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신문을 펼쳐서 제일 먼저 보는 게 만화 ' 무대리, 용하다 용해' 이다.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만화  '대물' 이 끝난 후 한동안 사는 재미가 없었는데 그 상실감을 메꾸어 준 게 바로 무대리이다. 무대리는 대물처럼 극적이거나 손에 땀을 쥐게하는 긴박감은 없으나 그 누구도 생각해 낼 수 없는 반전과 번뜩이는 재치와 촌철살인의 유머로 내 배꼽을 잡게 하기에 충분하다.

무대리의 무대는 직장이다. 주인공 무대리를 비롯, 상사인 마부장과 직장동료인 정남, 왕대리, 장한혀 등 몇명이 주요 등장인물이며 필요에 따라서 가끔 부인과 아이들도 등장한다.

만화는 이들 열댓명이 매일 지지고 볶고 싸우고 울고 푸념하고 다시 화해하는 이야기를 골자로 하고 있다.

무대리가 다니는 회사는 흡사 전쟁터 같다.

재떨이와 구두짝이 나르는 건 예사이고 주먹이 왔다갔다 하는가하면 어떤 땐 그 무거운 컴퓨터 모니터도 날라 간다. 난무하는 욕설은 아예 회사생활의 일부분이다.

그 중 마부장에게 제일 많이 당하는 건 우리의 불쌍한 무대리인데 소심한 그는 가끔 마부장을 골려주기는 할지언정 직접적으로 대항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가 마부장에게 하는 복수라야 기껏 속으로 '말대가리' 라고 부르는 것 정도이다.

한국에서 제대로 된 직장생활을 해보지 않은 내가 이 만화를 보면서 가장 궁금한 건 진짜 한국의 회사는 어떤 분위기일까 하는 것이다.

무대리 말고도 직장을 주무대로 한 한국만화는 거의 다 치고박고 때리고 얻어맞는 내용들이 많은 것 같다. 만화이니만치 많은 과장과 허구가 첨부되었으리라 짐작은 해보지만 만화내용대로라면 한국직장 생활에서 남아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무대리가 다니는 회사에 비하면 내가 다니는 미국 회사는 하늘과 땅이다.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실수나 잘못을 비난하며 큰소리를 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언젠가 한번 이 칼럼에서 고백했듯이 나는 영어를 썩 잘하지 못한다. 직원들 중 아마 내 영어가 제일 시원챦을 것이다. 영어를 잘 못하니 실수도 많이 했으련만 지난 2년 동안 나는 단 한번도 상사에게 불려가 주의를 들은 적이 없다. 아, 딱 한번 있다.

한번 불려간 일 있는데 나는 첨에 칭찬을 들으러 불려간 줄 알았다. 칭찬으로 먼저 시작을 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출근 시간도 정확하고, 항상 명랑하며,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우수직원이다. 그러나(but)!..."

미국사람들의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고 but, 다음에 나오는 말을 조심하라더니 그 말이 맞았다

내 목소리가 너무 커서 주위사람들이 집중이 안된다니 가급적이면 근무시간에 잡담을 하지 말라는 주의였다. 그러나 주의를 들었는데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며 기분을 전혀 나쁘게 하지 않고 주의를 주는 상사라니!

나는 미국회사는 이렇게 인간적일 수 없다고 감격까지 했다. 무대리 회사와 비교까지 하면서! 무대리는 걸핏하면 상사에게 말로 당하고 주먹으로 얻어터지고 구둣짝으로 얻어 맞지 않는가. 하루라도 조용히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진짜 살벌하기까지 하다.

'쯪쯪쯪,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지만 진짜 너무했다. 나 같으면 벌써 때려 치웠겠구만.그것도 직장이라고 목을 매고 있으니....'

나는 무대리를 동정하고 또 동정했다. 회사에서 그렇게 당하고서도 아침이면 다시 꼬박꼬박 출근하는 무대리에게 연민의 정까지 느꼈다.

그러나 내가 감격까지 해가며 인간적이라고 믿었던 미국직장이 사실은 전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느끼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침까지 멀쩡히 일 잘하던 직원이 하루아침에 해고 당하는 것을 서너번 목격하고서였다.

내 옆의 여자는 점심먹고 돌아와 책상에 앉는 순간 해고당했다.

인사과 직원과 경비직원이 오더니 다짜고짜 여자의 짐을 박스에 주섬주섬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여자를 호위해 출입문 밖으로 발로 차듯이 내 보내버리는 것이었다. 죄인처럼 앞뒤로 호위당해 걸어 나가던 여자의 얼굴에 나타나던 분노와, 당혹감과 그리고 창피함이 섞인 복잡한 표정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광경을 본 나는 얼마나 가슴이 후들후들 떨리던지 한동안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사람을 저런 식으로 해고할 수 있을까?

그 여자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몰라도 적어도 저런 식으로 사람을 쫒아내는 것은 너무나 비인간적인 처사같았다. 다른 동료들 모르게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 고 통보를 해줄 수는 없었을까?

내가 인간적이고 믿었던 미국회사는 사실은 얼음같이 냉혹하고 냉정한 집단이었다.아무리 오래 근속한 우수직원이라 해도 해고할 때는 칼로 무 자르듯 했다.

최근 나는 내 책상에 주욱 올려져 있던 사진틀이나 장식품들을 치워버렸다.

장식품과 사진틀등 개인용품이 가득 담긴 종이 박스를 들고 해고당해 떠나가던 동료들의 초라하고 구질구질한 모습을 몇번 목격하고 취한 조치이다.

나는 해고당하면 아무것도 손에 들지 않고 몸만 간단하게 걸어 나갈 것이다.

그에 비하면 비록 매일 지지고 볶고 좌충우돌 하지만 무대리 회사는 얼마나 인간적인 곳인가?

무대리 회사라면 직원이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해도 욕 몇 마디, 주먹 몇 번 날리고 말지 우리 회사처럼 근무시간에, 많은 동료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경비원으로 하여금 앞뒤로 포위하듯 해 쫒아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무대리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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