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들한테서는 아직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

행여나 오늘은, 하고 기다린 지가 벌써 일 주일이 넘었다.

'그래, 년말이니 바쁘기도 하겠지. 바쁘지 않으면 유능한 직원이 아닐테니까...'

정말순 여사는 콩나물을 다듬던 손을 멈추고 흘낏 전화통을 바라 본다.

이 아파트로 이사온 후 다이얼 판이 커서 이용하기 편하겠다며 큰 며느리가 사다 준 빨간색 전화통. 그 것은 은 나 잡아잡수 하는 표정으로 두꺼비 마냥 그냥 묵묵히 엎드려 있다.

정말순 여사는 당장 작은 아들사무실로 전화를 걸고픈 걸 억지로 눌러 참으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쉰다.

아무리 생각해도 작은 아들 내외가 괘씸하다.

어찌보면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련만, 아니, 아무리 어려운 부탁이래도 그렇지, 부탁을 자주 하는 사람도 아니고 난생 처음으로 한 부탁인데 일 주일이 넘도록 연락도 주지 않고 있다니.

뭐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다.이렇게 에미가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줄 뻔히 알면서 말이다.

그리고 작은 며느리란 아이도 너무하지 않은가. 분명히 지 남편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며느리 역시 일주일이 넘도록 가타부타 말도 없이 모른체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부탁을 하기 위해 정말순 여사는 얼마나 망설였던가. 거의 한 달을 끙끙 앓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날짜가 코앞에 닥치자 더 이상 미룰수 없어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어 가까스로 작은 아들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글쎄요. 일단은 재클린한테 물어 보고요"

단번에 승낙하리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전화를 받는 작은 아들의 목소리는 떨뜨름하기 그지 없었다. 뭐랄까, 팔에 붙은 벌레를 털어내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정말순 여사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할리 없었지만 이왕 내친김이었다. 한 달을 망설여 온 것,이 참에 다 털어 놓아야 했다.

"저기, 그러니까 말이지. 음식은 많이 하지 않아도 돼. 요즘 노인네들. 건강생각해서 많이 먹지도 않는다니까. 그냥 간단하게 갈비나 좀 하고 겉절이 김치만 있으면 될거야. 후식으로는 떡하고 과일만 준비하면 될거고. 재클린 한테 말하렴. 겉절이는 내가 만들어 갈 수 있다고. 고기는 전날 내가 니네 집에 가서 재클린하고 같이 재어 놓으면 될 거고. 아참, 노인네들한테 술이 없으면 안되니까 소주나 한 박스 살까?..."

허둥지둥, 두서없는 정말순 여사의 말을 듣는 지 마는 지 한참을 잠자코 있던 작은 아들. 그가 짜증이 다분히 담긴 말투로 불쑥 내뱉았었다.

"그런데 왜 어머니 칠순잔치를 꼭 우리집에서 해야 된대요? 크고 좋은 식당도 많은데..."

"그,그건..."

정말순 여사는 갑자기 말문이 콱 막히는 걸 느꼈다. 가슴에 치미는 걸로는 '왜, 좋은 네집에서 에미 칠순잔치 좀 하면 안되냐?'고 소리를 질러 주고는 전화기를 쾅 내려놓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칠순잔치는 무슨 일이 있더래도 작은 아들 집에서 해야 했다.

"그게 말이지.."

정말순 여사의 목소리가 저절로 기어들어 갔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노인회장으로 취임한 지 벌써 6개월 째인데 그동안 단 한 번도 회원들에게 식사다운 식사를 대접 못했지 뭐냐? 그래서...회장 취임한 후엔 전회원들한테 크게 잔치를 베푸는 게 전례이기도 한데.... 월례회 때마다 회원들의 인사가 잔치 언제 해 줄거냐는 거야......."

정말순 여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동시에 작은 아들의 한숨소리가 정말순 여사의 귀에 들려 왔다.정말순 여사는 거의 울 것 같은 심정이었지만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다음달이면 내 칠순도 끼었고 해서 겸사겸사 잔칠 했으면 하고..그런데 회원들이 똑같은 메뉴의 식당 음식은 이제 질려서 싫다는구나. 니 형집은 좁아 터져서 그렇고 네집이 크고 좋지 않니? 이번 기회에 노인회원들에게 집 구경도 좀 시켜주고 말이지....."
정말순 여사는 다시 한번 말 도중에 침을 삼켰다.

"니네들 피곤하고 힘든 줄 안다만 내 체면을 봐서 이번 칠순잔치를 니네 집에서 좀 해다오, 응?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앞으로는 이런 어려운 부탁 안 하마."

정말이지 정말순 여사는 남편없이 지금까지 두 아들을 키워 오면서 단 한 번도 이런식으로 아들에게 주눅들어 본 적이 일찌기 없었다.

서른을 갓넘은 청상과부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두 아들을 키웠지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했기에 항상 누구앞에서나 당당했고 떳떳했었다. 그런 정말순 여사의 성격을 익히 아는 작은 아들이니만큼 이 부탁을 하기 위해 자기 어머니가 얼마나 많이 망설였으리라는 걸 미루어 짐작할 만 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자기집이냐고, 다른 좋은 식당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자기집이냐고 내켜하지 않는 뜻을 비추더니 급기야는 자기 마누라한테 물어보고 연락하겠노라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게 벌써 일 주일 전이었다.

'이게 다 그 망할 영감태기 때문이야'

지난 번 회장선거에서 불과 몇 표 차이로 정말순 여사한테 고배를 마신 김삼돌 씨는 이후 사사건건 정말순 여사를 못살게 굴었다. 이번 칠순잔치 건만 해도 그렇다. 원래 시끌벅쩍한 것을 싫어하는 정말순 여사는 칠순을 기념하여 돈이나 한 몇백불 노인회에 기부하려고 했었다. 그랬더니 김삼돌 씨가 나서서 50년 노인회 역사상 첫 여자 노인회장으로 당선된 사람이 겨우 돈 몇 백 불로 칠순잔치를 대신하려 하냐고 노인회원들을 충동질 했다. 할 수 없이 정말순 여사가 정 그렇다면 식당을 빌려서라도 노인회원들을 대접하겠다고 했더니 '이런저런 이유로 한 달에도 수차례씩 대접받는 식당 음식말고 이왕이면 자녀가 정성들여 장만한 음식을 먹고 싶다' 는 이유를 전해왔다.

사실은 정말순 여사 역시 안할 거면 몰라도 이왕 할거면 자신의 칠순 잔치만은 좀 특별하게 치루고 싶었다. 노인회원들의 이런저런 잔치에 초대받아 가 보면 거의 다 판에 박은 듯 똑같은 메뉴와 똑같은 맛의 식당음식이나 맞춤음식이 나오는데 그 음식들을 대하노라면 자녀들의 무성의를 보는 듯 한 기분이 들었던 게 사실이었다.

'이럴 때 큰 아들집이라도 좀 변변하면 얼마나 좋을까? 집이라고는 콧구멍하니 원..노인회원들이 못와도 5,60명은 올 건데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어떻게 감당하려고...'

정말순 여사는 작은 아들의 대궐같이 큰 집을 생각했다.

지난 여름 집들이 때 한 번 가보고 여지껏 가보지 못한 작은 아들의 집은 정말이지 어마어마 하게 크고 넓었다. 방 다섯개에 목욕탕이 네 개, 그리고 서재와 영화관까지 갖춘 작은 아들집은 전문가가 꾸민 인터리어와 가구가 잘 어울려 마치 영화에 나오는 집같이 호화로왔다. 그 뿐인가. 넓은 수영장과 인공폭포로 꾸며진 뒷뜰은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집들이에 초대된 사람들은 집 칭찬에 침들이 말랐고 정말순 여사가 보기에도 잘 생긴 작은 아들과 예쁘고 세련된 며느리는 마치 맞춤처럼 그 집과 잘 맞았다.

'똑똑한 아이들이니 결혼 몇개월 만에 이런 크고 좋은 집을 장만하는구나'

정말순 여사는 애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작은 아들과 며느리를 바라보았다. 아울러 정말순 여사는 동생네 손님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쭈볏대며 서있는 큰아들 내외를 한심한 눈으로 한번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때만해도 정말순 여사는 작은 며느리에게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작은 며느리는 말이 통하는 며느리, 즉 한국인 며느리였기 때문이다.

남의 집 허드렛 일로 학비를 대며 어렵사리 공부를 시키던 큰 아들이 대학도 채 마치지 못한채 자신의 아이를 가진 타인종 여자와 결혼식을 올리던 날 정말순 여사는 마실 줄 모르는 소주를 두 병이나 마시며 밤새 울었다.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대학까지 나온 내가 오직 자식하나 잘 키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식당 구정물에 손 담그며 세월을 보냈건만 장남이란 놈이 대학도 못 마치고 타인종과 결혼 할 줄이야...아이고 망할녀석, 대학공부 하러 보냈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아이부터 만들었네..아이 만드는 게 뭐가 그리 급해서...!"

타인종이긴 하지만 동양계통인 큰 며느리는 음전했다. 그리고 하나 뿐인 시어머니에게 잘 하느라고 노력 하는 게 눈에 역력히 보였지만 처음부터 밉게 보아선지 정말순 여사의 반눈에도 차지 않았다.

큰 며느리는 일 주일에 한 두 번 정도는 꼭 찾아 와서는 청소도 해놓고 장도 봐다 놓았다. 그 정성이 갸륵해 곁을 좀 주고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자식의 앞길을 막아놓은 여자라는 생각이 문득 들면 눈 앞에 얼씬거리는 것 조차도 싫었다. 무엇보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도 정말순 여사가 큰 며느리에게 정을 주지 않는 이유였다.

평생 대화상대가 없었던 정말순 여사는 며느리와 마주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게 소원이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마주앉은 풍경이라니,생각만 해도 정답지 않은가!

정말순 여사는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모두 며느리에게 해 주고 싶었다.

그동안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자신의 일대기를, 어머니로서 위엄을 지키느라 두 아들에게는 말도 꺼내보지 못한 자신의 한을 며느리에게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국에 오자마자 남편을 떠나 보내고 여자 혼자 몸으로 헤쳐온 세상풍파가 얼마나 맵고 고달팠는지, 그리고 자신의 미모에 혹해 따라다니던 남정네들을 어떤 방법으로 통쾌하게 물리쳤는지를 며느리와 같이 앉아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치면서,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밤새 풀어놓고 싶었다.그러고 나면 자신의 가슴 밑바닥에 똬리처럼 켜켜로 틀고 앉은 한이 어느정도 풀릴 것만 같았다.

그뿐인가, 한국인 며느리를 보기만 하면 제일 먼저 달려가고 싶은 곳이 한국 식품점이었다.

정말순 여사가 그동안 가장 부러웠던 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나란히 손잡고 한국마켓에서 장보는 모습이었다. 혼자서 물건 사고, 혼자서 계산하고 혼자서 쓸쓸히 카트를 끌고 파킹장으로 나오는 자신이 불쌍해서 정말순 여사는 속으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그래서 정말순 여사는 한국인 며느리를 보기만 하면 한국식품점에 함께 손을 잡고 가서는 아~ 입벌려 시식음식도 먹어보고 '얘, 이 생선이 너무 싱싱하지 않니, 이 생선 좀 살까?' 이것저것 만져도 보고 타박도 해보고 카트 가득 식품을 싣고는 한국식품점 안을 휘젓고 다니고 싶었다.

철딱서니라곤 없는 큰 아들과 무뚝뚝하기가 나무토막같은 작은아들에게 기대기보다 차라리 혼자서 모든 걸 실행하며 살아온 정말순 여사는 한국인 며느리를 얻기만 하면 친구처럼 친정어머니처럼 잘 지낼 계획이었고 또 그럴 자신도 있었다.

작은 며느리와는 그렇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릴 때 이민오긴 했지만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덕분에 한국어 소통에는 아무 지장이 없는 작은 며느리를 처음 보았을 때 정말순 여사는 정말이지 너무 좋아서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야 소원을 풀게 됐다는 기쁨때문이었다.

작은 며느리는 인물도 출중한데다 머리도 뛰어나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벌써 어느 법률회사에 스카웃되어 일을 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집안도 좋아서 어머니쪽으로는 의사,교수가 몇 명이나 포진하고 있다고 했다.

정말순 여사는 성에 차지 않은 큰 며느리를 본 한이 작은 며느리를 보면서 눈 녹듯 사라지는 걸 느꼈다. 모든 방면에 뛰어난 며느리가 그동안 정말순 여사가 혼자 살며 겪은 고생과 고난을 보상이라도 해줄 것 같아서 벌린 입이 다물어지 지 않을 지경이었었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던지 아는데 까지는 몇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후...모든 방면에 뛰어나면 뭐하누. 사람이 얼음장 같이 차기만 한데.걔가 나를 시어미로 여기기나 하는지..'

창너머로 겨울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넘어가는 흐릿한 해가 꼭 자신의 신세를 보는 것 같아 정말순 여사는 쓸쓸했다.

효도를 바라고 갖은 고생으로 아들을 키운 건 아니지만 자신의 칠순 생일잔치 해 달라고 이렇게 자식들에게 빌붙는 신세가 될 줄을 자신도 미처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특히 작은 아들 내외는 자기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 응당 먼저 이야기를 해 와야 옳았다.

'나한테 조금이라도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있다면 지놈이 나한테 이러면 안될텐데...'

이렇게 어둡고 좁아터진 노인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은 모두 작은 아들때문이었다.

어느 날.작은 아들은 극도로 흥분된 목소리로 정말순 여사에게 전화를 해왔다. 어느 실업가가 살던 집이 싯가보다 훨씬 싸게 매물로 나온 사실을 부동산 하는 친구를 통해 지금 막 알게 됐다며.

"어머니, 다운페이 할 돈이 필요해요. 장인어른이 마련해 준 집을 처분하고 은행 예금을 바닥까지 다 긁어도 다운페이 할 돈의 반도 안되거든요. 그러니 어머니가 사는 집을 팔아 돈을 좀 마련해 주세요. 어머니는 우리집에 와서 같이 살면 되쟎아요."

정말순 여사의 두말 않고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집을 팔아 전액을 작은 아들 집 사는데 보태 주었다.

돈을 받아가던 날, 작은 아들도 미안했던지 '어머니 방은 햇볕 잘 드는 남향방으로 미리 재클린하고 상의해서 정해 놓았다'고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순 여사는 잘 아는 친구집에 임시로 기거하기로 했다. 그런데 집들이까지 마친후 곧 데리러 온다던 작은 아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노인아파트의 빈 방 하나가 나왔으니 같이 계약을 하려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집 사는데 돈을 보태었다고 해도 그렇지, 아이도 없는 신혼부부가 들어가 살 새 집에 자기같은 늙은이가 같이 묻어 가는게 미안해서 '니네 집은 노인회와 거리도 멀고하니 어디 노인회와 가까운 아파트에 들어가 살란다' 고 지나가는 말처럼 했더니 그 말을 귀담아 들었다가 재깍 실행에 옮긴 작은아들이었다. 그렇게 해서 정말순 여사는 집 판 돈 다 작은 아들에게 뺏기고 졸지에 노인 아파트 신세가 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집 판 돈 준 것은 별로 아깝지가 않았다. 부모로서 없어서 못 주지, 있다면야 집 아니라 그 무엇인들 못 팔아줄까.

정말순 여사가 섭섭한 건 평소에도 별로 살가운 아이는 아니었지만 점점 더 남처럼 변해가는 작은아들의 태도였다.

'하긴, 자식이라도 일단 결혼하면 남이지. 이번 칠순잔치만 잘 치루고 나면 다시는 귀찮게 하지 않아야지'

정말순 여사는 다 다듬은 콩나물을 부엌에도 갖다놓고 소파에 앉아 숨을 골랐다. 아무래도 직접 전화를 한번 해 볼 심산이었다. 직장으로 전화를 하면 아들이 짜증을 낼 것 같고 집으로 전화를 해서는 자동응답기에 용건을 남길 작정이었다. 이 방법이 오히려 직접 아들,며느리가 직접 전화를 받는 것보다 좋을 것 같았다.

회사에서 돌아와 용건을 확인하면 아들이든 며느리든 둘 중에서 전화를 해 주겠지.

정말순 여사는 점점 어두워 오는 방에 불을 켜고는 주섬주섬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찾아들었다.

"헬로우"

정말순 여사는 하마터면 전화수화기를 놓칠 뻔 했다.

전화를 받은 건 뜻밖에 작은 아들이었다. 이 시간이면 작은 아들은 응당 회사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신년 휴가를 좀 냈거든요. 새해 5일까지 놀아요."

전화기 속 너머로 재클린이 피아노를 치며 부르는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휴가받아 둘 다 집에 있으면서 왜 에미한테 여지껏 연락하지 않았냐고 정말순 여사는 묻지 않았다.

칠순잔치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정말순 여사는 숨이 넘어갈 듯 노여웠다.

너희 둘은 아예 나를 무시하고 있었구나, 아주 철저히....

"그렇쟎아도 내일 쯤 전화를 하려고 했었거든요."

작은 아들이 변명하듯 말했다.

내일 쯤? 내일 쯤이라구? 이 늙은 어머니가 굴 속같이 어두운 방에서 온종일 전화통만 바라보며 니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뭐라고? 내일 쯤 전화를 하려고 했었다고?

정말순 여사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움켜잡았다.

"어머니. 칠순잔치 우리집에서 하는 것 정말 안되겠거든요. 요즘 재클린이 입덧을 심하게 하는데 특히 한국음식은 냄새만 맡아도 싫대요. 참, 내가 어머니한테 말씀 안 드렸나? 재클린,임신했어요"

다 관두어라. 내가 언제 너같은 아들 있고 손주 있다더냐.

정말순 여사는 목이 꽉 막히는 걸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야, 칠순잔치 안해도 된다. 그날 회원들 모두 온천여행을 가기로 했거든. 그러니 걱정말아라. 귀찮게 해서 미안하구나. 재클린한테 임신 축하한다고 말해 주렴....... "

전화를 끊기 전 정말순 여사는 한 마디 덧부쳤다.

"꼭 너하고 똑같이 닮은 아들 낳길 바란다."

정말순 여사는 조용히 수화기를 놓았다.

가슴은 태산을 올려놓은 듯 무겁고 답답한데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정말순 여사는 팔짱을 낀 채 창에 기대어 밖을 내다 보았다. 내일모레 칠순을 앞두고 있는 작고 초라한 노인네 하나가 검은 창에 비추어졌다.

서방 복 없는 내가 자식 복이 있으랴!

그때서야 참았던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초인종 소리가 난 건 그 때였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는 정말순 여사는 문쪽으로 가는 대신 불을 껐다. 불을 끈채 맘놓고 실컷 울기라도 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초인종은 질기게 울었고 정말순 여사는 할수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문 밖엔 큰 아들 내외가 서 있었다.

"네가 웬일이냐, 이 시간에."

"청승맞게 불은 왜 꺼놓고 있어요?"

정말순 여사는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렸다.

"전기장판 사왔어요.이 사람이 지난번 어머니네 와서 전기장판이 고장난 걸 알았나 봐요 말을 하지 그랬어요. 히터가 있어도 노인네는 전기장판으로 뜨끈뜨근하게 지지는 게 최곤데. 그동안 추워서 어떻게 지내셨어요. "

"........."

"오늘 제가 같이 온 건 다음주 어머니 칠순잔치를 이 사람이 맡아 하겠다는 말을 전해주려고요. 우리집 동네 공원 있지요? 우리 집에서 하면 좋겠지만 너무 좁아서 거기서 하기로 했는데요. 마침 그날 날씨가 화창하고 좋대요.이 사람이 자기 아는 한국친구들 다 불러서 갈비 굽고 해서 거하게 한상 차려서 노인회원들 다 대접하겠다니까 그날 한 분도 빠짐없이 다 오시라고 하세요."

큰 아들은 신바람이 나서 떠벌렸다.

" 어머니. 그건 그렇고, 오늘 우리 둘 다 일 빠지고 어디갔다 온 줄 아세요? 산호세로 이 사람 한복 사러 갔다 왔어요. 이 동넨 한복집이 없쟎아요.어머니 칠순 때 이 사람이 한복입고 큰 절도 올리고 그동안 연습한 '어머니 은혜'도 부르겠대요. 내 마누라라서가 아니라 참 잘 부르던데요. 지금 한 번 들어보실라우? "

"........ "

"참 어머니,우리 두 달 후 방 세개 짜리로 이사 가요. 최근에 이 사람과 내 월급이 좀 올랐거든요.남의 도움 한푼도 안받고 순전히 우리 힘으로 장만한 거예요."

"그,그랬니....."

정말순 여사가 겨우 중얼거리듯 입을 열어 말했다.

장하다, 아들아.한 푼 보태준 것도 없는데 너희들 힘으로 집을 샀다니.내가 미안해서 어떡하니......

정말순 여사는 어디 쥐구멍으로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경이 되었다.

"계약을 하고 나서 이 사람이 제일 먼저 한 말이 뭔 줄 아세요? 이제는 어머니를 모셔와도 되겠네, 그러더군요. 방 두개짜리 콘도라 차마 어머니를 모셔올 생각은 못하고 있었지만 그게 마음에 걸렸나봐요.어때요,어머니 괜찮지요?우리 이사하면 어머니도 우리랑 같이 가실 거지요? 새로 이사갈 집은 뒷뜰이 괘 넓거든요.어머니도 좋아하실 거예요.어머니, 우리랑 같이 사실 거지요?"

"그,그래......."

"그런데 어머니 지금 우는 거예요?"

" 아,아니..그냥...."

"아따, 그만한 일로 뭐 눈물까지 흘리고 그러세요,그래? 어머니 답지 않게...."

넘쳐나는 눈물로 인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정말순 여사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가득 담긴 눈길로 큰 며느리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말은 하지 않아도, 이 아이가 비록 말은 하지 않았어도 나를 이렇게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었구나...저 한테 따뜻한 눈길 한번 주지 않은 못된 시어미인 나를 위해서...

정말순 여사는 와락 큰 며느리의 손을 움켜 잡았다. 큰 며느리도 힘주어 정말순 여사의 손을 마주 잡아왔다.

둘 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둘 사이엔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뜨거운 애정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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