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연의 시작

20달러짜리 지폐를 정옥의 손에 쥐어주고 떠났던 잭은 정확하게 20일 후에 다시 스낵바에 나타났다.

"야, 잭이 다시 돌아 왔어, 잭이! 지금 매니저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주방에서 걸레를 빨고 있는 정옥에게 옥림이 뛰어 와서 잭의 출현사실을 호들갑스럽게 알려왔다.

" ! "

"빨리 나와 봐!"

정옥은 걸레를 물에 그대로 담구어 둔 채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마침 매니저와 잭이 주방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아, 정옥씨!"

매니저가 정옥을 보고 활짝 웃었다.

"이 분이 정옥 씨의 남은 근무 시간을 계산해 주겠다고 하는군. 별로 바쁘지 않으니 지금 나가도 좋아요. 좋은 선물 많이 얻어가지고...."

잭이 다가와 정옥의 손을 잡았다.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이 나타나 있었다.

"잭....."

정옥도 잭의 손을 마주 잡았다.

"얼른 나가."

옥림이 정옥의 어깨를 가볍게 미는 것과 동시에 잭이 정옥의 손을 이끌었다. 둘을 에워싸고 있던 몇몇 웨이츄레스들이 길을 비켜주었다. 그녀들의 부러운 눈초리가 정옥의 뒷통수에 와 꽂혔다.

"야아, 누구는 좋겠다아!"

누군가가 짖궂게 소리를 질렀다.

정옥은 잭의 손에 손목을 잡힌 채 그가 이끄는대로 걸었다. 벅찬 기쁨에 가슴이 와랑와랑 뛰었다.

아, 이 사람이 진짜로 돌아 왔구나...

정옥은 고마움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잭을 쳐다보며 웃었다. 자기보다 한참 키가 커서 고개를 들어야만 올려다 볼 수 있는 잭이었다. 잭도 정옥을 내려다 보며 싱긋싱긋 웃었다.

잭이 진짜로 돌아오리라곤 생각도 못한 정옥이었다. 한 달만에 돌아오겠다던 쟌이 아주 영영 돌아오지 않았듯이 어쩌면 잭도 다시는 안돌아 올것만 같은 예감에 그녀는 밤마다 잠을 설쳤던 것이다.

"저, 저...."

잭의 손에 이끌려 큰길가까지 나온 정옥은 걸음을 멈추며 잭의 주위를 환기시켰다.

" ? "

"마이 팬츠 이즈 노 굳. 마이 셔츠 이즈 노 굳..."

정옥은 손으로 자기 옷차림을 가리켰다.

손에 들었던 걸레는 놓고 오긴 했지만 정옥의 차림새는 유니폼 그대로였다. 정옥은 집에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는 의사를 손짓발짓으로 표시해 보였다. 정옥의 엉터리 영어를 알아들었는지 잭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큰 길 전봇대 근처에 잭을 남겨두고 정옥은 쏜살같이 자취방으로 뛰어갔다.

옷장 문을 여는 정옥의 손이 마구 떨렸다.

아, 하나님은 날 버리지 않으셨구나! 감사합니다. 내게 다시 좋은 미국남자를 보내 주셔서. 제발 이번만은 결혼까지 해서 미국으로 들어 가게 해 주세요!

옷을 갈아입은 후 립스틱까지 바르고 정옥은 숨이 턱에 차서 잭에게 달려 갔다.

잭은 전봇대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장승같이 큰 키의 미국남자가 전봇대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같이 멋있어 보였다.

정옥은 잠시 서서 숨을 고르며 잭의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잭을 힐끗거리며 쳐다보았다.

미군들이 주둔하는 미군부대가 근처에 있고 미국선박이 매일같이 드나드는 항구도시라 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 미국인이었지만 잭의 몸은 지나가던 사람이 다시 한번 돌아볼 정도로 미끈하고 탄탄했던 것이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영어로 어떻게 하는 줄 몰라 한국말로 미안해요를 연발하는 정옥을 잭은 미소를 띄고 바라보았다.

길가에 서 있는 둘을 보고 마침 택시 한 대가 다가왔다.

잭은 정옥을 안 쪽으로 앉게 했다. 잭이 무어라고 운전사에게 말했다.

운전사가 '오케이'라고 대답하며 백미러로 정옥의 얼굴을 힐끗 한번 쳐다 보았다. 무언가 복잡한 표정으로.

그러나 정옥은 운전사의 얼굴에 나타나는 그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만나던 첫 날, 보석상으로 데리고 가 진주목걸이를 사 주었던 쟌처럼 잭도 자기에게 선물을 사 주기 위해 어디론가 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정옥. 택시 운전사의 얼굴 표정을 읽기에는 정옥의 마음이 너무 들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후 정옥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선물을 사러 가려면 택시는 시내 어딘가로 갔어야 했다. 그러나 택시는 시내를 지나고도 한참을 더 달려가고 있었다.

정옥은 불안이 담긴 눈으로 잭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잭은 정옥의 손을 잡은채 차창 밖 풍경만 내다보고 있었다.

"저, 저기요, 아저씨..."

참다못해 정옥이 택시운전사를 불렀다. 택시 운전사가 백미러로 정옥을 보았다.

"지금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정옥의 말에 택시 운전사가 기가 찬다는 듯이 허, 하고 웃었다.

"그럼 아가씬 어디를 가는 지도 모르고 저 남자를 따라 나선 거요?"

택시 운전사가 무어라 더 말을 하려는 찰나 잭이 무어라고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택시 운전사는 '쏘리' 라고 말하면서 고개를 두어번 주억거리더니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는 계속 앞만 보고 운전을 했다.

거의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큰 빌딩앞이었다. 정문 앞에 군복을 입은 군인이 근엄한 자세로 보초를 서고 있는 빌딩이었다.

정옥은 어리둥절한 채 잭의 손에 이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잭은 긴 복도를 지나서 어느 방으로 정옥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 방의 중앙 벽에는 정옥도 몇 번인가 보아서 알 수 있는 미국국기와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었다.

제복을 입은 미국남자가 잭과 정옥을 맞았다. 잭은 정옥을 뒤로 하고 잠깐동안 제복을 입은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 후 잭은 영어가 잔뜩 쓰여진 종이를 남자로부터 받아 정옥에게 내밀었다. 정옥이 그게 무엇을 뜻하는 줄 몰라 바보같이 멍하니 서 있기만 하자 제복의 남자가 정옥에게 한국말로 '이름' 이라고 말해 주었다.

아하, 이름을 쓰라는 거구나.

정옥은 남자가 주는 볼펜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왜 내 이름을 쓰라는 걸까. 정옥은 궁금했다. 그러나 영어를 못하는 정옥은 이유를 물어볼 수도 없었다.

정옥이 옆에 서 있는 잭을 쳐다 보았다. 정옥과 눈이 마주친 잭이 다정하게 미소지었다. 잭의 미소를 보자 정옥은 다소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잭이 손가락으로 짚어주는 빈 칸에 이름을 써 넣었다. 그리고 두어장의 서류에도 이름을 더 써 넣었다. 조금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름을 다 쓰고 나자 제복의 남자가 정옥에게 오른 손을 들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정옥은 왜 손을 들어야 하는지 영문을 몰랐으면서도 시키는대로 오른 손을 들었다. 정옥이 흘낏 보니 잭도 오른 손을 들고 있었다.

남자가 정옥과 잭을 보고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무어라고 잭에게 물었다. 잭은 '예스'라고 대답했다. 남자는 또 정옥에게 똑같은 말을 물었다. 무어라고 묻는지 알아들을 도리가 없는 정옥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잭이 정옥의 귀에 대고 '예스' 라고 하라고 시켰다.

얼떨결에 정옥은 잭이 시키는대로 '예스' 라고 대답했다.

남자가 다시 몇 마디 하더니 정옥에게 손을 내리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정옥은 손을 내렸다.

무언지 모르지만 조금은 엄숙한 느낌의 의식은 끝난 것 같았다. 제복의 남자가 종이를 주섬주섬 챙겼다.

잭이 정옥에게 다가가 이마에 입 맞추었다.

모두 10분도 안돼 일어난 순식간의 일이었다.

남자가 잭에게 의미있는 눈길을 주면서 정옥에게 알듯모를 듯한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정옥은 그 남자의 미소를 보았다. 그렇지만 그저 모든 게 어리둥절하기만 했던 정옥은 그가 지은 미소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며칠후.

그날 잭이 정옥을 데리고 갔던 곳은 미국 대사관이었다는 것을 알았다.그리고 그날 정옥은 잭과 함께 결혼에 대한 의식을 치루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잭의 나이가 정옥보다 무려 열살이나 많은 서른 여덟 살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정옥은 라디오를 껐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던 차 지나가는 소리가 다시 씽씽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따끔 큰 트럭이 정옥이 쪼그리고 앉은 방구들을 흔들며 지나갔다.

곧 통금이 될 것이다.

정옥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10분 전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 저녁도 잭은 돌아오지 않을 작정인가....

정옥은 불안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벽시계를 쳐다 보았다.

결혼예식을 치른 며칠 이후.

잭은 셋방을 따로 얻어 정옥의 짐을 옮기게 했다. 6개월치의 방세는 잭이 미리 지불했다.

"정옥아. 넌 참 알 수 없는 아이야. 영어 한 마디 못하면서, 남자들과 말 한 마디 제대로 나누지 못하면서 어떻게 미국남자와 결혼을 다 하니? 제발이지 그 기술 나 한테도 좀 가르쳐 줘 봐."

잭의 부탁으로 잭과 정옥사이의 통역을 맡고 있는 옥림이 한 말이었다.

정옥은 그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잭은 이번 한국 방문이 마지막이래. 더 이상 외항선 일을 안하게 됐다고. 일단 자기가 미국으로 들어가서 네 미국 입국에 대한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 표를 부쳐주겠단다. 그런데 그 기간이 한 6개월은 걸릴 것 같다네. 생활비도 매달 부쳐주겠대. 그동안 고생많이 했으니 스낵바 일은 그만두고 6개월 동안 그냥 푹 쉬란다. 이제 네 팔자는 필대로 펴 버린거야"

옥림은 잭의 말을 정옥에게 전하면서 연신 '팔자가 폈다' 를 연발했다. 그녀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부러움이 나타나 있었다.

'팔자가 폈다' 라며 정옥을 부러워 하는 사람은 옥림뿐만이 아니었다.

스낵바의 모든 웨이츄레스들은 물론이고 그 바닥 여자들은 모두 다 정옥을 부러워했다. 쟌과의 관계로 그 바닥의 신데렐라로 떠 올랐던 정옥은 잭과의 결혼으로 명실공히 다시 한번 신데렐라가 되었다.

잭이 시키는대로 스낵바를 그만두고 잭이 마련해준 셋방으로 짐을 옮기는 날은 주위여자들이 모두 모여 들었다.

"뜯어보고 또 뜯어봐도 남자들의 시선을 끌 구석이라곤 없는 데 어떻게 정옥이 잭의 눈의 들었을까"

"우리 눈엔 예쁘지 않아도 잭의 눈엔 예쁘게 보였나보지 뭐. 아, 예전에 쟌인가 하는 남자도 정옥이한테 반해서 결혼하자고 그랬지 않아. 월남전에 나가서 죽어버리긴 했지만..."

"글쎄 말이야. 정옥이가 남자를 끌어당기는 이상한 힘이 있나 봐"

"흥, 설마 거기에 금테를 두르지는 않았을 거고....."

"어이구, 이런 데서 노는 여자 아니랄까봐 말하는 뽄새하고는...그나저나 정옥아,잭이 너랑 일주일을 너랑 같이 지낸댔냐? 이 주일을 같이 지내고 간댔냐?

"아마 일 주일일걸? 잭이 타고 온 배가 일 주일 후에 떠난댔으니까..."

"야, 정옥아. 일 주일동안 네가 아는 방법이란 방법은 다 동원해서 잭을 반쯤 죽여서 보내라. 그래야 그 맛 못 잊어서 얼른 널 데리고 가지"

"잭이야 얼른 정옥이를 데리고 가고 싶겠지. 그런데 미국 가는 수속이 복잡하다며? 한 6개월정도 걸린대지, 아마?

"그러게. 방금 결혼한 마누라 눈에 밟혀서 잭이 우째 발걸음을 떼 놓을꼬. 일 주일이면 금방 지나갈텐데 잭이 아예 문밖 출입 할 생각않고 밤낮 그것만 하다 가려고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네. 정옥이 너 각오 단단히 했니? 잭, 그 남자 생긴 것 보니 엄청 밝히게 생겼던데?"

여자들의 농담은 그야말로 농담으로 끝났다.

여자들의 농담처럼 잭은 일주일동안 그것만 하지 않았다.

미국 대사관에서 돌아온 다음날 밤 잭은 정옥을 자신의 호텔방으로 불러들여 관계를 가졌다. 영준과 쟌을 거치며 남자 몸에 어느덧 익숙해진 정옥이었지만 매번 섹스를 할 때마다 긴장되고 움추려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날 밤 잭의 손이 정옥의 몸 구석구석을 안가는 곳 없이 더듬었을 때도 정옥은 잔뜩 긴장되어 있었다. 탄탄하고 강인한 몸을 가진 잭이라 섹스도 힘차고 거칠게만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위는 너무나도 간단하고 싱겁게 끝났다.

정옥의 몸위에서 두어번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 같더니 금방 잠잠했다.그리고 그는 곧 잠이 들어버렸다. 정옥은 잭이 일부러 서둘러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그 무언가의 행위를 일부러 억제하고 하지 않는 것같은 느낌도 강하게 받았다.

아무도 없는 호텔방, 시간도 많았는데 왜 그는 서둘렀을까. 그리고 나의 몸을 통해 하고저 했던 행위가 무엇이었을까...

정옥은 잠든 잭 옆에 누워 밤새도록 생각했지만 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잭은 새벽에 다시 한번 정옥을 원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도 간단하고 빠른 것이었다.

두 번째 관계는 셋방으로 짐을 옮긴 날 밤이었다.

그날 밤 처음과 다른 게 있다면 정옥으로 하여금 자신의 것을 빨게 했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행위는 영준과 쟌과의 섹스에서도 보통 있어왔던 일이었으므로 정옥은 성심껏 그가 원하는 일을 해 주었다. 그러나 잭은 그 시간이 매우 길었다. 영준과 쟌은 보통 2,3분이면 최대로 흡족해 했었다. 잭은 정옥이 10분 이상을 해주었는데도 별로 만족해 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힘이 든 정옥이 스스로 잭의 그것에서 입술을 뗐을 때에야 마지못해 고맙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그리고나서 그만이었다. 벌써 며칠째 잭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벽시계가 뎅뎅,하고 열두 번을 쳤다.

정옥은 일어나서 자리를 깔았다. 그리고 입었던 스웨타와 바지를 벗고 전등불을 끈채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어둠과 함께 정옥을 휩쌌다.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치루어진 결혼. 그리고 비록 부드럽긴 했었으나 무언가를 매우 억제하는 듯 느껴지던 잭과의 섹스. 일주일동안 같이 있겠다고 하고는 벌써 며칠째 돌아오지 않고 있는 잭....

정옥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여섯달 치 방세를 미리 선불해 놓았고 앞으로 여섯달동안의 생활비를 잭이 부쳐준다고는 했지만 스낵바까지 그만둔 처지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옥은 그저 까마득하기만 했다. 여섯달 후 잭이 미국으로 데리고 들어간다고 했지만 그 말이 피부에 와 닿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잭의 말이 믿을 수가 없었다. 잭이 왜 자기랑 결혼을 했는지, 그리고 왜 자기를 미국으로 데려 가려고 하는지.

자기를 사랑해서 인것 같지는 않았다.

나도 모르는 목적이 있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하다 정옥은 어둠속에서 혼자 피식 웃었다.

털고 털어봤자 빈 몸뚱아리 하나뿐인 자기에게서 이룰 만한 목적이 뭐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든 때문이었다.

그때 다급하고 거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방문이 벌컥,하고 급하게 열렸다.

열린 문으로  커다란 잭의 몸이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놀라 벌떡 일어나는 정옥의 몸을 잭이 찍어 눌렀다. 정옥이 입고 있던 얇은 잠옷이 잭의 거친 손에 의해 찢겨져 나갔다. 어둠속에서 하얗게 드러나는 정옥의 젖을 두 손으로 움켜진 잭. 그는 양쪽 젖을 마치 빨래짜듯이 세게 비틀어 돌렸다. 그리고는 한쪽 젖꼭지에 입을 대더니 거칠게 빨아대기 시작했다.

"아, 그만! 아파요! 제발 그만요!"

두려움에 질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당하고만 있던 정옥이 젖꼭지가 떨어져 나가는 아픔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침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에게는 정옥의 비명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정신없이 젖을 빨아대던 그는 그마저도 성에 차지않는다는 듯 이번에는 이빨로 정옥의 젖꼭지를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더니 한순간 거칠게 물어뜯기 시작했다.

아아악, 방이 떠나갈 듯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정옥은 잭의 머리를 힘껏 밀쳤다.

잭의 몸이 나동그라졌다.

방바닥에 나동그라진 잭은 그제서야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그는 숨을 씨근덕거리며 몸을 일으켜 앉더니 어둠속에서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

짧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놓였다.

이윽고 잭은 끙, 소리를 내며 정옥이 깔아놓은 이불위에 몸을 눕혔다. 머리를 베개에 대자마자 그는 곧 잠에 빠진 듯 코고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잭의 입에서 뿜어나오는 술냄새가 방안을 진동시켰다.

정옥은 아리고 쓰려오는 젖을 움켜잡은채 어둠속에서 한참 숨죽여 울었다.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어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쳐도 잭의 행동은 정상이 아닌 것 같았고 그동안 잭과 보낸 시간을 되돌아 봐도 역시 뭔가가 석연찮았다.

어쩌면 좋지....

그러나 이제와서 어떻게 되돌릴 수도 없었다. 알고 했던 모르고 했던 둘은 서류상으로 결혼까지 한 부부아닌가. 어쨌든 가는 데까지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당장 잭과의 관계를 그만둔다해도 정옥은 별 뾰족한 수도 없었다.

이미 그만 둬버린 스낵바 잡역부로 도로 돌아 갈 수도 없었다. 정옥이 그만둔 그날로 사람이 채워졌다고 했다. 그리고 정옥이 무엇보다 두려운 건 미국 남자와 결혼해서 미국에 들어간다고 정옥을 부러워해 마지않는 옥림을 비롯한 그 동네의 여자들이었다.

지금 와서 잭을 따라 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녀들은 뭐라고 그럴까. 나보고 미쳤다고 하겠지.

 

"앞으로 매달 편지 하겠대. 다른 생각말고 얌전히 자기 생각만 하고 있다가 들어 오래"

"응..."

"아무리 늦어도 6개월 안에는 미국에 들어갈 수 있을 거란다. 날짜가 잡히면 비행기 표는 보내주겠단다"

"응..."

두어평 남짓한 정옥의 방.

잭이 떠나는 날이었다.

잭과 정옥은 옥림을 통해 서로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있었다.

잭이 말을 하고 정옥은 그냥 듣는 편이었다.

정옥의 옆구리를 옥림이 찔렀다.

"야, 남편이 떠나는데 뭐라고 한 마디 쯤 해라. 중간에서 내가 미안해 죽겠다."

"그냥....."

옥림의 재촉에 정옥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냥, 건강하라고 그래"

"그 말 말고 다른 말 할 건 없어? 명색이 네 남편이쟎아. 사랑한다던지 앞으로 보고 싶을 거라던지...."

옥림이 말했다. 얼굴에 장난을 가득 담고서.

"정 그렇다면..."

정옥이 불안한 표정으로 옥림을 쳐다보았다.

"내가 미국 공항에 내려선 어떻게 해야하는지 한번 물어 봐 줘"

이제 잭은 떠난다.

6개월 후에 데려가겠다는 약속만 하고서. 그것도 나를 데리러 나오는 게 아니고 부쳐주는 비행기 표를 가지고 나 혼자 잭이 있는 곳까지 찾아가야 한단다. 영어는커녕 한글도 제대로 못읽고 쓰는 내가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야 간다는 미국에 어떻게 찾아갈 것인가......

며칠전 잭이 보였던 광폭한 행동으로 인한 두려움은 벌써 정옥에게서 가셔져 버리고 없었다. 대신 미국에 어떻게 혼자 찾아갈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정옥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미국으로 가긴 갈 수 있는 건가, 하는 의구심은 요 며칠 잭이 정옥에게 보여준 행동으로 인해 저 멀리 달아났다. 정옥은 잭이 자신을 미국으로 불러들일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잭이 나를 확실히 사랑하고 있어. 그래서 그는 나와 결혼 한거야....

다음날 눈을 뜬 잭은 그때까지도 방 한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는 정옥을 발견하고는 크게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정옥에게 손을 내밀려던 그는 정옥이 두려움에 찬 표정으로 자신을 슬슬 피하는 행동을 보이자 무언가를 깨달은 듯 했다. 그는 자기가 그런 짓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다는 듯이 머리를 감싸쥐며 괴로워 했다.

자신에게 물어뜯겨 피가 나는 정옥의 젖꼭지에 손수 약을 발라주며 잭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정옥. 미안해. 정말 미안해."

잭은 정옥의 뺨과 이마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더니 정옥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는 백화점으로 정옥을 데리고 갔다.

그날 정옥은 양손에 다 들지도 못할만큼 많은 물건을 잭으로부터 선물받았다.

시계, 옷, 화장품, 구두....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잭이 배를 타고 떠나는 당일 오전까지도 잭은 정옥을 백화점으로 데리고 다니며 평소 정옥이 꿈도 꾸지 못하던 비싼 것들을 사서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이후 떠나는 날까지 사흘을 정옥의 방에서 잤다. 물론 섹스를 했지만 지난번처럼 정옥을 놀라게 하는 행동은 없었다. 부드럽게 애무하고 부드럽게 끝냈다.

그래서 정옥은 잭의 광폭했던 그날밤 행동을 ' 술에 취해서 그랬었구나 ' 하고 가볍게 잊어버릴 수 있었다.

 

기껏 하고 싶은 말이 앞으로 어떻게 미국에 찾아가냐는 말이 한심스러웠던지 옥림은 정옥의 말을 잭에게 전하지 않았다. 대신 옥림은 눈을 홀기며 정옥에게 면박을 주었다.

"이 바보야. 그런 것은 걱정 안해도 돼. 잭이 어련히 공항에 마중 나갈까. 6개월동안 맘 변하지 말고 돈이나 잘 부치라는 다짐이나 해 두지, 벌써부터 무슨 미국 찾아갈 걱정은....."

떠날 시각이 다가왔는지 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서는 잭을 따라 일어서며 정옥이 옥림에게 황급히 말했다.

"잘 가라고, 6개월 뒤에 꼭 다시 만나자고 전해 줘"

옥림이 정옥의 말을 잭에게 전했다. 잭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팔을 벌려 정옥을 안았다. 그리고 정옥의 볼과 입, 그리고 이마에 키스했다.

잭은 가방을 들고 방을 나섰다.

집 밖에는 잭이 미리 불러 둔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잭이 돌아서 뒤따라 나온 정옥을 다시 한번 포옹하고 택시에 올라 탔다. 그는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는 택시에서 정옥을 내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정옥과 옥림도 같이 손을 흔들었다.

잭을 태운 택시는 시커먼 배기가스를 내뿜으며 떠났다.

"얘,그만 들어가자."

택시가 안보일 때까지 못박힌 듯 서 있는 정옥을 옥림이 흔들었다.

"벌써 정이 든거야?"

정옥의 눈에 반짝 눈물이 비치는 걸보고 옥림이 말했다.

정옥은 옥림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 갔다. 방에는 사다만 놓고 채 끄르지도 못한 쇼핑 보따리가 그대로 쌓여 있었다.

"아이구, 뭘 이리 많이 샀냐? 없는 게 없네?"

힘 없이 방바닥에 주저앉는 정옥을 대신해 옥림이 쇼핑가방을 일일이 풀기 시작했다. 옥림의 손에 의해 쇼핑가방 밖으로 꺼내져 나오는 물건들을 정옥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잭은 떠났다. 나는 6개월동안 매달 그의 소식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과연 내가 아무일 없이 무사히 미국에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정옥을 다시 엄습했다.

쟌에 대한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쟌도 정옥을 미국에 꼭 데리고 들어가겠다고 했었다.그리고는 어이없이 죽어버렸다.

내게는 항상 불행한 일들만 생겨나는데..영준도 그렇고 쟌도 그렇고.....

"그나저나 너 잭에 대해서 뭘 확실히 알고는 있는 거니?"

방바닥에 잔뜩 늘어진 옷가지와 화장품들을 걸쳐보고 냄새를 맡아보던 옥림이 문득 생각난다는 듯 정옥에게 물었다.

".........."

정옥이 잭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이가 정옥보다 열살 위이고 미국 배를 타고 들어와 그 미국 배의 짐을 하역하는 일을 한다는 것밖에.

고향이 어딘지도, 지금 미국 어느 주에 사는지도, 심지어는 가족사항도, 아무 것도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이런 말 해서 뭐하지만...."

옥림이 망설이는 어조로 말했다.

"첨엔 안그랬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이상하게 난 잭이라는 남자가 썩 좋은 남자라고 느껴지지가 않아. 너랑 결혼까지 했으니까 네 남편이라서 내가 무어라고 함부로 말은 못하겠지만 말이야....."

"............"

"왠지 진실성이 없어 보여. 그가 하는 말이 모두 거짓말같애. 잭네 집이 미국서 엄청 부자라며? 그런데 왜 그 부잣집 아들이 뱃짐 나르는 일을 하겠니? 우리 눈엔 미국 사람들이라면 모두 다 멋져보이고 잘나 보이지만 사실 그 뱃짐 나르는 일 노동일이쟎아. 그런 일은 많이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 아니야? 그렇다고 생각 안해?

" ! "

정옥은 그동안 잭이 거짓말을 할 거라곤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돈을 펑펑 잘 써대서 진짜로 돈이 많은 남자인 줄 알았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미국의 잭네 집도 엄청 부자일 줄 알았다. 그런데!

"그리고 이 말은 끝까지 안하려고 했지만 이왕 말이 나왔으니 해야겠다."

옥림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비쳤다.

"너랑 결혼하고 그 남자 며칠 집에 안들어 온 적 있었지? 그 남자 어디 있었는 줄 아니? 여자를 사서 잠을 잤단다. 잭이랑 잠 잔 여자가 벌써 떠들고 다녀서 소문이 짝 났어. 갓 결혼 한 자기부인을 혼자 집에 두고 다른 여자랑 자는 남자,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지?"

그랬었구나. 아아, 그랬었구나!

"그리고 이제와서 말이지만 그런 엉터리 결혼이 어디있니? 평생에 한번 있는 결혼을 그렇게 얼렁뚱땅 해치우다니. 네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채 말이야. 넌 사실 결혼하는 줄도 모르고 했쟎아. 신부도 모르는 결혼, 그거 사기결혼 아니니? 그가 그런식으로 너랑 꼭 결혼을 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자기 말대로 자기 집이 그렇게 부자라면 너 아니어도 결혼하자는 여자들이 줄을 섰을 텐데..."

정옥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사기결혼!

그래, 그렇게 서두를 일이 아니었는데....

"미안하다. 널 걱정케 하거나 기분나쁘게 할 생각은 없었어.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정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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