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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옥은 잭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떨군채 이쪽을 외면하고 있는 남자. 그는 더 이상 광기어린 눈을 희번덕거리며 주먹을 휘둘러대던 남자가 아니었다. 정옥의 입에서 떨어질 결정만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초라하고 무기력한 남자에 불과했다.

경찰에 고발만 하면,폭력의 증거만 있으면 그냥 무조건 감옥에 보내지는 줄 알고 있던 정옥이었다. 미국인 목사의 부인으로 세상물정에 밝은 편이었던 윤 여사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었다.

그런데 잭이 구속이 되고 안 되고는, 형을 살고 안 살고는 정옥의 권한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정옥의 마음이 다시 착잡해졌다.

십 여년 동안 지옥의 고통 속에 나를 살게 한 남자다. 나의 아까운 청춘을 자신의 더러운 배설물받이로 사용했던 남자다.....

그러나.

그러나, 저 사람을 지금 감옥에 넣는다한들 내게 돌아오는 보상은 무엇일까.

미국인 할아버지네 맡겨져 있는 영이의 얼굴이 정옥의 머리에 다시금 떠올랐다.

어쨌든 저 사람은 영이의 아버지인데......

정옥은 결심했다.

잭을 용서하자고. 영이의 아버지를 감옥에 넣어서는 안된다고......

정옥은 입을 열었다.

"저, 저...저, 사람을......"

순간 잭이 퍼뜩 고개를 들어 정옥을 보았다. 정옥의 눈과 잭의 눈이 마주쳤다.

"..........."

그때 왜 그런 생각을 정옥은 했을까.

그가 자기한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듯한 생각이 든 것이었다.

미안해. 미안해,정옥......

글쎄, 정옥이 너무 간절하게 바라던 것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정옥의 눈에는 잭이 분명 그렇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 처럼 보였다.

"저,저 사람을 요,용,용서합니다. 감,감옥에 보...보,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정옥의 말에 윤 여사는 매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투로 정옥이 한 말을 판사에게 그대로 전했다.

정옥의 뜻이 전해지자 법정 안은 지금까지의 소란보다 더 큰 소란이 일어났다.종신형을 청구해도 시원치 않을 인간을 어떻게 용서하느냐는 반응들이었다.

판사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옥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윤 여사를 통해 정옥의 입장을 재차 확인했다.

"재,잭을 요....용...용서합니다. 그가 내게 한 소..소소행을 생,생각하면 지금도 치,치,치...치가 떨리지만 딸...딸의 아,아버지이기 때문에 그,그가 감옥에 가는 걸 원,원...원,원치 않습니다. 다만 딸의 아,아,아버지이기 때문에....."

법정 안이 다시 술렁거렸다.

윤 여사로부터 정옥의 뜻을 재확인 받은 판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판사는 잭을 감옥에 넣지 못하는 대신 '접근 금지령 2년'을 내렸다.

혹시라도 잭이 정옥에게 다시 다가갈 수 있는 것을 염려에 두고 내려진 판결이었다.

잭과 정옥의 이혼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날 지역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다.

정옥이 남편을 '용서' 하므로 잭이 구속되지 않은 사실은 지역 주민들의 가슴에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주민들은 정옥을 '원수를 사랑하라' 는 성경말씀을 손수 실천한 동양에서 온 작은 천사로 칭송했다.

정옥은 그 지역에서 일약 유명인사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곧 여러사람이 주동으로 한 '이정옥 돕기' 모금 운동이 일어났다.

잭과 이혼은 되었지만 정옥이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며 또한 정옥의 몸이 많은 시일의 치료를 요하는 중증의 상처를 입은 상태라는 요지의 기사가 이혼 이야기와 함께 신문에 실렸기 때문이었다.

지역주민들은 앞다투어 모금운동에 동참했다. 몇몇 단체에서는 '이정옥 돕기' 의 일환으로 디너파티등의 행사를 열어 거기서 모아진 성금을 정옥에게 전해 주기도 했다.

어느날.

윤 여사가 좋은 옷 한 벌을 가져오더니 정옥에게 갈아 입으라고 말했다.

"이 지역의 유명 기업인들과 정치인들이 다 모인 자리에 정옥 씨가 초청되었어요. 매우 중요한 자리이니만큼 모양에 신경을 쓰도록 하세요"

정옥은 얼떨결에 윤 여사가 시키는대로 옷을 갈아 입고 머리를 만진후 윤 여사를 따라 나섰다.

윤여사가 정옥을 데리고 간 것은 그 지역에서 가장 고급스럽다는 한 호텔의 연회장이었다.호화스러운 드레스와 멋진 양복으로 성장을 한 남녀들이 잘 셋팅된 둥근 테이블 사이를 물고기처럼 천천히 유영하고 있었다.

정옥은 생전 처음 보는 호화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윤 여사가 한 테이블로 정옥을 이끌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세요. 여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다 정옥 씨를 위해 돈을 기부한 사람들이예요."

".............."

"나중에 앞에 나가서 인사를 해야 할지도 몰라요. 떨지 말고 잘 해야 해요. 그냥 한국말로 하면 내가 통역할 테니까 너무 부담은 갖지말고....."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인사를 해야한다는 윤 여사의 말에 정옥은 괜히 따라나왔다고 후회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정옥이 온 걸 알고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쳐댔기 때문이다.

리셉션의 제일 끝머리 순서로 예정되었던 정옥의 인사는 참석인들의 박수로 인해 제일 먼저 하게 바뀌어졌다.

사회자가 정옥의 이름을 부르는 줄도 모르고 어리둥절하게 앉아 있던 정옥. 그녀는 윤 여사의 재촉에 의해 엉거주춤 걸어 나가 마이크 앞에 서야 했다.

100여개의 얼굴이, 그리고 200여개의 눈이 정옥에게로 일제히 쏠렸다. 정옥은 떨리고 당황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옥은 마음을 다잡았다.

나를 위해 돈을 모아준 사람들한테 인사를 하는 게 당연한 도리이리라.....

정옥은 마이크를 잡았다.

"여,여,여러분....."

정옥의 목소리가 한껏 떨려 나왔다.

"여,여러분 가,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도,도와주신 덕분에 저,저는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입안의 침이 바짝바짝 말라오는 것 같아서 정옥은 혀로 입안을 축였다.

정옥은 안간힘을 쓰며 다음말을 덧부쳤다.

"이,이제부터 제,제..제 딸 영이와 함께 열..열,열심히 살겠습니다...."

마지막 정옥의 말은 울음으로 젖어들었다.

잭의 매에 쓰러져 끝내는 죽어 버릴 줄 알았던 정옥이었다. 탈출하여 이런 자리에 서 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감격스러워 목이 메는 정옥이었다.

윤 여사가 큰 소리로 정옥의 말을 통역했다. 그리고 윤 여사는 정옥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지금 이정옥 씨는 너무도 기뻐서, 너무도 기쁘고 감격스러워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정옥씨가 흘리고 있는 눈물은 기쁨의 눈물, 감격의 눈물입니다!"

다시 박수가 터져나왔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정옥은 비틀거리며 자리에 가 앉았다.

누가 정옥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안았다. 정옥은 고개를 들었다. 우아한 차림새의 중년 부인이 허리를 굽혀 정옥의 어깨를 감싸안고 있었다.

"정옥"

그녀는 정옥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울지 말아요.이제 신의 뜻으로 당신에게 좋은 일만 생길 거야. 당신을 위해 기도 할거야."

정옥은 고맙다는 표시로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아주 따뜻한 손이었다.

정옥의 앞으로 모금된 액수는 꽤 컸다.

정옥은 작은 콘도를 빌려 그동안 머물던 윤 여사네 집에서 이사를 나왔다.

"언제까지나 있어도 괜찮다니까 그러네. 방도 많은데 그냥 같이 지내"

윤 여사는 정옥이 나가는 것을 만류했다. 그러나 남편 스미스 목사와 단 둘이서 단촐하고 오붓하게 평생을 살아온 윤 여사였다. 영이까지 데리고 언제까지나 신세를 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정옥은 요양이 필요했다. 윤 여사가 아무리 잘 해준다 하지만 정옥의 시중까지 들게 할 수는 또한 없었다. 영이랑 같이 지내면서 몸을 추스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그럼 병원 부지런히 다니고...."

윤 여사는 할 수 없다는 듯 정옥의 독립을 도와 주었다.

콘도로 이사온 후 정옥은 거의 한 달 동안을 문밖 출입을 못할 정도로 앓았다.

짐승처럼 당하면서도 10여년을 견딘 몸이었지만 긴장이 풀리니까 그동안 골병이 들대로 든 몸이 서서히 증세를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영이가 고사리같은 손으로 끓여오는 음식을 겨우겨우 목에 넘기며 화장실도 기어 가다시피 하며 정옥은 한 달을 자리에 누워 꼼짝하지 못했다.

남편 스미스 목사와 한 동안 유럽여행을 다녀온 윤 여사는 가방을 놓자마자 정옥에게 달려 왔다가 해골같이 참혹하게 마른 정옥의 몸을 보고 기겁을 했다.

"내 말 안들었구나. 택시라도 타고 병원을 다니라고 하지 않았어? 이런 미련한 사람같으니라구..."

탈출한 직후 다리와 몸의 심한 상처는 응급치료를 받았었다. 그러나 정옥은 그것 조차도 자신의 신분과 맞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한번도 소중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그리고 자신은 물론 그 누구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버러지 같은 몸, 길가의 잡초같이 천한 자신의 몸은 치료같은 건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어도 저절로 낫는다고 여기는 정옥이었다.

윤 여사는 다음날 즉시 정옥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강제로 치료를 받게 했다.

"치료비는 걱정 말아. 모금된 돈이 떨어져도 아직 도와줄 사람이 많으니까..."

윤여사는 혀를 찼다.

치료비 때문에 그러는 줄 알고 애써 정옥을 안심시키면서.

정옥은 이주일 동안을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두어달 동안은 집에서 통원치료를 해야 했다.

어느날.

윤 여사가 기쁜 얼굴로 정옥을 방문했다.

"당신 왼쪽 눈의 신경이 아직 살아 있대요! 잘만 하면 왼쪽 눈으로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아!"

" ! "

아,왼쪽 눈으로 볼 수 있다니!

그동안 한 쪽 눈만 가지고 반쪽 세상을 보면서 살아 온 정옥.

두 차례의 수술 끝에 정옥의 왼쪽 눈은 다시 시력을 되찾았다. 예전처럼 선명하게는 아니지만 희미하게라도 사물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서너달이 지나자 정옥의 몸도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치료를 받으면서 윤 여사가 지극정성으로 음식을 해다 준 음식을 잘 챙겨 먹은 덕분이었다.

그런데 잭은 어떻게 되었을까? 잘 지내고 있을까?

본래 생겨 먹기를 그렇게 생겨 먹은 걸까. 몸의 상처가 나으면서 견딜만 해지니까 잭의 정황이 궁금해지는 정옥이었다.

"잭은 지금 이 동네에 없어"

윤 여사가 말했다.

법원에서 이혼 판결과 접근 금지령을 받은 그 며칠 후 잭은 숲속의 외딴 집을 떠났다고 했다.

레베카와 윤 여사는 거의 매일이디시피 잭의 동정을 살피러 갔었다. 혹시라도 이상한 낌새라도 보이면 즉시 경찰에 알릴 생각이었다. 잭 같이 포악한 사람이 비록 접근 금지령을 받았다하나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잭은 며칠을 집에서 꼼짝않고 술만 마시는 것 같더니 어느날 아침 가재도구를 차에 싣고는 떠나더라고 했다.

"정옥 씨와 영이가 없는 그 집에서 혼자서는 도저히 살기 싫었나보지 뭐"

어디로 갔는지는 윤 여사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방심 하면 안돼. 접근 금지령 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인간이야. 언제 어떻게 나타나서 해코지를 할지 모르니까 부디 조심해"

윤 여사가 정옥에게 당부했다.

정옥 역시 윤 여사와 생각이 같았다.

낮에는 영이를 벗삼아 자리에 잘 누워 있다가도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잠긴 문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정옥은 불안감에 떨었다.

그러나 몇 달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옥의 마음도 점차 안정되어 갔다.

영영 떠나버렸나 보다. 이제는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겠지.....

정옥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옥의 몸과 마음이 어느정도 회복된 것을 확인한 윤 여사는 정옥에게 운전교습을 받을 것을 권유했다.

"차가 발인 이상 운전을 할 줄 알아야 해. 당신이 그동안 잭에게 그렇게 당하면서도 도망칠수가 없었던 것은 바로 운전을 할 줄 모르는 것 때문이었쟎아"

그랬다. 윤여사의 말대로 정옥이 운전만 할 줄 알았더라면 상황은 조금 틀려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옥은 운전학교에 등록했다.

영이는 저능 아동만 가는 특수학교에 입학시켜야 했다.

여덟살이 되었지만 말을 제대로 못하는 영이. 정상아들과는 어울릴 수 없다는 교육당국의 통보를 전해 듣고 정옥은 비통한 마음에 가슴을 치고 또 쳤다.

불쌍한 우리 영이,부모 잘못 만나가지고....

윤여사가 그러는 정옥을 위로했다.

"특수학교에 입학한다고 해서 나이 먹도록 계속 그 곳에만 있는 게 아니야. 조금 실력이 향상되면 언제든지 일반 학교로 옮길 수 있어.영이는 머리가 좋은 아이니까 곧 그렇게 될 거야...."

정옥은 두 달만에 운전 면허증을 취득했다. 그리고 곧 작은 중고차 한 대를 구입했다.

물건 한 가지를 사려고 해도 일일이 윤 여사의 도움을 빌릴 수밖에 없었던 정옥. 차를 가짐으로서 날개를 얻게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손바닥에서 은색으로 반짝거리는 차 키를 내려다 보면서 정옥은 눈물을 흘렸다. 감격의 눈물이었다.

내가 차를 운전할 수 있게 되었구나...내가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게 되었구나....

"이제 차도 생겼으니 영어학교에 다니도록 해요. 몇 년동안은 들어온 성금으로 살수 있지만 앞으로는 자립을 해야지요. 그러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영어를 익혀놔야 해요"

그래, 이제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 하겠구나....언제까지나 남들 신세만 질 수 없으니까....

윤 여사는 정옥을 정부에서 이민자들을 위해 무료로 운영하는 '어덜트 스쿨'에 등록시켜주었다.

그녀가 그동안 그렇게 바보같은 인생을 살았던 것은 정옥이 착해서였기도 했겠지만 세상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미국에 대해서는 너무도 무지했던 정옥이었었다.앞으로는 무조건 배워야 했다. 그것이 영어이든 세상 살아가는 이치든간에.

또한 정옥에게는 영이를 번듯하게 키워야 할 책임도 있었다. 영어를 모르면 자신은 물론 영이도 자신과 같은 삶을 되풀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정옥을 무섭게 했다.

영이를 특수학교에 등교시켜 놓고 자신도 학교에 가기위해 책을 챙기면서 정옥은 자신을 추스리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너무나 막막하기만 한 정옥이었다.

어릴때,남의 어깨 너머로 겨우 한글이나마 깨우쳤었던 정옥. 한글로 된 편지 한 장을 쓰기 위해 밤을 새워야 했던 정옥. 그런 정옥이 30년만에 다시 책을,그것도 생판 모르는 영어 책을 펼쳐야 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흰 것은 종이요,검은 것은 글씨라는 것만 겨우 아는 정옥이 영어라는 남의 나라말을 배워야 하는 것이었다.

홀로서기를 위해 가야 할 길은 너무나 힘들고 험했다. 언제 끝이 보일 지 모르는 머나먼 여정이 눈 앞에 놓여 있었다.

"누구세요? "

문밖으로부터는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누굴까, 아무도 찾아 올 사람이 없는데......

정옥은 조심스럽게 현관 문을 열었다.

" ! "

정옥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문 밖에 장승처럼 우뚝 서 있는 남자, 그는 잭이었다.

"웨,웬일로 여,여길... 여,여기는 또 어,어떻게 알,알고서?!"

드디어 이곳도 찾아내고야 말았구나!

정옥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아,잭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방법은 정녕 없는건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곳만은 도저히 찾아오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잭은 현관에 주저앉은 정옥을 한 번 쓱 쳐다보고 성큼 성큼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소파로 가서 털썩, 소리나게 앉았다.

"이리로 와"

바닥에 앉은 채 부들부들 떨고만 있는 정옥에게 잭이 손짓을 했다.

정옥은 비틀거리며 걸어 가서 잭 앞쪽에 놓인 의자에 엉덩이를 반만 걸치고 앉았다. 그러는 정옥을 잭은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아직도 내가 무서운가?"

"..........."

정옥의 얼굴은 공포로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럼, 무섭고 말고. 저승사자 보다 더 무서워.당신의 그 집요함이 무서워....

"정옥!"

잭이 정옥의 이름을 불렀다. 지난 10년 동안 같이 살면서 한 번도 잭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던 정옥의 이름. 이제는 자연스레 잭의 입에서 불려지는 것이었다.

"아직도 내게 돌아 올 생각이 없는가?"

잭은 버릇처럼 손가락을 꺾으며 말했다. 우두둑, 하는 그 소리가 자신의 뼈 꺾어지는 소리같아서 정옥은 몸서리를 쳤다.

"아직도 날 원망하고 미워하고 있나?"

잭이 고개를 늘여서 앞에 앉은 정옥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정옥"

"..........."

잭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 한테로 돌아 와. 예전처럼 널 때리거나 하지 않을테니까 . 앞으로 잘 해 줄테니까......"

지금까지 열 번도 넘게 잭으로부터 들어 온 말이었다.

정옥은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

그만 해요, 제발! 당신과 나의 인연은 벌써 끝났어요. 몇 년 전, 이혼서류에 사인을 했을 때 벌써 끝났다구요. 제발 좀 나를 그냥 내버려 둬요!

2년 동안의 접근 금지령이 풀리자마자 잭은 정옥 앞에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그동안 혼자 지내느라 힘들었는지 바짝 야윈 모습으로.

잭이 정옥에게 한 첫 마디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거였다.

자신을 향한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눈총을 받으면서 그동안 자신이 정옥에게 얼마나 잘못했는지 깨달았다는 것이다.

"미안하다."

잭은 정옥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심장이 없는 줄 알았던 남자 입에서 나온 사과의 말. 그는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눈치였다. 그러나 꽁꽁 닫힌 정옥의 마음이었다.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식은 정옥의 마음이었다. 그런 정옥의 마음이 쉽게 열릴리 없었다.

그가 망설이는 듯한 말투로 재결합에 대한 뜻을 비추었을 때 정옥은 잭에게 미친듯이 소리를 질렀다.

"뭐,뭐라구요? 재,재결합이라구요? 다,당신, 지금 제 정신이예요? 제,제 정신으로 내게 하는 소린가요?"

재결합이라니, 오오! 맙소사,재결합이라니!

겨우겨우 몸과 마음의 상처를 추스리고 내 힘으로 살아갈 방도를 세우고 있는 중인데 재결합이라니!

잭이 해주는 거라면 금방석이라도 치가 떨릴 판이었다. 그에 대한 기억이라면 정말이지 바늘 조각만큼도 소름끼치게 싫은 정옥이었다.

정옥이 목숨만큼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영이였지만 문득문득 영이의 모습에서 잭을 발견할 때가 있었다. 그런 순간마다 정옥은 흠칫흠칫 몸을 떨며 몸서리를 쳤었다.그런데 재결합이라니!

정옥은 다음 날로 당장 이삿짐을 옮겼다.

친언니처럼 정옥과 영이를 보살펴주는 윤 여사를 떠나는 건 슬픈 일이었지만 잭이 모습을 드러낸 이상 한 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윤 여사도 눈물을 흘리며 섭섭해 했지만 정옥의 의사를 존중해주었다.

"그래, 아무래도 그러는 게 좋겠지? 망할 놈의 인간 같으니라구.그 뻔뻔한 입에서 재결합하자는 말이 어떻게 나와....."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이사를 간 후 두 달만에 정옥은 잭의 또 방문을 받았다.

그는 정옥에게 또 다시 회유했다.

"앞으로는 잘 해 줄테니까 같이 살자"

천만에!

정옥은 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영어를 배우고, 운전을 배우고 그리고 미국생활에 어느정도 익숙하게 된 정옥이었다. 가정폭력법이 조금씩 강화되어 가고 있었고 핫 라인 같은 폭력 신고 전화가 가까이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된 정옥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예전처럼 잭의 무자비한 폭력을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잭이 폭력을 휘두를 기미를 보이기만 하면 경찰을 부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경찰에게 대충 영어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수도 있었다. 그러한 자신감이 정옥으로 하여금 '노' 라고 거절의 말을 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잭을 대하는 건 여전히 떨리고 기분나쁜 일이었다.

그 다음날로 정옥은 또 이삿짐을 꾸렸다.

그러나 잭은 집요하고 끈질겼다.

깊은 곳으로 숨는다고 숨어들어도 몇 달후면 그는 용케 정옥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숨으면 찾아내고,숨으면 찾아내는 숨박꼭질을 몇 년 동안 자그마치 열 세 번을 해야 했다.

이번에도 정옥으로부터 거절의 말을 들은 잭. 그러나 그는 예상을 한 듯했다. 얼굴에 별다른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은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이는 아직 자나?"

".........."

"영이가 일어나면 전해 줘. 아빠가 다녀갔다고...."

"잭!"

돌아서 나가려는 잭을 정옥이 불렀다.

"다,당 당신이 내,내게 한 짓을 진심으로 미,미..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

"그,그렇다면 나를 그,그냥 호,혼자 살게 내,내버려 둬 줘요...그냥 혼,혼자 살게...."

"............"

잭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옥 쪽으로 등을 돌린 자세로 잠시 묵묵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끝내 아무말 않고 그냥 돌아 갔다.

문을 잠그며 정옥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또 이사를 가야겠구나......

그러나 다시 이사를 가본들 아무런 소용이 없을 터였다. 정옥이 어디를 가던지 다시 찾아내고야 말 잭이었다. 정옥이 가는 곳이 설사 지구의 끝이라 해도 잭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었다.

정옥은 소파에 무너지듯 앉았다.

아아, 잭과의 악연은 정말로 질기고 질기구나........

정옥은 막막했다. 잭의 손아귀를 절대로 벗어날 수 없을거라는 절망스런 생각에 앞이 캄캄했다.

"왜 그래, 엄마?"

잠이 깼는지 영이가 잠옷바람으로 거실로 걸어 나왔다.

"..........."

영이는 특수학교에서 놀랍도록 빠른 습득력을 보였다. 교사들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 학교에 입학한지 1년도 안되어 일반 학교에 입학한 영이는 벌써 국민학교 4학년이 되어 있었다. 월반을 한 것이다.

공부도 잘 하고 귀염성이 있는 영이를 반 아이들은 물론 학교 선생들 전부가 좋아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자랑스레 펼쳐보이며 재롱을 피우는 영이를 보노라면 저 아이가 일곱 살까지 말도 제대로 못하고 어릿어릿하기만 하던 아이인가 싶어 정옥 자신도 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

"아빠 다녀 갔지?"

영이는 말 안해도 다 안다는 투로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이사 가지 마. 지금 다니는 학교 선생님이랑 친구들이 모두 좋아서 헤어지고 싶지 않거든...."

열번이 넘는 이사. 이사를 갈 때마다 영이도 물론 전학을 다녀야 했다.

"걱정하지 마, 엄마. 이제 아빠도 더 이상 엄마를 때릴 수 없쟎아. 그러니까 그냥 여기서 살아...."

".........."

영이는 정옥의 가슴 속으로 손을 넣으며 어리광을 부렸다.

그래, 영이야. 피해서 이사를 가 봤자 또 들키고야 말 걸 괜히 이사 다니느라 너 한테 못할 짓만 했구나.....

정옥은 영이의 말랑말랑한 궁둥이를 만졌다.

이제 영이를 위해서라도 더 이상 이사를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영이의 말마따나 나를 더 이상 괴롭힐 수도 없는데 뭐.....

그러나 매번 자신의 요구를 거절당한 잭이 종내에는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음부터는 일단 거절을 할 땐 하더라도 따뜻한 밥이라도 먹여서 보내던지 해야겠다고 정옥은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정확하게는 1986년 12월 23일.

이른 새벽에 정옥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새벽의 전화벨 소리는 항상 불길하다.

그렇쟎아도 정옥은 밤새 악몽에 시달리다가 눈을 뜬 터였다.

"당신이 잭 탐슨의 전처 맞습니까?"

전화기 속에서 잭의 이름이 나오자 정옥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전화기 속의 남자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잭 탐슨이 사망했습니다"

정옥의 손에서 수화기가 떨어져 내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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