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를 달고

정옥의 간절한 바램과는 달리 잭은 한밤중에 깨어 일어났다. 그리고 위스키 한 병을 가져다가 병나발을 불었다.

그는 거실 한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정옥을 손짓해 불렀다.

정옥은 그 손짓이 무얼 뜻하는 줄 알았다. 정옥은 옷을 벗고 바닥에 누웠다. 어쩌면 이짓도 오늘 밤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잭의 요구에 순순히 따른 것이었다.

그래, 네 마음껏 가져라! 오늘이 마지막이니 네 마음대로,네 뜻대로 유린하여라!

정옥이 별 반항을 하지 않자 잭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무말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잭은 다시 한번 관계를 요구했다. 이번에도 역시 정옥은 순순히 몸을 맡겼다.

"네 년이 웬일이냐? 엊저녁부터 순순히 내 말을 다 듣게? 이제부터는 반항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바꾸어 먹은 게냐?"

술이 깨어서일까. 잭은 날카로운 눈으로 정옥의 얼굴을 살폈다. 정옥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녀는 얼른 무표정한 표정을 지었다.

잭이 이죽거렸다.

"네 년이 이제서야 섹스에 맛을 들인거로구나?"

정옥은 잭 옆에 더 있다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옷을 줏어 입고 부엌으로 나왔다.

정옥의 등 뒤로 잭이 다시 이죽거렸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게 섹스야. 네년이 진작 섹스에 맛을 들였다면 나한테 그렇게 맞지 않았어도 되었을걸"

 

정옥은 허둥거리는 손으로 영이의 옷을 갈아 입히고 머리를 빗겼다. 성치않은 다리를 끌며 그 일을 하느라 몇 번이고 고꾸라져가며.

하나님. 제발, 제발 저를 이 소굴에서 구해 주세요.....

정옥은 일 분에 한 번씩 창밖을 내다보며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기도했다.

일을 하러 간다고 나갔던 잭이 오늘따라 일찍 돌아오는 불상사가 없게 해 주세요. 오늘 무사히 여기를 떠나 가게 도와 주세요....

그녀의 가슴은 초조와 불안, 그리고 벅찬 기대로 인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숨 막히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또독....또독......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정옥은 불에 덴 듯이 일어났다. 그리고 절뚝거리는 다리를 끌고 나가서 급하게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레베카와 윤 여사였다.

둘의 얼굴도 역시 정옥처럼 긴장과 두려움으로 잔뜩 굳어 있었다.

"준비 다 되었지요?"

"예,예....."

윤 여사는 들고 있던 봉지에서 운동화를 한 켤레 꺼내 정옥에게 주었다.

"자아, 이것으로 얼른 갈아 신으세요"

정옥은 허둥지둥 운동화를 발에 꿰었다.

"그럼 빨리....."

정옥은 미리 침대밑에서 꺼내 식탁에 올려 놓았던 보따리를 얼른 집어들었다.

"가자, 영이야!"

레베카와 윤여사가 영이와 정옥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네 사람은 모두 집 밖으로 나왔다.

정옥은 눈을 찌르는 햇볕 때문에 손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

윤 여사는 급하게 영이를 들쳐 업었다. 그리고 레베카는 정옥의 팔을 부축했다.

"길로는 갈 수가 없어요. 혹시라도 당신 남편과 부딪칠 수도 있기 때문에......"

레베카와 윤 여사는 길과는 반대쪽 숲 속으로 정옥을 이끌고 갔다.

레베카와 윤 여사가 어저께 바로 정옥과 영이를 데리고 나가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었다.

오두막 집으로 들어 오는 길은 딱 한 군데였다. 차를 이용해 그길로 나간다면 훨씬 신속하고 쉽게 탈출을 할 수 있었겠지만 잭과 맞딱뜨릴 위험이 컸다. 그래서 레베카와 윤 여사는 큰 길과는 반대쪽에 있는 숲을 따라 마을로 내려가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래서 정옥의 운동화까지 준비해 온 것이다.

아무도 다니지를 않아 길이 나 있지 않은 숲속은 풀과 나무, 가시덤불이 무릎까지 우거져 있었다. 그리고 이마와 눈을 사정없이 찔러대는 나뭇가지들로 인해 걸음을 옮기는데 매우 힘이 들었다. 레베카의 얼굴은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찔려 벌써 생채기가 몇 군데나 났다.

윤 여사도 레베카도, 그리고 정옥도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잭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뒤를 쫒아 올 것만 같아, 바람을 가르고 총알이 날아와 뒷통수에 박힐 것만 같아 그들은 마냥 불안했던 것이다.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분위기를 감지한 영이도 윤 여사의 등에 업혀 숨소리 조차 크게 내지 않았다.

정옥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눈 앞에서 멀어져 있는 오두막 집을 바라 보았다.

오두막 집은 숲에 묻혀 조용히 서 있었다. 지옥같은 기억만 서려 있는 오두막 집이었지만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곳이라는 생각을 하자 정옥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잘 있어라. 악몽의 집아.....

"자, 얼른 가요"

레베카가 정옥을 재촉했다. 정옥은 걸음을 다시 옮겼다.

해는 어느덧 하늘 한 가운데로 떠오르고 있었다.

뾰로롱......뾰로롱....

이름 모를 새들만 지저겨대는 적막한 산 속.

네 명은 민첩하게 움직였다.

등으로 진땀이 흘러내려 옷을 적셨지만,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들어가서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따가왔지만, 가시덤불이 얼굴과 손등을 긁었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윤 여사는 일곱 살이나 되는 영이를 업고 레베카는 다리를 못쓰는 정옥을 부축하고 마치 전쟁에 진 패잔병들처럼 묵묵히 숲을 헤치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저만치 마을이 보이기 시작 했다.

차를 타면 2, 3분. 걸으면 한 시간이면 족할 거리를 숲길을 헤치고 오느라 거의 두 시간이나 걸려 도착한 것이었다.

"정옥 씨! 됐어요! 드디어 동네에 다 왔어요!"

윤 여사가 감격에 겨워 거의 울음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윤 여사와 레베카가 정옥을 데리고 간 곳은 윤 여사의 남편이 시무하고 있는 교회의 사택이었다.

"오, 주여!"

윤 여사의 남편 스미스 목사는 처참한 정옥의 모습에서 모든 것을 짐작한 듯 했다. 파란눈의 그는 신음처럼 주여,를 몇 번이고 반복해 외쳤다.

나무등걸을 피하고 숲을 헤치고 오느라 네 사람의 행색은 말 할수 없이 엉망이었다. 특히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두 시간이나 험한 산길을 내려 온 정옥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윤 여사는 자신의 차림새를 추스릴 틈도 없이 정옥과 영이를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정옥과 레베카에게는 따뜻한 차를, 영이에게는 따뜻하게 뎁힌 우유를 갖다 주었다.

"정옥 씨. 이 차를 좀 드세요. 그리고 우선 마음을 좀 안정하도록 해요"

그러나 정옥은 윤 여사의 말대로 안정할 수가 없었다.

안정이라니. 지금 당장이라도 잭이 문을 박차고 들어 올 것만 같은데 안정이라니...

정옥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마냥 떨리고 있었다. 윤 여사의 권유로 잡은 찻잔의 차가 넘쳐 흘러 내릴 정도였다.

정옥은 도저히 차를 마실 수가 없어 찻잔을 내려놓고 영이를 끌어 안았다.

"차라리 그냥 바로 핫 라인 사무실로 갈 걸 그랬지요?"

레베카가 공포에 질려 있는 정옥을 안타까운 눈으로 보며 윤 여사에게 말했다.

"아니요. 정옥 씨의 이런 몸 상태로는 좀 어렵겠어요. 일단은 안정을 좀 한 다음에 가도 늦지 않아요. 그리고 정옥씨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좀 들어 보아야 하고....."

윤 여사는 정옥의 품에 안겨 있는 영이를 자신의 품에 옮겨 안았다. 그리고 찻잔을 정옥의 손에 다시 꼭 쥐어 주었다.

"이제 안심해도 돼요. 어쩌면 아직 당신 남편은 당신이 없어진 줄도 아직 모르고 있을테니까....."

윤 여사는 정옥이 차를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정옥 씨!"

".........."

정옥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입은 열었으나 으으으,하는 짐승같은 신음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우리는 당신 남편을 경찰에 고발하려고 해요. 그러니 마음을 진정하시고 그동안 당신 남편이 한 일을 소상히 이야기 해 봐요. 그러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 해요. 당신의 몸에 난 상처만 가지고도 충분한 증거가 될 수도 있지만 당신 입으로 말하는 증거도 필요해요. 당신 남편을 고발하려면 당신의 시인이 있어야 해요. 알겠어요?"

윤 여사는 정옥의 뼈만 남은 손을 뜨겁게 부여잡았다.

"알아요. 당신이 왜 말을 할 수 없는지. 그동안 당신은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을 당해오며 말을 쓰지를 못해서 일시적으로 말을 잊게 된 것 같아요. 더구나 지금은 심리적인 공황상태에 빠져 있는 것 같고....."

윤 여사가 정옥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그 눈은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신은 꼭 말을 해야만 해요. 자, 얼른 말을 해 봐요. 그 짐승같은 남자한테 지금까지 어떻게 당해왔는지.....

정옥의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내 시인이 있어야 잭을 고발할 수가 있다! 그를 처벌하게 하려면 내 증언이 필요하다!

정옥은 입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입을 열어서 그동안, 지난 10년 동안 그가 자기에게 행해온 짐승보다 못한 짓들을 폭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만이 지금 정옥이 잭에게 복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그것만이 아직도 정옥의 몸을 옥죄고 있는 잭의 미친 쇠사슬을 끊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유,유....윤,윤 여사님....."

정옥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윤 여사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정옥 씨"

윤 여사가 정옥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제,제.....나,나.남...남편 이,이름은 재,잭이예요. 잭 탐슨....."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행하기 어려운 잭의 작태를 정옥은 더듬거리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번 기회가 하늘이 내린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서. 이번에는 하늘도 꼭 자신을 도와 잭의 곁을 완전히 빠져 나가게 해 줄거라는 일념으로 정옥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10여년 동안 겪은 일들을 어찌 한 두시간만으로 다 간추릴 수 있으랴! 대충만 이야기한다해도 한나절은 꼬박 걸릴 것이었다.

그리고 정옥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이야기를 했지만 윤 여사는 정옥이 무슨 말을 하는지 거의 알아 듣지못했다.

정옥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언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어도 아니고 한국말도 아니었다. 제 3의 언어, 아니, 짐승의 언어라고 할까.

그러나 윤여사는 참을성 있게 정옥이 하는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틈틈히 옆에 앉은 레베카에게 정옥의 이야기를 그대로 통역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의 여섯시간에 걸친 정옥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급기야 윤 여사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런 인생이 하늘 아래에 있었다니...아아, 하나님이 무심하기도 해라...."

레베카도 같이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놓던 정옥은 급기야는 통곡하고 말았다.

바로 오늘 아침까지 10여년을 하루같이 겪어온 일었이지만 막상 자신의 입으로 그것들을 낱낱이 털어놓자니 자신이 생각해도 자기 인생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영이는 커다란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정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괘,괜,괜찮을까요? 지..지..진,진짜 괜,괜찮을까요?"

정옥의 겁먹은 목소리에 윤 여사는 옆에 갖다 놓은 전화통을 바라보았다.

"여차하면 경찰에 전화를 걸면 돼요. 너무 걱정말라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윤 여사도 역시 불안하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스미스 목사는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작은 방에는 정옥과 영이, 그리고 윤 여사가 있었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정옥과 윤 여사의 얼굴에 다시 불안이 서렸다.

밤이었다. 커튼이 내려진 창밖은 칠흙같은 어둠만이 드리우고 있었다.

잭이 지금쯤은 정옥과 영이가 없어진 걸 알았을 터였다. 그래서 미친 듯이 날뛰고 있을터였다. 어쩌면 이 교회 사택을 알아내고 총을 휘두르며 이리로 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옥의 입술이 하얗게 타들어 갔다.

"오늘 밤만 어떻게 잘 넘기면 될 것 같은데....."

윤 여사가 벽시계를 쳐다보며 손바닥을 비볐다.

망할 사람들같으니라구. 어떻게 자기들 퇴근시간을 핑계로 도움 요청을 외면하고마누......

윤 여사는 핫 라인 직원들을 원망해 보았다.

핫 라인(hot line).

한국의 매맞는 여성들 피난처 같은 곳이다.

때는 1980년대 초반이었다.

캘리포니아주를 포함한 16개 주에서 가정폭력법이 제정된 것이 1980년. 법은 제정되었지만 그 법이 지금처럼 안전하게 여성들을 감싸기 전이었다.

미국내 가정에서는 가정폭력이 만연하고 있었다. 수많은 여성들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정옥처럼 음지에서 신음했다. 배우자에게 맞아 목숨을 잃는 여성들 숫자가 늘어가는등 갈수록 심화되는 가정폭력이 미국내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되자 국가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가정폭력법을 제정한 것이다. 그리고 핫 라인같은 가정폭력 상담소를 설치해 매맞는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초기 가동 단계인 핫라인은 여러 헛점들 투성이었다.

바로 정옥의 경우같은.

정옥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 그리고 정옥의 마음을 대충 진정시킨 후 윤 여사와 레베카는 바로 핫 라인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엉성하기만 했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을 해야하므로 지금은 아무 도움도 줄 수가 없다는 얘기였다.

윤 여사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전화기가 갑자기 요란스레 울렸다.

정옥과 윤 여사는 뛸 듯이 놀라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조용한 밤 전화벨 소리는 유독 요란스럽고 컸다.

윤 여사는 선뜻 전화기에 손을 내밀지 못했다. 흉칙한 무엇을 보듯이 그저 바라 보기만 할 뿐.

전화벨 소리는 대여섯번 요란스레 울리다가 혼자 제풀에 지쳐 사라졌다. 그러다가 전화벨은 또 대여섯번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에도 역시 윤 여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기를 서너번. 자정을 기해 한번 더 울린 것을 끝으로 전화는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정옥은 지금도 그 때의 전화벨 소리만 생각하면 등에 식은 땀이 흐른다고 한다. 정옥은 확신했다. 그 전화는 분명 잭이 건 것일거라고.

다음날.

날밤을 하얗게 새운 윤 여사와 정옥은 아침 일찍 핫 라인 사무실로 찾아 갔다. 레베카는 벌써 도착해 있었다.

"오! 하나님 맙소사!"

정옥의 처참한 모습을 보자 핫 라인 사무실 직원들은 모두 몸서리를 쳤다.

사무실을 연지 얼마되지 않긴 했지만 정옥같이 지독한 경우는 처음 본다고 이구동성이었다.

"이러고도 여지껏 살아있었단 말입니까?"

"오오,내가 인간인 게,내가 남자인 게 부끄러워지는군요!"

"진짜 끈질긴 생명력입니다. 이런 몸에서 아이가 태어났다니!"

정옥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그녀의 몸 상태만 보고도 모든 것을 짐작하는 핫 라인 직원들이었다.그들은 악마같은 잭의 행위에 모두 치를 떨었다.

핫 라인 직원들은 정옥의 몸에 난 상처를 모두 사진 찍었다. 만일을 위해 증거로 남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곧 정옥은 병원에 보내졌다. 치료를 받기 위해, 그리고 진단서를 끊기 위해.

외상만 가지고 내려진 진단은 자그마치 전치 16주였다. 거기다 지독한 영양실조와 우울증까지 겹쳐 있었다. 그리고 신경쇠약에다 약간의 정신착란증까지 있다고 했다. 육체는 물론 정신까지 성한 곳이 거의 한 군데가 없다는 의사의 소견이었다.

의사역시 핫라인 직원들과 똑같은 말을 했다.

"의사생활 20년에 남한테 맞아서 이렇듯 처참하게 된 몸은 처음 봅니다."

핫라인 직원들은 정옥의 이혼에 대한 서류를 준비했다. 그리고 지역신문에 정옥의 이야기를 발표했다.

상처 투성이 몸의 사진과 함께 실린 정옥의 이야기는 작은 소도시인 N시를 발칵 뒤집어 놓고야 말았다.

마침 그 당시 미국 전역에는 '불타는 침대(The Burning Bed)'라는 영화가 개봉되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파라 포세트가 주연한 이 영화는 잭과 같이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남편과 함께 10여년을 산 여성의 실화를 토대로 만든 영화였다. 그 여성은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급기야는 침대에 불을 질러서 남편을 태워 죽여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은 나중 미국의 가정폭력법을 강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정옥의 이야기는 불타는 침대의 주인공보다 더 처참하고 충격적이었다. 10여년씩이나 짐승처럼 학대당하고 유린당하며 마침내 언어까지 잊어버린 정옥의 이야기는 조용한 소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가슴에 영화보다 더 커다란 자극을 주었던 것이다.

"한 여성의 인권을 완전히 말살하고 유린한 잭이란 놈을 잡아다가 당장 감옥에 처넣어야 한다"

"잭 같은 인간이 버젓이 활개를 치고 다니게끔 방치한 우리 사회제도에도 문제가 있다"

"그런 사람은 우리 여성들의 적이다. 가정폭력법을 더 강화해야 한다."

정옥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신문에는 정옥을 동정하고 잭을 비난하는 독자여론이 매일같이 줄을 이어 실렸다.

또한 핫 라인 사무실 직원들은 업무가 일시 마비될 정도였다. 성난 미국인들이 잭을 성토하는 전화가 매일 폭주했기 때문이다.

며칠후 정옥은 이혼 판결을 받기위해 법원으로 갔다. 당시에는 이혼을 하려면 법원에서 판결을 받아야 했다.

1969년에 캘리포니아 주에서 처음으로 협의상이혼법 (no-fault divorce law)이 실시되었고 이후 많은 주들이 협의이혼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법은 10년 이상의 세월이 걸린 후에야 제대로 정착이 되었다.

특히 당시 정옥이 살던 N시는 네바다 주와 캘리포니아 주에 걸쳐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한쪽은 캘리포니아 주였고 다른 한쪽은 네바다주였다. 그런 지역 여건상 N시는 캘리포니아주보다 네바다주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있었다. 네바다 주는 협의이혼법이 활발하게 시행되지 않고 있던 주였던 것이다.

법정의 방청석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만큼 정옥의 사건에 대한 N시 지역 주민들의 관심은 크고 지대했다.

정옥은 윤 여사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법정에 들어섰다. 그러나 무심코 눈을 들어 옆을 보던 정옥은 잭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

그는 깎지 않은 수염이 온 얼굴을 뒤덮은 초췌한 모습이었다.

잭도 정옥의 모습을 본 것 같았다. 그는 흠칫하며 놀라워 하더니 이내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러나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정옥을 흘낏거리며 쳐다보았다.

정옥의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너무 떨려 걸음을 옮겨 놓을 수 없을 정도였다.

"정옥 씨!"

윤 여사가 정옥의 팔을 부축한 손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겁내지 말아요. 아무도 당신을 괴롭힐 수 없어. 당신은 안전해요, 지금!"

정옥은 윤 여사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정옥은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아서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힘이 풀린 다리가 계속 휘청거렸다.

법정에서 잭을 만나게 되리라는 걸 전혀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막상 그를 눈앞에 다시 보게 되자 정옥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옥은 미리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감히 잭이 앉은 쪽으로는 눈길을 줄 수가 없어 바닥만 내려다 보고 있는 정옥. 그녀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예기치 않은 눈물이 흘러나와 얼굴을 적셨다.

생각만해도 가슴이 떨려오는, 다시는 얼굴을 마주 대하기조차 끔찍하고 싫은 남편이었지만 막상 초라한 그의 모습을 보게 되자 마음이 아파오는 정옥이었다.

정옥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모든 방청객들이 혀를 찼다. 그러나 그들은 정옥의 복잡한 심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무섭고 두려워서 우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곧 판사가 입장했다.

판사는 들고 온 서류철을 뒤적이며 잭에게 이름과 주소, 그리고 나이등에 대해 먼저 묻기 시작했다. 잭이 모두 대답을 했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판사가 물었다.

"당신이 이정옥의 남편입니까?"

잭이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판사가 다시 물었다. 그때서야 잭이 예,하고 대답했다.

"당신은 10년전 결혼한 이후 지금까지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는 지독한 폭력과 섹스로 이정옥을 괴롭혀왔다는데 사실입니까?"

판사의 물음은 준엄했다.

잭은 잠깐 망설이다가 다시 예,하고 대답했다.

정옥은 얼핏 눈을 들어 잭을 쳐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힌채 눈을 감고 있었다. 체념하는 표정이었다.

판사는 핫 라인 측에서 조사해 제작해 준 서류를 토대로 서른 가지가 넘는 질문을 잭에게 연이어 던졌다.

"당신이 휘두른 폭력으로 이정옥의 왼쪽 눈이 실명되었다는데 사실입니까?"

"이빨을 네 개나 부러뜨리고 한 쪽 다리도 못쓰게 했다는데 사실입니까?"

"당신 딸 영이가 말을 배우게 되면 이정옥을 도와 도망이라도 칠까봐 일곱 살 때까지 학교도 보내지 않고 말을 가르치지 않았다는데 이 사실이 맞습니까?"

판사의 물음이 계속되자 방청객들 사이에서 탄식과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몇몇 여성들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기도 했고 손을 모아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잭은 숨 쉴 틈도 없이 던져지는 판사의 물음에 그저 예, 라는 대답만으로 자기가 한 짓을 모두 시인했다.

판사가 잠시 숨을 고르는 듯 하다가 잭을 보며 물었다.

"마지막으로 당신 아내에게 할 말이 있습니까?"

순간, 잭이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이혼만은 피하고 싶습니다. 이제부터는 때리지 않고 잘 위해주면서 같이 살고 싶습니다"

방청객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저,저런! 저런 쳐죽일 놈!"

"저런 양심도 없는 인간! 저걸 말이라고 하고 있나!"

"여리디 여린 여자한테 10년동안 갖은 학대를 자행 해놓고 이제 와서 다시 살겠다니 저 놈 머리가 돈 게 아니야?!"

판사는 법원직원으로 하여금 법정을 정돈시켰다.

법정 안이 조용해졌다.

판사는 이윽고 판결을 내렸다.

"잭 탐슨이 이정옥에게 행한 폭력에 대한 증거가 너무도 뚜렷하고 잭 탐슨 또한 이를 시인하므로 이 두 사람의 이혼을 허락합니다"

방청객들은 일시에 환호성을 올렸다. 일부 여자들은 울음을 터트리며 서로 껴안기도 했다.

이혼이 되리라고는 짐작을 하고 있었지만 막상 판사로부터 판결이 떨어지자 정옥은 멍한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정옥이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어느 미국 할아버지한테 맡겨진 영이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판사는 법정을 다시 정리하고나서 방청석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윤 여사를 앞으로 불러내었다. 그리고 무어라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거리던 윤 여사는 정옥에게 다가왔다.

"정옥 씨. 당신만 동의하면 잭을 구속해 감옥에 넣겠다고 그러시는군요. 당신의 의향이 어떤지 알아보래요"

윤여사의 말에 정옥은 어리둥절해 눈을 크게 떴다.

당신만 동의하면이라니? 잭이 저절로 감옥에 가는 게 아닌가......

가정폭력법이 시행초기단계였던 즈음이었다. 요즘 같으면 손톱으로 할켜진 상처 한 개만으로도 가해자를 구속 시킬수 있는 강력한 법이 시행되고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가정폭력범을 구속시킬 수 있는 법이 발효되기 전이었다. 가정폭력은 이를테면 법의 테두리밖에 있는 범죄였다. 부부사이의 폭력은 친고죄라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치 않으면 판사도 어쩔수 없는지라 정옥의 의향을 물은 것이었다.

법정안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팽팽한 긴장감과 적막감으로 가득찼다. 모두 다 숨을 죽이고 정옥의 얼굴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정옥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정옥은 잭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채 정옥을 외면하고 있었다.

정옥의 마음이 착잡해지기 시작했다.

내 인생을 만신창이로 만든 남자, 몸은 물론 정신까지 황폐화 시킨 남자,한 때는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스러웠던 남자.....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던 잭과의 10년 세월이 정옥의 머리속에 떠 올랐다가 지워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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