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자

"에이미, 아침에 부탁한 것 다 마쳤어요?"

"........."

"에이미?!"

"네,네에? 지금 나 불렀어요?"

"에이미, 아까부터 얼빠진 사람마냥 왜 그래?"

"죄,죄송합니다....."

"오늘 아침에 부탁한 서류정리 다 끝났냐구요"

"네,네..아직...네...지금 하고 있는 중.. 아니... 거의 다 끝나가요"

에이미는 상사의 꾸중을 듣고 다시 서류에 눈을 가져갔으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이미 체크한 서류를 체크하지 않은 서류 위에다 올려 놓기도 하고 아까부터 비어서 바닥을 보이고 있는 머그 잔을 자꾸 입으로 가져가기도 한다. 입에 갖다 댄 머그잔이 비어 있음을 인지하고 난 후에는 머쓱해 하면서 책상 위에다 놓았다가 2,3분 뒤엔 다시 그 머그 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행동을 몇 번이고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봐도 얼이 빠진 사람이고 정신이 다른데 가 있는 사람이다.

아무래도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셔야 할까 봐.

에이미는 고개를 빼 상사의 방을 들여다 본다. 에이미의 상사, 그는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어디다 열심히 통화를 하고 있는 중이다.

에이미는 머그 잔을 들고 일어선다.

휴게실에 가서 뜨거운 물을 가져다가 일회용 커피를 한 잔 타 마실 생각이다. 미국에서 30년을 넘게 살았지만 아직도 뼛속까지 한국인인 부모밑에서 자란 에이미는 식성또한 한국사람하고 똑같다. 휴게실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료로 제공되는 아메리칸 커피보다 한국인이라면 다 좋아하는 일회용 인스턴트 커피가 에이미 입에 맞는 것이다. 에이미의 책상서랍에는 일회용 커피가 박스채로 언제나 비치돼 있다.

두 개쯤, 아니, 세 개쯤 털어넣으면 진한 커피가 될려나.

에이미는 조금 전 쟌의 전화를 받았다.

에이미를 찾는 전화가 쟌의 목소리임을 알았을 때 에이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로 놀랍고 기뻤었다. 그러나 그는 에이미 때문에 전화한 게 아니었다.

"수연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고 싶어요"

수연이 오늘로서 이틀 째 결근을 하고 있다는 쟌의 말이었다.

"어디 몸이라도 아픈지 확인하고 싶어요......."

자신의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는 수연의 번화번호를 찾아서 쟌에게 불러주면서 에이미는 자신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림을 알았다. 그리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해져 옴을 느꼈다.

그녀의 가슴을 짓누르는 무엇, 그것은 불길하고 이상한 예감이었다. 쟌과 수연의 관계가 단순한 직장동료가 아닌, 그 이상의 것이라는. 쟌을 사로잡고 있었던 여자가 다름 아닌 수연이었다는.

수연은 거의 결근을 하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결근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한다. 이틀도 하고 사흘도 한다.의사 소견서만 받아오면 일 주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틀 정도 결근했다고 전화를 할 정도라면 이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이다. 단순한 직장동료라면 이틀 정도 결근했다고 전화하지 않는다.

그랬었구나. 그랬었구나.

분명 쟌에게 누가 있는 것 같긴한데 분명치가 않았다. 그래서 에이미는 그동안 회사내에 근무하는 모든 미혼 여성의 머릿속으로 꼽아보며 실체를 확인하려 애썼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기혼 여성, 그것도 다름아닌 수연이었다니.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눈의 비늘이 벗겨지는 기분이라서 에이미는 지금 머리가 멍했다.

쟌이 기혼여성에게 관심을 가지리라곤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은 에이미였다.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여지껏 자신의 예감이나 짐작이 빗나가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이번 사실만큼은 사실이 아니길 에이미는 간절히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래, 어쩌면 그저 내 생각만일지도 몰라.... 그렇지만,그렇지만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수연의 모습이 좀 이상했다는 걸 에이미는 기억해냈다.

공중에 붕 떠있는 사람처럼 넋이 나가 보였고 가끔은 황홀한 꿈을 꾸고 있는 사람처럼 들떠 보였다. 그리고 볼엔 늘 화사한 홍조가 떠나지 않고 피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여자의 모습인 것이다.

그래, 요즘 들어 무척 예뻐진 것도 같았어....

얼마전 하늘색 스웨터를 입고 있는 수연을 보았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에이미는 수연이 참 매력적인 여자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매력이라니. 솔직히 에이미는 그동안 수연을 하찮게 생각했었다.

천 명 직원중에 남자 넷을 제외한 한국인 여직원이 수연과 에이미 단 둘 뿐이라 친하게 지내왔지만 알게 모르게 에이미는 늘 수연을 무시해 온 것이었다.

수연은 기껏 한국에서 고등학교까지밖에 못나온 학력에다 영어도 시원챦았다.(그 시원챦은 영어를 만회하느라 죽지살기로 노력해 회사에선 늘 우수사원으로 뽑히긴 하지만)

어찌어찌하여 실력있는 변호사와 결혼해 지금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곤 있는지는 모르지만 언뜻언뜻 얼굴에 나타나는 스산한 표정을 보면 지금까지 그리 썩 평탄한 인생을 살아 온 여자는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에이미가 수연을 하챦게 생각한 건 그녀의 외모였다. 수연은 일단 키가 작았다. 높은 구두를 신고도 에이미의 어깨까지밖에 오지 않는 작은 키, 한때는 날씬하고 고운 몸이었을지 모르지만 이제 나이들어 슬슬 살이 붙기시작하는 수연의 몸매는 자신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고 에이미는 생각해왔다.

그러나 수연에겐 남자의 관심을 끄는 그 무엇이 있다!

뜨거운 물을 머그컵 가득 받아 사무실로 돌아 온 에이미는 커피타는 것도 잊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내가 모르는, 여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녀만의 매력, 그게 무엇일까.

작년 가을이었던가.

한 백인 남자가 수연을 소개해 달라고 에이미에게 요청을 해온 적이 있다. 서른 여섯 살의 독신이었는데 다른 주에서 두 달동안 연수를 받으러 온 남자였다.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에이미의 눈에도 아주 매력적으로 잘 생긴 남자가 수연과 데이트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온 것이었다.

"그녀에게 바로 데이트 신청을 할 수도 있지만 동양여자는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녀를 놀래키고 싶지 않거든요. 에이미, 당신이 그 여자와 친한 것 같으니 의견을 물어봐 줄래요?"

수연이 결혼한 여자라는 걸 알고 그 남자의 얼굴에 나타나던 실망과 비통의 표정을 에이미는 아직도 기억한다.

"언니, 반지 좀 끼고 다녀, 남자들이 언니가 싱글인 줄 알고 자꾸 입맛 다시쟎아."

수연은 그때 깔깔깔 웃으며 농담을 섞어 말했었다.

"나를 보고 입맛을 다셔? 설 익지도 않고 너무 타지도 않은, 아주 잘 익은 아줌마라서 그럴거야. 얘, 그러고 보면 내 나이가 여자의 일생중 가장 황금기인 것 같아.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남편, 에릭이 결혼할 때 해 준 반지의 알이 너무 커 부담스러워라고 결혼반지를 끼지 않는 이유를 수연은 설명했다. 에이미가 권유했다.

"그럼 심플한 밴드를 하나 마련해서 끼고 다녀.정 큰 반지가 부담스러우면"

그러나 그 이후로도 수연의 손가락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요즘 젊은 남자들은 다 그렇게 저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들을 좋아하는 것일까.

에이미는 아침에 상사가 지시한 서류철을 천천히 뒤적이며 생각했다.

그 쟌이라는 남자 역시 수연이 결혼하지 않은 여자인 줄 알고 다가갔겠지. 결혼했다는 걸 알았으면 아예 처음부터 시작할 염두도 안 냈을 거야. 설마 기혼인 줄 알고도 그랬을라고. 만약 그랬다면 그는 아주 나쁜 파렴치한이거나 사회 규범을 무시한 사기꾼, 가정 파괴범일 테고. 그나저나 뭇 남자들을 다 혼란하게 만들 속셈이 아니라면 그 여자는 왜 결혼반지를 끼고 다니지 않는 거야!

왈칵 수연이 미운 생각이 들어서 에이미는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책상에다 탁,소리가 나게 던졌다. 수연이 옆에 있다면 얼굴이라도 할켜주고 싶을 정도로 에이미의 심사는 잔뜩 뒤틀리고 있었다.

나쁜 여자같으니! 내가 쟌에게 무척 관심있다는 걸 알면서, 내가 얼마나 그 남자를 좋아하는 줄 알면서 쟌과 그렇고 그런 사이로 발전했다 이거지.솔직하고 마음넓은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에이미는 수연에게 우롱당한 느낌이다.

용서할 수 없어!

그녀는 소리도 요란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안에 있던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에미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옷걸이에 걸쳐둔 쟈켓을 집어들었다. 가슴이 부글부글 끊어올라서 도저히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시원한 바람이라도 좀 쐬고 와야지.....

나가는 뒷통수를 상사가 노려보고 있거나 말거나 에이미는 쾅 소리가 나게 사무실 문을 닫았다.

 

한 번,두 번, 세 번, 네 번......

수연은 아침에 눈 뜬 침대에서 아직도 내려오지 않고 누워서 숫자를 세고 있다.

그동안 쟌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나갔던 게 몇 번이었던가 알고 싶은 것이다.

점심을 같이 먹으러 나갔던 건 딱 네 번이다. 그리고 김치를 세 번 갖다주었고 가끔 휴게실에서 커피를 같이 마셨다.

그렇게 짧은 접촉으로 이렇게 깊은 정이 든다는 게, 자신도 주체 못할 정도로 마음이 바짝 쏠리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마치 푸석푸석하게 말라있던 스펀지에 물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는 급속도로 빠르게 수연의 마음으로 들어왔고 수연의 마음을 흠뻑 적셔놓고 말았다.

단 며칠만에도 사랑에 빠지려면 빠질 수도 있는 게 남녀 사이긴 하지만......

수연은 오래 전에 본 영화 '타이타닉'을 생각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단 며칠 만에,정말 단 며칠만에 약혼자를 버리고 목숨을 버릴 정도로 서로 깊은 사랑에 빠져버린다. 그들은 진실로 진실로 사랑했다.

그러면 나는 지금 진실로 진실로 쟌을 좋아하는 것일까. 쟌과의 사이에 사랑이란 말을 차마 쓰기 두려워서 수연은 '좋아하는 것'으로 말을 바꾸어 생각해본다.

같이 있으면 구름 위를 걷는 것 처럼 달콤한 기분이고 잠시라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보고 싶다. 퇴근하고 돌아와서 다음 날 출근시간까지가 굉장히 먼 것 처럼 느껴진다.

아침에는 저만치서 회사건물이 보이기 시작하면 곧 그의 얼굴을 보게 될 설레임에 가슴이 뛴다. 일을 하면서는 그가 옆 책상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개를 들면 그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행복하다.

이런 기분은 과연 무엇일까. 이런 기분을 과연 '사랑' 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사랑인란 말을 쓰기가 두려워 망설이던 수연이 마침내 사랑이란 단어를 자신과 쟌 사이에 놓아본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스무 여섯살 남자와 마흔 먹은 여자가 느끼는 이 감정을 과연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내가 쟌을 사랑한다치고 나는 지금 쟌, 그 남자에게 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차가운 물 한 잔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일어날 엄두를 내지 못하면서 수연은 계속 생각했다.

절대로 섹스는 아닌 것 같았다. 섹스라면 에릭과의 사이에서 충분한 만족을 느끼고 있어 아무 불만과 아쉬움이 없는 수연이었다.

아무리 이리저리 생각을 해봐도 그녀가 쟌에게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냥 딱 하나, 그와 같이 있고 싶다는 것, 그것이었다. 지금 수연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열망은 쟌과 마냥 같이 있고 싶은 것이었다.

아무말 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얼굴만 바라보면서 같이 있고 싶다. 허락된다면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아니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채 그냥 같이 있고 싶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 보며 일에 열중하고 있을까. 내가 사 준 코발트 블루 셔츠를 그가 입었을까.

쟌에 대한 그리움이 갑자기 밀물처럼 수연의 가슴으로 들이닥친다.

아, 보고 싶다. 쟌, 그가 보고 싶다.

그의 얼굴을 당장 보지않고는 미쳐버릴 듯한 절박감이 엄습해와서 수연은 벌떡 일어나 앉는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시계를 보았다.

열 두시 이십 오분, 아직 한 시가 되려면 삼십 오분이나 남았다.

수연은 시계를 보면서 잠깐 망설였다.

지금이라도 회사에 나가려면 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서둘러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뛰어나가면 오후 근무 시작 시간인 1시까지는 얼추 시간을 맞출 수도 있다. 그러나...

수연은 힘 없이 다시 자리에 누웠다. 수연은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사실은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는 것이다. 어제부터 수연이 회사에 나가지 않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도저히 맨정신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의 얼굴을 보게 되면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좋을 지 수연은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냥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태연한 척 해야 하는지,가볍게 웃어주어야 하는지, 눈을 마주쳐야 하는지, 외면해야 하는지......

무엇보다 수연이 지금 두려운 것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나타날 감정이다. 한 남자를 가슴에 받아들이게 되면서, 그리고 그 남자로부터 좋아한다는 고백을 듣고난 뒤 생겨난 황홀하고도 달콤한 느낌은 아무리 숨길 래도 숨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생각만으로 얼굴이 달아오른 것 같아서 수연을 이불 속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그때 침대 사이트 테이블에 있는 전화벨이 울렸다.

"괜찮아?"

전화기 속에서는 걱정을 가득 실은 에릭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괜찮다고 했쟎아요. 그냥 가벼운 몸살인 걸요"

전화기 속의 남자가 쟌이 아닌 에릭이라는 거에 대해 실망하면서 수연은 몸을 움추렸다.

내가 지금 왜 이러나.그는 내 전화번호조차 모르고 있을 텐데.......

"밥은 챙겨먹었어?"

"그럼요. 몸은 좀 안 좋아도 식성은 여전해요"

안 먹었다고 하면 에릭의 잔소리가 길게 이어질 것 같아 수연은 일부러 명랑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오늘 저녁 퇴근하면 외식이나 하지...."

수화기를 내려놓고 수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은 온통 딴 남자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남편의 전화를 받아내는 자신이 새삼 징그러운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쁜 년이야 내가, 아주 나쁜 년.....

화장대 위에 던져 두었던 휴대전화 벨이 울린 건 바로 그 때였다. 계속-

7월 1일에는 '7년 전에 '가 올려집니다.

이계숙의 더 많은 작품은 http://kyesook.com 로 오셔서 읽으세요