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녀, 미니를 만난 것은 1년 전 겨울이 막 끝나갈 무렵이었다.

캘리포니아 겨울날씨답지 않게 밖에 세워 둔 차유리 창에 얼음이 낄 정도로 매서운 날씨가 며칠 째 계속되던 어느날이었는데 나는 그 무렵 본국 잡지사에서 청탁받은 소설 한 편을 쓰느라 몇 날 며칠을 밤을 새우던 중이었다.

설탕을 넣지 않은 독한 커피와 몇 백장의 원고지와 수집한 자료더미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어느날 밤 불현듯 초인종 소리가 나 문을 열어보니 조그만 여자가 잔뜩 옹숭거리고 서 있었다.

그녀는 두툼한 가운 차림으로 서있는 나를 아주 애절한 눈길로 바라 보았다. 그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한국사람이냐, 하고 물어 왔다.

나는 좀 놀랐다.

까맣게 반들거리는 피부와 인형같이 큰눈을 가진 이 여자는 분명 흑인같아 보이는데 내가 한국사람임을 어떻게 알까. 그리고 밤 아홉 시가 넘은 시간에 생판 모르는 집에 초인종을 눌러놓고 다짜고짜 한국사람이냐니......?

나는 고개를 끄떡했다. 그리고 무슨 용건이냐고 물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뭘 팔러 다니는 여자같지는 않은데...... “

"우리엄마도 한국사람이다. 이름이 영자다. 이영자.”

그녀는 노란 스웨터속의 몸을 더욱 옹송거리며 자신은 한국인 엄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났으며 이름이 미니라고 말했다. 한국이름은 민희인데 미국이름이 묘하게 발음이 같다며 미니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일 주일 전 이층으로 이사를 왔다. 엄마랑 둘이서. 아버지는 2년 전 죽었다. 큰집에서 살았는데 아버지 죽고 그 집을 엄마랑 관리하기가 벅차서 팔았다. 그리고 이 아파트로 이사 온거다. 너는 이름이 뭐냐? 저녁마다 늦게까지 불이 켜져있던데 공부를 하는 거냐? 엄마와 나는 너를 먼 발치서 보고 한국여자임을 금방 알아 차렸다. 내가 안녕 하세요, 하고 아는 체를 먼저 하고 싶었는데 엄마가 말려서..... 엄마는 한국사람을 굉장히 싫어한다.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다. 난 한국인이 좋은데.......”

미니는 쭈뼛거리던 처음과는 달리 쉬지 않고 많은 말을 늘어 놓았다.

나는 좀 성가신 기분이 들었으나 약간의 호기심이 없잖아 있었으므로 가운 주머니에 두손을 찌른 채 문에 기대어 서서 그녀가 지껄여대는 말을 잠자코 들어주었다.

내가 자신에게 흥미를 느낀다는 걸 눈치챈 미니는 얼굴에 홍조를 띄며 더욱 잰입을 놀렸다.

“나는 이곳 A시의 주립대학교에 다닌다. 엄마는 그냥 집에만 있다. 아버지가 죽으며 보험금을 많이 남겨 놓아서 평생 일을 안해도 된다고 엄마가 그랬다. 넌 어디 다니냐? 엄마가 너보고 착하게 생겼다고 하더라”

나는 그녀가 A시 주립대학에 다닌다는 말을 듣고는 그 대학에 교수로 재직중인 R씨를 아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나 미니는 모른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하긴.. 교수가 수백 명일텐데 알 리가 없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남자친구가 한국학생이다. 같은 과인데 이름이 상훈이다. 모두 '생'이라고 부른다. 그는 매우매우 잘생겼다. 키도 크고...”

나는 그만 그녀를 돌려 보내려다 자신의 남자친구가 한국학생이란 말에 다시 바싹 흥미가 느껴졌다.

어떤 남학생일까. 반반 피를 나누었다지만 흑인에 가까워 보이는 미니를 여자친구로 삼은 상훈이란 남자는?

그러나 나는 픽 하고 웃었다. 남자친구를 굳이 애인으로 생각지 않는 미국젊은이들의 관습을 떠 올렸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클라스 메이트 정도겠지.

나는 지나가는 말투로 가볍게 물었다. 결혼할 거냐,하고..

상훈이란 남자의 이야기를 하면서부터 반짝반짝 빛나던 그녀의 얼굴이 결혼이란 말에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개를 수그러뜨리며 결혼?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불현듯 생각난 듯 나에게 잘있어,하고 일갈했다. 그리고 바로 몸을 돌려 소리나게 층계를 올라 가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그녀가 올라간 층계를 바라보았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생판 모르는 여자가 방문해서는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하네......

나는 천천히 문을 닫고 컴퓨터 앞으로 도로 돌아왔다.

식은 커피를 쏟아 버리고 다시 뜨거운 커피를 내리던 나는 불현듯 영감처럼 떠오르는 생각에 손을 멈추었다.

‘그래, 미니는 상훈을 사랑하고 있는게 틀림없어. 그런데........?’

내가 다시 미니를 만난 건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몇 날 며칠을 씨름하던 원고를 본국으로 우송하고 한가한 마음과 몸으로 소파에 파묻혀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났다.

미니다!

나는 짐작으로 알아 차렸다. 그녀가 언젠가는 나를 다시 찾아올 것을 짐작 하고 있던 나는 빠른 걸음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미니가 어색하게 웃으며 서있었다.

“불이 켜져 있길래.... 방해가 안되는지.....”

“괜찮아. 들어와..”

나는 그녀를 이끌어 들여 소파에 앉게하고 커피 한 잔을 갖다 주었다.

그녀는 책장에 가득찬 책이랑 벽에 걸린 사진틀을 유심히 보더니 '예쁜방이로구나' 하고 건성으로 한 마디 하더니 내가 갖다놓은 찻잔을 두손으로 움켜쥐고 잠시 침묵하였다.

그런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던 나는 그녀가 무척 매력적인 아가씨라는 걸 느꼈다. 적지도 크지도 않은 키에 잘록한 허리, 커다란 눈이며 조그마한 콧등이 흑인 아버지와 한국이 어머니의 피를 골고루 받아 매우 섹시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음을 알수 있었다. 특히 그녀의 가무잡잡한 피부색은 진한 갈색으로 일품이었는데 흑인으로 보기엔 너무 옅었고 동양인으로 보기엔 짙었지만 매끄럽고 부드러워 보였다.

‘흑진주같은 아가씨구나. 상훈이란 남자가 반할 만도 했겠다.’

나는 미니와 상훈의 관계를 멋대로 속으로 결부시키면서 미니가 전에 나 한테했던 것처럼 명랑하게 지껄여 주길 기다렸다. 그러나 미니는 큰 컵의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었다.

나는 그녀의 분위기에서 짙은 슬픔을 감지할 수 있었다.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짙은 슬픔..

“너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느냐? 누구와 깊이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느냐?”

오랜 침묵을 깨고 미니가 나에게 물어 왔다.

나를 보는 그녀의 눈엔 놀랍게도 눈물이, 맑은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물을 보자 당황하고 놀랍기도 해서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번에 얘기했던 상훈... 한국 남자, 상훈. 나는 그를 매우 사랑한다. 그 역시 나를 사랑하고. 그런데 ... 일이 쉽지가 않다. 그의 부모들이... 내가 흑인의 딸이라고.....”

유리로 된 티 테이블을 내려다 보며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던 미니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와아 울음을 터트렸다.

"내가 얼마나 상훈을 좋아하고 사랑 하는 줄은 아마 하느님만 아실 거다. 그를 위해서는 죽을 준비도 되어 있는데.... 상훈은 부모님 핑계만 대고 있다.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이 깊은 수렁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

나는 그녀의 소파로 가서 흐느끼는 그녀의 어깨를 가만가만 쓸어 주었다.

이 철부지 아가씨야. 하필이면 한국남자를 좋아 했더란 말이냐. 세상에서 제일 완고하고 고루한 부모님을 둔 한국남자를......

나는 서럽게 울어대는 미니의 아픈가슴을 조금 알 것 같아 그저 그녀의 들썩이는 어깨만 쓸었다. 그 밖에 내가 할 일이란 아무것도, 정말이지 아무 것도 없었다.

한참을 울던 미니는 코맹맹이 소리로 목욕탕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가리키는 대로 목욕탕으로 가 얼굴을 씻고 깨끗한 표정으로 되돌아 왔다.

“기분이 어떠니?”

나는 문득 내가 그녀의 친언니같은 기분을 느꼈다.

내가 10여년 전에 밟은 전철을 다시 밟으며 괴로워 하는 이 까만 아가씨에게서 동병상련을 느낀 것일까. 사랑이란 괴물은 피부색도 가리지않고 나이도 가리지 않고 국경도 가리지 않으며 괴물처럼 무지막지 쳐들어 와 가슴들을 온통 난도질하는구나!

“미안해.”

미니는 내 곁에 다가와 손을 내밀어 내 볼을 어루만졌다.

“두 번 밖에 안 봤을 뿐인데 네가 꼭 친한 사람 같이 느껴져. 네가 코리안이기 때문일거야. 내 엄마도 코리안, 상훈도 코리안.....”

미니는 다시 목이 메는지 말을 잇지 못하고 내 볼에 손바닥을 댄 채 잠시 서 있다가 다음에 또 놀러오마 하고 돌아갔다.

그녀의 빈 찻잔을 챙기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쓰린 가슴이 어느덧 내게도 옮아온 듯 가슴이 답답해 져 찻잔을 든 한 손으로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미안해요. 잘 알지도 못한 사람께 소란을 피운 것 같아서....”

나는 미니엄마를 바라 보았다.

미니는 제 엄마를 그대로 빼어닮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형이며 커다란 눈의 미니엄마는 깊게 팬 주름살에도 불구하고 한 눈에 대단한 미인임을 알아 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고운자태의 그녀 입은 의외로 거칠었다. 미니가 두 번씩이나 내게 찾아온걸 사과하러 왔다는 그녀는 내가 청하지도 않은데 집안으로 들어오더니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았다.

“하필이면 연애를 걸어도 한국놈하고 걸어서 이렇게 속을 썩히는지 모르겠수. 죽이지도 못하고 살리지도 못하고 ... 그동안 상훈인가 그놈에게 미니를 떼어놓느라 별 수단을 다썼다우. 그런데 이 죽일 년이 말을 안들어....”

미니 엄마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진주빛 매니큐어가 칠해진 뾰족한 손톱으로 연신 소파를 콕콕 찍었다. 그녀의 손가락엔 굵은 다이아가 광채를 내고 있었다.

“둘이 좋아 한다면 뭘 그렇게 떼어놓으려고 그러세요.”

나는 당치도 않은 말인 줄 뻔히 알며 한 마디했다. 나도 모르는 새에 미니의 남자문제에 깊숙이 끼어든 걸 성가셔 하면서....

예상대로 미니엄마는 큰일 날 소리 하지도 말라며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무슨 소리예요. 내가 팔자가 사나와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흑인하고 결혼해서 흑인 피가 섞인 딸년을 낳았지만 세상에서 둘도 없이 귀하게 키운 아이예요. 왜 그런 귀한 딸을 그 쪽 집안 식구들에게 구박을 받게 해? 천만에 말씀이지. 우리 미니가 댁에서 봐서 알겠지만 얼마나 예뻐? 상훈인가 뭔가 그놈 주기는 아깝지. 그리고 솔직히 그 놈 집 집구석이 뭐 볼 게 있다고. 기껏 남의 집 잔디나 깍아주며 먹고사는 사는 주제에. 우리 미니는 그런집 아니라도 얼마든지 결혼시킬 수 있지. 이제 스물 한살로 나이도 어리겠다, 예쁘겠다, 대학 곧 졸업하겠다. 뭐가 빠져서 엽전네에 시집보내서 고생을 하게 해? 어림도 없지.”

미니엄마는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상훈이나 그 가족들이 앞에 있으면 할퀴기라도 할 기세였다.

나는 그녀의 기세에 눌려 입을 다물었다.

“흥, 지까짓 것들이 어딜 가서 우리 미니같은 여자를 구해? 같잖게 발라당 까진 한국 계집애들 보다 백 번 낫지. 우리미니가 한국음식을 얼마나 잘 하는 줄 알아요? 내가 걔 조그말때부터 노상 가르쳤거든. 김치찌개, 청국장찌개, 못하는 요리가 없어. 암. 한국 계집애들보다 낫고 말고.....”

나는 바짝 열이나 혼자 떠들어 대는 미니엄마를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흑인과 결혼해 흑인을 닮은 딸을 낳았을망정 그 딸에게 한국음식 요리법을 가르치면서 맛 보았을 슬픔과 비애가 느껴지는 것 같아 웬지 가슴이 서늘해졌다.

 

 

나는 유리로 된 식탁에 놓여진 내프킨과 포크 따위가 잘 놓여있나 다시 한번 확인하며 찌개냄비 뚜껑을 열어 간을 보았다.

전기밥솥에 앉힌 밥은 이미 잘 지어져 김을 올리고 있었고 잡채와 불고기에서는 향긋한 참기름 냄새가 났고 두부와 파를 잔뜩 넣은 된장찌개는 알맞게 끓고 있었다. 준비는 거의 끝난 셈이었다.

나는 플라스틱 바구니에 오렌지를 씻어담으며 미니와 상훈을 저녁초대 한 것이 결코 잘한 일이 아님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혼자 씁쓰레하게 웃었다.

양쪽 부모의 축복아래 밝고 희망찬 미래를 약속 받으며 사귀고 있는 커플도 아닌 서로가 반대하며 헐뜯고 있는 부모들 때문에 위태롭게 불안한 사랑탑을 쌓고 있는 이들 미니와 상훈을 불러 들여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무어란 말인가. 어떠한 고난과 역경도 뚫고 헤쳐나가 사랑의 열매를 맺으라고도, 아예 맺지 못할 사랑이니 시간과 에너지 낭비 말고 일찌감치 그만들 두라고도 말 못할 입장이 아닌가. 그런데 이 저녁초대는.....

나는 나 자신의 경솔함을 스스로 나무라며 물컵을 챙기고 접시를 챙겼다.

미니가 상훈을 내게 소개시켜 주고 싶다고 했을때 나는 썩 기분이 내키지 않았으나 간절하게 나를 바라보는 미니의 표정에서 어쩌면 나자신만이 이들의 안타까운 사랑을 이해해야 할 것같은 의무를 느꼈다.

“그래, 언제 한번 데려 오렴. 나도 네 남자친구를 보고 싶구나.”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는 금요일 저녁, 엄마가 친구랑 온천으로 여행을 가서 이틀 후 돌아올 것이니 그때 상훈을 데려오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체념하는 심정으로 그러라고 했었다. 미니는 내 목에 매달리며 어린아이같이 좋아했다.

어쨌든 잘 되어야 할 할텐데....

그때 초인종 소리가 났다. 나는 둘렀던 앞치마를 풀어 놓고 나가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변상훈입니다. 미니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짧은 스포츠머리의 건장한 청년하나가 고개를 꾸벅했다. 그 옆엔 하얀 투피스를 입은 미니가 눈부시게 웃으며 서있었다.

“그래요? 미니가 내 얘길 많이 했단 말이지? 어서 들어와요.”

나는 그들을 들여서 식탁에 앉게 하고 알맞게 퍼진 밥을 공기에 푸고 찌개그릇을 식탁에 옮겼다.

“미니도 한국음식을 잘 먹는다길래 한국식으로 저녁을 준비했어요.”

우리는 낮은 음악을 틀어 놓고 식사를 시작했다. 미니는 밝고 환한 얼굴로 음식맛을 칭찬 하였고 틈틈이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상훈을 바라 보는 걸 잊지 않았다. 상훈 역시 따뜻한 눈길로 미니를 가끔씩 바라 보았다.

얼마나 아름다운 한쌍이냐.

나는 그들이 잘 어울리는 남녀라고 생각했다. 갸느리고 약해 보이는 미니와는 대조적으로 상훈은 다부지고 건강한 체격을 갖고 있었다. 특히 그의 정갈해 보이는 이마와 서늘한 눈은 정직하고 바른 성품을 보는 듯했다.

미니의 살결이 조금만 희었더라면...

나는 안타깝게 미니의 까만 피부를 훔쳐 보았다.

“그런데 왜 결혼을 않고 혼자 사세요?”

상훈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씹던 밥알을 꿀꺽 넘겨 버렸다.

“너무 개인적인 질문이었나요? 그냥 궁금해서....”

상훈은 내가 흠칫하는 모습을 보이자 몹시 미안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눈길을 떨구었다.

괜히 가슴이 떨려왔다.

10년 전. 내 푸르던 20대를 몽땅 받쳐 사랑했던 시절. 그 때의 아픔을 아직도 속으로만 삭이면서 살아가고 있는 나를, 내 가슴을 상훈이 건드렸던 것이다.

“미안합니다.”

상훈은 내게 다시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한국말을 알아 듣지 못하는 미니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러는 상훈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괜찮아.”

나는 커피를 끓이마고 식탁에서 일어섰다. 그냥 앉아 있다가는 그들 앞에서 눈물을 보일 것만 같았다.

나는 투명한 유리주전자에 물을 받으며 그저 투명한 눈으로만 세상을 보아오던 10년 전 내 20대를 생각했다.

내 20대를 푸르게 장식했던 R교수도 함께. 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을 만큼 온몸으로 사랑했던 R 교수님. 그러나 끝내 25년의 나이 차이를 극복못한 우리는 헤어져야 했고 나는 그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만 되새김질 하면서 지금껏 혼자 살아 가고 있다. R교수는 그후 자신과 비슷한 년령의 여자와 다시 재혼을 했다던가. 그는 미니가 다니고 있는 주립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다. 본부인을 사별하고 혼자 독신으로 지내면서도 항상 깔끔한 차림새에 은근한 멋을 풍기던 R 교수를 지금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래, 상훈은 미니와 어떻게 할거야? 미니말로는 부모님 반대가 무척 심하다는데....”

나는 계속 꼬리를 무는 R교수에 대한 기억을 애써 지워 버리려 머리를 흔들며 상훈에게 물었다. 그는 식사를 끝내고 냅킨으로 입가를 훔치는 중이었다.

“..........”

상훈은 대답이 없었다. 미니만이 부엌에서서 커피를 따르고 있는 나와 상훈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본인들에겐 지금 사랑만이 전부이고 그것이 최대의 목표라고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부모님 심정도 조금은 헤아려 봐야 할 거야. 한국인 어머니를 가졌다곤 하지만 흑인 아버지에서 난 미니를 상훈 부모님이 반대 하시는건 어쩌면 당연 할거야. 왜냐하면.....”

내 자신이 생각해도 구태의연한 것 같은 말을 두어마디 하다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신의 부모나 주위사람으로부터 수 십 번도 더 들었을 똑같은 소리, 나까지 거들건 뭐가 있겠나 싶어서였다.

상훈은 묵묵히 내가 놓아준 찻잔만을 내려다 보다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니를 그냥 여자로, 치마 입고 아이 낳는 여자로만 봐 주었으면 좋겠어요. 피부색깔이니, 국적이니, 그런 것 좀 안 따졌으면 좋겠어요. 미니는 여자고 나는 남자고 그래서 둘이 좋아 하는데 뭐가 이리 어렵고 복잡한지 모르겠어요......”

상훈과 내가 나누는 이야기가 그리 가볍지 않다는 것만은 알아차린 미니가 눈을 빛내며 장난스럽게 내뱉었다.

"상훈, 우리 다른 州로 도망 가 버릴까?"

순간 상훈의 얼굴에서 퍼뜩 어떤 기운이 솟구쳤다가 사라지는 걸 나는 얼른보았다.

나는 식탁을 훔쳤다.

 

 

나는 근 일주일을 지독하게 아팠다.

매서운 추위끝에 며칠 날씨가 따뜻하길래 옷을 얇게 입고 직장엘 나갔더니 몸살감기가 걸린 모양이었다. 첨엔 가볍게 생각하고 대수롭쟎게 넘어 갔는데 점점 열이 오르고 편도선이 붓고 온몸의 관절이 마디마디 쑤시며 아팠다.

아픈 몸을 끌고 억지로 회사에 출근 도장을 찍던 나는 급기야 들어눕고 말았다. 회사에는 아프다는 통고를 하고 두껍게 커튼을 내린채 물 한 모금을 입에 대지 못한 채 죽도록 앓았다.

앓으면서도 낫기 위해 병원엘 간다거나 약을 사러 나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그냥이대로 잠들 듯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시트를 땀으로 흠뻑 적시며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는 와중에서도 나는 R교수를 간간히 떠올렸다. 그의 연한 웃음을, 가까이 하면 맡아지던 파이프 담배냄새를, 날씨가 추우면 늘상 입던 베이지색 바바리코트의 R교수 모습이 환영처럼 왔다간 사라져 가곤 했다. 나는 두 손을 허위적대며 그의 옷자락을 잡으려 안타깝게 몸부림치다 눈을 뜨곤 하였다. 그러면 온몸을 휩싸는 허탈과 함께 육신의 아픔이 나를 짓누르곤 했다.

그저 나를 여자로만, 여자의 이름으로만 날 보아 주었으면 좋았을걸. 사제지간이라든지, 연령차라든지 그런건 따지지 말고 여자로만 날 대해 주었으면 지금까지 이런 마음의 고통으로 내가 아파하지 않을텐데....

나는 R교수를 비몽사몽간에 몇 번이나 소리쳐 불렀다. 내 고함소리에 내가 놀라 퍼뜩 눈을 뜨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주일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 음식도, 아무 약도 먹지 않았지만 거짓말처럼 머리가 맑고 몸이 가뿐한 걸 느낀 나는 어지러진 침대를 정돈하고 비틀거리며 걸어 나와 거실의 커튼을 열어 젖혔다.

일주일만에 보는 강렬한 햇빛이 기다렸다는 듯 내눈을 찔렀다.

‘미니는 어떻게 되었나?’

문득 이층의 미니안부가 궁금해졌다. 그저께 저녁 몹시 싸우는 듯한 소리가 났는데 내 육신의 아픔에 못 이겨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내일 쯤 올라가 봐야겠어....’

나는 그 다음날부터 다시 직장엘 나갔다. 일 주일을 비운 내 책상 위에는 내가 발송시켜야 할 고지서등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나는 주위사람의 걱정스런 눈을 뒤로 한 채 내가 할 일을 끌어 당겼다.

“괜찮아? 아직도 아파 보이는데?”

멕시코 여자동료가 나를 근심스레 쳐다보며 한 마디했다. 걱정말라는 시늉으로 한쪽 눈을 찡긋하며 나는 일더미 속으로 파묻혔다.

미니를 방문해 보리라는 내생각은 곧바로 실행되지 못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치우고야 마는 결벽증 비슷한 내 성격은 매일 밤 10시쯤 나를 집에 돌아 오게 했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밀린 일을 처리해야만 속이 편안해지는 나는 동료들이 모두 돌아 간 뒤에도 늦게까지 남아 일을 하였다.

밤 10시 쯤 집으로 돌아오며 이층 미니네 집을 보면 언제나 불이 꺼져 캄캄하였다. 나는 그대로 내 방으로 돌아와 씻고 침대로 몸을 던지기 일쑤였으므로 미니나 미니엄마와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동안 밀린 일감을 모조리 해치운 나는 가벼운 기분으로 슈퍼마켓에 들러 음료수랑 과일들을 사 가지고 일찍 집으로 돌아 왔다.

쟈켓을 벗으려던 나는 전화벨 소리에 수화기를 들었다.

“저 상훈입니다.”

“아, 상훈학생!”

그의 목소리는 잔뜩 굳어 있었다. 무엇에 쫒기는 듯 다급하게 들리기도 했다.

“미니가, 미니가 어디론가 가 버렸어요.”

상훈의 말이 나를 그 자리에 얼어 붙게 했다. 미니가 가버리다니....!

"오늘 새벽에 전화가 왔는데.자기는 멀리 떠나니까 찾지 말라고.....행여나 해서 오늘 온종일 미니 있을만 한데는다 찾아 보았는데 없어요. 진짜 떠나 가버린 것 같아요. 미니가 가면서 이 전화번호를 주면서 그동안 고마웠다고 전하라고....."

시도때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 오는게 성가셔서 내게 오려거든 일단 전화를 해 보고 오라고 내 전화번호를 미니에게 주었었다. 그런데!

“도대체 상훈인 그동안 뭘하고 있었어! 자기의 여자가 떠나 가는 것도 모르고!”

나는 상훈에게 소리를 지르며 전화를 끊고 후다닥 나가 미니 집을 쳐다 보았다. 다행히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급한 걸음으로 층계를 두 단씩 뛰어 올라 초인종을 서너번 연속으로 눌렀다.

“난 또 누구라고? 들어 와요...”

미니엄마는 문을 열다가 나를 보자 반색을 했다

“미니는, 미니는 어디 있어요?”

나는 다짜꼬짜 미니를 찾았다. 자신의 딸이 없어졌는데도 태연하게 집에 앉아 있는 미니엄마를 보자 분노가 치솟았다.

“미니가 어디론가 떠나갔다는데 그게 사실이예요?”

나는 물건들이 엉망으로 늘어져 발 디딜 틈도 없는 방안을 둘러보며 급하게 물었다.

“미니는... 미니는 돌아 올 거예요.”

미니엄마는 급한 내 태도와는 달리 느릿느릿하게 대답하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세상에, 그년이 상훈인가 뭔가 하는 놈의 아이를 뱃지 뭐예요?쳐죽일 년. 내가 제년을 어떻게 키웠는데 제 팔자가 어떻게 될 줄 알고 한국놈의 아이부터 덜컥 가져, 가지길......“

미니가 상훈의 아이를 가지다니....

나는 너무도 놀라운 사실에 할 말을 잃고 미니엄마를 쳐다 보았다.

“며칠전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아이를 떼라고 야단했지만 말을 듣지를 않아요. 나중엔 너 죽고 나 죽자고 매질을 했지. 온몸에 멍자국이 들도록 때렸지만 죽어도 아이는 떼지 않겠대....”

며칠전 밤의 소란이 그 때문이었는가.

나는 혼란스러워오는 머리를 추스르느라 잠시 이마를 짚었다.

“댁도 생각을 해 봐요. 놈이야 지금 우리 미니가 젊고 예쁘니까 사랑합네 어쩝네 수작질을 하지만 제놈 집에서 끝까지 반대를 하면 어쩔수 없이 나가 떨어질 것 아니우. 그러다가 한국인 계집애라도 하나 생기면 우리 미니쯤이야 언제 봤냐 할테구. 인생 버리는 건 우리 미니밖에 없다구. 내가 그걸 불 보듯 뻔하게 보는데 아이를 낳으라고 하겠어요? 어이구 미친년...”

갑자기 미니 엄마는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며 깊이 파진 윗옷 사이로 내다 보이는 늘어진 젖가슴은 웬지 피폐해 보였다. 그녀의 울음소리는 늙고 병든 짐승을 연상시켰다.

나는 팔짱을 끼고 미니엄마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그년이 나한테 맞으면서 그래요. 차라리 멀리 도망가서 숨어 살겠다구요. 아이는 낳아서 잘 키울 자신이 있다나요? 미친 이년아. 그럴 용기나 있음 그렇게라도 해라 하고 악을 써 주었는데 속으로는 차라리 학교고 뭐고 집어 치우고 상훈이랑 멀리로 가서 둘이 오붓하게살아 주었으면 하고 바랬어요. 그런데 상훈이가 그러고 싶겠어요? 그는 외아들에다 대학졸업하면 좋은 직장도 잡을텐데. 사실 말이야 바른 말로 우리 미니가 볼 게 뭐있어요? 인물이야 예쁘다지만 누가 봐도 흑인의 자식임에 표가 나는데...."

“미니는 언제 떠났어요?”

나는 뭔가 짚히는 게 있어 민희 엄마에게 물었다. 얼음 한 덩이가 속을 훑고 지나가는 전율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어제하고 그제니까 사흘전에요.”

민희엄마는 울면서 띄엄띄엄 말했다.

사흘전? 상훈은 아까 오늘아침에 미니가 떠났다고 했었다. 사흘 전에 떠나 간 미니가 오늘 아침에야 상훈에게 떠난다는 말을 하다니....

나는 꺼이꺼이 울어대는 미니엄마를 뒤로하고 천천히 내 집으로 돌아 왔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미니는 그럼 사흘동안 이곳에 있었단 말인가. 이곳에 사흘을 머무르고나서 오늘 아침에야 상훈에게 작별을 했단 말인가. 아니면 사흘전 집을 나오자마자 상훈에게 떠난다는 이야기를 하고 떠났는데 상훈이 내게 거짓말을 한 건가.

상훈이 거짓말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상훈이 같이 떠나줄 것을 요구하는 미니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미니는 상훈의 거절에 상심하며 떠났고 상훈은 미니가 완전히 떠나길 기다렸다가 오늘 저녁에야 내게 전화를 걸어 미니가 떠난 사실을 알려온 것이다.

그렇다면 상훈의 그 쫒기는 듯한 목소리는......?

나는 제발 그렇질 않길 바랬다.

미니가 엄마에게서 나와서 어느 호텔방에서 지내다가 오늘 아침에서야 떠날 결심을 굳혀 상훈에게 전화를 했길 바랬다. 그것이 정갈한 이마와 정직해보이는 얼굴을 가진 상훈에게서 실망과 배신감을 느끼고 싶지 않은 내 간절한 바램이었다. 그것은 내 진심이 었다.

그로부터 삼 개월 후 나는 마음에 맞는 룸메이트를 얻어 그 아파트를 나와 이사를 했다.

내가 이사를 나올 때까지도 미니엄마는 그 아파트에서 살았다.

내가 출퇴근 할 때마다 그녀는 이층 창가에 서서 하염없는 눈길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미니가 떠난 후부터는 외출도 않고 집에만 있었다.

어쩌다가 나와 마주치면 ‘우리 미니는 꼭 돌아올 거예요. 바람좀 쐬고 마음이 정리되면 꼭 올 거예요. 난 하나도 걱정되지 않아요.’하고 자신에게 타이르듯 얘기하곤 했다.

그러나 내가 그 아파트를 나올 때까지 미니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로부터 1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도 미니에게선 아무 소식이 없다.

내가 가끔 전화를 하면 미니엄마는 미니는 꼭 돌아 온다는 말만 수 없이 되풀이 하곤 한다. 이층을 오르내리기 힘들어서 이사를 하고 싶어도 언젠가는 돌아올 미니를 위해 이사를 할 수 없다며 그녀는 숨죽여 운다.

그녀의 점점 쇠잔해 가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처음 미니가 나를 찾아 왔을 때의 노란 스웨터 속의 병아리 같던 그녀를 생각한다.

명랑하고 재잘거리길 좋아하고 '나는 상훈을, 그 코리안 남자를 사랑해'하고 거침없이 말하던 그녀, 그녀는 지금 어느 하늘 아래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죽을 준비까지 되어있을 정도로 사랑한다던 남자의 분신은 낳았을까？.....

피부색깔로가 아닌 그저 여자의 이름으로 혼신을 바쳐 사랑에 빠졌던 여자, 미니....

며칠전, 나는 미국 백화점안에서 상훈을 우연히 만났다.

그는 혼자가 아닌 결좋은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한국인 여자와 함께였다. 그들은 행복하게 웃으며 화장품 코너에서 향수를 고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상훈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나를 외면하였다. 그리고는 여자의 손을 이끌고 황망히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사라진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어쩌면 R교수도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부인과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향수를 고르고 있을 지도 모른다.

당신때문에 젊은 한 여자가 이렇게 사위어 가는 줄 모르고.

‘잊어 버려야지.......’

나는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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