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탁자에 놓인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껐다. 그리고 정옥을 쳐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짧게 자른 머리가 왠지 추워 보였다.

"정옥 씨라고 했죠?"

정옥은 고개를 숙이고 물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피차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정옥은 괜시리 헛기침도 한번 해보고 탁자 위에 놓인 담뱃갑도 쥐었다 놓아보는 남자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이름이 강우라고 했던가.

"얼마전 제대해서 지금까지 그냥 집에서 놀고 있습니다. 마땅한 취직자리도 없고 해서...."

강우는 정옥을 쳐다보며 다시 한번 어색하게 웃었다.

문득 정옥은 그의 웃음에서 까마득히 잊고 있던 영준의 얼굴을 떠올렸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난 후에도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영준은 어색하게 웃곤 했었다. 지금 정옥의 앞에 앉은 강우라는 남자처럼.

"곧 미국으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강우는 다시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저는 오래전부터 미국을 동경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강우는 '미국'이란 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미국, 미국이 무엇이길래 모두 미국을 동경하는가. 미국이 도대체 어떤 나라길래 강우처럼 집안이 좋은 사람도 '동경' 이란 말을 서슴없이 쓰는가.

정옥은 가늘게 한숨을 쉬면서 생각했다.

잭이 떠난 한 달쯤 후의 어느 햇빛 맑은 일요일.

옥림과 공원에 갔다가 알게 된 강우라는 남자였다.

강우도 친구 몇 명이랑 함께 공원에 온 것이었다. 정옥은 강우라는 남자에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러나 강우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얘, 강운가 하는 그 남자, 국회의원 모씨의 아들이래. 집안이 아주 쨍쨍하다는데? 그 사람 친구들이 그러더라"

어느새 강우의 친구 한 명과 연인관계로 발전한 옥림이 정옥에게 전해 준 말이었다.

"그 남자 네게 관심이 많은 것 같았어"

"............"

"꼭 한 번만 너를 만나게 해달래"

"나 결혼했다고, 몇 개월 있다 미국에 들어갈 사람이라고 그러지 그랬어"

"그러엄. 다 말했지. 그런데도 좋다는 거야. 한번 만나보지 않을래?"

옥림의 성화에 못이겨 나온 자리.

강우는 계속 담배만 피워대고 있었다.

싱거운 남자. 이럴 걸 뭐하러 나오라고 했나.

정옥은 반쯤 남은 커피잔을 집어들었다. 마저 마시고 일어 설 생각이었다.

정옥의 심중을 눈치챘는지 강우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처음 공원에서 정옥 씨를 보았을 때 그냥 참 매력적인 여자다,하는 느낌만 가졌었습니다.수줍어하고 말이 없는 모습도 퍽 인상적이었고. 그런데 옥림 씨로부터 곧 미국에 들어갈 거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동안 잠자고 있던 미국에 대한 꿈이 다시 왈칵 살아나더군요. 전 생각했습니다. 정옥씬 하나님이 나를 미국에 보내 주려고 보낸 동아줄이다....."

"집안이 좋으시다고 들었는데요. 아버님도 그렇고....."

정옥이 애써 한 마디 하자 강우의 얼굴에 곧 냉소가 떠올랐다.

"내가 미국에 가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우리 아버지 때문이요. 겉과 속이 다른 민중의 배신자, 우리 아버지 때문에...."

강우는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탁자위에 얌전히 포개져 있는 정옥의 두 손을 덥썩 움켜 쥐었다.

"정옥 씨! 날 도와 줘요. 난 미국엘 가야 해요. 이 땅에 이대로 있다가는 내가 미치던지 아버질 죽이던 일을 내고 말거야. 날 데리고 미국에 가 줘요!"

강우의 눈빛은 간절했다. 정옥은 그의 눈빛에서 다시 한 번 영준을 느꼈다.

영준씨....

 

정옥의 생일을 맞아 잭으로부터 선물이 부쳐져왔다. 팥알 만한 사파이어가 박힌 목걸이였다.

"생일 축하한단다. 매일 정옥이 생각만 한대. 보고 싶다네"

목걸이와 같이 부쳐져 온 잭의 편지를 읽어주던 옥림. 옥림은 목걸이를 자기가 먼저 한참 만지작거리다 정옥에게 건넸다.

"어서 걸어 봐. 얼마나 예쁜지 좀 보게"

정옥은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전등불 밑에서 푸른 바닷빛 사파이어는 영롱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잭의 집이 과연 부자이긴 부자인가 봐. 이런 걸 사서 부쳐 주는 걸 보면. 이런 것 엄청 비싸겠지?"

옥림이 정옥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옥림은 전에 없이 요즘 정옥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별로 좋지 않은 남자일 것 같다는 옥림의 말은 잭으로부터 꼬박꼬박 부쳐져 오는 생활비와 편지, 그리고 선물때문에 점차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을 옥림도 알고 있었다.

"글쎄....."

정옥은 목에 건 목걸이를 손거울에 비추어 보며 웃었다.

그것 봐. 네가 한 말이 안맞쟎아.

정옥도 옥림에게 말하고 싶었다.

네 말대로 잭이 좋지 않은 남자라면, 나랑 사기로 결혼을 했다면 왜 이런 선물을 사서 보내주겠니? 네 말이 틀렸어. 잭네 집은 부자임에 틀림없어. 부자는 아니더라도 이런 사파이어 목걸이랑 생활비를 보내 줄 충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일거야.

정옥은 옥림의 말로 인해 한동안 갈등하고 고민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잭과의 결혼에 대해 생각도 했었다. 비록 똑똑하지 못하고 빠릿빠릿하지 못한 정옥이었지만 옥림이 하는 말이 어느정도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옥림의 말이 다 맞다하더라도, 설사 잭이 자기랑 사기로 결혼을 했다하더라도 정옥은 그 결혼을 무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정옥은 미국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어쨌든 여기 한국보단 낫겠지. 아무래도 미국이니까. 빈 깡통만 줏어 팔아도 여기 공무원 월급은 나온다는 데가 미국이라던데....강아지도 끼니 때마다 쇠고기를 먹는다는 데가 미국이라던데......

그동안 그 동네 여자들로부터 들어온 숱한 이야기들이 미국에 대한 동경과 환상으로 정옥을 빠트린 것이다. 또한 당시의 정옥으로서는 미국 가는 방법말고는 별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것도 한 이유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한국 땅을 뜨고 싶어진 생각이 간절한 정옥이었다. 한국 땅에서는 앞으로도 별다른 희망이 없었다.

어느덧 정옥의 나이는 서른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아 놓은 돈 한 푼 없는데다 웬만한 직업은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정옥이었다. 못배운 정옥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예전처럼 식모나 잡역부일이 고작이었다.

미국에 가지 않는다면 예전의 그 우울하고 구질구질한 생활로 다시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아아, 다시 그 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진짜 싫어!

그즈음 정옥은 새로운 사실을 하나 깨닫고 있었다.

정옥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자기 몸을 움직여 일하지 않으면 입에 밥을 넣을 수 없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만 하나 잘 만나면 일을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잭은 떠나는 달부터 매달 200달러의 돈을 정옥에게 부쳐오고 있었다.

70년 초반의 한국에서 달러 200달러는 큰 값어치가 있었다. 200달러를 원화로 바꾸면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을 실컷 사고도 돈이 남았다. 스낵바 잡역부로 일하며 어렵고 궁색하게 살던 정옥에게 200달러는 그동안 단 한번도 만져보지 못한 큰 돈이었다. 정옥은 자신이 일생동안 못 사입고 못얻어 먹은데 대한 보상이라도 하는 심정으로 마음껏 돈을 썼다.

살아온 환경으로 인해 늘 소극적이고 주눅이 들어있던 정옥이었다. 그동안은 싸구려 티셔츠 한 개를 사는데도 망설이고 또 망설여야 했던 정옥이었다. 그러나 마음대로 풍족하게 돈을 쓸 수 있게 되자 자신의 신분도 상승된 것 같은 기분에 자신감과 배짱도 생겼다.

옥림에게 정옥은 자기가 할 수 있는 한도내에서 도와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옥림은 십 몇년동안 다니던 스낵바를 그만두고 작은 양품점을 차렸는데 장사가 썩 잘 되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옥림이 당시 사귀던 강우의 친구는 반건달이었다. 그 남자의 용돈까지 대주어야 했으므로 옥림은 늘 돈에 쪼달렸다. 옥림이 돈에 곤란한 눈치를 보이면 정옥은 이유를 묻지 않고 수중의 돈을 다 주었다.

옥림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주고 싶은 게 정옥의 심정이었다.

처음에 옥림이 정옥을 불쌍히 여겨 스낵바에 취직을 시켜주지 않았더라면 무슨 수로 잭을 만날 수 있었겠으며 무슨 수로 미국에 갈 꿈을 꿀 수 있었겠는가. 어쩌면 아직도 술집 색시들의 속옷이나 빨며 초라하게 살고 있을지도 몰랐다.

따지고 보면 오늘 날의 자신을 있게 한 것은 다 옥림 덕분이이라는 생각을 정옥은 했다.

정옥은 강우에게도 돈을 많이 썼다.

식당에 가서 밥이라도 먹게되면 돈을 내는 건 언제나 정옥이었고 그에게 옷이라던지 구두같은 것을 사 주기도 했다.

잭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었지만 정옥에대한 강우의 집착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또한 정옥 역시 강우가 싫지않았다. 강우의 얼굴에서 문득문득 느끼게 되는 영준에 대한 환상이 정옥이 강우를 뿌리치지 못하는 큰 이유이기도 했지만 강우와 나누는 섹스는 너무나 좋았다.

정옥은 영준과 쟌, 그리고 잭등 세 남자와의 섹스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와의 섹스에서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고 그동안 단 한번도 절정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정옥이었다.

영준과는 너무 어렸었다. 그리고 이 남자를 실망시키면 자기를 떠나 가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긴장감 때문에 정옥의 몸은 항상 굳어 있었다.

쟌과의 관계에서는 항상 찢어지는 고통밖에 없었다. 쟌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아픔으로 인해 그녀는 늘 울다시피 했었다.

잭과의 섹스는 몇 번 되지 않았을뿐더러 매번 너무 짧게 끝나는 바람에 정옥이 무엇을 느낄 새도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자신이 원했던 섹스가 아니라 언제나 상대편의 주동에 의해 행해지는 관계였기 때문에 세 남자를 거쳤으면서도 늘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던 정옥이었다.

그러나 강우와는 동등한 관계에서 치루어지는 섹스에서인지 매번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정옥의 나이가 서른이었다. 섹스가 뭔지 알 나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 남자를 거치면서 정옥의 몸이 어느덧 열려 있었고 남자의 몸에 익숙해져 있었다.

또한 강우는 여자가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자기 욕망으로만 밀고 들어 가 욕심만 채우는 남자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정옥의 즐거움을 우선에 두고 항상 섹스를 했다.

정옥은 밤마다 그의 품에서 자지러졌다.

섹스를 하는 중에 강우는 정옥에게 늘 속삭였다.

"미국에 들어가면 잭과는 이혼을 하는 거야. 그리고 나랑 살아. 밤마다 이렇게 너를 즐겁게 해줄테니까. 알았지?"

정옥의 젖을 애무하다가 아니면 정옥의 아랫도리에 얼굴을 묻다가 강우는 또 정옥을 다그치기도 했다.

"넌 화산같은 여자야. 남자의 몸이 닿으면 곧 폭발하는. 너 같은 여자가 왜 열 살이나 나이가 많은 미국남자랑 살아야 해? 넌 내가 감당해야 해. 넌 내거야. 넌 나랑 살아야 해."

그럴때마다 정옥은 곧 죽을 것같은 황홀감에 빠져서 입에서 나오는대로 대답을 내뱉곤 했다.

"알,알았어....알았다구...."

그러나 거친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은 섹스가 끝나고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던 가슴의 요동소리가 잠자고 나면 정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영어라곤 헬로우,밖에 모르는 자신이 무슨 수로 강우를 미국에 불러들일 수 있을 지 암담한 것이었다. 이민이나 해외여행도 자유롭지 않던 시절이었다. 미국에 들어가는 방법은 가족 초청이나 유학뿐 인 것 같은데 형제 초청도, 배우자 초청도 할 수 없는 강우를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러나 강우는 걱정말라고 했다. 미국에 친구든 친척이든 연고자가 살고 있다는 증거만 있으면 자기는 미국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했다.

"여권도 미리 다 준비해 놨어.정옥이가 사는 미국주소가 적힌 편지 서너통만 보내주기만 하면 돼."

그런 강우를 보면서 정옥은 작은 희망을 가져보았다.

피붙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미국, 아는 사람이라고는 잭 말고는 한 사람도 없는 미국에서 가끔 강우라도 보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희망. 설사 이혼을 하지 못하고 잭과 평생을 같이 산다하더라도 같은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것 같았다.

옥림이나 주위사람들 말처럼 미국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한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생활이 시작될 터인데 강우가 옆에 있다면 미국생활이 더 쉽고 즐거울 것 같았다.

강우는 성심을 다해 정옥을 보살펴 주었다.

도미수속이 시작되면서 미국 대사관에서 자주 서류들이 날아왔다. 강우는 그 서류들을 도맡아 뛰어다니며 처리해 주기도 했다.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는 나날이었다. 정옥의 30년 생애에 처음으로 맛보는 이 나른하고 느긋한 편안함.

"내가 정옥을 만난 건 축복이야. 정옥인 내 삶의 유일한 희망이야"

강우는 기회가 날때마다 입버릇처럼 말했다.

늘 쾌활한 편인 강우였지만 가끔 그의 얼굴이 그늘로 뒤덮힐 때가 있었다. 아버지의 여자문제 때문에 평생 속을 끊이다가 몸져 누운 어머니의 병세가 점점 나빠진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 땅을 떠나면 가장 슬퍼할 사람이 우리 어머니야. 나 하나만 믿고 지금껏 견뎌온 불쌍한 양반이야. 그렇지만 내 앞에 놓인 이 기회를 놓칠순 없어. 어머니가 만류하더라도 난 떠날 거야. 미국으로 들어갈 거야"

강우의 표정은 단호했다.

그런 강우의 표정을 볼 때마다 정옥은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서늘한 기분을 느꼈다. 만에 하나 미국에 가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면 꼭 무슨 일을 저지르고 말것만 같은 서늘한 예감.

그렇게 몇 달의 세월이 흘렀다.

잭이 미국에 들어 간지 거의 7개월 째 되는 11월 어느날, 마침내 정옥은 미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비자를 받았다. 그리고 며칠후 정옥은 잭으로부터 부쳐져 온 비행기 표도 받았다.

"간다간다 하더니 진짜 가게 되는구나. 망할 계집애. 이렇게 헤어지게 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정이나 들이지 말걸. 섭섭해서, 정말 섭섭해서 어떡하지. 내가 너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

잭으로부터 부쳐져 온 비행기 표를 신기한 듯 몇번이고 들여다 보다가 소중하게 품에 간직하는 정옥을 보면서 옥림은 벌써 이별을 눈 앞에 둔 듯 눈물부터 글썽거렸다.

"그래. 옥림아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 나도 평생 너를 잊지 못할 거야"

정옥은 그동안 자신이 쓰던 살림살이 일체를 옥림에게 주었다.

"그런데 강우씬 곧 널 따라 들어갈 수는 있대니? 괜히 멀쩡한 남자 마음만 붕 뜨게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구나"

옥림은 섭섭한 와중에도 강우에 대한 걱정을 잊지 않았다.

"글쎄, 나도 모르겠어. 내가 보내주는 편지 서너통만 가지면 비자를 받을 수가 있다고 하긴 하던데......"

"하여튼 넌 희한한 애야. 미국남자나 한국남자나 한번 붙었다하면 떨어지지를 않으려고 하니 말이야"

옥림의 말에 정옥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그나저나 너 이제 들어가면 언제 한국에 나올지도 모르는데 고향집 소식은 알아봤니? 언니나 어머니, 한번 안보고 갈거야?"

어머니-.

옥림의 말에 정옥의 가슴이 싸하게 아파왔다.

11살 때 본 것을 마지막으로 그동안 단 한번도 만나지 못한 어머니.

남의 집을 전전할 때는 보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지 아예 찾아 나설 생각을 못했었다.그리고 공장생활을 할 때는 한푼이라도 돈을 더 모아 가겠다고 미루다가 결국은 가지못하게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영준을 만나고 쟌과 잭을 만남으로 고향집과 어머니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너 참 못됐다. 어떻게 어머니를 찾아 가 볼 생각을 한번도 안했단 말이니?"

사실 잭이 떠나고 난 뒤 금전적으로, 시간적으로 여유가 많았을 때 고향집을 한번 찾아 가보리란 생각은 했었다.

"우리 엄만 돌아가셨을 거야"

"왜 그런 말을 해? 무슨 소식이라도 들었더랬어?"

옥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잭을 떠나보내고 얼마 후 정옥은 어머니 꿈을 꾸었다. 하얀 한복을 입은 어머니가 머리를 길게 푼 채 높은 언덕을 마냥 올라가는 꿈이었다. 꿈에서 깬 정옥은 그 꿈이 어머니의 죽음을 알려주는 꿈임을 감지했다. 그래서 고향집을 찾아 갈 생각을 포기한 것이었다.

정옥이 꿈 얘기를 하자 옥림은 혀를 끌끌 찼다.

"어머닌 돌아가셨다치더라도 언니들은 살아 계실 것 아니니. 너 참 무심하다. 나 같으면 꿈 꾼 다음 날 당장 고향을 찾아가 봤을 게다. 어머니의 생사가 궁금해서라도..."

옥림은 정옥을 면박주다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객지에 나와서 그래도 가장 친하게 지냈던 애가 바로 정옥이 너였어. 가거든 편지 꼭 해야 해, 알았지? 그리고 넌 앞으로 좀 모질고 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거친 세상 바닥을 혼자서 20년 가까히 부딪치며 살아 왔으면서도 넌 세상을 너무 몰라. 너무 쑥맥이고 순해 빠지기만 했어. 하긴 그 순진한 점 때문에 남자들이 너를 좋아하는지 모르지만...."

 

11월 23일, 김포공항.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하늘은 잔뜩 흐리고 찌푸드했다.

옥림은 정옥이 입은 자주색 투피스 안의 블라우스 리본을 다시 고쳐 매 주었다. 서울 시내 양장점까지 나가 맞춰 입은 투피스와 블라우스였다.

"꼭 편지하는 것 잊지말고....알았니? "

"으응...."

"계집애...많이 보고 싶을 거야...."

"그으래, 옥림아. 나도 네가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정옥과 옥림은 너무 울어서 코맹맹이가 된 소리로 다시 한번 작별의 인사를 교환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내내 울었건만 둘의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왜들 이래? 살아 있음 다 만나게 될텐데...."

강우가 둘의 등을 다독거렸다.

그는 정옥에게 작은 수첩을 건네 주었다. 정옥이 타고 가는 비행기 번호며 도착할 공항 이름, 그리고 잭의 주소와 전화번호등을 조목조목 적은 것이었다.

"김포서 밤 여덟시에 떠나서 하와이에서 한시간 경유한 후 시애틀로 갈거야. 시애틀 공항엔 저녁 여덟시쯤 도착이야. 알았니?"

"으응."

"하와이에서는 비행기에서 내리게 되더라도 절대 공항 밖을 걸어 나가면 안돼. 반드시 공항내에만 있어야 한단 말이야, 알았어? 그래도 혹시 길이라도 잃게 되거든 아무한테라도 이 수첩을 내밀란 말이야. 여기에 '난 영어를 못합니다. 도와주세요' 하고 써 놨어. 잭의 주소랑 전화번호를 적어 놓았으니까 어쨌든 잭한테로 연락이 갈수 있을 거야."

강우의 태도는 물가에 어린아이를 내다놓은 어미 같았다. 그는 정옥이 미국입국시 필요한 서류며 여권을 챙기느라 혼자 분주했다.

"미국 갈 여자가 어떻게 영어 한 마디 배워놓지 않았냐. 그동안 잭과 의사소통은 어떻게 했어? 일일이 옥림을 통했어?"

이것저것 챙기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정옥이 한심했는지 강우가 한 마디 했다.

정옥이 얼굴을 붉혔다.

여기서야 옥림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통역을 해 주었으니 잭과 의사소통을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또한 미국 들어가는데 필요한 서류수속은 강우가 맡아서 다 해주었다. 정옥은 그동안 두 손을 놓고 있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젠 옥림도 없다. 그리고 강우도 없다. 내가 다 알아서 해야 한다!

정옥은 그제서야 비로소 미국에 가는 게 실감이 났다.

 

정옥은 김포공항에 대기하고 있는 비행기의 트랩을 밟았다.

스튜어디스의 안내를 받아 찾아 앉은 좌석은 바로 창가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게 뻔했지만 정옥은 비행기 창으로 밖을 내다 보았다.

혹시라도 옥림과 강우의 모습이 보일까, 하고.

그러나 창밖은 캄캄한 밤이었다. 보이는 건 불을 밝힌 공항 청사건물뿐이었다.

잘 있어 옥림아. 강우 씨도 잘 있어.

떠나기 직전 꼬옥 잡았던 강우 손의 온기가 아직도 남은 듯해서 정옥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강우와 함께 했던 여섯달.

정옥의 생에서 가장 편안하고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그 누구도 일을 못한다고 핀잔을 주지 않았고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시간에 쫒겨 휴게실 한 귀퉁이에서 선 채로 점심을 먹지 않아도 되었다. 다음달 방세를 어떻게 낼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먹고싶은 걸 먹지 못해 침만 삼키지 않아도 되었었다. 빈 호주머니를 가진채 쇼인도우에 걸린 물건들을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었다.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쓸 수 있었던 6개월이었다. 자고 싶으면 자고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도 되었던 6개월이었다.

안전벨트를 매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비행기는 10분 후 이륙할 것이라고 했다.

정옥은 비행기 안을 둘러보았다. 정옥의 두 옆자리를 비롯, 비행기 안은 거의 비어 있었다.정옥은 좌석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미국 갈 준비에 며칠 잠을 못잔 머리가 아팠고 눈은 모래를 뿌린 듯 깔깔했다.

이제 하룻동안 잠을 푹 자두는 일만 남았다.

정옥은 눈을 감았다.

23일 밤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알리자 잭은 무척 반가와 했다고 했다. 정확한 시간에 마중을 나가 있을 테니 염려말고 비행기를 타라고 했다고 옥림이 전해 주었다.

잭의 말대로라면 이제 걱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국에 도착하기만 하면 새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잭과 함께 하게 될 미국생활. 어떠한 상황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지 모르지만, 설사 힘들고 고된생활이 된다하더라도 절대 실망하지 않고 열심히 살리라고 정옥은 마음먹었다.

다가 올 미국 생활이 아무리 힘들고 고될지라도 지금까지의 생활보단 나으리라.

눈을 감은 정옥의 머리속으로 지난 날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항상 춥고 배가 고팠던 어린 시절. 늘 구박을 받고 매를 맞으며 눈치를 봐야했던 남의 집살이 시절. 영준과의 만남과 영준 어머니의 포악한 눈빛, 심술궂은 목소리. 그리고 영준의 죽음과 순아....

아아.

정옥은 자신도 모르게 도리질을 쳤다.

비참하고 슬펐던 과거는 지금 이 순간으로서 다 잊자. 지금부터는 앞으로 일어날 즐겁고 행복한 일만 상상하자.

비행기가 움직이는 기척에 정옥은 눈을 떴다.

집을 떠나 올 때부터 잔뜩 음산하게 찌푸려 있던 하늘에서는 언제부터인지 비를 뿌리고 있었다.

정옥은 말없이 비행기 창을 때리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비행기 창에 부딪쳤다가 또르르 굴러떨어지는 빗방울은 구슬처럼 아름다웠다. 빗방울을 바라보는 정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앞으로는 저 빗방울처럼 아름답고 투명하게 살아가리라, 정옥은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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