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시에서 얻은 집도 역시 동네와는 떨어진 산 속의 외딴 집이었다.

잭 역시 지붕 고치는 일을 하러 다녔다.

잭같이 포악하고 무지막지한 사람에게도 순정은 있었는가.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멍하니 혼자 있기를 잘했다. 그의 얼굴에는 캐더린에 대한 그리움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캐더린에 대한 그리움은 곧 이 여자 저 여자를 마구 만나고 다니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잭, 있어요? 나는 신디인데요. 잭 좀 바꿔 주세요"

"잭은 지금 없는데요"

"잭하고 얘기하고 싶은데요"

"아침에 나갔어요. 지금 없어요"

"잭 있으면 바꿔 줘요"

"미안합니다. 나가고 없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걸려오는 전화.

정옥은 똑 같은 대답을 하느라 입이 아플 지경이었다.

모두 잭과 사귀고 있는 여자들의 전화였다.

잭은 과외로 자동차 부속공장에도 다니고 있었다. 손재주가 좋은 잭은 곧 자동차 부속공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되었고 돈을 잘 벌게 되었다. 그 돈을 바깥에서 여자들에게 흥청망청 쓰고 다니는 것이었다.

훤칠하고 인물 좋지, 돈 잘 쓰지, 섹스 잘 하지, 그러니까 여자들이 줄을 잇는 것이었다.

만나는 여자들에게 정옥의 존재에 대해 일체 이야기 하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간혹 전화를 걸어오는 여자들중에는 '지금 전화받는 사람이 누구냐' 고 묻는 경우도 있었다. 아내라고 대답했다가는 또 잭에게 경을 칠것이었다. 또한 정옥도 아내라고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잠자코 있으면 여자들은 혹시 식모아니냐고 되물었다.

식모?

정옥은 쓴 웃음을 지었다.

식모같으면야 월급이나 받고 매나 맞지 않지. 매일 죽도록 얻어 맞고 배설물이나 받아야 하는 정옥의 신세는 식모보다 못한 것이었다.

그 중 일부 대담한 여자는 집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온 얼굴에 시퍼렇게 피멍이 맺히고 상처투성이인 정옥이 문을 열어주면 그녀들은 기겁을 하고 꽁무니를 뺐다.

정옥의 모습 하나로 모든 것을 짐작했다는 듯이.

몇 달동안 그렇게 쉴새없이 걸려오던 여자들의 전화가 뜸한가 싶더니 이번에는 각 상점이나 식당에서 전화가 와 잭을 찾기 시작했다.

자동차 부속 공장에서 아무리 돈을 많이 받는다지만 한꺼번에 여러명의 여자를 만나고 다니려니 돈이 부족한 것이었다. 잭은 공수표를 남발하고 다녔다. 은행잔고가 없는 공수표를 끊고 다니니 사방에서 잭을 찾을 수밖에.

보석상에서도, 의류점에서도, 식당에서도 뻔질나게 잭을 찾아대기 시작했다.

잭이 옆에 있다해도 그런 전화는 안받을 게 뻔하지만 대부분 잭은 집에 없었다. 정옥 혼자 그 전화를 다 받아 앵무새처럼 잭이 지금 집에 없다는 것을 되풀이 해야 했다.

매번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어조로 전화를 받으니 그 쪽에서도 정옥이 누구인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어느날 의류점 주인이라며 지금 전화를 받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정옥은 대답했다.

"식모"

수화기 저쪽에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공수표를 남발하고 다니는 주제에 집에 식모까지 두었다니 기가 막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을 찾는 전화가 끊이지 않는다는 걸 알자 잭은 전화를 아예 끊어버렸다.

전화마저 끊긴 산속의 오두막 집은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무인도였다. 정옥은 그 무인도에서 또 몇 년을 고립되어 살았다.

그즈음 정옥에게는 큰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영이때문이었다.

영이는 일곱 살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잭은 영이를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다. 하루종일 정옥과 단둘이 집안에서 갇혀 지냈다.

정옥도 영어를 못하지, 잭은 욕설 외에는 말을 안하지, 말을 배울 기회가 전혀 없는 영이.

영이는 일곱살이 되도록 말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이가 일곱살이 되도록 보는 거라곤 엄마가 아버지로부터 매일 두드려 맞는 것과 추잡스러운 섹스행위였다. 그런 비정상적인 행동과 폭언만 듣고 매일 자라온 영이는 벌써 이상한 행동을 했다.

혼자서 잘 놀다가도 잭의 차 소리만 나면 파랗게 질리며 구석으로 숨었다. 그리고 정옥이 만들어 준 헝겊 인형을 마구 때리고 발로 찬다던가 하는 폭력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저 아이가 커서 장차 무엇이 될까.

어릴 때는 몰랐는데 영이가 점차 커가자 정옥은 무엇보다 그게 제일 걱정스러웠다.

내가 이러고 죽지 못해 사는 건 내 팔자려니 치더라도 부모 잘못 만나 학교도 가지 못하고 바보처럼 커야 하는 우리 영이의 장래는 어떻게 될까. 저 아이가 온전한 인간으로 자라 주기나 할까.....

정옥의 바람은 딱 한가지였다.

자기 같은 인생을 살지 않는 것.

정옥은 영이 생각만 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속만 새까맣게 타들어 갔지 딱히 어미로서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무기력한 정옥이었다. 그저 손을 놓고는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정옥은 차마 보지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영이가 자위를 하고 있는 모습을!

일곱 살밖에 안된 아이가 무슨 쾌감을 알아서 자위를 할까.

영이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소파 모서리에다 자기 성기를 마구 부벼대고 있었던 것이다!

지 엄마가 보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개의치않는 영이.

영이는 섹스나 자위같은 것은 남이 없는데서 은밀하게 치루어져 한다는 것 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눈만 뜨면 보고 들은 게 지 아버지와 엄마의 섹스행위였다. 부끄러움이라던가 수치심이라는 것을 배울 기회가 아예 없었던 영이였다.

아아, 영이야 !

정옥은 달려가 영이의 몸을 잡아 행위를 멈추게 했다. 그리고 영이를 끌어안았다.

"영이야. 이런 짓은, 아아 ! 이런 짓은......."

정옥은 그때 큰 결심을 했다.

영이를 제대로 키워야겠다는 결심이었다. 절대로 아이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이었다.

영이를 정상적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말을 가르쳐야 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영어 한 마디를 구사할 줄 모르는 정옥이 말을 가르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이에게 말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일단은 세상으로 영이를 데리고 나가야 할 것이라고, 그리고 친구를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라고 정옥은 생각했다.

정옥은 그 생각을 바로 실행으로 옮겼다.

정옥은 식료품을 사러 갈 때 반드시 영이를 동행했다. 그리고 잭이 집을 비울 때를 틈타 영이를 데리고 마을로 내려갔다.

거의 한 시간을 걸어서 내려가야 하는 마을이었지만, 돌아 올 때는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대는 영이를 업고 오느라 시간과 힘이 배로 걸렸지만 영이와의 외출을 그만두지 않았다.

마을로 내려가서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집도 보여주고 차도 보여 주었다. 정옥이 영어를 못하는지라 무어라고 설명을 해 주기는 어려웠지만 이 세상은 엄마와 아버지가 다가 아닌, 무한정 넓다는 것을 영이에게 가르쳐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해서든지 영이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겠다는 생각으로 온동네를 기웃거리고 다녔다. 영이 또래의 아이들이 있는 집을 찾아내면 무조건 영이의 친구가 되게 해 달라고 부모에게 부탁할 참이었다.

그게 얼마나 무모한 짓일까. 그러나 그런 무모한 짓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게 자식에 대한 엄마의 마음이었다.

몇 년의 세월이 걸리더라도 나는 영이에게 말을 배우게 하고 말거야......

정옥은 영이의 손을 끌고 집을 나서면서 매일 자신에게 다짐했다.

그렇게 한 달여를 외출을 했을까.

어느날 영이와의 외출을 잭에게 들키고 말았다.

잭은 다음날 어디서 구했는지 총을 한 자루 집에 가지고 와서 정옥에게 보여주었다.

"네 년이 영이까지 데리고 나가서 돌아 다녔단 말이지?"

잭은 총알이 장전된 총을 정옥의 가슴에 겨누었다.

"앞으로 내 허락없이 한 발자욱이라도 움직이지마! 내 말을 안 들으면 이 총알이 네년 심장을 꿰뚫을 줄 알아!"

잭은 그날 이후부터 일을 하다가도 불시에 집에 들이닥쳤다. 정옥과 영이가 집에 있나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모성은 더 강했다. 정옥은 외출을 멈추지 않았다.

영이를 더 이상 방치하지 않겠다는, 더 이상 바보로 만들지 않겠다는 정옥의 결심은 크고 강했다.

잭이 집을 비우면 정옥은 즉시 영이의 손목을 끌고 다시 마을로 내려갔다. 그리고 이집저집의 문간을 기웃거리며 영이의 친구가 될만한 아이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 정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일까.

정옥은 드디어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레베카라는 여자였다.

영이보다 한,두살 어려보이는 듯한 쌍동이 딸과 함께 마당에서 잔디에 물을 주며 장난을 치고 있는 레베카의 모습을 보았을 때 정옥은 직감했다.

내 부탁을 들어 줄 여자라고.

딸을 둘이나 키우고 있는 여자이니 자기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정옥은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레베카의 얼굴이 무척 선해 보였던 것도 정옥의 용기를 배가시켰다.

정옥은 그 들에게 다가갔다.

"저,저...저기..저,저기요...."

생전 처음보는 사람에게 황당하기 짝이 없는 부탁을 해야하는 정옥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지만 그냥 물러날 수 없었다. 불쌍한 영이를 위해서.

정옥은 한,두 마디 겨우 더듬거리는 영어로 자신의 뜻을 전했고 정옥이 예상했던대로 레베카는 순순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해서 영이는 하루에 두어 시간씩 레베카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영이가 레베카의 쌍둥이 딸들과 함께 노는 동안 정옥은 그냥 손을 놓고 기다리지 않았다.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해주었다. 골병이 들대로 들어 움직이기가 여의치 않은 몸이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레베카에 대한 고마움을 갚아야 한다고 정옥은 생각했다.

일 주일째 되는 날.

레베카가 청소를 하고 있는 정옥에게 다가 와 손을 잡았다.

"정옥..."

"........"

키가 큰 레베카는 허리를 굽혀 정옥과 눈을 맞추었다.

"말해 봐요, 정옥. 당신의 몸에 난 그 무수한 멍과 상처는 어떻게 된거예요? 그리고 왼쪽 눈은 또 왜 그렇게 된거예요?"

"............."

정옥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옥의 영어로는 도저히 자기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상처, 당신 남편이 만든거지요?"

"............."

정옥은 고개를 끄떡했다.

"역시 그랬군요......"

레베카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베카는 한 때 마약과 술을 하기도 하며 방탕한 생활에 빠졌던 여성이었다. 그러나 뜻한 바 있어 그 생활을 청산하고 신학교에 다니고 있는 백인 여성이었다.

그날 오후.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영이를 데리고 레베카의 집에 다녀오다가 길에서 잭과 딱 마주치고 말았던 것이다.

잭이 운전하는 회색 스테이션 왜건을 맞닥뜨리자 정옥은 숨이 그대로 멎는 것 같았다.

영이도 사태를 짐작했음인지 정옥의 치마폭으로 숨어들었다.

"그렇쟎아도 요즘 뭐가 수상하다고 생각했더니......"

파랗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정옥.

차에서 뛰어내려 주먹부터 내지를 줄 알았는데 예외로 잭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는 정옥에게 차갑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어디 갔다 오는 거냐?"

"..........."

"일단 차에 타라. 집에 가서 얘기 하자"

잭은 팔을 뻗어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굳어서 떨어지지 않는 다리때문에 조수석에 올라 타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딴 때 같으면 벌써 욕설이 터져 나왔을테지만 잭은 잠자코 정옥과 영이가 차에 다 올라 탈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말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앞만 바라 보고 운전을 하고 있는 잭의 굳은 얼굴에서 정옥은 오늘 자신은 죽는 날이라는 걸 예감했다.

그러나 정옥은 다짐했다.

절대로 절대로, 레베카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겠다고.

레베카에게 무슨 짓을 할지...

내 한 몸 당하고 말지 고마운 레베카에게까지 화를 입힐 순 없다고 정옥은 입술을 깨물었다.

4, 5마일밖에 안되는 집까지 도착하는데는 2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잭은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바지에 꿰어져 있던 가죽혁대를 풀었다.

정옥은 눈을 감았다.

진짜 오늘은 죽는 날이로구나.......

영이는 숨도 크게 못 쉰 채 구석에 숨어서 이 쪽을 보고 있었다.

"요즘들어 영이란 년의 말이 꽤 는 것 보고 네년이 수상한 짓을 하고 다니는 지 짐작을 했다. 빨리 말해! 그동안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그랬다. 불과 일 주일을 레베카네에 데리고 갔을 뿐인데 벌써 영이의 영어실력은 눈에 띄게 향상되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이라 말을 배우는 속도가 매우 빠른 것이었다.

어눌하게 단어 몇 마디만으로 자기 의사표시를 하던 영이가 정확하게 문장을 구사하는 걸 보며 정옥은 눈물이 나올 만큼 기뻤다.

그래, 영이야. 그렇게 얼른 말을 배워라. 너만은 사람구실을 해야 하는 거야. 너는 절대로, 절대로 나 같이 살면 안되는 거야....

그런데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일 주일만에 잭에게 다시 걸리고 만 것이다.

"말해! 빨리 말하라니까!"

가죽 혁대가 슈잉, 바람가르는 소리를 내더니 정옥의 몸에 와 감겼다. 정옥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너 같은 코리안 암캐년은 죽어도 싸. 감히 나 몰래 집 밖을 또 나돌아 다녔단 말이지?!"

고꾸라진 정옥의 몸 위로 가죽혁대는 사정없이 내려와 다시 휘감겼다. 정옥의 얼굴과 몸의 살점이 터져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정옥이 매를 맞으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자 잭은 가죽혁대를 내 팽개치고는 정옥의 머리채를 질질 끌고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물이 찬 변기안에 정옥의 머리를 쑤셔박았다.

"말하라니까,빨리 말해, 이 쌍년아!"

정옥의 코와 입으로 물이 사정없이 들어갔다.

"차라리 날 죽여, 죽여버려!"

숨을 쉬지 못해 허우적대면서 정옥은 울부짖었다. 그리고 정옥은 까무라쳤다.

정옥이 눈을 뜬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영이는 늘 그렇듯 소리도 내지 않고 울면서 처연한 얼굴로 정옥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열려진 창문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정옥은 비척비척 일어났다.

물을 많이 들이킨 머리는 돌덩이를 매단 듯 무거웠고 온몸은 불에 덴 듯 쓰라리고 아파왔다.

정옥이 일어나는 기척을 보이자 잭은 마시고 있던 술병을 팽개쳤다. 그리고 정옥에게 소리쳤다.

"앞으로 내 허락없이 문밖 출입을 한번만 더 했다간 넌 그 자리서 죽는 줄 알아! 이젠 더 이상 봐 주지 않아!"

잭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내가 가지고 있는 총에 총알이 항시 장전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았겠지?!"

천만에!

정옥은 속으로 절규했다.

네 총알이 내 뒷통수에 와 박힌다해도 나는 앞으로도 계속 영이를 데리고 나갈 거야! 더 이상 영이를 이렇게 방치하지 않을 거야. 네 손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지!

죽을 때 죽더라도 영이를 데리고 나가려던 정옥의 계획은 당분간 실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잭의 감시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잭은 그 날 이후로 아예 일을 나가지 않은 채 집에서 술만 퍼 마시며 정옥의 행동을 일일이 주시했다.

먹을 것이 떨어져 영이가 배 고프다고 울어도 잭은 개의치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식빵조각만을 일 주일째 씹고 있는 영이와 정옥이었다. 그러나 잭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가 자신이 마시는 술이 떨어져야 몸을 움직였다.

영이가 말갛게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도 성기를 들이대며 섹스를 요구하는 짓거리는 여전했다. 10여년동안 하루도 빼지않고 지겹도록 되풀이되는 일이었지만 정옥은 이제는 영이를 먼저 의식해야 했다.

영이가 보지않게 방으로 들어 가자는 정옥의 애타는 호소를 잭은 폭력으로 무시했다. 정옥은 얼굴과 온몸에 피를 철철 흘리며 그것을, 저주스러운 잭의 그것을 빨고 핥고 주무르고 몸에 넣어야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술이 살 돈이 떨어진 잭은 어쩔수 없다는 듯 다시 일을 나갔다.

그는 일을 나가면서 엄포를 놓았다.

"아예 앉은뱅이가 되고 싶지 않거든 얌전히 집에만 있어!"

그즈음 정옥은 잭에게 너무 맞아서 다리 한 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한 쪽 다리를 질질 끌고다니는 정옥이 그래도 못미더웠는지 시뻘겋게 핏발이 선 눈을 희번덕거리며 다시 한 번 엄포를 놓는 잭이었다.

그러나 잭이 집 문을 나가자마자 정옥은 얼른 영이의 옷을 갈아 입혔다.

레베카네에 갈 생각이었다.

나는 갈 거야. 영이를 위해서 나는 갈거야....

그러나 정옥은 현관문을 나서다가 도로 철부덕 주저앉고 말았다. 다리가 제대로 옮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질질 끄는 다리를 가지고는 도저히 레베카네 집에까지 갈 수가 없었다.

"영이야.. 너를 어쩌면 좋으냐....너를 이렇게 바보로 만들 수는 없는데...레베카네 가야 하는데......"

다리까지 못쓰게 된 자신의 신세보다 영이에게 말을 가르칠 수 없는 게 안타까와서 정옥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영이도 같이 울었다.

그 때였다.

조심스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난 것은!

잭이 도로 돌아 온 줄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던 정옥은 잭이라면 저렇게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지 않을 거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누굴까. 이 산골짝 외딴집을 찾아 온 사람은.

정옥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리를 끌면서 나가 문을 열었다.

" ! "

문 밖에는 놀랍게도 레베카가 서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낯선 동양여자와 함께였다.

"정옥!"

"레,레베카!"

레베카는 문턱에 엉거주춤 서서 입을 벌리고 있는 정옥을 껴안았다.

"정옥 괜찮아요? 다리는 왜 또 그렇게?"

레베카는 정옥의 다리를 보더니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옆에 서 있는 동양여자를 급하게 소개했다.

"이 분을 모시고 왔어요. 당신을 도와주려고...."

동양 여자가 정옥의 손을 움켜잡았다.

"정옥 씨!"

"나는 윤이라는 사람이예요. 당신 한국사람이지요? 맞지요?"

한국말! 아아, 한국말!

정옥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정옥의 입에서 갑자기 주체 못할 통곡이 터져나왔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그때.

드디어 나를 도와 줄 사람이 나타났구나! 이제 곧 여기를 빠져나갈 수 있겠구나!

윤 여사라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런 직감이 퍼뜩 왔던 것이다. 그래서 10년동안 꾹꾹 쌓여 있던 가슴 속의 한이 자신도 모르게 통곡으로 터져 나왔던 것이다.

어허헝헝헝........

윤 여사와 레베카는 저 심장 깊은 곳에서 쥐어 짜져 나오는 듯한, 한이 철철히 맺힌 듯한, 상처입은 짐승의 소리같은 정옥의 울음소리를 잠자코 서서 들었다.

윤 여사가 정옥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은 얼마 전이었다.

남편으로부터 매일 폭행을 당하는 듯 온몸에 성한데 없이 피멍이 든 어느 여자가 딸과 함께 한 일 주일 자기 집에 오기 시작했는데 한 달전부터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여자가 분명히 한국여자 같아 보인다는 것이다.

영어를 거의 못했지만 딸에 대한 정성은 지극한 듯 하루도 빼지않고 꼬박꼬박 오던 여자가 오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무슨 큰 일이 일어난 것 같다면서 같이 그 여자를 찾아 가 보자고 레베카가 말했다.

한국여자 같다는 말에 윤 여사도 쾌히 승락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동네가 작다고 하나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여자를 찾아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베카와 윤 여사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정옥을 수소문하고 다녔다.

그러다가 얼마전 어떤 이로부터 산속의 오두막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분명 사람은 살고 있긴 한 것 같은데 누가 사는지 본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레베카와 윤 여사는 그 집에 분명히 정옥이 살고 있을 것 같은 직감을 했다.

그래서 일 주일전부터 숲속에 숨어 동정을 살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집에서는 매일 여자의 비명소리와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두 여자는 안타까움으로 발을 동동 굴려야 했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집안으로 들어 가 볼 수도 없었다. 남자가 어떤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그러다가 오늘 남자가 일을 나갈 채비를 하고 집을 나서는 걸 확인하고 급하게 문을 두드린 것이었다.

"레베카로부터 대충 당신의 얘기를 들었어요. 조금 전에 나간 남자가 남편인가요? 어딜 갔나요? 언제 돌아 올 예정인지 혹시 아세요?"

윤 여사는 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옥은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혀가 아예 굳어버렸는지 으으으,하는 신음소리만 입술을 헤집고 나올 뿐이었다.

윤 여사가 정옥의 손을 힘차게 다시 움켜잡았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말해보세요. 지금 나간 남자가 남편 맞지요?"

정옥은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내 몸을 이렇게 만신창이로 만든 인간, 남편이란 사람 맞아요!

정옥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만 끄덕인 것이다.

일을 하러 나간다고는 했지만 어쩌면 잭이 도로 돌아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긴박한 불안감이 정옥을 휩쌌다. 그러나 정옥은 죽을 힘을 다했다. 말을 하기 위해, 굳어진 혀를 놀리기 위해.

"도,도...도와....도와 주...주..주세요!"

마침내 정옥의 입에서 비명처럼 말이 튀어나왔다.

"이...이대로 이,이...있다가는 저,저,저....저는 주,죽을 거예요.....재..재,잭이,잭이 절 주,죽일거예요!"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정옥을 윤 여사가 황급히 끌어안았다.

정옥의 등뒤에서 쭈볏거리고 서 있던 영이도 와아,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럼요, 도와 주고 말고요.그래서 우리가 지금 왔지 않아요?"

"정옥씨.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요"

자신의 품에 쓸어안았던 정옥을 떼어놓으며 윤여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겠어요. 숲속에 숨어 있다가 당신 남편 차가 나가는 즉시 올테니까 준비를 하고 있으세요.당신을 지금 당장 데려가고 싶지만 준비가 안되어 있어 시간이 지체가 될 것 같아요.이러고 있다가 당신 남편이라도 돌아 오게 되면 우린 끝장이예요.그러니까 내일...."

레베카와 윤 여사는 돌아갔다.

최소한의 입을 것을 준비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으라는 다짐을 하길 잊지 않았다.

레베카와 윤 여사가 돌아가고 난 뒤 정옥은 반 미친 상태가 되었다.

드디어 드디어 탈출을 한다! 드디어 지옥의 소굴을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정옥은 자신의 소지품 몇 개와 영이의 옷 몇 벌을 보자기에 싼 후 침대 밑에 감추었다.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누르려고 다리를 끌면서 집안일에 몰두하려고 했지만 가슴은 계속 쿵쾅쿵쾅 두 방망이질을 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잭은 술에 취하지 않은 채 일찍 돌아왔다.

문을 열어주는 정옥을 확 밀치고 들어온 잭은 저녁이 차려진 식탁을 거들떠도 보지않은채 소파에 드러누워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았다.

제발 깨지 말거라. 제발 깨지말고 내일 아침까지 자거라......

정옥은 기도하는 심정이 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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