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이런저런 일로 마음 다치고 속상하고 울화가 터지는 일이 많은데 그중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가 가장 큰 것 같아요. ‘모두가 내 맘 같지가 않다’라는 말이 왜 나왔게요. 나름 진정한 친구로 여기고 진실로 대했는데 자기 이익과 실속만 챙기면서 나를 이용해 먹은 사람. 좋은 말만, 칭찬만 해주기에 착하고 선한 성품을 가진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실상은 등 뒤에서 질투 시기의 험담을 하고 있었던 사람. 자기 필요하고 아쉬울 때만 친한 척하는 게 눈에 보이는 사람을 대할 때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지요. 그렇다고 다 쳐내버리고 혼자 살 수는 없는 법입니다. ‘혼자 있으면 외롭고 둘이 있으니까 괴롭더라’ 를 되뇌이며 차라리 외로움을 감수하고라도 혼자이겠다고 결심을 해보지만 이게 마음대로 되던가요.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그런데요. 쌀에 돌이 많다해도 돌보다는 역시 쌀이 몇 천배 더 많듯이. 힘들 때 나를 위로하고 추울 때 따뜻하게 내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은 역시 주위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리 나를 실망시키고 내 울화를 뒤집고 짜증을 유발하는 사람이 많다해도 가만 보면 나를 위해 주고 신뢰해 주고 걱정해 주는 ‘좋은 이’들이 더 많더라 이겁니다.

최근 인간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서 내 주위에는 좋은 사람이 참 많구나하는 사실을 느낀 일이 있었습니다. 한 달 가까이 지났으나 아직도 나의 가슴을 훈훈하게 하는.

’베키‘ 라는 나보다 서너살 어린 친구가 있습니다. 신문사를 다닌 관계로 남자들과 더 많이 어울렸던 나는 그녀 남편을 먼저 알았습니다만 어찌하다보니 베키랑 더 가까와졌습니다. 적어도 일 주일에 한 번은 얼굴을 보는 사이입니다. 최근, 베키로부터 돈 2천불을 건네받을 일이 생겼습니다. 내게 빚을 진 건 아니고 나를 통해 누구한테 전달하는 일입니다. 가게 두 개를 운영하면서 눈코뜰새 없이 바쁜 베키가 가게 마크와 주소가 찍힌 봉투에 20불짜리 네 묶음을 넣어 우리집으로 가지고 왔어요. 백불짜리로 바꿀 시간이 없었다면서. 그날따라 나도 손님이 와서 엄청 바빴던지라 확인도 않고 그냥 받아서 가방 안에다 던져 넣었습니다. 아무래도 은행가서 백불짜리로 바꾸어다 전달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는 며칠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그 돈을 꺼냈습니다. 세탁소에 갈 일이 생겼는데 내 거래 은행이 세탁소 옆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 낸 것입니다.

그냥 가져가려다가 봉투 째 돈을 꺼냈습니다. 아무래도 한 번 세어봐야 할 것 같아서. 남편은 출타하고 혼자 있는 조용한 아침, 나는 부엌에서 그 돈을 침을 묻혀가며 하나하나 셌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두 번, 세 번을 세었는데도 2천불이 안 되는 겁니다. 1720불밖에 안 되어요.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분명 가방 안에 두었다가 그대로 가져나왔는데. 후들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20불짜리를 5장 씩 몫을 지어서 부엌 카운터에 쫘악 펼쳐가며 다시 세었습니다. 역시 1720불입니다.

늦기 전에 얼른 베키한테 알려줘야할 것 같았어요. 가게 시작 시간인 아홉시만 넘으면 그녀는 전화를 받지 못할 정도로 바쁘거든요. 시간을 보니 5분 전 아홉시. 얼른 증거사진으로 펼쳐놓은 돈을 사진 찍어서 베키한테 보낸 후 전화를 걸었습니다. 다행히도 전화를 받았어요. 까딱하다가는 생돈을 물어주게 생긴 나는 격앙된 목소리로 돈이 비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몇 십불도 아니고 자그마치 280불이나 모자란다고. 아무리 바빴어도 베키 앞에서 돈을 세어보지 못한 내 불찰을 탓하면서. 베키가 말했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모자라는 돈 280불을 얼른 갖다 드려야지요. 언제 집에 계세요? 나중에 들릴께요”

그랬는데요. 돈이 비는 게 아니었습니다. 베키와 통화를 마치고 혹시나해서 가방을 열어봤더니 한 뭉텅이의 돈이 밑에 깔려있습니다. 베키가 준 업소용 봉투가 크고 헐렁해서 빠진 것이었습니다. 먼저 확인한 후 베키한테 전화를 했어도 늦지 않았을 것을. 나는 내 성급한 성질을 탓하면서 나머지 돈을 꺼내 세어봤습니다. 딱 맞아떨어지네요. 2천불!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다시 베키한테 전화했습니다. 아침부터 수선 떤 것에 일단 사과부터 했지요.

만약 내가 베키 입장이었으면 어땠을까요? 무조건 상대방 탓부터 했을 겁니다. 그럴리가 없는데요? 정확하게 세어봤어요? 다시 한 번 세어보세요. 내가 분명히 2천불을 갖다드렸는데 누가 빼간 것은 아닐까요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베키는 일절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내가 물어봤습니다.
내가 잘못 세어봤을 경우도 있고 불순한(?)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전혀 의심도 없이 순순히 모자라는 돈을 충당해 주겠다고 했냐고. 베키가 웃습니다.
“내 탓을 먼저 했지요. 언니는 매사에 칼처럼 정확하고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이잖아요. 만약 언니가 허술한 사람이었으면 의심을 했을 수도.…”

지난 글의 몇몇 독자님들 댓글에도 밝혔지만 냉증때문에 요즘 뜸 뜨고 침을 맞으러 다닙니다. 곧 날씨가 더워질 텐데 에어컨 바람을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아서요. 한국에서 치료를 받고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완쾌까진 요원한 것 같아요.

한의사는 팔순을 넘긴 할머니로, 친하지는 않지만 오랜 인연이 있는 사람입니다. 침과 뜸만 50년 넘게 해왔다는 베테랑이기도 합니다. 조금 비싸긴해도 얼마나 성의있게 치료를 해주는지 몰라요. 한 달을 넘게 다녔는데 조금씩 차도가 있습니다. 항상 냉골같던 다리에 조금씩 온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돈 쓰지 말고 시간 쓰지 말고 진즉 여기서 치료를 받아 볼 걸.

기쁜 마음에 동네방네 자랑을 시켰어요. 내 자랑을 듣던 사람들 중 샌디(2021년, 12월에 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 등장한 그 샌디 맞습니다)가 자기도 한번 진단을 받아봐야겠다고 말했습니다. 알레르기 반응인지 뭔지 특정 음식을 먹으면 아랫배가 뒤틀리는 증상때문에 너무 고통스럽다면서. 내가 치료 받으러가는 날, 샌디가 한 시간 쯤 후에 한의원에 들리기로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다리에 침을 꼽고 누워있는데 샌디가 도착했습니다. 샌디는 다른 방으로 안내되었지요. 치료를 마치고 돈을 내려고 카운터에 갔더니 한의사가 뭘 우물우물 먹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게 말합니다. 고마워, 고마워. 계숙 씨 고마워. 새 환자를 소개시켜 줘서 고맙다는 줄 알았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샌디가 떡을 사다 줬다는 겁니다. 한의사는 내가 시킨 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샌디 앞에서 ‘떡‘의 띠귿 자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한의사가 말합니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떡이랍니다. 운전을 못하니 한국마켓을 갈 수가 없어 먹어본 지가 오래 전이라는 것입니다. 샌디가 사다 준 쫄깃쫄깃한 떡을 보고는 진료시간임에도 참지 못하고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보고도 먹어보라며 스티로폼에 담긴 찰떡을 내밉니다. 내 무심함이 얼마나 자책이 되던지요.

자식들 다 출가시켜 보내고 혼자인 한의사는 너무 노쇠해서 운전을 못합니다. 5분 거리인 숙소만 간신히 다닐 수 있다고 합니다.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니까 필요한 생필품은 남의 손을 빌려야 한답니다. 치료받으러 한달 넘게 왔다갔다하면서 그녀의 사정을 다 전해들었지만 나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한때 나보다 더 컸던 키와 몸무게가 줄어들어 완전히 파파 할머니가 된 그녀를 보면서도 응당 나이 들어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녀의 노쇠한 체력을 이해 못했습니다. 지인들이 가져오는 음식들로 우리집 냉장고는 항상 가득했지만 그 중 하나도 덜어다 줄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샌디는 생전 처음 보는 팔순 노인을 위해 떡을 사다 준 것입니다. 샌디의 남을 배려하는 마음, 남을 우선하는 마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이렇듯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 내 친구라는 사실이 너무나 고맙고 행복합니다.


- 돈이 모자란다는 증거(?)랍시고 베키에게 성급히 찍어 보냈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