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벌린 입에다 똥을 처넣기 전에 어떻게 좀 하지 못해!"

잭의 고함소리에 화장실에 있던 정옥은 보던 볼일도 채 마치지 못한 채 밖으로 뛰어 나갔다.

아이는 바닥에서 사지를 버둥거리며 불에 덴 듯 울어대고 있었다.

정옥은 아이를 안아 올렸다.

눈물범벅이 된 아이의 얼굴이 토마토처첨 새빨갰다.

아무리 아이가 숨 넘어 가도록 울어대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잭이었다.

 

임신 초기에는 섹스를 삼가하라고 의사가 경고를 했고 뱃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제발 좀 자제해 달라고 정옥도 호소를 했다. 그러나 그런말에 자신의 욕구를 죽일 잭이 아니었다.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낮이나 밤이나 똑같이 정옥을 요구했다. 임신 전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아이를 잃게 될까 봐 정옥은 얼마나 노심초사 했는지 모른다. 잭에게 폭력을 당할 때도 정옥은 몸을 최대한으로 웅크렸다. 뱃속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모진 고초를 겪으며 낳은 아이가 영이였다.

영양실조에다 피폐하고 쇠약한 정옥의 몸에서 나온 아이지만 별 이상한데 없이 건강한 아이였다.

의사가 건네 주는 아이의 얼굴을 정옥은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아가야, 고마워. 건강하게 태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그러나 영이는 잘 우는 아이였다.

불안정하고 지친 심신에서 잉태된 아이여서일까. 아이는 옛날 구멍가게 집 은재가 그랬듯이 낮이나 밤이나 시간을 가리지 않고 울었다.

아이가 잘 울어대니까 잭의 포악한 성질은 더 포악하게 시도 때도 없이 발산되었다.

텔레비젼을 보는데 시끄럽게 운다고 입을 틀어 막아 버리기도 하고 베개로 아이를 눌러 놓기도 했다. 커다란 베개 밑에서 숨을 못쉬고 새파랗게 질리는 아이를 정옥이 들쳐 업고 밖으로 뛰어 나간 게 한 두번이 아니었다.

어느 날은 자기 낮잠을 방해한다고 아이를 거꾸로 든 채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에 집어 던져 넣어버리겠다고 얼러댄 적도 있었다.

그 일로 아이는 머리와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아이가 생기면 조금 나아지려니 했던 정옥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아이를 낳았는데도 잭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조금치의 관심이나 애정도 보이지 않았다. 한번 안아 보는 건 고사하고 제대로 한번 쳐다보지도 않았다.

잭은 아이가 세살이 넘도록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정옥도 이름을 지어 줄만한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아이는 태어난 지 몇 년이 지나도록 이름도 없이 자랐다.

그래서 정옥이 나름대로 '영이' 라고 한국 이름을 붙여 준 것이다.

영이가 네 살이 될 무렵.

잭은 큰 저수지를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저수지가의 잡초를 베고 낚싯군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치우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비 올 때 수문을 열고 닫아 저수지 수위를 조절하는 간단한 일이었다.

주인측에서 저수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속의 집 한 채를 제공해 잭과 정옥은 그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시간을 정해 일을 나갈 필요가 없으니 잭은 자연히 집에서 지내는 일이 많게 되었고 정옥에게는 지옥같은 시간이 더 늘어 났다.

 

 

"한국사람이세요?"

미국 온지 거의 십 년만에 들어보는 한국말 소리에 정옥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 보았다.

머리를 곱슬곱슬하게 퍼머를 한 작고 마른 여자가 정옥을 보고 웃고 있었다.

"........."

정옥은 대답대신 일단 고개부터 끄덕했다.

10년동안 쓰지를 않아 거의 다 잊어버린 한국어라 예,라는 간단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정옥은 더듬거리면서 간신히 한 마디를 더 할 수 있었다.

"하,한,한국, 사,사람인데요..그,그럼 거기도?"

정옥의 대답을 듣더니 여자는 얼른 다가와서 정옥의 손을 잡았다.

"어머나, 놀라와라. 여기서 한국사람을 다 만나게 되다니!"

여자는 다시 활짝 웃었다. 그녀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이 나타나 있었다.

"이 지역에 15년 넘도록 살면서 한국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었는데 이거 너무 반가와요"

"예에, 그,그러셨..어요..."

"어디 사세요?"

그것을 정옥이 어떻게 알겠는가.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이름도 모르는 정옥이었다.

정옥은 그냥 손가락으로 산쪽을 가리켰다.

여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거긴 산 속인데....거기 집이 있었던가요?"

"예에, 저,저어기.....저..저수지.....외,외딴집....."

여자가 자신의 손바닥을 짝,하고 소리나게 마주쳤다.

"아하, 저수지 근처 큰 바위 옆에 있는 집? 어머나! 빈 집인줄 알았는데 그 집에도 사람이 살았어요?"

저수지 주인이 마련해 준 집은 외딴집이기는 했으나 마을과는 그리 많이는 떨어져 있지 않은 집이었다.

정옥이 사람들과 접촉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잭이었지만 영이가 생기고부터는 정옥 혼자 '서클 케이' 나 '에이엠 피엠' 같은 편의점에 가는 것을 허락했다.

아이가 있으니 우유나 시리얼 같은 먹을 게 필요해 마켓에 갈 일이 많아졌다. 그러나 정옥이 운전을 못하는지라 일일이 잭이 나가야 했다. 그게 여간 귀찮고 성가신 일이 아니니까 정옥의 외출을 허락한 것이었다.

또한 모든 어미가 그렇듯 정옥 역시 영이에게 극진한 애정을 보이고 있었다. 그걸 본 잭은 적어도 정옥이 지 새끼를 놓고 도망가지는 않을 거라고 안심했다. 그것도 정옥의 외출을 허락하는 한 이유이기도 했다. 정해 준 시간에서 단 1분이라도 늦게 오면 난리가 나긴했었지만.

그날도 정옥은 동네 한 귀퉁이에 위치한 한 편의점에서 우유를 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럼 저 먼 길을 걸어서 내려 왔단 말이예요? 내 차에 타세요. 내가 태워다 줄께요"

"아,아,아니예요...혼,혼자서...혼자서 걸,걸어..걸어 가..갈 수 있어요"

정옥은 울듯이 여자의 청을 거절했다.

여자의 차를 얻어탄 걸 잭이 알기라도 한다면! 뒷 일은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것이었다.

여자는 자기의 호의가 무시당하자 기분이 상한 듯 했다. 그러나 여자는 곧 다시 표정을 바꾸어 안면가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 이름은 캐더린이예요. 저어기 저 이층집 보이지요? 그 이층집 뒷골목의 막다른 집이 우리집이예요. 시간 있으면 놀러 오세요. 나는 항상 집에 있으니까..."

정옥은 어떻게 돌아오는지도 모르게 집으로 돌아왔다.

영이의 점심을 챙기는 정옥의 가슴과 손이 마구 떨렸다.

이제는 잘만하면 이 곳을 빠져 나갈 수도 있겠구나! 자유의 몸이 될 수도 있겠구나!

같은 한국인으로서 아니, 같은 여자로서 캐더린이 자신을 도와줄 것을 정옥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캐더린은 상처 투성이, 멍 투성이인 정옥의 얼굴과 몸을 유심히 살펴 보는 듯 했다. 그녀가 바보가 아니라면 상처를 보면서 뭔가 짐작하는 게 있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정옥은 몸이 굳어져 옴을 느꼈다.

막상 이곳을 빠져 나간다해도 어떻게 앞으로 살아 나갈 수 있을까에 생각이 미친 때문이었다.

미국생활에서는 필수인 운전도 못하고 돈 한푼 없는 신세, 게다가 영어는 한 마디도 못하고. 지리도 전혀 모르고 하다못해 지금 살고 있는 동네 이름조차 모르는데.......

10여년동안 잭 외에는 그 누구와도 접촉하지 못하며 세상과 철저히 단절된 생활을 한 정옥. 정옥은 무인도에서 혼자 갇혀 산 사람과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정옥은 자신이 잭에 의해 짐승처럼 사육되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러나.

그러나, 하고 정옥은 생각했다.

나는 포기할 수 없어. 안 될 때 안되더라도 일단 시도나 한 번 해 봐야지. 한국여자를 만난 이번 기회가 어쩌면 마지막 기회 일지도 모르니까. 그녀에게 도움을 청해 봐야지......

그러나 정옥의 그 간절한 바람은 그냥 바람으로만 끝나고 말았다.

잭이 집을 비운 어느 날.

정옥은 영이를 들쳐업고 캐더린의 집을 찾아갔다.

그녀는 아들과 함께 낮잠을 자고 있다가 정옥을 맞았다. 부스스한 얼굴로 문을 열던 캐더린은 정옥을 보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금방 찾아 올 줄은 몰랐네. 얼른 와요"

캐더린이 과일과 차를 내놓았다. 그러나 정옥은 그것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맘이 급했다. 잭이 돌아오기 전에 얼른 집으로 다시 돌아가 있으려면 말이다.

"제, 제가요...마,말...말을 다 잊,잊어 버렸어...요...한,한국 떠...나온지 10년, 10년이 다 되도록 한,한번도 한국말..한, 한국말을 쓰..쓰지를 모..모..못,못해서......"

정옥의 이마에서는 땀까지 배어 나왔다.

영어도 아닌 한국말을 하는데도 이렇게 쩔쩔매야 하다니!

"그래요? 나도 한국말 쓸 기회가 없어 거의 잊어버려 가고 있는 중인데...."

"저,저를 도,도와 주세요..제,제...제발.....저,저를!"

정옥은 그때까지도 채 아물지 못한 자신의 손바닥을 캐더린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셔츠와 치마를 들쳐 온몸에 나 있는 상처와 지진 담뱃불 자국을 보여주었다.

"저, 저는, 남편으로부터 하...하루라도 안맞는 나,날,날이 없어요. 저는 도,도망가야 해요. 여기 더 있다간 매...매에 못 이겨 주..죽,죽을 거예요...죽고 마..말..말거예요."

"세상에........!"

캐더린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고도 여지껏 살아있단 말이예요, 죽지 않고? 오오,하나님 맙소사.....!"

캐더린은 몸서리를 쳤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아, 가엾기도 해라, 불쌍하기도 해라. 그런데 왜 그렇게 때린데요? 그렇게 죽도록 때리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니예요?"

"세,섹,섹스,...때....때문에......."

"세엑스?"

캐더린의 물음에 정옥은 잭의 변태적인 섹스 행각을 소상히 이야기 해야 했다.

같은 여자끼리지만 창피하고 수치스러워 차마 입에도 담기 싫은 이야기였지만 일단 캐더린의 도움을 받기로 작정한 이상 아무 것도 숨겨서는 안될 것이라고 정옥은 생각했다.

"그,그는 하,하루에도 여,열,열번 이상씩 해,해야 하는 사..사람이거든요....."

"열 번 이상씩?"

캐더린의 눈이 등잔만하게 커졌다.

그러나 캐더린의 이 기묘한 변화를 어떻게 정옥이 받아들여야 할까?

매 맞는 이야기까지는 눈물까지 흘려가며 귀를 기울이던 여자가 섹스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는 얼굴빛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주 맛있는 음식을 눈 앞에 둔 배고픈 사람의 얼굴 표정이 그럴까?

캐더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면서 얼굴에 발갛게 홍조가 띠어졌다.

그리고 하아하아, 숨까지 가쁘게 쉬더니 몸까지 비비 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 ! "

아무리 무지하고 바보같은 정옥이었지만 지금 앞에 앉은 캐더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금방 눈치를 챌수 있을 정도였다.

정옥은 이야기를 멈추었다.

캐더린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그래요? 왜 이야기를 중간에서 하다 말고 멈추어요?"

"가,가겠...가겠어요..."

자신을 잡으려는 캐더린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정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옥은 캐더린의 아들과 함께 놀고 있는 영이를 등에 업었다.

갈 때는 바람같이 날아갔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등에 업힌 영이가 자꾸 밑으로 늘어지는 것 같아 정옥은 아이를 고쳐 업기 위해 몇 번을 길에 멈추어 섰다.

더러운 년...

캐더린이 보인 표정은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섹스를 하고 싶은 여자의 남자에 대한 뜨거운 갈망, 바로 그 저속하고 뜨거운 갈망의 표정이었다.

하지만 정옥의 경우는 그냥 단순한 남녀간의 섹스 이야기가 아니지 않는가! 잔인한 폭력이 동반된, 까딱하다가는 한 목숨이 스러질 경각에 처한 여성이 당하는 섹스 이야기였다. 즐거움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섹스.

그러나 남편과 이혼한 후 몇 년동안 남자의 접촉이 없었던 캐더린에게는 정욕의 불을 바싹 당기게 하는 이야기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정옥은 입맛이 썼다. 그리고 서글펐다. 자신의 처참한 상황을 그렇게밖에 받아 들이지 못하는 캐더린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정옥은 캐더린의 도움을 받아 잭의 곁을 도망치겠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캐더린은 절대 자신을 도와줄 여자가 아니었다고 정옥은 판단한 것이다.

그날 저녁.

누가 문을 두드렸다.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던 정옥은 그만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캐더린, 그녀가 문 밖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여자가 여긴 왠일일까. 설마 낮의 일을 잭에게 일러 바치려고 온 건 아닐까....

얼굴색이 변한 채 사시나무 떨 듯 부들부들 떨고 서 있는 정옥을 밀치고 잭이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낮에는 달리 캐더린은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하고 있었다. 입술도 광대마냥 빨갛게 칠해져 있었다.

"저희 아들이 갑자기 아파서 말이예요. 병원으로 데려 가야겠는데 혼자서는 도저히 엄두가 안나네요. 아저씨가 좀 도와주시겠어요?"

캐더린은 애교가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잭에게 말했다. 잭 뒤에 서 있는 정옥은 아랑곳하지 않는 말투였다.

왠 낯모르는 여자가 와서 말을 거나, 하는 표정으로 어리둥절하던 잭은 캐더린의 말투와 몸 전체서 풍기는 교태를 보았다. 그는 웃으며 흔쾌하게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안에 가서 내 쟈켓을 가져 와"

잭은 정옥에게 명령했다.

둘이 떠난 현관에서 정옥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는 픽, 웃으며 문을 닫고 돌아 섰다.

아들이 아프다는 캐더린의 말은 분명 거짓말일거라고 정옥은 생각했다. 낮에도 멀쩡하던 아들이 왜 갑자기 병원까지 갈 정도로 아프단 말인가. 그리고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여자의 옷차림과 화장은?

잭의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정옥의 생각은 적중했다.

잭과 캐더린은 미쳐서 돌아갔다.

일 주일에도 몇 번 씩 잭은 캐더린의 집에 가서 자고 왔다.

"잭, 집에 있지요? 바꿔 줘요."

정옥이 전화를 받으면 캐더린은 당당하게 잭을 찾았다.

정옥은 둘의 관계에 대해 일체 간섭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옥은 그 둘이 미쳐 있는게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정옥에게 강요하는 섹스의 횟수가 적어졌으니까. 여전히 섹스를 탐하는 잭이었지만 전에처럼 하루에도 열 번 씩은 아니었다. 캐더린이 정옥을 살려준 셈이었다.

어떤식으로든 캐더린은 정옥에 고마운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이른 아침이었다.

캐더린이 정옥을 찾아 왔다.

"왠,왠일로?.."

문을 열어 주는 정옥의 머리채를 캐더린이 나꾸어 챘다.

무방비 상태로 있던 정옥은 바닥에 쓰러졌다. 캐더린은 정옥을 올라 타고는 사정없이 손톱으로 할퀴고 물어뜯고 때리기 시작했다.

기습을 당한 정옥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매를 맞았다.

이른 아침부터 거실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던 잭이 이 광경을 다 보았지만 그는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빙글빙글 웃으며 구경을 하고 있었다.

"왜 이러는 거예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정옥이 맞으면서 소리쳤다.

캐더린에게까지 매를 맞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 쌍년아. 네가 진짜 몰라서 묻는거야? 날더러 갈보같은 년이라고 했다며? 이 더러운 쌍년이 누구더러 갈보래? 너야말로 D동 바닥에서 몸 팔다 온 년 아니야? 이 개 같은 년아!"

캐더린은 소리소리 지르며 날뛰었다.

정옥은 캐더린에게 반항해 보려고 들었던 팔을 힘없이 도로 내렸다.

비열하고 나쁜 놈..그 말을 일러바치다니....

며칠 전이었다.

영이가 눈을 뜨고 보고 있는데서 섹스를 하려고 덤벼드는 잭에게 영이가 잠이나 들거든 해주겠다고 애원했다. 그러나 한번 발동하면 세상없어도 욕구를 풀어야 하는 잭은 막무가내로 자신의 성기를 정옥에게 물리려고 했다.

참다 못한 정옥이 소리쳤다.

"캐더린인지 술집 작부인지 그 여자한테 가서 해 달라고 해!"

그 말을 캐더린에게 그대로 전한 것이었다.

정옥은 그날 캐더린에게 허리를 못 쓸 정도로 흠씬 두들겨 맞았다.

정옥은 피 흐르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잭은 몰라도 캐더린 앞에서 걸레처럼 널부러져 있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구석에 앉아서 바들바들 떨며 이 모든 광경을 보고 있던 영이가 정옥이 일어나는 기색을 보이자 쪼르르 달려와서 안겼다.

"어,어...엄,엄마..."

"여,영이야...."

정옥은 한줌도 안되는 영이를 힘주어 안았다.

"저런 병신같은 계집애!"

잭이 벽력같은 고함을 질렀다.

"이 계집애야. 엄마는 무슨 얼어 죽을 엄마야! 저 년은 바보같은 한국년, 암캐같은 년이야. 저런 년은 바보야, 하고 불러야 하는 거야"

잭은 앉아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정옥의 품에서 영이를 나꾸어채 갔다.

"자, 불러 봐, 얼른. 바보야, 하고"

잭은 영이를 세워 놓고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영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아니야, 바보,아니야. 어,엄마,엄마야"

잭의 솥뚜껑같은 손이 영이의 귀싸대기를 후려 갈겼다. 영이가 짚단 쓰러지듯 옆으로 픽 쓰러졌다. 잭은 쓰러진 영이의 멱살을 틀어 쥐어 올렸다.

"요 쪼그만 년이 내 말을 안들어.너 저년한테 바보라고 부를래, 안부를래?"

지 아버지의 성질을 아는지라 울지도 못하고 새파랗게 질린채 허공에 대롱대롱 올려져 있는 영이. 그것을 바라보는 정옥의 눈에서 불이 났다.

"왜 이러는 거야, 이 더러운 놈아! 아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나 정옥은 잭의 뒷발길질을 정통으로 맞고 다시 푹 쓰러졌다.

"너, 더 맞을 래, 바보라고 부를래?"

잭은 왼쪽 주먹을 들어 영이에게 을렀다.

마침내,영이가 비쭉비쭉 입술을 비틀어 울면서 모기만한 소리로 '바보야' 하고 정옥을 불렀다.

그제서야 잭은 허공에 들어 올렸던 영이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이 모든 광경을 팔짱을 끼고 보고 있던 캐더린이 웃으며 잭에게 눈을 찡긋했다. 잭도 씨익 웃으며 캐더린과 눈을 맞추었다.

둘은 낄낄대고 웃으며 나란히 손을 잡고 나갔다.

너희는 지옥에 갈거야......

정옥은 부르짖었다.

악에 받쳐 내뱉은 말을 고스란히 상대방에게 전해 준 남자. 그리고 그 상대방에게 두들겨 맞는 걸 웃으며 바라 보는 남자. 딸로 하여금 제 어미를 바보라고 부르게 하는 남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사람을 내버려 두고 쾌락을 즐기기 위해 정부의 손을 잡고 사라진 남자......

그런 남자를 인간으로 부를 수 있을까. 그 남자는 인간이 아닌 짐승이었다.

정옥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정옥은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신발도 신지 않은 맨 발로 저수지로 뛰어 올라간 정옥은 망설일 것도 없이 저수지에 몸을 날렸다. 헤엄을 치지 못하는 정옥의 몸은 몇 번 물 위로 떠올랐다가 그대로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정옥은 죽지 못했다.

마침 새벽 낚시를 마치고 돌아갈 채비를 채리던 낚싯군의 눈에 정옥이 몸을 날리는 모습이 뜨인 것이었다.

정옥은 낚싯군에 의해 구출되어 집으로 옮겨졌다.

캐더린의 집에 가서 한 바탕 섹스를 마친 잭은 일 나갈 채비를 하기 위해 집에 와 있었다. 그는 낚싯군 등에 업힌 정옥을 보고 대뜸 욕부터 퍼부었다.

"개 같은 년이 이번엔 또 물에 빠져 죽으려고 했었구만. 죽으려면 곱게 죽지 누구 경을 치게 하려고!"

낚싯군은 잭의 태도에 기가 찬 모양이었다.

"거, 당신 너무하는구만! 죽으려고 했던 부인이 살아서 돌아왔으면 우선 안부부터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참 별 못된 사람도 다 있네!"

낚싯군은 정옥을 업은채 응접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정옥을 소파에 내려놓았다. 정옥의 몸에서 흘러내린 물로 소파와 거실은 금방 흥건하게 젖었다.

낚싯군은 아장아장 걸어 나온 영이를 가리키며 잭에게 말했다.

"당신, 부인한테 좀 잘 하슈. 당신이 뭘 크게 잘못 하는 모양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어린 아이를 두고 엄마가 죽을 생각을 다 하지?!"

정옥은 젖은 옷을 갈아 입을 경황도 없이 멍하니 넋을 놓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영이가 다가와 정옥의 손을 잡았다.

"어,엄,엄마아....."

처연하게 정옥을 쳐다보는 영이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 ! "

어린 것이 소리내어 울지도 않고 눈물만 가득 담은채 제 어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네 살밖에 안된 아이였지만 제 어미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판단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이의 눈물을 보는 순간 정옥은 정신이 번쩍 났다.

나는 혼자가 아니로구나. 내 딸, 영이가 있었구나. 이 어린 것을 두고 죽으려고 했다니....내가 죽어 없어지면 이 어린 것을 누가 거두어 키우라고....

정옥은 몸을 일으켜 영이를 와락 끌어 안았다.

미안하다 영이야. 널 두고 죽으려 한 내가 나빴어. 이제 절대 죽을 생각을 하지 않을께.....

잭과 캐더린의 관계는 1년이 넘게 계속되었다. 그리고 1년 후 N시로 이사를 했다.

원래는 8개월 만에 그곳을 떠나려 했었다. 저수지 돌보는 일이 남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캐더린이 잭을 놓아주지 않았다.

이삿짐을 다 싣고 떠나려는데 캐더린이 달려와서는 가려거든 자기를 죽이고 가라고 울고불고 난리를 친 것이다. 잭도 캐더린과 헤어지는 게 싫었는지 쌌던 이삿짐을 정옥에게 다시 풀게했다. 그리고 거기서 몇개월을 더 머물렀다. 그러나 몇개월 후에는 잭도 어쩔 수 없이 그곳을 떠나야 했다. 거기엔 잭이 일 할 만한 마땅한 직장이 없었다. 캐더린도 전남편이 주는 양육비로 근근히 살아가는 처지라 잭의 술값과 생활비를 보태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잭과 정옥이 떠나는 날.

캐더린은 잭을 붙잡고 몸부림쳤다. 두껍게 바른 화장이 지워지는 줄도 모르고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어. N시니까 여기서 차로 세 시간이면 가쟎아"

잭이 캐더린을 안고 아이 달래듯 얼렀다.

캘리포니아의 N시.

N시는 정옥에게 특별한 곳이다. 이 N시에서 정옥은 윤여사를 만났다.

그리고 그녀의 도움으로 탈출의 날개를 달 수 있었던 것이다.-계속-

- 이계숙의 더 많은 작품은 http://kyesook.com 로 오셔서 읽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