 팔뚝만하고 길이가 1미터 쯤 되는 쇠몽둥이야. 그걸로 정신없이 놈을 두들겨 팼어. 아마 머리가 깨졌거나 갈비뼈가 부러져도 몇 대는 부러졌을 거야…”

윤승준이 키들키들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는 제 정신이 아닌 듯 했습니다. 그 상황에 웃음이 나오다니요.

“지..진..진짜 쇠..쇠몽둥이었어요?나..나무몽둥이가 아니고?”

내 말에 윤승준이 고개를 끄덕, 했습니다. 그래, 진짜 쇠몽둥이였어. 그 새낀 맞아도 싸. 그 개새낀 맞아 죽어도 싼 새끼라구.

“오..하나님!”

나는 머리를 감싸쥐었습니다.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쇠몽둥이로 두들겨 패다니!

“그…그..그래서… 그 사람은..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어요? 당신한테 쇠몽둥이로 맞은 그 사람은?”

내가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물었습니다.아무래도 심상치 않았습니다. 윤승준의 하얀 와이셔츠며 얼굴이며 양복에 묻은 피의 양이 보통 많은 게 아니었습니다. 그 정도로 많은 양의 피가 묻을 정도면 상대방은 보통 심하게 다친 게 아닐 것이라는 짐작이 들었습니다. 윤승준의 말대로 머리통이 깨어졌거나 팔이 부러졌거나 갈비뼈가 나갔거나 하는 엄청난 부상을 당해야 했을 것입니다.

“몰라. 나는 그렇게 패놓고 그냥 집으로 돌아온 것 뿐이니까. 그 개새끼 죽어도 내 책임 아니야. 날 화나게 하고 덤비게 만든 것은 그 새끼니까.”

그렇게 말하는 윤승준의 얼굴은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눈알은 시뻘겋게 핏발이 서 있었고 이마와 뺨은 핏자국으로 인해 귀신의 형상이 따로 없었습니다. 무시무시한 윤승준의 얼굴에 나는 소름이 오싹 끼쳤지만 얼른 밖으로 나갔습니다. 물수건으로 일단 윤승준의 얼굴을 닦아야했습니다. 귀신의 형상으로 그냥 그렇게 있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방에 들어오니 윤승준은 양복과 와이셔츠를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맨몸으로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얼굴 이리 내요. 좀 닦읍시다”

놀라움과 충격으로 벌렁벌렁하는 가슴을 진정하며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윤승준은 말없이 얼굴과 몸을 내쪽으로 돌렸습니다 .나는

물수건으로 윤승준의 얼굴을 닦아내었습니다.

정말이지 나는 몰랐습니다. 윤승준에게 그런 폭력적인 성향이 있는 줄을. 예전에, 남의 남자 무릎에 앉았다고 나를 욕하고 후려치고 짓밟은 적이 있었지요. 그때도 나는 윤승준에게 폭력적인 성향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를 아끼고 사랑해서 그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쇠몽둥이로 사람을 마구 패다니.

다음날이었습니다. 윤승준은 회사에 나가지 않고 집에 있었습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회사를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침에 내가 해주는 밥을 손도 대지 않고 방안에 누워만 있었습니다.

나는 어제 하던 김장을 마저하기 위해 마당에서 채소를 다듬고 있었습니다. 일이 손에 잡힐리가 있나요. 계속 헛손질만 하고 있었지요.그때 누가 벨을 눌렀습니다. 회사에서 사람이 찾아온 것입니다.

“윤 부장님한테 맞은 사람, 전치 10주 진단이 나왔답니다.윤부장님을 폭행죄로 고소했습니다”

수염자욱이 새파란 젊은 직원이 전해주는 말이었습니다. 윤승준은 묵묵히 직원의 말을 들었습니다.

“윤부장님이 회사를 그만두지 않으면 고소를 취하하지 않는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개새끼!”

윤승준은 마당에 서서 쭈뼛거리며 서 있는 내게 양복을 가져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회사에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회사에 누를 까치지 않기 위해 자발적으로 그만두려 했는데 그 새끼가 그렇게 나오는 이상 절대로 그만 두지 않을 거야”

상대방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병원에 입원해서는 계속 윤승준을 협박하고 회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유능하고 청렴한 윤승준을 놓치고 싶지 않았나봅니다. 다른 부서로 발령을 내렸습니다. 부장에서 평사원이 된 것입니다.그렇게 하면 상대방에서 만족할 줄 알았지요. 그렇게 했으나 상대방은 여전히 손톱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상처가 거의 다 나았는데도 퇴원하지 않고 계속 병원에 머물며 윤승준의 퇴사를 강요하는 것입니다.물론 상대방의 병원비는 우리가 다 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랴부랴 전세금을 빼고 작은 셋방으로 이사를 가야했습니다. 단독주택에 살게 된 기쁨이 채가시기도 전에 졸지에 셋방살이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몇달의 시간이 흐른 후 어쩔수없이 윤승준은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권고사직이었습니다. 상대방이 회사를 세무서에 고발해 흔들려 하니 회사에서도 더 이상 윤승준을 잡고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일은 일단락 되었고 윤승준은 실직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처음 한두달은 윤승준도, 나도 별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좋았어요. 우리는 극장으로, 공원으로 데이트하는 처녀총각마냥 돌아다녔습니다.

이게 웬일일까요. 직장이 금방 구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윤승준은 초조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알뜰살뜰하게 모아두었던 돈도 어느덧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고 돈 나올 구멍은 없었습니다. 그즈음 큰 형이 암으로 투병하고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의료보험이란 프로그램이 없을 때라 천정부지로 치료비가 들어갔습니다. 부모님이나 형제들이 모두 형의 병원비를 대기가 바빴습니다. 실직한 윤승준과 나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형은 1년을 걸쳐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형이 세상을 떠나기 몇 달전 윤승준과 나는 형집에 문병을 갔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갈 때마다 치료비에 보태라고 돈을 가져다준다지만 실직한 형편에 우리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사과 한 봉지를 들고 갔지요.

당시 교등학교 교사였던 형수는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남편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형이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자 생활비를 벌어야 했겠지요. 그래서 그녀는 남편을 간호하면서 집에서 학생들 과외를 하고 있었습니다. 집에서 쉬엄쉬엄 놀아가며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치료비는 몰라도 생활비는 충분하게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윤승준이 말했습니다.

“형수는 학교를 그만 두어도 돈 버는 방법이 있네. 학력이 좋으니까”

그렇지는 않겠지만 꼭 난 들으라고 하는 소리같았습니다. 나는 아뭇소리 못했습니다.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습니다. 내가 형수처럼 학력이 좋았다면 그러고 있지 않았을 겁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돈을 벌었겠지요, 그러나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차를 나르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일은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나는 엄연히 결혼한 가정주부입니다. 아무리 생활이 곤궁하다해도 결혼한 여자가 다방레지로 나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금통장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는데 돈 나올 구멍은 없고 직장은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윤승준도 얼마나 답답하고 불안했겠습니까. 이럴 때 내가 나서서 생활비라도 벌어오면 많은 도움이 될 텐데 내가 밉쌀스럽기도 했겠습니다. 나랑 결혼 한 걸 후회도 했을 거구요.

그 즈음 첫 아이를 임신했습니다. 임신 사실을 확인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윤승준에게 자식을 선물 할 수 있게 된 것이요.

사실 나는 임신을 잘 할 수 있을지 남몰래 불안에 떨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워낙 몸이 약했어요. 허리는 한 줌에 몸무게가 100파운드가 나가지 않습니다. 약하디 약해빠진 내 몸에, 손바닥으로 가려지는 내 작은 배안에 한 생명이 잉태되어 자라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뻤던 것도 잠시였습니다. 하필이면 이 때에,하는 생각이 얼른 들었습니다. 당시의 경제사정이 너무 안 좋았던 까닭입니다. 아기가 태어난다해도 제대로 키울 준비가 안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싸구려 옷 한 벌 사 줄 여건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그러나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몸안의 생명은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어느 날 새벽이었습니다. 아침밥을 짓기위해 부엌으로 나오다가 나는 그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아랫배가 갑자기 끊어질 듯 아파오는 것입니다.터져나오려는 신음을 입술로 눌러참으며 얼른 팬티 아랫부분을 확인했습니다.검붉은 피가 뭉실뭉실 팬티밖으로 배어나오고 있었습니다. 직감적으로 나는 알았습니다. 뱃속의 아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방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윤승준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습니다.

“여..여보….”

나는 윤승준을 흔들었습니다. 그러나 어젯밤 소주 한병을 다 마신채 곯아떨어진 윤승준은 일어날 기척을 보이지 않았어요. 나는 쓰러지다시피 옆집으로 가서 대문을 흔들었습니다. 옆집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계셨어요. 나랑 친하게 지내는 할머니였습니다.

“이…이게 무슨 일이야?”

할머니는 내 두 다리 사이로 줄줄 흘러내리는 피를 보고 사태를 짐작했습니다. 할머니는 나를 부축하여 일단 자기 집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방금 자기가 빠져나온 자리로 나를 눕혔습니다.

“아이고, 이를 어째? 유산이네…유산이야…..”

윤승준의 실직에 따른 여러가지 스트레스가 유산으로 이르게 한 것입니다.

그날 오후 나는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무허가로 소파수술을 해주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정식 산부인과를 찾아가 시술을 받기엔 주머니 사정이 너무 빠듯했습니다. 실직한 후 윤승준이 허구헌날 술타령으로 날을 보내고 있는지라 손가락 사이로 모래 빠지듯 돈이 술술 나가고 있었습니다. 급기야는 내일 먹을 양식걱정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푼이라도 아껴야했습니다.

그 곳은 아주 더럽고 허름한 곳이었습니다. 파리똥과 빈대를 때려 잡은 핏자국이 벽 여기저기에 그대로 묻어 있는 낡고 냄새나는 가정집이었습니다. 나는 비릿하고 이상한 냄새가 나는 어두컴컴한 방으로 안내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낡은 야전 침대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 침대에 몇명이나 되는 여자가 누웠을까요.

“몇개월이었지?”

거칠고 험한 인생의 풍파가 얼굴에 그대로 내려앉은 여자는 담배를 연신 피우면서 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 잘…잘 모르겠어요..아..아마 3..3개월 쯤 된 것 같아요….”

임신이 언제 되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던지라 대충 짐작으로 말했습니다. 여자는 내 대답에 한심하다는 듯 재떨이에 침을 찍 뱉더니 명령조로 내게 말했습니다. 팬티 벗어. 그리고 이리로 와서 다리를 벌리고 누워.

나는 그 여자 앞에 개구리처럼 수치스런 자세로누웠습니다. 다리 아래로 여자의 험상궂은 얼굴이 보이나 싶더니 차가운 여자의 손이 나의 그곳으로 거칠게 쑥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아,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겪는 무시무시한 아픔에 찢어지는 비명을 질러야했습니다.

뭔가 날카로운 것이 내 아랫도리로 함부로 쑥 디밀어지는 것 같더니 마구 들쑤시고 헤집어대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무시무시한 고통은 처음이었습니다. 나중에도 소파수술을 몇번 받았지만 그렇게 하늘이 노래지도록 아픈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방을 나오면서 봤더니 세상에! 나의 아랫도리를 헤집었던 것은 다른 게 아닌 구불구불하게 편 쇠 옷걸이었습니다. 마취도 없이 쇠 옷걸이로 핏덩어리를 마구 긁어냈던 것입니다. 여자들이 무허가 시술소에서 낙태수술을 받다가 자궁에 구멍이 나 피를 몇 말이나 쏟고 죽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게 어쩌면 나 일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등에 소름이 쭉 돋았습니다. 그렇게 나의 첫 아기는 세상의 빛 한번 보지못하고 스러졌습니다.

며칠 후였습니다. 나는 윤승준이 낮잠을 자는 틈에 집을 나섰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언제까지 윤승준이 취직이 될 때까지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 없는 일. 나라도 나서야했던 것입니다. 내가 찾아간 곳은 신문에 광고가 나온 직업소개소였습니다. 식당일이라도, 식모일이라도 좋았습니다.찬밥 더운 밥 가릴 겨를이 없었어요. 뭐든지 해야했습니다.

“글쎄요. 그런 험한 일을 하기엔 몸이 너무 약해보이는데…..”

미심쩍어하는 표정으로 나를 훑어보던 직원은 적당한 자리가 있으면 연락을 할 테니 연락처를 적어놓고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전화번호와 이름을 적고 있는데 킥킥대고 웃는 소리가 들려보니 소파에 앉아 있는 몇몇의 소녀들이었습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시골에서 막 올라온 게 뻔한 행색의 소녀들.호기심과 두려움과 기대감이 잔뜩 서린 얼굴로 자기들끼리 뭐라뭐라하며 장난들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 전 내가 처음 직업소개소를 찾았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나도 그때 그랬지요.

호기심과 두려움과 기대감으로 잔뜩 주눅이 들어 어깨를 움츠리고 직업소개소를 찾았더랬습니다. 그리고 한때 반짝, 편안하고 유복한 생활을 했더랬습니다. 지금은 다시 초라하고 빈곤한 초기의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내일 먹을 양식걱정을 해야할 처지인 것입니다.

직업소개소를 나서니 바깥은 황혼이 지고 있었습니다. 급할 것도, 서둘 것도 없었던지라 버스비라도 아끼려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나는 버스 정류장 몇 개를 지나면서 걸었습니다. 그러다가 집 가까운 시장 모퉁이에서 돗자리를 깔고 앉은 사주팔자 할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언제부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꽤 용한지 어쩐지 지나가다 보면 항상 손님들이 끊이지 않던 곳입니다.마침 그날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 앞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지갑에서 꼬깃꼬깃 숨겨두었던 돈 천원을 내놓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나의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윤승준의 생년월일을 물었습니다.

“에고,오래 못가겠군…”

두꺼운 돋보기 너머로 누렇게 헤지고 바랜 책장을 들치고 한참동안 손가락을 꼽더니 할아버지가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상극이야….물과 불 같은 상극…..10년 가면 많이 가겠네….일찌감치 헤어지는 게 수야”

예전에 주인집에서 만난 도사와 똑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니 그때서야 낮잠에서 깨어났는지 윤승준이 부시시한 차림새로 마루에 나와 앉아있었습니다. 머리는 수세미처럼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은 땟국으로 얼룩져있었습니다.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가는 한숨이 새어나왔습니다. 처음 만나 좋아했던 윤승준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는 조용하고 차분한 남자였습니다. 생김새도 그랬습니다. 날카롭고 이지적인, 어떻게 보면 샌님같고 어떻게 보면 머리에 지식이 가득한 학자풍의 모습을 한 남자였더랬습니다. 그런데 지금 술냄새를 푹푹 풍기는 더럽고 초췌하고 초라한 남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길에서 보면 그 어느 누구도 눈길 한번 주지 않을 거지같은 형상을 한. 남들은 다 퇴근 할 시간에 일어나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생활이 그렇게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일어나셨어요?배고프겠네?얼른 저녁을 지을께요”

나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상냥하게 말했습니다. 모습이 변했더라도 어쨌든 내 남편입니다. 끼니를 챙겨줄 의무가 있습니다.나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외출복을 벗고 얼른 부엌으로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윤승준이 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너 지금 어딜 갔다온 거야?”

윤승준이 날카롭게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솥뚜껑같이 크고 우왁스런 손이 나의 뺨을 후려쳤습니다.무방비 상태로 서 있던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습니다.

“이 바보 같은 년이 도대체 나를 뭘로 보고?”

그의 주먹과 발이 쓰러진 내 몸 위로퍽퍽 소리를 내며 마구 쏟아져내렸습니다.

“내가 이러고 있다고 지금 네가 날 무시하는 거야? 내 허락도 없이 어딜 나갔다 들어와? 너 지금 나가서 바람 피우고 들어오는 거지?”

그의 폭력은 무자비했습니다. 나는 삶은 감자처럼 처참하고 무참하게 으깨지고 짓이겨져야 했습니다. 그의 주먹과 발길질을 당하면서도 도대체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왜 그렇게 맞아야 하는지 이유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두손 모아 빌었습니다. 때리는 데는 비는 게 상책입니다. 어릴 때 계모가 나를 때리기 시작하면 나는 무조건 빌었습니다. 두손을 앞으로 모으고 싹싹 빌었습니다.

잘못했어요.용서해 주세요.제발 용서해 주세요….

윤승준은 정신없이 나를 때려놓고는 씨근거리며 자신의 바지를 내렸어요. 그리고는 내 옷을 우왁스럽게 벗기기 시작했습니다. 스웨터를, 바지를, 내복을, 그리고 브래지어와 팬티를 찢어 발기듯 벗겨내었습니다. 옷가지들이 떼어내어지자 금방 앙상하게 마른 나의 알몸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나의 버둥거리는 사지를 두 무릎으로 결박했습니다. 그리고 억지로 나의 두 다리를 벌렸습니다. 이어 들어오는 그의 발기된 성기. 그의 성기는 그냥 그렇게 쑤욱, 나의 몸을 헤집고 들어왔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무서운 폭행을 당하고 무서움과 서러움과 치욕감에 울고 있던 나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섹스가 가당키나 합니까? 그러나 윤승준은 내 심중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자기 욕심을 차립니다. 나를 폭행한 데 대한 사과 한 마디 없이 그렇게. 키스나 애무도 없이 그렇게. 그것은 부부가 나누는 성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강간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싫어! 싫어! 싫어! 싫다구!”

나는 마구 발버둥을 쳤습니다. 미친듯이 도리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없었어요. 윤승준은 막무가내로 내 몸 위에서 펄떡거렸습니다. 오, 하나님. 차라리 나를 죽여주세요!

내가 죽기살기로 반항을 하자 윤승준은 다시 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습니다. 내 코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습니다.

그 폭력은 전초전일 뿐이었습니다. 7년 7개월 동안이나 지속되었던 폭력의 전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